아리스토텔레스는 200여 권의 연구서에서 세계의 구조를 발견하고 그 구조를 물리학, 생물학, 천문학, 논리학, 윤리학, 미학, 수사학, 정치학, 형이상학으로 분리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스승의 도서관과 분류 시스템 속에서 책을 소유한다는 것이 외줄 타기라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즉 우주에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고 총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혼돈에 맞서 조화로운 건축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모래로 만든 조각품이라는 것, 그리고 망각에 맞서 우리가 지켜내고 있는 은신처이자 세상의 기억이며 시간의 해일에 맞선 장벽이라는 것을 말이다. - P56
상업, 교육, 혼혈의 길을 따라 괄목할 만한 문화적 유사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풍경에는 유사한 모습의 도시들이 흩어져 있었다.(거리가 직각 그리드를 형성하는 도시 계획에 따라 광장, 극장, 경기장, 그리스어로 된 비문, 사원이 배치된다.) 그것이 당대 제국 특유의 기호이다. 오늘날 세상을 획일화하는 코카콜라, 맥도날드, 번쩍이는 광고들, 중심상가, 할리우드 영화관, 애플 제품 등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P60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놀라움과 불안 사이에서 경련하던 헬레니즘 문명에 상반된 충동이 나타났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회의주의와 종교적 맹신, 호기심과 편견, 관용과 배척이 동시에 발생했다. 자신을 세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민족주의에 함몰된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사상들이 경계를 넘어 전파되면서 쉽게 뒤섞였다. 그리하여 절충주의가 나타났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를 가로지르는 스토아 철학은 평정과금욕과 내적 강화를 통해 번뇌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마치 불교 신자들이 행하던 수행처럼 말이다. - P61
이 시대에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를 세우려고 경쟁한다.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도 그런 싸움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파로 등대는 여러 세기 동안 세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나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처럼 그 등대는 자부심의 엠블럼이자 통치자들의 선정적인 꿈이었다. 더욱이 그 등대는 과학의 황금시대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애초에 등대(faro)는 나일강의 삼각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도시를 세우기로 결정한 곳이다. 발트해에도 파로(Faro)로불린 섬이 있다. 잉마르 베리만이 영화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1961)를 촬영한 곳으로, 그는 감독 생활을 접은 뒤 그곳에서 은자처럼 살았다. 하지만 지명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파로)는 지리적 명칭에서 온 것이고, 그리스의 유산으로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을 쓰고 있다. - P66
독서는 표정, 태도, 대상, 공간, 재료, 움직임, 빛의 변화를 포함한일종의 제의적 행위다.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독서했는지 상상하려면, 독서라는 내밀한 의식에 진입하는 그 시대의 정황적 그물을 알아야 한다. 두루마리 책을 다루는 건 요즘 책의 페이지를 다루는 것과 다르다. 두루마리를 펼치면 종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인 텍스트 뭉치들이 연이어 눈앞에 나타난다. 독자가 이를 읽어가면서 새로운 글을 보려면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쳐가고 왼손으로는 읽은 부분의 두루마리를 말아야 한다. 휴지기와 리듬을 요하는 느린 춤과 같다. 서를 마치면 두루마리는 정반대로 말려 있게 되기 때문에 다음 독자를 위해 두루마리를 되감아둬야 한다. 그런 행위를 하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을 재현한 도자기나 동상이나 부조가 있다. 서서 읽거나 앉아서 무릎에 책을 놓고 읽는 형상이다. 두 손이 바쁘다. 한 손으로는 두루마리를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글을 읽을 때 보이는 몸짓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등을 살짝 구부리며 몸을 웅크린 채 독자는 잠시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여행을 시작한다. - P68
한 무리의 천사들이 1980년대 옷차림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서관에 들어간다. 브루노 간츠는 넓고 짙은 외투에 목을 덮는 스웨터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사람은 그들을 볼 수 없기에 천사들은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옆에 앉기도 하고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한다. 또 누군가 읽고 있는 책을 엿보기도 한다. 어느 학생의 볼펜을 만지기도 하고 그 작은 물체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미스터리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그들은 언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왜 책이 그들을 몰입하게 하는지 알고자 한다.
독서는 내적 소통을, 고독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천사들에게는 놀랍고도 초자연적인 기적 같은 일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독서를 통해 읽은 문장들이 아카펠라나 기도처럼 울려 퍼진다. 영화의 이 장면처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중얼거리는 말로 가득했을 것이다. 고대에는 눈으로 문자를 인식하면 그 문자를 읽으며 텍스트의 리듬을 탔다. 발로는 메트로놈처럼 바닥을 두드렸다. 읽기는듣기였다.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생각해보자. 지금 책을 펼쳐 손에 들고 있는 당신은 신비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습관이 돼서 스스로하는 일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며,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글의 흐름을 침묵 속에서 따라가고 있다. 당신은 어느 방에 있을 것이며,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다시 말해 오직 당신만 볼 수 있는 환영(바로 내가 쓴 글이라는 환영)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곳에서 시간은 당신의 호기심 혹은 지루함에 달려 있다. 당신은 영화 장면과 유사한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그 현실은 오직 당신에게 의존적인 현실이다. 당신은 언제든 이 문장에서 눈을 떼고 외부 세계로 들어가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는 당신이 선택한 현실의 가장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 모든 일에는 마술적 아우라가 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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