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마셨잖아. 검은 술병이 말했다. 거의 다 비었다고. 넌 취했어. 너무 많이 마셨어.
취했다고? 그래서 그게 뭐? 아무도 상관하지 않잖아. 내가 어떻게 되든 아무도 신경 안 써. 아무도. 단 한 명도. 난 자유야. 그리고 나 이제 쓰러질 거야. - P365

계단 앞에 선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이곳 수녀님들은 성심회 수녀님들하곤 완전히 달라. 존 하비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비회의 수녀들에게는 애덕이 없고, 애덕회의 수녀들에게는 자비심이 없다고. 아무래도 그 말은 사실인 듯했다. - P373

한 노쇠한 여인이 주디스를 외면한 채 바닥만 응시하며 계단 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 여자 걸음 좀 봐. 여기만 오면 진짜 짜증이 난다니까. 주디스는 생각에 잠겼다. 늙은 여자들, 불쌍한 늙은이들. 그들을 염려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어. 아무도. - P373

첫 번째 층계참에 오르자 1층이 내려다보였다. 몇몇 여자는 보기 흉한 흰색 병원 침대에 누워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회색 환자복을 입은 채 방 중앙에 있는 난로 주위에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위로 바짝 당겨진 채 묶여 있는 머리카락. 얼굴에는 아무런 화장기도 없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꾸민다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병마가 모든 걸 집어삼키는 나이대에 속했고, 따라서 오직 편안함만이 그들의 유일한 규범이자 욕망이었다. 여자들은 커다란 검은 깔때기 모양의 굴뚝이 천장까지 솟아 있는 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소곤거리고 있었다. 주디스는 그들의 속삭임이 마치 낡은 집의 벽면 뒤에서 바스락대는 생쥐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 P374

오, 하느님, 제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는데 왜 저를 벌하지 않으시나요? 전 하느님을 버렸어요. 듣고 계시나요, 제가 하느님을 버렸다고요. 왜냐하면, 오,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이 절 버렸으니까요. 신부님, 전 신부님이 필요했는데 신부님은 절 외면했어요. 전 하느님께도, 신부님께도 기도했는데,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어요. 모든 남자가 제게서 돌아섰어요. 예수님과 신부님, 당신들 두 분도 포함해서요.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측면 제단 위에서 미소를 지었다. 하얗고 순결한 튜닉을 걸친 파란 예복. 섬세하게 채색한 두 손은 하느님의 중재를 축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모님, 어째서 절 위해 중재해 주지 않으셨나요? 왜 지금 웃으시나요? 웃을 일이 하나도 없잖아요. - P411

그녀는 피곤해졌다. 미사가 왜 이리 길지.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미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미사는 너무 길고 긴 일이야.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많은 게 달라 보일까? 삶도, 희망도, 헌신도, 생각도 전부 달 라지잖아. 믿음이 없다면, 결국 혼자가 되는 거야. 난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내 사람들 사이에 있었어. 내 믿음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였지. 그러니 이제 난 없어진 거야. 믿음이 없어지면 그와 엮인 사람들도 다 사라지니까. 아니, 아니지. 난 아직 포기한 적 없어. 그럴 수 없어. 믿음을 포기하면 나머지도 다 포기해야 하잖아. 믿음에는 옳고 그름이 없어. 느낌이 안 와. 아무것도 모르겠어. 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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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말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만큼 신났던 적은 없었다고. 한 숨도 잘 수 없어 밤낮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건 뭐… 여간해서 읽기 어려운 책을 읽으려면 감옥에 가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데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 사람이 아닌, 책에 나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가벼움』의 마리클로드.
낮을 위한 책이 있고, 또 밤만을 위한 책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무척이나 공감했다(그녀가 전혀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닌데도 말이다). 더욱이 그녀가 밤만을 위한 책이라며 예를 든 게 스탕달이었다. 스탕달은 밤의 작가라며 일장 연설을 하는 그녀… 나도 스탕달을 집었다 밤을 새워 가며 읽은 적이 있어서 스탕달이 밤의 작가라는 의견에는 공감하지만, 또 공감할 수만은 없는 게 ‘일장 연설‘이라고 내가 표현한 그녀의 태도 때문이다. 누군가는 스탕달을 낮에 읽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모두가 스탕달을 밤에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온건한 것도 지루하지만, 우악스러운 것은 고통스럽다. 그런 건 참아 주기가 힘들다. - P59

이렇게 술을 섞다 보면 알게 된다. ‘섞는다‘라는 감각에 대하여 말이다. 술과 술은 물론 술과 다른 게 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밀도와 냄새가 섞이는, 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대해 말이다. 또 이런 깨달음도 있다. 세상에 나쁜 술은 없구나라는. 나쁜 건 술을 나쁘게 만드는 인간의 무지와 무결제, 내가 너보다 많이 마시겠다는 호승심, 그런 사람들이 벌이는 싸움과 다음 날 밀려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부끄러움과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다. - P68

게다가 에이해브 선장은 자기 연출에 능한 사람답게 극적인 말까지 해서 술맛을 돋운다. 그는 지금 마시는 술이 악마의 발처럼 뜨거운 술이라고 말한다. 이렇게만 말해도 술자리가 후끈 달아오를 텐데 뭘 좀 아는 남자인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단숨에 들이켜고 천천히 삼키라고. 그토록 넘쳐 나는 인생도 벌컥벌컥 마시고 나면 온데간데 없어진다고. - P73

배를 타는 사람들은 돈도 돈이지만 바다와 직접 맞대면하기 위해 배를 탄다. 바다의 가혹함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심한 자기모멸을 겪다 어쩌면 자기를 살해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은 바다로 나가 쉴 새 없이 날뛰는 완악한 마음을 잠재워 보려 한다. 마음의 불길, 그 어쩔 수 없음을 말이다. 외부의 적이 하도 강력해 내부의 적과 잠시 휴전 중인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 P73

나도 종종 자가 처방을 내리곤 한다. 속이 답답할 때는 황금빛 필스너를, 으슬으슬할 때는 암갈색 코냑을, 기분이 우중충할 때는 산뜻한 릴레 블랑을, 소화가 안 될 때는 씁쓸한 화이트 포트 와인을 내준다. 이건 그나마 괜찮을 때다.
속이 쓰릴 때는 페이쇼드를, 배가 아플 때는 앙고스투라 비터스를 준다. 먹고 나면 괜찮아진 느낌이 드는데, 과연 이 비터스의 특정 성분이 작용을 한 건지 아니면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쳐 몸까지 괜찮아진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플라시보 효과일지도. 매일 맨발로 흙길을 저벅저벅 걷는 사람의 마음이랄까. 대구의 수성못에 갔다가 맨발 군단을 마주치고서 신발을 신고 있는 게 큰 잘못인 것처럼 느낀 적이 있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에게 플라시보 효과가 함께하시길,이라고 빌며 그들을 지나쳤던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플라시보라도 효과가 있으니 된 게 아닌가? 그러니 술이 꼭 몸 에 해롭다고만 볼 수 없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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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밤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텅 빈 하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너머에는 별과 행성들이 있었고, 지구 역시 그들 사이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어떤 멋진 설계 덕분에 그 모든 게 움직일 수 있었고, 어떤 존재 덕분에 그 움직임에 의미가 생겼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옳다면 어떨까, 이 모든 의미가 수천 년 전에 남자와 여자가 되기 위해 바다에서 기어 나온 물고기들에게서 시작된 거라면?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유인원이, 거대한 원숭이가 우리의 조상이라면? 그런 세상에서 고통을 헤아리는 하느님은 어디 계실까? - P238

주디스는 제단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희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부와 성모가 그녀의 머릿속을 휘청이며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이 읊는 기도문이 다급하고 열의 없는 복사 소년들의 웅얼거림처럼 무의미해질 때까지 계속 기도했다. 그녀는 매든 씨의 뒤를 따라 하숙집을 뛰쳐나온 굴욕적인 순간, 고통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기억을 천천히 되짚었고, 그러는 동안 그녀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반쯤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와 그가 말했던 것들과 그때의 잔인한 말투는 아무리 반복해 떠올려도 잦아들지 않았다. 기도와 달리, 그것들은 반복을 통해 무뎌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기도의 부정이자 희망의 반대였다. - P270

"아, 그건 불가능해요. 그렇게 뚱뚱한 여자와 친구라니! 사실 나한테 친구가 궁한 건 아니잖아요."
당신 친구 별로 없잖아. 오닐 부인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장황한 얘기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지난번 하숙집을 바꿨을 때 했던 이야기에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지. 누가 알겠어. 그 모든 집주인이 당신이 묘사하는 것만큼 속이 시커멀 리는 없잖아. 아, 가엾은 주디, 당신이랑 다퉈 봐야 뭐 하겠어. 다르시 이모님이랑 성미가 똑같아. 고집불통. - P282

라이스 부인 같은 여자와 친구라니. 주디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모이라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했어. 어떻게 내가 그 뚱보와 친구가 되고, 어떻게 그 일, 그 심각한 일, 그러니까 그 연애가 그렇게 그냥 사그라들겠냐고. 정말, 모이라는 모를 거야. 닭들한테 둘러싸여 흐뭇해하는 암탉이나 다름없잖아. 그리고 우나는 그냥 어린애야. 얘가 남녀관계에 대해 뭘 알겠어? 두 사람은 날 이해하지 못해. 앞으로도 그렇겠지. 애초에 날 이해한 적도 없었고. - P282

성당이 고요해지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홀로 무릎을 꿇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늙은 성구 관리인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던 모습. 하느님의 사제와 하느님의 비밀 지킴이는 모두 하느님의 성전 앞을 무심하게 지나치며 기계처럼 복종하고 형식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들 둘은 하느님의 성전 앞에서 불신자처럼, 감실 안이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마치 그 앞에서 무릎을 끓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 P342

그래? 그럼 나는 듣는 이가 없는 기도를 해 왔던 거야? 방금 한 고해 성사는 그냥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거고? 그래,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잘 설명돼. 이 모든 불행, 바보 같은 짓들, 아무 소용도 없는 9일 기도, 한 번도 답을 얻지 못한 기도들. 이게 사실이라면 모든 사제, 모든 주교, 모든 추기경은 다 틀린 거잖아. 착각에 빠진 인간들일 뿐이야. 감실에 없는 신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고 착각한 사람들. 신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하느님은 왜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릴까? 버나드가 말했었지. 왜 내 죄들이 하느님을 아프게 할 거라 생각하냐고.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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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길고 끝이 뾰족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밀려들 때 그 신발을 바라보면 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신발에 매달린 작은 단추들이 지혜 롭고 다정한 눈처럼 주디스를 향해 깜박였다. 작은 신발 눈, 너희는 늘 그 자리에 있구나. - P149

『군주론』에서 그랬잖아. 니콜로 마키아벨리, 위대한 이탈리아인의 책. 무슨 구절이었더라? 한 국가에서 악이 솟구치면 그 악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더욱 확실한 해결책이다. 기어코 악을 부수려는 자는 오히려 악의 힘을 키워 주고, 악에게 결박당한 이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도록 만든다. 그렇지. 그 말을 지금 상황에 적용해 봐. 결과를 개의치 말고 그 악에게 명예를 보여라. 니콜로는 자신했지. 그러면 악이 사라지거나, 적어도 최악의 결과는 미뤄질 거라고. 영국 통치자들의 처세도 그랬지. 분열과 정복 말고도 수단이 하나 더 있었어. 개선. 위대한 이탈리아인 니콜로가 그의 손으로 해냈던 것처럼, 멋진 아일랜드 사람인 나도 해낼 수 있을 거야. 이 베르나르투스 리치오! 공작이 해내는 거야. 내 이 손으로. - P161

시청 건물의 거대한 돔 아래에 자리한 광장. 잊힌 기념물에 둘러싸인, 아일랜드 독립 추모공원이 곁을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벨파스트의 모든 게 뚜렷이 보이는 곳. 신문팔이가 단조롭고 시시한 북아일랜드 사투리로 세상에서 일어난 위대한 사건들을 외쳐 대는 곳. 칙칙한 건물들의 정면이 모여 무역의 미덕과 까다로운 거래와 장로교의 정의를 선언하는 곳. 질서있고 말끔하게 늘어선 채 조명등의 빛을 받고 있는 기념비들, 아일랜드 늪지에 반쯤 잠긴 채 무성하게 퍼져 있는 하얀 말뚝버섯들, 쾌활함이 없는 개신교, 질서를 지나 치게 신봉하는 개신교. 그리고 이토록 진부한 기념물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뚱한 아일랜드 시민들. - P173

회한에 찬 주디스는 벽난로 선반으로 시선을 돌려 벽 쪽으로 돌아선 액자를 바라보았다. 이모 말이 맞아요. 그녀는 말했다. 이모 말이 옳다고요. 이모가 그랬죠. 오언 오닐 같은 남자한테는 절대 저를 소개해 줄 수 없다고요. 댄 브린한테도요. 사냥의 달인이자 변호사 회사를 운영했던 남자. 아니, 매든 씨는 달라요. 그 사람이 미국에서는 일을 잘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아닐 거예요. 그러니 그냥 그 사람을 내려놓아야겠죠. 혹시라도 그 남자와 얽혔다가는 다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뭘 포기하죠? 주디스가 말했다. 이제는 아무도 절 신경 쓰지 않아요.
댄 브린, 댄 브린이 더블린으로 이사한 후로는 그 사람이나 그의 가족들하고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어요. 단 한마디도요. 일요일이 오면 우나 오닐 그 어린애마저 제 말투를 따라하며 놀려요. 제가 뭘 하든 누가 신경이나 쓸까요? 제가 더 포기할 게 있나요? 제임스 매든은 평범해요. 하지만 그는 남자고, 독실한 가톨릭신자고, 흔해 빠진 직업은 이제 다 집어치웠고, 점잖게 살 만한 돈도 있다고요.
그래요, 대체 뭐가 문제죠? 그녀는 액자 뒤에 가려진 얼굴에게 물었다. 그렇게 점잖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대체 왜 잘못이라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미국에 가기만 한다면, 그가 뭘 했던 사람인지 누가 알겠어요? 이쪽에 있든, 저쪽에 있든 남자는 다 똑같아요. 누더기부터 부자까지, 전부 다요. 제임스 매든한테는 좋은 여자가 바꾸지 못할 단점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게다가 그 남자는 바보가 아니에요. 잘만 배우면 살아 온 방식을 바꿀 수도 있다고요. - P187

한 잔 마시면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술은 망각을 돕는 게 아니라 기억을 도왔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불쾌한 사실들을 이성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한 패턴으로 재정리해 주었다. 알코올 중독자. 주디스는 위험하고 실망스러운 순간을 떨치려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건 이 모든 시련을 좀 더 철학적으로 바라보고 더욱 꼼꼼히 따져 보기 위해서였다. 이성을 거절하는 각성제의 힘을 빌려서. - P205

문밖에서는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눈앞에 닥친 삶에 바쁜 사람들. 사람들은 생계를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계획을 세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공유하고 있었다. 주디스는 홀로 성당을 되돌아보았다. 괴로움 없는 하느님의 집, 텅 빈 곳, 노래도, 의식도 빼앗긴 곳, 찬란한 활기를 와락 안겨 주었던 사람들마저 빼앗긴 곳.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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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질투심이 많다. 끓일 땐 딴 짓은 물론이고 딴생각도 하면 안된다. - P191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애매한 시간과 공간의 틈을 떠도는 이 아이들은, 느닷없이 닥쳐온 생의 불가해함이 견딜 수 없어 몸부림을 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99

어디냐?
아들이 있는 장소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아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무의미한 발성에 불과하겠지만 그 질문은 매번 박으로 하여금 자신이 있는 곳, 진저리나지만 버텨야 하는 장소에 대한 이질감, 나아가 두려움에 가까운 혐오감을 즉각 환기시켰다. - P208

박도 요즘은 전화보단 문자질에 빠져들었다. 어리석고 맹한 세계만이 줄 수 있는 위로도 있었다. 무신경하고 무의미한 문자들 속에는, 박이 자신의 일상에서 좀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사소한 것에 대한 감탄, 매사가 처음인 듯한 놀람, 진정 없는 후회, 회한 없는 망각,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하찮음에 대한 무감각. 이를테면 기이한 마술이나 지난한 역경없이 단숨에 도달할 수 있는 무중력의 차원 같은 것. 그러니까 어디냐?와 그만하시면 안돼요?의 세계로부터 아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말의 부스러기들이었다. - P213

둘 다 혹은 둘 중 하나가 부서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겠지. 둘 중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지, 당연히. 그런데, 그 둘 중 하나가 자기 쪽이 된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그렇다면 차라리 둘 다, 쪽을 선택할 것이다. 기쁨보단 고통에 동반자가 더 필요할 테니.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정하는 문제는 어떨까.
사실 누가 그 자리에 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불가피하게 제단 에 놓여야 한다면 단죄되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 다. 누군가 희생양이 되었다면 그건 그 자신의 죄의 단독성 때문이 아니다. 죄란 얼마나 흔해빠진 것인가. 오래된 종교의 경전에서도 보았듯 오히려 가장 순결한 자가 제단에 오르곤 하는 것이다. - P240

대구를 생각하자 한 남자가 떠오른다. 바뗄이란 괴팍한 놈이 있었지. 프랑쑤아 바뗄. 사백년 전 당대 최고의 요리사였던 그는 어느 귀족의 잔치에 수석 요리정으로 초빙되었다. 많은 손님들이 초대되었고 정원에는 거대한 식탁이 줄지어 차려졌다. 호사를 극한 잔치는 사흘 동안 계속될 예정이었다. 바델은 마지막 날 오후가 기울어갈 무렵, 향락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성의 뒤편으로 조용히 걸어나가 인적이 드문 숲 언저리에서 자살했다. 마르쎄이유 항에서 보내기로 한 생선 – 정확히 어느 종류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이 약속한 시간을 지나서도 도착하지 않아 마지막 코스가 되는 그 날의 만찬 준비에 차질을 빚은 것이 까닭이었다. 새우와 관자와 생선살이 듬뿍 든 부야베스 대신 담백한 단호박 수프를 끓이거나 넙치구이 대신 송아지갈비를 내놔도 뭐랄 사람은 없었다. 그가 견디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르와조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바델인 듯 선명하게 깨달았다. 갑자기 르와조의 피돌기가 격해졌다. 난, 최선을 다했어, 늘.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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