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아니라는 거 아는데 자꾸 오게 된다. 어쩐지 기도해도 안 들어주고, 똥주가 교회를 다니는 것부터 이상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딴 동네로 이사 가셨다니, 원. 똥주가 내 자존심을 하도 바득바득 긁어서, 그렇다고 애들처럼 팰 수도 없어서,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보려 했는데 말짱 도루묵 됐다. 이제 와서 또 죽여달라고 할 생각 없다. 딴 동네로 이사 간 하나님 찾아 그곳까지 갈 수도 없다. 좀 띨해서 그렇지 똥주가 썩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그냥 뭐 그렇다. 어머니가 왔다. 같이 사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와 나, 그 분이 한방에 앉았다. 아버지와 싸우는 걸 보니 생각보다 성깔 있고 말도 잘했다. 나쁘지 않다. - P160
눈이 꽤 내렸다. 눈은 내리는데 엄마는 왜 안 오시나요, 하는 해님달님 오누이처럼 어렸을 때도 안 기다려본 어머니를 열일곱 살 먹은, 해가 바뀌었으니 열여덟 살 먹은 내가 기다린다. 어머니와 시장이라도 갈라치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 눈길이 영 별로다. 인터넷에 보면 인물 좋은 베트남 여자도 많던데 어머니는 안 그렇다. 앞니까지 심하게 벌어져 심히 촌스러운 얼굴이다. 이래저래 쪽팔린 상황이지만 어머니라는 말 은근히 마음에 든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식당이 어딨어. 빌어먹을 식당 주인. - P162
스텝은 꼬이고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섀도복싱도 안 됐다. 내가 언제 오라고 했냐고. 제 발로 오는 애를 내가 무슨 수로 막아.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게 대학인데 왜 거길 못 들어가서 안달이야. 내가 대학 가지 말라고 했냐고. 인 서울대든 진짜 서울대든 가라고. 왜 나한테 와서······. - P165
장애라는 말에 아버지 어깨가 잠시 흔들렸다. 사람한테는 죽을 때까지 적응 안 되는 말이 있다. 들을수록 더 듣기 싫고 미치도록 적응 안 되는 말 말이다.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닌데, 하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가슴을 치는 말은 한 번 두 번 세 번이 쌓여 뭉텅이로 가슴을 짓누른다. - P173
심심하고 마땅히 놀릴 거리가 없을 때 유용하게 써먹던 인간들. 나는 아버지를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굳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였다. 비장애인 아버지는 미리 말하지 않아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애인 아버지를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상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숨긴 자식이라며 듣도 보도 못한 근본까지 들먹인다. 근본은 나 자신이 지키는 것이지 누가 지켜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좀 있어 보이게 비웃을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만 가지고 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똥주. 외국인 노동자를 부리는 집에서 태어나, 지금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한다고 그 사람들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똥주. 이것이 바로 내가 똥주를 죽이고 싶었던 진짜 이유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딱지가 앉지 않는, 늘 현재형이라 아물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 P173
"나도 내 몸이 싫었다. 이게 나한테 끝나는 게 아니라 멀쩡한 너한테까지 꼬리표를 달아주더라. 부모가 도움은 못 돼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내 아들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말을 한마디씩 해. 그래서 되도록이면 너하고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혼자 있었어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내가, 네 아버지라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길 바랐다. 그래서 너한테서 자꾸 숨었지. 그렇게 나를 숨겼던 게 오히려 너까지 숨어 살게 만든 것 같다." "그러지 않았어요." - P174
똥주가 나에 대해 관찰일기를 쓰고 있는 게 확실하다, 사실 그랬다. 모두를 아등바둥 하루를 지내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던데,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은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다가 늙으면 죽고.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면 모를까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죽으면 게임 끝이다. 제아무리 많은 걸 이루 어놓고 죽는다 해도 그건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동네 양아치든 대통령이든 죽으면 똑같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생활에 개입할 수 없다. 그거 아니라고 불쑥 살아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서로 피해 안 주고 조용히 살다 죽는 게 장땡이다. - P174
"그 영감이 ‘네 몸땡이는 멀쩡한데, 네 정신 상태가 문제야‘ 했을 때는 처음으로 대들었다. 당신이 내 몸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겠냐고. 그랬더니 내가 숙소에서도 안 나오고, 남하고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내 모습도 볼 수 없다고 혀를 차더라." "예?" "너도 잘 모르겠지? 그 영감이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한다니까.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잖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고. ‘친구도 없는 인간이, 제 모습이 어떤지 알기나 하겠어.‘ 그러는데, 그때 좀 알겠더라." - P176
"그 영감 덕에 민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하고도 좀 어울렸다. 죽었는데 어떨 때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들려. 만날 나만 보면 ‘너 그렇게 살지 마.‘ 했는데, 지금도 가끔 그 목소리가 들린다니까. 산 사람이면 시끄럽다고 뭐라고나 하지. 죽은 영감이 내 속에 척 들어앉아서 자꾸 나를 혼낸다. 하하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근데, 그런 게······ 있더라. 나 죽으면, 너도 나 원망할래?" "아버지는 그 할아버지 원망해요?" "가끔. 내 정곡을 얼마나 꾹꾹 찔렀나 몰라. 그래도 좋은 영감이 었지." " 그럼 됐지 뭘요." - P177
"우리 서로 인정하고 살자." "뭘 인정해요?" "너는 내 춤을 인정해주고, 나는 네 운동을 인정해주고. 우리 몸이 그것밖에는 못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킥복싱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을 이렇게 했다. 저 얘기를 하려고 죽은 영감까지 들먹이며 폼을 잡았나. 하긴 그렇게 반대를 했으니······. - P177
"녀석······ 다리 긴 것 좀 봐. 근사하게 컸네······." 아버지가 내 허벅지를 툭툭 쳤다. 근사하게 컸다는데 왜 가슴이 울렁거리는 거야. 아버지 눈이 갑자기 빨갛게 되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눈이 아팠다. - P178
지난봄, 똥주를 만났다. 그리고 똥주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때 즈음 나는 킥복싱을 시작했다. 킥복싱은 미치도록 좋았다. 싫다가 좋다가 한꺼번에 내게 왔다.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한테 고자질하러 교회를 찾았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체육관을 찾았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누구와 대화해본 적이 없어 혼자 떠들 수 있는 교회를 찾았다. 내 몸을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내 몸을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체육관을 찾았다. 어쩐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새로 찾은 기분이다. - P178
"그래, 우리 몸, 우리가 그렇게 데리고 살자." 아버지와 내가 가지고 있던 열등감. 이 열등감이 아버지를 키웠을 테고 이제 나도 키울 것이다. 열등감 이 녀석, 은근히 사람 노력하게 만든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영 나쁜 것 같지도 않은 게 딱 똥주다. - P179
건성건성 대충대충인 거 같아도 날카로울 때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관장님. 체육관비 한 번 제대로 낸 적 없어도 항상 웃으며 내 스파링 상대가 돼주었던 관장님이다. 똥주보다 더 선생님 같고 처음으로 스승의 은혜가 뭔지 알게 해준 분인데 떠난다니.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주먹질과 발길질밖에 없는데, 그걸로 생전 처음 뭘 해보겠다고 꿈꿔봤는데 떠난다니. 뭐 이런 좆같은······. - P181
개천에 얼음이 얼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났다. 아니 무슨 물도 별로 없는 개천이 얼고 그래. 아이참, 저거 얼어도 썰매 못 타잖아. 아이고 배야, 개천이 자꾸 나를 웃겼다. 계집애가 겁도 없지 무슨 종군기자야. 하하하. 아우, 왜 오늘따라 종군기자라는 말이 다 웃겨. 오다가 꽃 냄새 나는 껌을 씹었나? 이히히. - P188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니. 니가 나비처럼 우아하게 날 때 상대가 벌처럼 쏘면 어떡할래? 우아하게 날갯짓하게 누가 그냥 둔대? 잊지 마라. 침착하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야. 방어하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힘껏 당긴 고무줄을 타! 놓은 것처럼 빠르고 깊게." - P196
"괜히 시합 앞두고 무리하지 마라. 날씨도 찬데 몸 다치면 끝이야." 나는 체육관을 나왔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인가 앞모습인가. 말보다 행동이 앞서던 관장님이 행동은 줄이고 말만 늘었다. 그 모습에 내 어깨가 다 축 처졌다. - P196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덥던 날. 정윤하가 게릴라전에 실패하고 대회에 못 온 날. 아버지가 댄스 교습소 원장님으로 등록된 날. 민구 삼촌이 돌아온 날. 아들 시합에 안 보내준다고 어머니가 식당을 그만두고 온 날. 내 인생의 정식 첫 시합날, 1라운드에서 또다시 TKO로 패한 날, 관장님이 떠났다. 낡아빠진 운동기구 몇 개 우리 집 옥상에 남겨두고 휘리릭 떠나버렸다. 내 인생에 TKO 패를 두 번 남기고 떠난 사람. 사나이로서 약속한다. 나도 상대에게 두 번의 TKO 패를 남기고 멀리 있는 내 스승님을 찾겠다고. - P198
우리는 시계 시침과 분침처럼 멀어졌다가도 악착같이 만난다. 조물주가 정해놓은 그곳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처럼. 일 년 넘게 지겹도록 앞서거니 뒤소거니 뱅뱅 돌며 만났다. 누가 우리 등 뒤에 달린 태엽을 쉬지 않고 감고 있는 모양이다. 운명이, 내가 분침이고 똥주가 시침이라면······ 저놈의 시침, 고장 나서 콱! 빠져버렸으면 좋겠다. - P200
그래도 똥주가 순진하기는 하다······. 나를 찾았으면 자기가 숨을 차례인데, 내가 또 숨어도 꼬박 꼬박 찾아줬다. 좋다. 숨었다 걸렸으니 이제는 내가 술래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찾을 생각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찾다 힘들면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쳐 쉬엄쉬엄 찾고 싶다.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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