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말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만큼 신났던 적은 없었다고. 한 숨도 잘 수 없어 밤낮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건 뭐… 여간해서 읽기 어려운 책을 읽으려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데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 사람이 아닌, 책에 나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가벼움』의 마리클로드.
낮을 위한 책이 있고, 또 밤만을 위한 책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무척이나 공감했다(그녀가 전혀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닌데도 말이다). 더욱이 그녀가 밤만을 위한 책이라며 예를 든 게 스탕달이었다. 스탕달은 밤의 작가라며 일장 연설을 하는 그녀… 나도 스탕달을 집었다 밤을 새워 가며 읽은 적이 있어서 스탕달이 밤의 작가라는 의견에는 공감하지만, 또 공감할 수만은 없는 게 ‘일장 연설‘이라고 내가 표현한 그녀의 태도 때문이다. 누군가는 스탕달을 낮에 읽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모두가 스탕달을 밤에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온건한 것도 지루하지만, 우악스러운 것은 고통스럽다. 그런 건 참아 주기가 힘들다. - P59

이렇게 술을 섞다 보면 알게 된다. ‘섞는다‘라는 감각에 대하여 말이다. 술과 술은 물론 술과 다른 게 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밀도와 냄새가 섞이는, 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해 말이다. 또 이런 깨달음도 있다. 세상에 나쁜 술은 없구나라는. 나쁜 건 술을 나쁘게 만드는 인간의 무지와 무결제, 내가 너보다 많이 마시겠다는 호승심, 그런 사람들이 벌이는 싸움과 다음 날 밀려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부끄러움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다. - P68

게다가 에이해브 선장은 자기 연출에 능한 사람답게 극적인 말까지 해서 술맛을 돋운다. 그는 지금 마시는 술이 악마의 발처럼 뜨거운 술이라고 말한다. 이렇게만 말해도 술자리가 후끈 달아오를 텐데 뭘 좀 아는 남자인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단숨에 들이켜고 천천히 삼키라고. 그토록 넘쳐 나는 인생도 벌컥벌컥 마시고 나면 온데간데 없어진다고. - P73

배를 타는 사람들은 돈도 돈이지만 바다와 직접 맞대면하기 위해 배를 탄다. 바다의 가혹함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심한 자기모멸을 겪다 어쩌면 자기를 살해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바다로 나가 쉴 새 없이 날뛰는 완악한 마음을 잠재워 보려 한다. 마음의 불길, 그 어쩔 수 없음을 말이다. 외부의 적이 하도 강력해 내부의 적과 잠시 휴전 중인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 P73

나도 종종 자가 처방을 내리곤 한다. 속이 답답할 때는 황금빛 필스너를, 으슬으슬할 때는 암갈색 코냑을, 기분이 우중충할 때는 산뜻한 릴레 블랑을, 소화가 안 될 때는 씁쓸한 화이트 포트 와인을 내준다. 이건 그나마 괜찮을 때다.
속이 쓰릴 때는 페이쇼드를, 배가 아플 때는 앙고스투라 비터스를 준다. 먹고 나면 괜찮아진 느낌이 드는데, 과연 이 비터스의 특정 성분이 작용을 한 건지 아니면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쳐 몸까지 괜찮아진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플라시보 효과일지도. 매일 맨발로 흙길을 저벅저벅 걷는 사람의 마음이랄까. 대구의 수성못에 갔다가 맨발 군단을 마주치고서 신발을 신고 있는 게 큰 잘못인 것처럼 느낀 적이 있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에게 플라시보 효과가 함께하시길,이라고 빌며 그들을 지나쳤던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플라시보라도 효과가 있으니 된 게 아닌가? 그러니 술이 꼭 몸 에 해롭다고만 볼 수 없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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