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밤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텅 빈 하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에는 별과 행성들이 있었고, 지구 역시 그들 사이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어떤 멋진 설계 덕분에 그 모든 게 움직일 수 있었고, 어떤 존재 덕분에 그 움직임에 의미가 생겼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옳다면 어떨까, 이 모든 의미가 수천 년 전에 남자와 여자가 되기 위해 바다에서 기어 나온 물고기들에게서 시작된 거라면?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유인원이, 거대한 원숭이가 우리의 조상이라면? 그런 세상에서 고통을 헤아리는 하느님은 어디 계실까? - P238

주디스는 제단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희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부와 성모가 그녀의 머릿속을 휘청이며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읊는 기도문이 다급하고 열의 없는 복사 소년들의 웅얼거림처럼 무의미해질 때까지 계속 기도했다. 그녀는 매든 씨의 뒤를 따라 하숙집을 뛰쳐나온 굴욕적인 순간, 고통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기억을 천천히 되짚었고, 그러는 동안 그녀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반쯤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와 그가 말했던 것들과 그때의 잔인한 말투는 아무리 반복해 떠올려도 잦아들지 않았다. 기도와 달리, 그것들은 반복을 통해 무뎌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기도의 부정이자 희망의 반대였다. - P270

"아, 그건 불가능해요. 그렇게 뚱뚱한 여자와 친구라니! 사실 나한테 친구가 궁한 건 아니잖아요."
당신 친구 별로 없잖아. 오닐 부인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장황한 얘기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지난번 하숙집을 바꿨을 때 했던 이야기에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 누가 알겠어. 그 모든 집주인이 당신이 묘사하는 것만큼 속이 시커멀 리는 없잖아. 아, 가엾은 주디, 당신이랑 다퉈 봐야 뭐 하겠어. 다르시 이모님이랑 성미가 똑같아. 고집불통. - P282

라이스 부인 같은 여자와 친구라니. 주디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이라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했어. 어떻게 내가 그 뚱보와 친구가 되고, 어떻게 그 일, 그 심각한 일, 그러니까 그 연애가 그렇게 그냥 사그라들겠냐고. 정말, 모이라는 모를 거야. 닭들한테 둘러싸여 흐뭇해하는 암탉이나 다름없잖아. 그리고 우나는 그냥 어린애야. 얘가 남녀관계에 대해 뭘 알겠어? 두 사람은 날 이해하지 못해. 앞으로도 그렇겠지. 애초에 날 이해한 적도 없었고. - P282

성당이 고요해지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홀로 무릎을 꿇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늙은 성구 관리인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던 모습. 하느님의 사제와 하느님의 비밀 지킴이는 모두 하느님의 성전 앞을 무심하게 지나치며 기계처럼 복종하고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 둘은 하느님의 성전 앞에서 불신자처럼, 감실 안이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마치 그 앞에서 무릎을 끓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 P342

그래? 그럼 나는 듣는 이가 없는 기도를 해 왔던 거야? 방금 한 고해 성사는 그냥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거고? 그래,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잘 설명돼. 이 모든 불행, 바보 같은 짓들, 아무 소용도 없는 9일 기도, 한 번도 답을 얻지 못한 기도들. 이게 사실이라면 모든 사제, 모든 주교, 모든 추기경은 다 틀린 거잖아. 착각에 빠진 인간들일 뿐이야. 감실에 없는 신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고 착각한 사람들. 신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하느님은 왜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릴까? 버나드가 말했었지. 왜 내 죄들이 하느님을 아프게 할 거라 생각하냐고.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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