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말 때문에 늦었어요. 나가려고 하는 순간에 왔지 뭐예요."
"약속 있다고 그냥 나오지 그랬어요?"
"그럴 수가 없어요. 형이니까요."
형한테는 그러면 안 되고 마리나는 기다려도 된다는 의미였다. 무슬림의 가족은 양날의 검처럼 장단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 P197

마리나는 그와의 만남도 별 볼일 없으리라는 걸 간파했다. 루스탐은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딱해서?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그녀는 가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잃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그녀의 인생에 저녁은 오지 않았고, 앞으로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이 남자가 아니라면 다른 남자를 만나면 된다. 물론 아예 안 만날 수도 있다. 사실 남자는 종족 번식을 위해 필요할 뿐이고, 그녀에겐 이미 아이들이 있었다. 프로그램은 완료된 셈이었다. - P194

마리나는 교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무적으로 말했다. 업무 전화임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사랑도 일 아닌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 P196

슬픔이 피 속에 아드레날린을 주입하자 행복이 그것을 잘게 쪼개서 몸 밖으로 배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통해 슬픔을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과 슬픔은 양날의 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서 하나의 몸을 이룬다. - P199

마리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남자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생 각하는 사랑은 여권에 찍힌 혼인 신고 도장과 함께 그 남자와 합법적으로 동거하는 거였다. 꼭 함께 살아야 사랑하는 건가? 감정 없는 잠자리를 갖고 서로 늘 짜증을 내며 보드카로 귀결되는 끊임없는 부부싸움이 사랑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흔한 말로 릴랙스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도 하지만 결국 보드카의 도움으로 슬픔을 치료하고 그로 인해 다시 쇠퇴한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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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린 시절은 삶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그 삶은 마리나를 부드럽게 비춰 주었다. 마리나는 늘 소리를 질러 대는 어머니나 항상 싸우고 들어오는 오빠를 사랑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면 그만이니까. - P179

모성애는 축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돈과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이 있고 아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이 힘만 든다면 스스로 사람이 아닌 비 맞는 한 마리 말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 P182

교무실에서는 그녀의 사생활을 놓고 열띤 논의를 벌였다. 마리나는 친구인 지리 교사에게 고민을 털어놨는데, "두 명이 알면 돼지들도 안다."(소련 드라마 《봄의 17개 순간》에 등장하는 명언으로 독일 격언이기도 하다)고 하지 않는가. "너에게 버림받아서 힘든 것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더 견디기 힘들구나."라는 노랫말도 있다. - P184

가장 먼저 유치원 원장이 접근했다. 그런데 입에서 완두콩 냄새가 났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안 좋은 냄새가 난다고들 한다.
반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냄새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개처럼. 단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마리나는 원장과 키스할 수 없었다. 입냄새가 너무 역겨웠다. - P188

사샤는 게으르고 주체적이지 않았지만 마리나는 아들을 끔찍하리만치 사랑했다. 사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장점이니 단점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마리나는 아들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서 생각했다. 사샤는 게으르긴 하지만 뻔뻔하지 않다. 게다가 겸손하다. 소위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코뿔소처럼 짓밟아 버린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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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아니라는 거 아는데 자꾸 오게 된다. 어쩐지 기도해도 안 들어주고, 똥주가 교회를 다니는 것부터 이상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딴 동네로 이사 가셨다니, 원. 똥주가 내 자존심을 하도 바득바득 긁어서, 그렇다고 애들처럼 팰 수도 없어서,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보려 했는데 말짱 도루묵 됐다. 이제 와서 또 죽여달라고 할 생각 없다. 딴 동네로 이사 간 하나님 찾아 그곳까지 갈 수도 없다. 좀 띨해서 그렇지 똥주가 썩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그냥 뭐 그렇다. 어머니가 왔다. 같이 사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와 나, 그 분이 한방에 앉았다. 아버지와 싸우는 걸 보니 생각보다 성깔 있고 말도 잘했다. 나쁘지 않다. - P160

눈이 꽤 내렸다. 눈은 내리는데 엄마는 왜 안 오시나요, 하는 해님달님 오누이처럼 어렸을 때도 안 기다려본 어머니를 열일곱 살 먹은, 해가 바뀌었으니 열여덟 살 먹은 내가 기다린다. 어머니와 시장이라도 갈라치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 눈길이 영 별로다. 인터넷에 보면 인물 좋은 베트남 여자도 많던데 어머니는 안 그렇다. 앞니까지 심하게 벌어져 심히 촌스러운 얼굴이다. 이래저래 쪽팔린 상황이지만 어머니라는 말 은근히 마음에 든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식당이 어딨어. 빌어먹을 식당 주인. - P162

스텝은 꼬이고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섀도복싱도 안 됐다. 내가 언제 오라고 했냐고. 제 발로 오는 애를 내가 무슨 수로 막아.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게 대학인데 왜 거길 못 들어가서 안달이야. 내가 대학 가지 말라고 했냐고. 인 서울대든 진짜 서울대든 가라고. 왜 나한테 와서······. - P165

장애라는 말에 아버지 어깨가 잠시 흔들렸다. 사람한테는 죽을 때까지 적응 안 되는 말이 있다. 들을수록 더 듣기 싫고 미치도록 적응 안 되는 말 말이다.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닌데, 하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가슴을 치는 말은 한 번 두 번 세 번이 쌓여 뭉텅이로 가슴을 짓누른다. - P173

심심하고 마땅히 놀릴 거리가 없을 때 유용하게 써먹던 인간들.
나는 아버지를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굳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였다. 비장애인 아버지는 미리 말하지 않아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애인 아버지를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상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숨긴 자식이라며 듣도 보도 못한 근본까지 들먹인다. 근본은 나 자신이 지키는 것이지 누가 지켜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좀 있어 보이게 비웃을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만 가지고 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똥주. 외국인 노동자를 부리는 집에서 태어나, 지금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한다고 그 사람들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똥주. 이것이 바로 내가 똥주를 죽이고 싶었던 진짜 이유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딱지가 앉지 않는, 늘 현재형이라 아물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 P173

"나도 내 몸이 싫었다. 이게 나한테 끝나는 게 아니라 멀쩡한 너한테까지 꼬리표를 달아주더라. 부모가 도움은 못 돼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내 아들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말을 한마디씩 해. 그래서 되도록이면 너하고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혼자 있었어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내가, 네 아버지라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길 바랐다. 그래서 너한테서 자꾸 숨었지. 그렇게 나를 숨겼던 게 오히려 너까지 숨어 살게 만든 것 같다."
"그러지 않았어요." - P174

똥주가 나에 대해 관찰일기를 쓰고 있는 게 확실하다, 사실 그랬다. 모두를 아등바둥 하루를 지내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던데,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은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다가 늙으면 죽고.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면 모를까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죽으면 게임 끝이다. 제아무리 많은 걸 이루 어놓고 죽는다 해도 그건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동네 양아치든 대통령이든 죽으면 똑같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생활에 개입할 수 없다. 그거 아니라고 불쑥 살아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서로 피해 안 주고 조용히 살다 죽는 게 장땡이다. - P174

"그 영감이 ‘네 몸땡이는 멀쩡한데, 네 정신 상태가 문제야‘ 했을 때는 처음으로 대들었다. 당신이 내 몸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겠냐고. 그랬더니 내가 숙소에서도 안 나오고, 남하고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내 모습도 볼 수 없다고 혀를 차더라."
"예?"
"너도 잘 모르겠지? 그 영감이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한다니까.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잖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고. ‘친구도 없는 인간이, 제 모습이 어떤지 알기나 하겠어.‘ 그러는데, 그때 좀 알겠더라." - P176

"그 영감 덕에 민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하고도 좀 어울렸다. 죽었는데 어떨 때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들려. 만날 나만 보면 ‘너 그렇게 살지 마.‘ 했는데, 지금도 가끔 그 목소리가 들린다니까. 산 사람이면 시끄럽다고 뭐라고나 하지. 죽은 영감이 내 속에 척 들어앉아서 자꾸 나를 혼낸다. 하하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근데, 그런 게······ 있더라. 나 죽으면, 너도 나 원망할래?"
"아버지는 그 할아버지 원망해요?"
"가끔. 내 정곡을 얼마나 꾹꾹 찔렀나 몰라. 그래도 좋은 영감이 었지."
" 그럼 됐지 뭘요." - P177

"우리 서로 인정하고 살자."
"뭘 인정해요?"
"너는 내 춤을 인정해주고, 나는 네 운동을 인정해주고. 우리 몸이 그것밖에는 못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킥복싱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을 이렇게 했다. 저 얘기를 하려고 죽은 영감까지 들먹이며 폼을 잡았나. 하긴 그렇게 반대를 했으니······. - P177

"녀석······ 다리 긴 것 좀 봐. 근사하게 컸네······."
아버지가 내 허벅지를 툭툭 쳤다. 근사하게 컸다는데 왜 가슴이 울렁거리는 거야. 아버지 눈이 갑자기 빨갛게 되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눈이 아팠다. - P178

지난봄, 똥주를 만났다. 그리고 똥주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때 즈음 나는 킥복싱을 시작했다. 킥복싱은 미치도록 좋았다. 싫다가 좋다가 한꺼번에 내게 왔다.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한테 고자질하러 교회를 찾았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체육관을 찾았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누구와 대화해본 적이 없어 혼자 떠들 수 있는 교회를 찾았다. 내 몸을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내 몸을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체육관을 찾았다. 어쩐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새로 찾은 기분이다. - P178

"그래, 우리 몸, 우리가 그렇게 데리고 살자."
아버지와 내가 가지고 있던 열등감. 이 열등감이 아버지를 키웠을 테고 이제 나도 키울 것이다. 열등감 이 녀석, 은근히 사람 노력하게 만든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영 나쁜 것 같지도 않은 게 딱 똥주다. - P179

건성건성 대충대충인 거 같아도 날카로울 때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관장님. 체육관비 한 번 제대로 낸 적 없어도 항상 웃으며 내 스파링 상대가 돼주었던 관장님이다. 똥주보다 더 선생님 같고 처음으로 스승의 은혜가 뭔지 알게 해준 분인데 떠난다니.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주먹질과 발길질밖에 없는데, 그걸로 생전 처음 뭘 해보겠다고 꿈꿔봤는데 떠난다니. 뭐 이런 좆같은······. - P181

개천에 얼음이 얼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났다. 아니 무슨 물도 별로 없는 개천이 얼고 그래. 아이참, 저거 얼어도 썰매 못 타잖아. 아이고 배야, 개천이 자꾸 나를 웃겼다. 계집애가 겁도 없지 무슨 종군기자야. 하하하. 아우, 왜 오늘따라 종군기자라는 말이 다 웃겨. 오다가 꽃 냄새 나는 껌을 씹었나? 이히히. - P188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니. 니가 나비처럼 우아하게 날 때 상대가 벌처럼 쏘면 어떡할래? 우아하게 날갯짓하게 누가 그냥 둔대? 잊지 마라. 침착하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야. 방어하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힘껏 당긴 고무줄을 타! 놓은 것처럼 빠르고 깊게." - P196

"괜히 시합 앞두고 무리하지 마라. 날씨도 찬데 몸 다치면 끝이야."
나는 체육관을 나왔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인가 앞모습인가. 말보다 행동이 앞서던 관장님이 행동은 줄이고 말만 늘었다. 그 모습에 내 어깨가 다 축 처졌다. - P196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덥던 날. 정윤하가 게릴라전에 실패하고 대회에 못 온 날. 아버지가 댄스 교습소 원장님으로 등록된 날. 민구 삼촌이 돌아온 날. 아들 시합에 안 보내준다고 어머니가 식당을 그만두고 온 날. 내 인생의 정식 첫 시합날, 1라운드에서 또다시 TKO로 패한 날, 관장님이 떠났다. 낡아빠진 운동기구 몇 개 우리 집 옥상에 남겨두고 휘리릭 떠나버렸다. 내 인생에 TKO 패를 두 번 남기고 떠난 사람. 사나이로서 약속한다. 나도 상대에게 두 번의 TKO 패를 남기고 멀리 있는 내 스승님을 찾겠다고. - P198

우리는 시계 시침과 분침처럼 멀어졌다가도 악착같이 만난다. 조물주가 정해놓은 그곳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처럼. 일 년 넘게 지겹도록 앞서거니 뒤소거니 뱅뱅 돌며 만났다. 누가 우리 등 뒤에 달린 태엽을 쉬지 않고 감고 있는 모양이다. 운명이, 내가 분침이고 똥주가 시침이라면······ 저놈의 시침, 고장 나서 콱! 빠져버렸으면 좋겠다. - P200

그래도 똥주가 순진하기는 하다······. 나를 찾았으면 자기가 숨을 차례인데, 내가 또 숨어도 꼬박 꼬박 찾아줬다. 좋다. 숨었다 걸렸으니 이제는 내가 술래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찾을 생각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찾다 힘들면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쳐 쉬엄쉬엄 찾고 싶다.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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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제압용 강한 한 방보다 강한 한 방을 노련하게 방어해낼 때 상대는 맥이 빠진다. 신경전. 빈틈없는 자에게 공격 기회가 온다. 4줄 로프 안의 사방 6.4미터의 공간, 1라운드당 3분. 3라운드 총 9분.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라. - P123

삼촌에게 아버지는 유일하게 무섭지 않은 어른이었다. 그리고 삼촌은 아버지를 정말 어른으로 보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가끔 저 미련한 사람 때문에 가슴이 뜨겁다. 자기 자리가 아버지 옆인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 P126

얼마나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자식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 잘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다. 똑같이 가난한 사람이면서 아버지 나라가 그분 나라보다 조금 더 잘산다는 이유로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한국인으로 귀화했는데도 다른 한국인에게는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는 그분이, 내가 버렸는지 먹었는지 모를 음식만 해놓고 가는 그분이, 개천 길을 내려간다. 몸이 움직인다. 내 몸이 미쳐서 움직인다. 저 꽃분홍색 술이 달린 낡은 단화 때문이다. 나는 내려가는 그분에게 달려갔다. - P130

그분이 활짝 웃었다. 그분은 울면서 웃는 능력이 있다.
아버지가 짜게 먹는 걸 기억하고 나까지 짜게 먹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 그분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 대신 똥주가 먹었다. 아버지와 뚝 떨어져 있는 그분의 거리. 그 거리 속에 존재하는 나. 지금 이곳이 내 자리인 모양이다. 나는 그분이 버스에 올라타는 걸 보고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 P133

똥주네 집인지 교회인지 가서 관장님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 곧 올 것 같다. 나는 이번 대회에서 반드시 이긴다.
"네가 공격할 부위만 보지 말고, 상대방 움직임을 봐. 들어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거 받아치는 게 더 강한 거야. 가서 복근 단련이 나 해." - P145

정윤하가 뒤뚱뒤뚱 달리는 폼을 보면 운동은 역시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정윤하가 버스에 올라타는 걸 보고 가볍게 섀도복싱을 하며 개천을 따라 올라갔다. 사실 길에서 섀도 하는 거 정말 별로다. 나도 낯간지럽고 지나가며 보는 사람들 표정도 별로다. 꼭 운동한 지 얼마 안 되는 것들이 한 번씩 재보는 폼 같다. 그런데도 한다. 정윤하가 버스 뒷자리에서 보고 있으니까. - P147

"완득이 운동하게 놔두세요."
"완득이마저 세상 뒤에 숨어 살게 할 생각 없어."
"여태 세상 뒤에 숨어 있던 완득이가, 운동하면서 밖으로 나오고 있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제일 잘할 수 있는 거, 하게 놔두세요." - P151

"한국에 밥하러 오셨어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말없이 조용했던 방에 아버지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내 말보다 헛기침 소리가 방 안을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밥이라도 마음 놓고 먹고 싶었어."
그분이 웃으며 말했다. 가끔은 울음보다 웃음이 더 가슴 저릿 때가 있다. 아버지 춤에 웃는 사람들. 그 웃음에 웃음으로 대꾸 주던 아버지. 아버지와 별반 다를 게 없던 삼촌······. 그리고 지금 그분의 저 웃음이 그렇다. - P151

그분과 두 번째 시장 길이다. 혼자 가도 된다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한사코 말리는 걸 기어이 따라나섰다. 집에서 아버지와 나눌 대화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해가 사라진 저녁 개천 길은 정말 춥다. 보도블록에서 올라온 찬 기운에 발이 시렸다. 휙휙 지나가는 자동차에 밀려 나온 바람은 주머니에 넣은 손마저 얼릴 만큼 차가웠다. - P152

이런.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뜯어먹으면서도 맛있다고 한 게 정말이었군. 나중에 돈 벌면 연하고 맛 좋은 닭을 사주겠다 했던 내 다짐은 뭐였던가. 그럼 그동안 해왔던 질긴 갈비도? 도대체 그분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이제 보니 반찬 도시락 주인도 어째 내가 아닌 거 같다. 미워서 떠나놓고······. - P154

드디어 삼계탕을 먹기 시작했다. 나와 삼촌과 그분과 아버지는 폐닭에 익숙했다. 그런데 똥주와 앞집 아저씨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이런 씨불, 뭐야 이거, 이게 고기여 타이어여? 니들, 나 골탕 먹이려고 불렀지?" - P155

"제······ 어머니십니다."
목에 콱 박혀서 나오지 않는 말을 가래 뱉듯이 힘들게 했다. 막힌 가래를 뱉으면 이렇게 시원하다. 그분이, 아니 어머니가 갑자기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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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동네에서 내가 움직인다. 전에는 나만 멈춘 것 같았는데 지금은 나만 움직인다. 느낄 수 있다. 나, 대회에 나간다. 나 지금 스텝 바이 스텝 중이다. - P110

"나도 아버지가 부자면 옥탑방이 아니라 지하도에서도 살 수 있어요. 사고 쳐도 다 해결해주는 아버지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선생님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예요! 하도 가난해서 다른 나라로 시집온 어머니 있어봤어요? 쪽팔려 죽겠는데 안 가져가면 배고프니까, 할 수 없이 수급품 받아가 본 적 있어요?" - P118

"너처럼 멋도 없는 새끼가 멋있는 척해도 재수 없어. 솔직히 너도 진짜 가난이 뭔지 모르잖아. 아버님이 너한테 금칠은 못 해줘도, 먹고 자는 데 문제없게 해주셨잖아. 너, 나 욕할 자격 없어, 새끼야. 쪽팔린 줄 아는 가난이 가난이냐? 햇반 하나라도 더 챙겨 가는 걸 기뻐해야 하는 게 진짜 가난이야. 햇반 하나 푹 끓여서 서너 명이 저녁으로 먹는 집도 있어! 문병 오면서 복숭아 하나 안 사오는 싸가지 없는 새끼. 아이고, 나 죽네." - P119

몰라도 될 걸 알아버린 인간들이 얼마나 너저분하게 구는지 정말 몰라서 저따위 말을 하는 거야? 남의 약점 가지고 즐거워하는 싸가지 없는 놈들이 지천에 깔렸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 그렇게 태어나서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 사람들이 어떤 시선을 던지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야? 발톱이 빠지고 인대가 늘어나면서까지 연습하며 진정한 춤꾼을 꿈꾼 아버지를 변두리 카바레로 내몰고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 P120

그래, 나는 한 번도 내 입으로 아버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그 놀림이 내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하게 되리라는 걸 너무 잘 아니까. 이 세상이 나만 당당하면 돼, 해서 정말 당당해지는 세상인가? 남이 무슨 상관이냐고? 남이 바글바글한 세상이니까! 호킹 박사처럼 세상에 몇 안 되는 모델을 두고 그런 사람도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1등만이 특별한, 나머지는 1등의 언저리로 밀려나 있어야 하는······. 내 아버지는 호킹 박사 같은 1등 대접을 원하는 게 아니라, 높기만 한 지하철 손잡이를 마음 편하게 잡고 싶을 뿐이다. 떳떳한 요구조차 떳떳하지 못하게 요구해야 하는 사람이 내 아버지다. 내 입으로 말하라고? 아버지는 이미 몸으로 말하고 있다. 그걸 굳이 아들인 내가 확인사살 해줘야 하나? 자기들은, 내 아버지는 비장애인입니다, 하고 다니나?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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