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트 레일라, 그곳의 문제는 단 하나뿐이지만, 그 뿌리가 너무나 깊어서 도무지 근절할 수가 없다네. 법정은 인간에 의해 돌아가지만 정의는 그렇지 않으니까. - P190

루퍼트 결국 중요한 건 살인의 범위 아닌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작은 규모의 살인엔 공포를 느끼고 치를 떨지만, 대규모의 살인엔 존경과 숭배를 표하지. 그게 바로 살인과 전쟁의 차이야. 예컨대, 한 남자가 런던의 어두운 골목에서 어떤 남자를 살해했다고 가정해 보세. 레일라의 말대로, 그의 금니가 탐나서 말이야. 사회 전체가 떠들썩해지고, 그 악한을 잡아서 처벌해야 한다고 온통 야단법석일 거야. 우리는 그걸 살인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한 나라의 젊은이나 남자가 모조리 봉기해서 다른 나라의 젊은이나 남자를 전부, 그것도 상대의 금니가 탐난다는 허접한 이유조차 없이 몰살하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는 그 같은 행위를 용인하고 심지어 박수를 보낸다네. 그것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살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나? 지난 세계 대전 동안에, 나 역시 그러한 전제 아래서 행동했는데 말이야. 참으로 비통한 노릇이지. 그 때문에 나는 오늘도 자네들과 함께 축음기를 들으며 마음껏 즐기고 싶었건만, 무슨 늙은이처럼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어슬렁거리는 신세가 되었다네. 하지만 중요한 건 말일세, 내가 살인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는거지. 그렇지 않은가? - P190

루퍼트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사실 십계명은 본래 그것을 부여받은 민족의 유목 생활에 있어서 심오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거야. 다만 그것이 오늘날의 생활 방식엔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까닭에 우리로서는 따르기 어려운 거지. 이따금 나는 그중에, 혹시 하나라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있을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네. 우선 ‘부모를 존경하라.‘라는 계명인데, 물론 존경하지. 그러지 않으면 어쩌겠어? 실제로 나는 내 생일마다 항상 부모님께 축하 전보를 보낸다네. 비록 그러는 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연장해 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다른 것들도 살펴보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난 이건 지키지 않아.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이건 지키지. ‘살인하지 마라.‘ 좀 전에 말했듯이 이건 벌써 어겼어. - P190

루퍼트 왜냐하면 이 시간이야말로 런던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시간 같거든. 모든 것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생활의 단조로움과 쾌락의 어리석음이 똑같이 투명해지는 시간이라는 말일세. 직장을 잃은 하녀들과 슬럼가의 타락한 미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거리를 헤매는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야. 또 광고판이 번쩍이고, 택시와 버스가 뒤엉킨 교통 체증의 시간이지. 그리고 공연장에 몰린 런던의 관객들이, 연극의 뻔한 결말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 자리를 잡는 시간이라네. 막이 내리면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그들은 추운 데다 비까지 내릴지도 모르는 밤거리로 쏟아져 나오겠지. 그러고는 택시를 잡느라 아우성치거나 기차역으로 걸음을 재촉할 거야.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서 식은 저녁을 먹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그런가 하면, 아직 조금 더 험한 꼴을 봐야 하는 이들도 있다네.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는 여태 문을 열지 않았지만, 곧 영업을 시작할 테고······. 아무튼 이러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질 때도 있다네. 11시 이십오 분 전. 지독한 시간이야. 섬뜩한 시간이지. 쾌락이 끝나는 시간일 뿐 아니라, 쾌락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야. 자, 내게는 지금 이 시간이 그러하다네. 게다가 오늘 밤엔 천둥까지 치지 않았나. 11시 이십오 분 전에······. - P208

루퍼트 그래, 알아들었네.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세상은 기이하고, 어둡고,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니 말이야. 나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지. 그럼에도 늘 서투른 논리를 적용하려 들다 보니 이상한 길로 들어서게 돼. 이번 경우도 그런 거 같군. 자네는 내가 했던 말을 내 면전에 들이밀었고, 따라서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네. 앞으로 다시는 논리를 맹신하지 않을 거야. 자네는 내가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고 말했어.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나는 그런 인간이지. 그런데 거기엔 자네의 생명도 포함된다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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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급변하다 보니 키라가 모르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영화 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그녀도 잘나갔다. 영화로 보나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로 보나······. 지금은 온통 경찰 영화나 총 쏘는 영화뿐이었다.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천편일률적인 작품만 넘쳐났다. 시민들이 한 번 씹고 버리면 되는 작품들이었다. 먹을 건 줘야겠는데 딱히 내놓을 게 없으니 아쉬운 대로 가축한테 던져 주듯 건초나 먹고 떨어지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드라마에 빠진 시기였다. - P25

키라 세르게예브나는 평생 거물을 낚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잉여 인간 취급을 받는 인노켄치와 함께 살았다. 사실 그 대단한 거물들은 막상 가까이에서 겪어 보면 하나같이 배신자에다 비열한 인간뿐이었다. 반면 인노켄치는 한결같이 믿음직했다. 즉 완벽한 사람은 없다. 리더십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단점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수도 없이 갈등하게 된다. 옷으로 비유하면 리더십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외출복이고 인품은 평상복이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 P27

젊은이들은 저녁이면 바닷가에 모이곤 했다. 해가 져도 바다는 여전히 숨을 쉬었다. 마르트노프카는 고령화가 진행되어 하나둘 죽어 가는데 바다는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늘의 달빛만이 바다를 동요시킬 뿐이었다. 젊은이들은 높은 지대에 펼쳐진 바닷가에 모여들었고, 바다는 늘 똑같은데 사람들은 매번 바뀌었다. - P29

사실 그녀가 못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스타 팩토리》에 나온 여자들보다 모자란 것도 없어 보였다. 간혹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못생긴 여자들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쥐새끼처럼 작은 여자가 나오는가 하면 돼지처럼 뚱뚱한 여자도 출연했다. 농구선수처럼 키가 큰 여자도 있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안젤라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그 길에 들어섰고 안젤라는 그들에게 뒤처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즉 바실리의 아버지가 "뭔가를 더 빨리 얻고 싶다면 방법은 아주 간단해.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문을 여는 순간 너는 창문으로 들어가렴······." 하고 알려 주었다. - P30

멀리 구석 쪽에서 얼쩡거리는 청년이 보였다. 몽유병 환자라도 되는 듯 눈을 반쯤 뜬 채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서 있었다. 리듬에 맞춰 배 쪽으로 낮게 멘 기타의 현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조각 같은 입을 움직여 허밍으로 따라 부르는 것 같았다. 안젤라는 그의 자유로운 모습에 넋이 나갔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구속받는 그녀와 달리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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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꽃은 벌을 유인하기 위해 좋은 향을 낸다. 반면 냄새가 고약한 것은 말려서 바람에 날려 버려야 한다. 흔적도 없이 말이다. - P11

하지만 이번만큼은 여자의 생각이 틀렸다. 나타샤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불행하지 않았다. 젖소과 함께 초원에 앉아 있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있을까? 그것도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에서 말이다. 젖소는 아이처럼 순하고 순박하며 예쁘기까지 하다. 술을 병째 들이켜고 나면 세상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눈물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공기를 가르며 불행을 예고한다는 말벌조차 신의 창조물이며 제 역할과 기능이 있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P14

안젤라는 집(좀 더 정확히는 잠시 신세 지는 여자의 집)으로 3번 전차를 타고 갔다. 전차는 텅 비어 있었다. 안젤라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모스크바 사람들을 보려다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왜 울어요?"라고 묻는 사람은 고사하고 그녀를 애써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다. ‘인생은 길고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그녀의 슬픔에 빠져들었고, 그들 역시 어느새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린 아가씨의 슬픔과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흐느낌이었다. 물론 자기 연민만으로도 눈물을 쏟을 이유는 충분했다. - P15

인노켄치는 인체가 수분으로 구성된 것처럼 90퍼센트의 게으름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벽장에 있는 드릴을 꺼내서 콘센트에 꽂고 벽에 구멍 낸 뒤 망치로 못을 두드려 벽에 고정하는 일은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어마어마한 결단이 필요했다. […]
그는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이끌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누군가 리드해 주면 어떤 목표라도 이뤄 낼 수 있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리더도 선두도 아니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2등으로 만족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2등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1등은 한 명뿐이다. 잔다르크나 미하일 쿠투조프 같은 이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군대는 2인자로 이루어진 조합이다. 2인자 없이 1인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세계는 수많은 2인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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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솔직하지 못하면 누구에게 솔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진정 내 모습일 수 있는 순간은 오직··· - P132

며칠 전 한밤중에 일어나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내가 남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는 내가 일기를 쓴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잘못된 감정에 빠져 있다고 믿기가 더 쉬웠던 거다. 순간 나는 미렐라가 화가 나서 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렐라처럼 자유로웠다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었을 거라는 말 말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요즘 들어 가족과 관련된 모든 일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 P139

사무실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빈 책상들은 하나같이 깨끗이 정돈된 상태였고, 서류를 보관하는 책장 문도 잘 닫혀 있었다. 전화도, 전화 교환기의 메마른 버튼 소리도, 신경질적으로 탁탁 타자기를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무실 환경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으면 미렐라도, 시장도, 지저분한 접시도 나를 방해하지 못했다. - P143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마리나라는 아이를 알고 싶은 마음이 털 끝만큼도 없다. 마음에 안 들 것이 안 봐도 뻔했다. 내 아들의 짝 으로 어떤 여자가 좋을지 생각해봤는데, 한참을 생각한 끝에 ‘강한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모들이 부자 며느리를 바라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같은 말이니까. 하지만 나는 경제력보다 더 깊은 내적인 강인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자는 돈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런 두려움도 일종의 나약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마리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그애의 나이 때문이다. 그애의 젊음, 실수할 수 있는 권리와 미숙할 수 있는 권리 때문일 것이다. - P154

참, 이상한 일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든 논리와 권리를 금전적인 이유에서 찾는다. 아마도 내가 돈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하다. - P164

사실 진정한 친구 없이 지낸 지 이미 오래다. 과거 학교 동창들과 신혼 때 어울리던 내 또래 젊은 여자들은 모두 나와 다른 삶 을 산다. 다들 아침 늦게 일어나 미용실에 가거나, 양장점에 들렀다 오후에는 카드놀이를 한다. 나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서 대화 할 거리도 없다.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불편했다. 살아 온 삶도 사회적인 지위도 교육도 말하는 법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 친구를 사귈 수도 없다. 몇 년 동안 사무실과 집을 쳇바퀴 돌듯 오가는 것도 버거웠다. 아이들을 위해 투자한 시간 이야말로 나의 오랜 자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내 자산을 훔쳐 달아나려 한다. 사실상 내 소유인 것은 그동안 직장에 투자한 시간밖에 없다. 그러니 사무실에서만 가식 없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 대가로 평생 그 거짓말을 지켜야 하는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P169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술에 취한 듯 집을 엉망인 채로 놔두는 상상을 해본다. 더러운 냄비와 빨랫감을 내팽개치고, 침대도 정 리하지 않은 채 말이다. 때로는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잠이 든다. 그것은 폭력적이고 맹렬한 욕망이었다. 임신했을 때 미친 듯이 빵을 먹고 싶었을 때 느꼈던 그런 욕망이었다. 밤마다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가 미켈레가 돌아오기 전까지 정리를 끝마치지 못하는 꿈도 꾸었다.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 P172

가족끼리 도저히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래서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 P180

핸드백 안에 일기장을 넣고 집을 나서는 미렐라의 모습이 떠올 랐다. 토요일에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려고 사무실에 가는 미켈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르헨티나의 산을 찍은 사진을 방에 붙여놓은 리카르도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원수처럼 상대방에게서 자신을 방어하는 존재다. - P182

"전 이런 상황이 싫은 거예요, 엄마. 엄마는 저를 비롯한 모두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결국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 거라고요. 엄마는 여자가 집안 일이나 요리하는 일 외에 다른 성취감을 느끼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자의 의무는 가족을 돌보는 것뿐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지 않을래요. 그러기 싫어요." - P191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어떤 시점에 가서는 가족 간에 어디 까지가 친절함에서 나온 행동이고, 어디까지가 잔혹함에서 나온 행동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진다. - P213

"자식들은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떠난다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다행인 거죠. 혼자 남겠지만, 적어도 고독으로 인한 혜택은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하면서 외롭기는 마찬가지죠."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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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후카 가와의 요정 히라세이 앞을 지나던 세이키치의 시선 속으로 문득 요정 앞에 대기하고 있던 가마가 들어왔다. 주렴이 드리워진 그늘 사이로 여인의 새하얀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예리한 그의 시선에는 사람의 발이 얼굴과 똑같이 복잡한 표정을 가진 것으로 비춰졌는데, 그 여인의 발은 고귀한 살갗으로 이루어진 보석처럼 느껴졌다. 엄지에서 시작해서 새끼로 끝나는 가지런한 다섯 발가락의 섬세함, 에노시마 해변에서 캐낸 연한 선홍빛 조개에도 뒤지지 않을 발톱의 색감과 구슬과도 같은 발뒤꿈치의 완곡미, 그리고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맑은 샘물이 항시 발치를 씻어 내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윤기. 바로 이 발이 머지않아 사내의 생 피로 살을 찌우고, 그 사내의 몸을 짓밟을 발이리라. 그리고 이 발의 주인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여인 중 가장 이상적인 여인일 것이었다. - P10

"너를 정녕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문신에 내 혼을 모두 쏟아부었단다. 이제 이 나라에서 너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어. 지금까지 네 안에 있던 나약함은 이제 다 사라져 버렸다.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너의 비료가 될 게야······." - P17

분홍색 커튼이 쳐진 창 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울림······. 때로는 숲속 요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다가 어떤 때는 동화 속에서 난쟁이들이 빼곡히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섬세한 상상의 비단 색실로 어린 마음에 미묘한 꿈을 한 땀 한 땀 새겨 넣는 그 신비로운 울림은 마치 이 오래된 늪 밑바닥에서 퍼져 나오는 연주 소리 같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 P31

잠시 후 방 안의 적막을 깨고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옆방에서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싸라기눈이 은반 위를 내달리는 것처럼, 골짜기에 맑은 물이 졸졸 흘러 이끼 위에 방울져 떨어지는 것처럼,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듯 신비로운 음률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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