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솔직하지 못하면 누구에게 솔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진정 내 모습일 수 있는 순간은 오직··· - P132
며칠 전 한밤중에 일어나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내가 남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는 내가 일기를 쓴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잘못된 감정에 빠져 있다고 믿기가 더 쉬웠던 거다. 순간 나는 미렐라가 화가 나서 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렐라처럼 자유로웠다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었을 거라는 말 말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요즘 들어 가족과 관련된 모든 일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 P139
사무실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빈 책상들은 하나같이 깨끗이 정돈된 상태였고, 서류를 보관하는 책장 문도 잘 닫혀 있었다. 전화도, 전화 교환기의 메마른 버튼 소리도, 신경질적으로 탁탁 타자기를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무실 환경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으면 미렐라도, 시장도, 지저분한 접시도 나를 방해하지 못했다. - P143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마리나라는 아이를 알고 싶은 마음이 털 끝만큼도 없다. 마음에 안 들 것이 안 봐도 뻔했다. 내 아들의 짝 으로 어떤 여자가 좋을지 생각해봤는데, 한참을 생각한 끝에 ‘강한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모들이 부자 며느리를 바라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같은 말이니까. 하지만 나는 경제력보다 더 깊은 내적인 강인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자는 돈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런 두려움도 일종의 나약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마리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그애의 나이 때문이다. 그애의 젊음, 실수할 수 있는 권리와 미숙할 수 있는 권리 때문일 것이다. - P154
참, 이상한 일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든 논리와 권리를 금전적인 이유에서 찾는다. 아마도 내가 돈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하다. - P164
사실 진정한 친구 없이 지낸 지 이미 오래다. 과거 학교 동창들과 신혼 때 어울리던 내 또래 젊은 여자들은 모두 나와 다른 삶 을 산다. 다들 아침 늦게 일어나 미용실에 가거나, 양장점에 들렀다 오후에는 카드놀이를 한다. 나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서 대화 할 거리도 없다.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불편했다. 살아 온 삶도 사회적인 지위도 교육도 말하는 법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 친구를 사귈 수도 없다. 몇 년 동안 사무실과 집을 쳇바퀴 돌듯 오가는 것도 버거웠다. 아이들을 위해 투자한 시간 이야말로 나의 오랜 자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내 자산을 훔쳐 달아나려 한다. 사실상 내 소유인 것은 그동안 직장에 투자한 시간밖에 없다. 그러니 사무실에서만 가식 없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 대가로 평생 그 거짓말을 지켜야 하는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P169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술에 취한 듯 집을 엉망인 채로 놔두는 상상을 해본다. 더러운 냄비와 빨랫감을 내팽개치고, 침대도 정 리하지 않은 채 말이다. 때로는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잠이 든다. 그것은 폭력적이고 맹렬한 욕망이었다. 임신했을 때 미친 듯이 빵을 먹고 싶었을 때 느꼈던 그런 욕망이었다. 밤마다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가 미켈레가 돌아오기 전까지 정리를 끝마치지 못하는 꿈도 꾸었다.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 P172
가족끼리 도저히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래서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 P180
핸드백 안에 일기장을 넣고 집을 나서는 미렐라의 모습이 떠올 랐다. 토요일에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려고 사무실에 가는 미켈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르헨티나의 산을 찍은 사진을 방에 붙여놓은 리카르도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원수처럼 상대방에게서 자신을 방어하는 존재다. - P182
"전 이런 상황이 싫은 거예요, 엄마. 엄마는 저를 비롯한 모두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결국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 거라고요. 엄마는 여자가 집안 일이나 요리하는 일 외에 다른 성취감을 느끼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자의 의무는 가족을 돌보는 것뿐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지 않을래요. 그러기 싫어요." - P191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어떤 시점에 가서는 가족 간에 어디 까지가 친절함에서 나온 행동이고, 어디까지가 잔혹함에서 나온 행동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진다. - P213
"자식들은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떠난다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다행인 거죠. 혼자 남겠지만, 적어도 고독으로 인한 혜택은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하면서 외롭기는 마찬가지죠."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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