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아니, 아니야, 너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니야. 단지 내가 오늘 밤 내내 너를 쳐다본 일로 나를 곤란하게 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아! 그래, 오냐. 오늘 밤 내내 내 너를 쳐다봤다. 너의 아름다움이 나를 현혹시켰구나. 그래서 내 너를 너무 빤히 쳐다봤구나. 허나 이제 두 번 다시 그렇게 쳐다보지 않으마. 사람이든 뭐든 직접 쳐다보면 안 돼지. 오직 거울로 비추어 보아야만 하지. 거울은 오직 가면만을 보여 주니까······.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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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 또다시 지각을 했어요." 그녀가 말을 꺼냈다.
"이번 주에 벌써 세 번째예요."
"네 번짼데요." 내가 정정했다.
"부끄럽지도 않나요?"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부끄럽다고 할 수도 없었고, 부끄럽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다.
"별로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쓸데없는 말장난은 그만두죠. 당신은 이 문제가 뭘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나요? 수업 종은 울렸는데 교사인 당신이 없으면 아이들은 어쩌겠어요. 어쩔 줄 몰라서 우왕좌왕 할 게 아니냐구요···"
"무슨 말씀을!" 나는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그 반대겠죠. 아이들은 제가 몸이 아파 결근을 하나 보다 하고 아주 좋아할 걸요." - P40

사람들은 나를 괴짜로 취급한다. 내가 많이 먹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랐다는 이유로, 아무도 청탁한 적 없고,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소설을 번역하고 있다는 이유로, 또 많은 사람들이 시간당 2루블 50코페이카를 주겠다며 부탁하는데도 내가 개인 교습을 맡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 P47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거짓말이 아냐."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인데···"
"가끔은 그래." - P54

수프는 절대로 맛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학교에서 먹는 수프보다는 나았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요." 내가 대답했다.
니나 어머니가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왜냐하면 야비하고 천박한 인간만이 대접받은 음식을 맛없다고 타박하며 먹을 테니까. 진실을 말할 때가 거짓을 말할 때보다 무례한 상황을 유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오늘은 나 나름의 무지개가 걸려 있어야만 했다. - P58

"여객기가 어느 산간 지방을 날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독수리 세 마리가 날아오더니 그중 한 마리가 그대로 비행기를 향해 돌진했다는 기사야."
[…]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니나가 나를 쳐다봤다.
"독수리에겐 나쁜 거겠지." 내가 말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몰라···" 니나가 벽을 통해 어딘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파블로프가 나를 통해 어딘가 딴 곳을 응시하듯이.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말 이것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내가 독수리였다면 가슴으로 비행기에 덤벼들 수 있었을까? 아니면 두 마리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렸을까? - P59

오늘 나는,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했다. 나는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사소한 거라도 모두 진실을 말하기로 작정했더라면 세상이 훨씬 살기가 편해졌으리라고. 왜냐하면 사소한 일에 거짓말을 자주 하다 보면 타성이 붙게 되고, 그러면 중요한 일에서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니까. - P66

디마는 ‘응급 진료실‘에서 의사로 일했다. 사람들이 위급한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를 집으로 호출했다. 그들은 디마의 왕진을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상태가 호전되고 나면 디마가 그들을 떠나는 즉시 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그와 같다. - P71

디마의 엄마가 말했다. "넌 어릴 때부터 주변머리라곤 없었어. 다른 애들이 간단하게 다 하는 망나니짓도 할 줄 몰랐지. 지금도 너는 그래. 나태한 인간들도 다 가진 꿈도 간단하게 꾸지 못하잖아. 너한테는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도 절대, 아무것도 없을 거다."
게다가 엄마는 디마가 물지게나 지면 딱 편할 거라고 덧붙였다. 그건 아무것도 바로잡을 게 없으니까. 왜냐하면 그건 아빠에게서 대물림한 거니까. 그의 타고난 특성이니까. - P74

디마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내 집에서 호랑이를 데리고 살고 싶어요. 그게 소원이에요."
"집에서는 개나 고양이만이 살 수 있어요." 모자 쓴 사람이 이치에 닿게 말했다.
"알아요." 디마가 짧게 인정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어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비극적인 인물이죠. 엥겔스가 그런 말을 했다죠. ‘비극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실현 불가능과 욕망의 충돌이다···‘라고 말이에요." - P75

디마는 동물원으로 갔다.
그는 이곳에 20년 전 아빠와 함께 마지막으로 왔었다.
그리고 지금 동물들의 우리 곁을 지나면서 다 자란 아이로 동물원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 그는, 그러니까 20년 전에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독수리 우리에서 독수리 자체만을 봤었다. 그런데 지금은 ‘갇혀 있는 독수리‘를 보고 있다. 독수리 우리는 위로 열려 있었다. 독수리는 머리 위로 하늘이 있으나 그곳을 향해 날아갈 수가 없다. 날개가 꺾였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꺾인 날개를 늘어뜨리고 넓은 그루터기에 앉아 있다가 가끔씩 나무 장식 위를 걸어 다니곤 했다. 그런 나무 장식은 주방 가구점에서나 파는 것들이다. - P76

"모든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뿐이죠." 디마가 말했다. 그는 의사로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죠?" - P78

조련사는 디마를 신뢰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호랑이를 소원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런데 조련사는 단 한 번도 그런 것들에 대해 꿈 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평생 조용히 떠돌아다니기를 염원했다. 서로의 눈앞에 거치적대지 않고 따로 떨어져 살기 위해서. - P80

집에 돌아와서 그는 사소한 이유로 랴와 전화로 말다툼했고, 전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엄마와 싸웠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세상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다. - P82

"인간의 뇌에 그런 스위치가 있다면 좋겠어요.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잊고 싶은 것들을 전부 잊을 수 있게요." 디마는 호랑이를 잊고 싶었다. - P83

실제로 뇌에 스위치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대신 텔레파시는 존재한다. 사람이 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면 그의 뇌는 견고하고 밀도 높은 파동을 사방으로 내보낸다. 그 파동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나서 집 안에 더 이상 채울 자리가 없어지면 창문으로 게워 낸다. 창문 밖으로 벗어난 파동은 위로 퍼져서 사방의 안테나에 부딪친다. 이 안테나들은 가느다란 두 팔을 펼쳐 든 아주 작은 사람의 스케치 모양을 하고 곳곳의 지붕 위에 서 있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서 있는 이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로 끌어 들인다. 언어와 음악과 생각들을,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신기를 통해 그 집 안의 사람들에게 전한다. 일반적으로 들리는 음악이나 언어들이 그것인데, 생각은 아니다. 생각들은 들리지 않지만 느낌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 어디선가 몹시 나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 심지어 그가 지구의 반대편에 산다 해도. - P84

디마는 행복과 환희를 경험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하게 빛나는 환희를 체험하지 못했다. 놀라움과 어떤 가벼운 황폐함은 있었지만 환희 같은 건 없었다. 디마는 난생처음으로 꿈의 실현을 경험했으나 그것이 이렇게 놀라움과 황폐함과 평온을 나타낼 줄은 몰랐다. - P85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면 그는 더욱 착해지고 다른 사람의 행복도 바라게 된다. 디마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구나 다. 그는 이 행복을 자신의 가죽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위급한 호출을 받고 방문하게 되는 집집마다 남겨 두고 싶었다. - P87

창문 너머로 다채롭게 채색된 창들이 달린 집들이 보였다. 마치 새해 장식 트리에 불을 밝혀 놓은 듯했다. 그러나 그 집들 맨 아래쪽에는 땅거미 속에서 겨우 식별되는 컴컴한 헛간들이 서 있었다.
디마는 관자놀이를 창틀에 기대고 서서 생각했다. 아직 젊다는 것에 대해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인생의 많은 날들에 대해서, 그리고 흥미로운 많은 사건과 만남에 대해서. - P87

그날은 그가 기억하는 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끝 무렵을 엄마가 어지간히 망쳐 놓고 말았다. 엄마들은 여느 사람들처럼 사랑할 줄 안다. 그리고 여느 사람들처럼 모든 걸 망칠 줄도 안다. - P88

디마의 일주일은 다르게 이뤄졌다. 일요일 다음엔 월요일이 와 있고 월요일 다음엔 다시 월요일이 와 있다. 그의 생활은 모두 연일 이어지는 월요일 하나로 변했다. - P91

친한 사람들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관대한 척 미소 지었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느꼈다. 인간은 항상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자신의 우월감을 기뻐한다. - P91

이번에는 거꾸로 조련사가 호랑이들에 흥미가 없어졌다. 호랑이들도 사람들처럼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놈들을 함께 두고 봐도 서로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한 차이가 없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는 큰 호랑이, 혹은 작은 호랑이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 P97

"나는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어요." 디마가 말했다. 그리고 마치 기도할 채비라도 하는 양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비극적인 인물이죠. 엥겔스가 그런 말을 했다죠. ‘비극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실현 불가능과 욕망의 충돌이다‘라고 말이에요."
무명인인 오흐리멘코는 디마가 불쌍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 P105

이곳에서 그는 거의 무료로 일했다. 그는 먹고 마시기에 충분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또 일만 할 수 있다면 어디나 마찬가지라 여겼다. 실제로 최고로 아름다운 것도 순간의 멈춤일 따름이니까. - P110

그는 살아 있는 따뜻한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만 했다. 열정이 아니라 부드러운 안정이 필요했다. 그녀의 품에 따뜻하게 파묻혀 있기만 해도 좋다. 어릴 때처럼. 이를테면, 그녀가 "나 여기 있어. 아무것도 겁내지 마···"라고 속삭여 주기만 하면 된다. 정말 그래 주기만 하면 머릿속에서 와글거리는 소리들을 겁내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목청껏 고함친다 해도 괜찮다. 눈을 감아도 무섭지 않을 테고, 잠조차 들 수 있으리라. 불면증이 그를 괴롭혔다. 누군가 곁에서 잠들 수 있게 해 줄 여자가 필요했다. 혼자 있는 건 너무도 무섭다··· 총살형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 P111

하루하루가 차츰 절망적인 지옥으로 변해 갔다. 안드레이는 결코 산목숨도 죽은 목숨도 아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상태도 죽어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끝도 없는 괴로운 투쟁이었다.
[…]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살아 있을 때가 더 나았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레나는 시간과 기억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늪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가라앉아 버렸다. - P112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흙덩이처럼 잿빛이었다. 짙은 색깔의 머리에 희끗한 머리카락이 반은 섞여 있었다. 가꾸지 않은 모습이 황폐해 보였다. 그녀의 엄마가 봤더라면 "마치 무두질 기계 속에다 짓이겨 놓은 것 같다"고 했을 것이다. ‘무두질 기계‘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던가? 생명의 강한 두 손바닥이 아니던가. 주먹을 불끈 쥔 삶이 아니던가. - P115

거의 모두 같은 연배인 서른일곱 살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옐리세예프는 자신이 가장 늙었다는 데에 비애를 느꼈다. 그의 나이는 쉰이었다. 이들과는 다른 세대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그들과 동등하게 어울렸다. 그건 상스러운 욕설이 포함된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나이를 암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서른일곱인 그들이 그 순간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는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이 속으로 ‘쓸모없는 늙은이는 저리 꺼지시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P116

레나는 분장 전문가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라면 그의 얼굴에서 무엇을 수정했을까, 생각했다. 그의 얼굴의 정해진 부분은 입과 잘 준비된 턱이었다. 그리고 미소였다. 그의 미소는 본질적으로 준비된 미소였다. 미소는 완벽했다. 치아는 깨끗하고, 품위 있고, 가지런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나 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안경 밑의 눈. 레나는 그 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불분명한 빛의 떨림. 광인의 눈빛이었다. 멋지게 곧은 목. 손놀림. 그리고 키. 키는 장신에 가까웠다. 무릎은 탁자 밑으로 멀리 사라졌다. 그런 무릎으로는 여자를 잘 지탱해 주고 아이들과도 잘 놀아 주리라. - P117

식탁에서의 대화는 거의 무의미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바로 이런 소탈한 모임의 의미는 대화의 내용에 있지 않다. 의미상의 무게가 아니라 영혼의 접촉에 있다. 그냥 서로 옆에 앉아 있으면 된다. 틀에 박힌 방에 혼자 있는 게 아니다. 함께 있는 것이다. 타인의 에너지를 피부로 지각하고, 따뜻해지고, 서로에게서 충전되어 외로운 죽음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칠 수도 있다. […] 어떤 알 수 없는 움직임과 긴장이 공간 속에서 흘렀다. 삶이었다. - P118

레나는 거의 어린애처럼 스스럼없는, 야비함에 가까울 정도로 뻔뻔한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는 주인처럼 처신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어릴 때 가정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혹은 호텔 방은 집이 아니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호텔 방은 모든 이들을 위한 벌집이니까.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신뢰의 차원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믿고 의지했다. 또 불쌍해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 P120

그는 눈을 감았다. ‘뎅··· 뎅··· 뎅···‘ 그가 미쳐 가고 있다. 그건 분명했다. 치료가 된다면 재능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약은 환청을 쫓아냄과 동시에 직관력도 지워 버린다. 이른 바 ‘옐리세예프‘가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럼 그때는 무엇이 남게 될까? 그리고 그때는 무슨 이유로 살아야 할까?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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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말 때문에 늦었어요. 나가려고 하는 순간에 왔지 뭐예요."
"약속 있다고 그냥 나오지 그랬어요?"
"그럴 수가 없어요. 형이니까요."
형한테는 그러면 안 되고 마리나는 기다려도 된다는 의미였다. 무슬림의 가족은 양날의 검처럼 장단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 P197

마리나는 그와의 만남도 별 볼일 없으리라는 걸 간파했다. 루스탐은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딱해서? 그렇다면 큰 오산이다. 그녀는 가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잃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그녀의 인생에 저녁은 오지 않았고, 앞으로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이 남자가 아니라면 다른 남자를 만나면 된다. 물론 아예 안 만날 수도 있다. 사실 남자는 종족 번식을 위해 필요할 뿐이고, 그녀에겐 이미 아이들이 있었다. 프로그램은 완료된 셈이었다. - P194

마리나는 교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무적으로 말했다. 업무 전화임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사랑도 일 아닌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 P196

슬픔이 피 속에 아드레날린을 주입하자 행복이 그것을 잘게 쪼개서 몸 밖으로 배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통해 슬픔을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과 슬픔은 양날의 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서 하나의 몸을 이룬다. - P199

마리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남자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생 각하는 사랑은 여권에 찍힌 혼인 신고 도장과 함께 그 남자와 합법적으로 동거하는 거였다. 꼭 함께 살아야 사랑하는 건가? 감정 없는 잠자리를 갖고 서로 늘 짜증을 내며 보드카로 귀결되는 끊임없는 부부싸움이 사랑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흔한 말로 릴랙스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도 하지만 결국 보드카의 도움으로 슬픔을 치료하고 그로 인해 다시 쇠퇴한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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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린 시절은 삶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그 삶은 마리나를 부드럽게 비춰 주었다. 마리나는 늘 소리를 질러 대는 어머니나 항상 싸우고 들어오는 오빠를 사랑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면 그만이니까. - P179

모성애는 축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돈과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이 있고 아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이 힘만 든다면 스스로 사람이 아닌 비 맞는 한 마리 말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 P182

교무실에서는 그녀의 사생활을 놓고 열띤 논의를 벌였다. 마리나는 친구인 지리 교사에게 고민을 털어놨는데, "두 명이 알면 돼지들도 안다."(소련 드라마 《봄의 17개 순간》에 등장하는 명언으로 독일 격언이기도 하다)고 하지 않는가. "너에게 버림받아서 힘든 것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더 견디기 힘들구나."라는 노랫말도 있다. - P184

가장 먼저 유치원 원장이 접근했다. 그런데 입에서 완두콩 냄새가 났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안 좋은 냄새가 난다고들 한다.
반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냄새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개처럼. 단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마리나는 원장과 키스할 수 없었다. 입냄새가 너무 역겨웠다. - P188

사샤는 게으르고 주체적이지 않았지만 마리나는 아들을 끔찍하리만치 사랑했다. 사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데 장점이니 단점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마리나는 아들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서 생각했다. 사샤는 게으르긴 하지만 뻔뻔하지 않다. 게다가 겸손하다. 소위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코뿔소처럼 짓밟아 버린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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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아니라는 거 아는데 자꾸 오게 된다. 어쩐지 기도해도 안 들어주고, 똥주가 교회를 다니는 것부터 이상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딴 동네로 이사 가셨다니, 원. 똥주가 내 자존심을 하도 바득바득 긁어서, 그렇다고 애들처럼 팰 수도 없어서, 종교의 힘이라도 빌려보려 했는데 말짱 도루묵 됐다. 이제 와서 또 죽여달라고 할 생각 없다. 딴 동네로 이사 간 하나님 찾아 그곳까지 갈 수도 없다. 좀 띨해서 그렇지 똥주가 썩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그냥 뭐 그렇다. 어머니가 왔다. 같이 사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와 나, 그 분이 한방에 앉았다. 아버지와 싸우는 걸 보니 생각보다 성깔 있고 말도 잘했다. 나쁘지 않다. - P160

눈이 꽤 내렸다. 눈은 내리는데 엄마는 왜 안 오시나요, 하는 해님달님 오누이처럼 어렸을 때도 안 기다려본 어머니를 열일곱 살 먹은, 해가 바뀌었으니 열여덟 살 먹은 내가 기다린다. 어머니와 시장이라도 갈라치면 우리를 보는 사람들 눈길이 영 별로다. 인터넷에 보면 인물 좋은 베트남 여자도 많던데 어머니는 안 그렇다. 앞니까지 심하게 벌어져 심히 촌스러운 얼굴이다. 이래저래 쪽팔린 상황이지만 어머니라는 말 은근히 마음에 든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식당이 어딨어. 빌어먹을 식당 주인. - P162

스텝은 꼬이고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섀도복싱도 안 됐다. 내가 언제 오라고 했냐고. 제 발로 오는 애를 내가 무슨 수로 막아. 대한민국에 널리고 널린 게 대학인데 왜 거길 못 들어가서 안달이야. 내가 대학 가지 말라고 했냐고. 인 서울대든 진짜 서울대든 가라고. 왜 나한테 와서······. - P165

장애라는 말에 아버지 어깨가 잠시 흔들렸다. 사람한테는 죽을 때까지 적응 안 되는 말이 있다. 들을수록 더 듣기 싫고 미치도록 적응 안 되는 말 말이다. 한두 번 들어본 말도 아닌데, 하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가슴을 치는 말은 한 번 두 번 세 번이 쌓여 뭉텅이로 가슴을 짓누른다. - P173

심심하고 마땅히 놀릴 거리가 없을 때 유용하게 써먹던 인간들.
나는 아버지를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굳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였다. 비장애인 아버지는 미리 말하지 않아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애인 아버지를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상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를 숨긴 자식이라며 듣도 보도 못한 근본까지 들먹인다. 근본은 나 자신이 지키는 것이지 누가 지켜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좀 있어 보이게 비웃을 수 있으니까. 겉으로 드러난 몇 가지만 가지고 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 똥주. 외국인 노동자를 부리는 집에서 태어나, 지금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한다고 그 사람들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똥주. 이것이 바로 내가 똥주를 죽이고 싶었던 진짜 이유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나에게도 딱지가 앉지 않는, 늘 현재형이라 아물 수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 P173

"나도 내 몸이 싫었다. 이게 나한테 끝나는 게 아니라 멀쩡한 너한테까지 꼬리표를 달아주더라. 부모가 도움은 못 돼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내 아들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말을 한마디씩 해. 그래서 되도록이면 너하고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혼자 있었어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내가, 네 아버지라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길 바랐다. 그래서 너한테서 자꾸 숨었지. 그렇게 나를 숨겼던 게 오히려 너까지 숨어 살게 만든 것 같다."
"그러지 않았어요." - P174

똥주가 나에 대해 관찰일기를 쓰고 있는 게 확실하다, 사실 그랬다. 모두를 아등바둥 하루를 지내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던데,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이 밥을 먹고 똑같은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그러다가 늙으면 죽고.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면 모를까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죽으면 게임 끝이다. 제아무리 많은 걸 이루 어놓고 죽는다 해도 그건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동네 양아치든 대통령이든 죽으면 똑같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생활에 개입할 수 없다. 그거 아니라고 불쑥 살아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니 서로 피해 안 주고 조용히 살다 죽는 게 장땡이다. - P174

"그 영감이 ‘네 몸땡이는 멀쩡한데, 네 정신 상태가 문제야‘ 했을 때는 처음으로 대들었다. 당신이 내 몸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겠냐고. 그랬더니 내가 숙소에서도 안 나오고, 남하고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내 모습도 볼 수 없다고 혀를 차더라."
"예?"
"너도 잘 모르겠지? 그 영감이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한다니까.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잖아.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고. ‘친구도 없는 인간이, 제 모습이 어떤지 알기나 하겠어.‘ 그러는데, 그때 좀 알겠더라." - P176

"그 영감 덕에 민구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하고도 좀 어울렸다. 죽었는데 어떨 때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들려. 만날 나만 보면 ‘너 그렇게 살지 마.‘ 했는데, 지금도 가끔 그 목소리가 들린다니까. 산 사람이면 시끄럽다고 뭐라고나 하지. 죽은 영감이 내 속에 척 들어앉아서 자꾸 나를 혼낸다. 하하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근데, 그런 게······ 있더라. 나 죽으면, 너도 나 원망할래?"
"아버지는 그 할아버지 원망해요?"
"가끔. 내 정곡을 얼마나 꾹꾹 찔렀나 몰라. 그래도 좋은 영감이 었지."
" 그럼 됐지 뭘요." - P177

"우리 서로 인정하고 살자."
"뭘 인정해요?"
"너는 내 춤을 인정해주고, 나는 네 운동을 인정해주고. 우리 몸이 그것밖에는 못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킥복싱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말을 이렇게 했다. 저 얘기를 하려고 죽은 영감까지 들먹이며 폼을 잡았나. 하긴 그렇게 반대를 했으니······. - P177

"녀석······ 다리 긴 것 좀 봐. 근사하게 컸네······."
아버지가 내 허벅지를 툭툭 쳤다. 근사하게 컸다는데 왜 가슴이 울렁거리는 거야. 아버지 눈이 갑자기 빨갛게 되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눈이 아팠다. - P178

지난봄, 똥주를 만났다. 그리고 똥주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때 즈음 나는 킥복싱을 시작했다. 킥복싱은 미치도록 좋았다. 싫다가 좋다가 한꺼번에 내게 왔다. 싫어하는 사람을 하나님한테 고자질하러 교회를 찾았고, 좋아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 체육관을 찾았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누구와 대화해본 적이 없어 혼자 떠들 수 있는 교회를 찾았다. 내 몸을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몰라, 내 몸을 잘 움직여줄 수 있는 체육관을 찾았다. 어쩐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새로 찾은 기분이다. - P178

"그래, 우리 몸, 우리가 그렇게 데리고 살자."
아버지와 내가 가지고 있던 열등감. 이 열등감이 아버지를 키웠을 테고 이제 나도 키울 것이다. 열등감 이 녀석, 은근히 사람 노력하게 만든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영 나쁜 것 같지도 않은 게 딱 똥주다. - P179

건성건성 대충대충인 거 같아도 날카로울 때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관장님. 체육관비 한 번 제대로 낸 적 없어도 항상 웃으며 내 스파링 상대가 돼주었던 관장님이다. 똥주보다 더 선생님 같고 처음으로 스승의 은혜가 뭔지 알게 해준 분인데 떠난다니.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주먹질과 발길질밖에 없는데, 그걸로 생전 처음 뭘 해보겠다고 꿈꿔봤는데 떠난다니. 뭐 이런 좆같은······. - P181

개천에 얼음이 얼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웃음이 났다. 아니 무슨 물도 별로 없는 개천이 얼고 그래. 아이참, 저거 얼어도 썰매 못 타잖아. 아이고 배야, 개천이 자꾸 나를 웃겼다. 계집애가 겁도 없지 무슨 종군기자야. 하하하. 아우, 왜 오늘따라 종군기자라는 말이 다 웃겨. 오다가 꽃 냄새 나는 껌을 씹었나? 이히히. - P188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니. 니가 나비처럼 우아하게 날 때 상대가 벌처럼 쏘면 어떡할래? 우아하게 날갯짓하게 누가 그냥 둔대? 잊지 마라. 침착하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야. 방어하기 위해. 공격하기 위해. 힘껏 당긴 고무줄을 타! 놓은 것처럼 빠르고 깊게." - P196

"괜히 시합 앞두고 무리하지 마라. 날씨도 찬데 몸 다치면 끝이야."
나는 체육관을 나왔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인가 앞모습인가. 말보다 행동이 앞서던 관장님이 행동은 줄이고 말만 늘었다. 그 모습에 내 어깨가 다 축 처졌다. - P196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덥던 날. 정윤하가 게릴라전에 실패하고 대회에 못 온 날. 아버지가 댄스 교습소 원장님으로 등록된 날. 민구 삼촌이 돌아온 날. 아들 시합에 안 보내준다고 어머니가 식당을 그만두고 온 날. 내 인생의 정식 첫 시합날, 1라운드에서 또다시 TKO로 패한 날, 관장님이 떠났다. 낡아빠진 운동기구 몇 개 우리 집 옥상에 남겨두고 휘리릭 떠나버렸다. 내 인생에 TKO 패를 두 번 남기고 떠난 사람. 사나이로서 약속한다. 나도 상대에게 두 번의 TKO 패를 남기고 멀리 있는 내 스승님을 찾겠다고. - P198

우리는 시계 시침과 분침처럼 멀어졌다가도 악착같이 만난다. 조물주가 정해놓은 그곳에서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처럼. 일 년 넘게 지겹도록 앞서거니 뒤소거니 뱅뱅 돌며 만났다. 누가 우리 등 뒤에 달린 태엽을 쉬지 않고 감고 있는 모양이다. 운명이, 내가 분침이고 똥주가 시침이라면······ 저놈의 시침, 고장 나서 콱! 빠져버렸으면 좋겠다. - P200

그래도 똥주가 순진하기는 하다······. 나를 찾았으면 자기가 숨을 차례인데, 내가 또 숨어도 꼬박 꼬박 찾아줬다. 좋다. 숨었다 걸렸으니 이제는 내가 술래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찾을 생각은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찾다 힘들면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쳐 쉬엄쉬엄 찾고 싶다. 흘려보낸 내 하루들. 대단한 거 하나 없는 내 인생, 그렇게 대충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하루가 모여 큰 하루가 된다.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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