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는 제시 홀 남관 지하의 작은 강의실에서 열렸다. 습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냄새가 시멘트벽에서 스며 나오고, 아무것도 깔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서 사람들의 발이 공허한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다. 천장 한가운데에 하나밖에 없는 불빛이 아래를 비추고 있어서, 강의실 복판의 책상 겸용 의자에 앉은 학생들은 환한 빛 속에 풍덩 빠져 있었다. 하지만 벽들은 흐릿한 회색을 띠었고, 강의실 네 귀퉁이는 거의 새카맣게 어두웠다. 마치 색을 칠하지 않은 매끈한 시멘트 바닥과 벽이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 P184

그동안 스토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핀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이 무거운 가면처럼 변해 있었다. 러더퍼드는 눈을 감고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홀랜드는 워커의 정중하지만 경멸 어린 태도와 로맥스의 열광적인 활기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토너는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과 분노와 슬픔이 점점 강렬해졌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들 중 누구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18

스토너는 맞은편 창밖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 셋이 함께 있을 때 그 친구가 뭐라고 했냐면······ 대학이 소외된 자, 불구가 된 자들이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는 피난처라는 얘기를 했어. 하지만 그건 워커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지. 데이브라면 워커를······ 세상으로 보았을 걸세. 그러니까 그 친구를 허락할 수가 없어. 만약 우리가 허락한다면, 우리도 세상과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은 그 친구를 허락하지 않는 것뿐일세." - P233

이디스가 앙심을 품은 듯한 목소리를 이끌어내서 냉담하게 말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까지도 가난하게 살았으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지 못할 이유가 없죠. 일찌감치 생각해 보지 그랬어요? 그 일이 어디로 이어질지. 불구자처럼 무능력해지겠죠.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바뀌더니 그녀가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애정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한테는 그런 일들이 아주 중요하죠. 그러니 달라져봤자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 P242

결국 그는 제시 홀의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런저런 강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공부의 방향을 미리 정해놓을 필요도 없이 자유로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는 순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려고 했다. 그가 수년 전부터 읽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 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 P249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 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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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지나가는 학기 중에 묘하게 잠시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윌리엄 스토너는 차츰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어쩌면 자신이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 P156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 P158

그레이스가 제 책상에 앉아 책에 빠져 있었다.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이 아이의 머리카락에 부딪혀 반짝이고, 그 불빛에 작고 진지한 아이의 얼굴 윤곽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지난 1년 동안 아이가 많이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싫지 만은 않은 작은 슬픔에 윌리엄은 잠깐 목이 메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자신의 책상으로 갔다. - P167

이 일의 중대한 의미가 서서히 다가왔기 때문에 그는 여러 주가 지난 뒤에야 이디스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인정하는 순간이 왔을 때에는 놀라움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디스가 워낙 영리하고 노련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행동에 불평을 늘어놓을 합리적인 근거를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녀가 그날 밤 거의 난폭하게 보일 정도로 갑작스레 그의 서재에 들이닥친 일을 되돌아보니 마치 기습공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이디스는 그보다 간접적이고,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전략을 사용했다. 사랑과 염려라는 가면을 쓴 전략이었으므로, 그는 그 앞에서 무기력했다. - P170

한편 아이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이디스의 태도가 조금 느슨해졌기 때문에 아이도 이제 가끔 미소를 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편안한 태도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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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우리를 친구로 대해주는 건 우리가 건드리지 않을 때 뿐이야. 톱날이 파고 들어간 다음부터는 전쟁이 벌어지는 거라고. - P20

안의 절친한 친구이며 역시 나이가 많은 빌리는 보통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덤 앞에서는 한두 마디 말을 했다. "안 피플스는 평생 남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적도 없어요. 어렸을 때, 아이였을 때 하다못해 막대사탕 하나도 안 훔쳤습니다. 그러고는 상당히 오래 살았습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잘 지낼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다른 사람들도 "아멘"이라고 말했다. 대장이 말했다. - P25

이 첫 키스로 그는 구멍에 빠졌다가 다른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지금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힘을 쓰다가 몸을 돌려 하류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데이지 꽃들 사이에서 키스를 하며 그날 오후를 다 보냈다. 그는 찬란한 기분이었다. 원래 몸속에 있어야 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온몸을 채운 것 같았다. - P46

불길은 그렇게 계곡을 집어삼켰다. 메도크릭에는 인적이 없었다. 그는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그곳에 있는 통에서 물을 마신 뒤 그대로 다시 걸었다. 곧 검게 탄 숲을 지나가게 되었다. 겨우 며칠 전만 해도 푸르던 나무 들이 이제는 거대한 창처럼 변해 있었다. 세상은 회색, 하얀색, 검은색으로 변해서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불꽃도 없었지만, 불길의 기세와 열기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재가 너무 많고, 숨 막히는 연기도 너무 짙었다. - P49

나무가 탁탁 타는 소리와 불길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렇게 걷다 보니 검게 탄 모든 나무가 아직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굽잇길을 돌자 불길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고, 반 마일쯤 앞에서 불길이 보였다.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커튼이 밤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아직 거리가 있는 데도 열기 때문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릎으로 주저앉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헤치며 지나온 뜨거운 재 속에 그렇게 앉아 울었다. - P50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석양 무렵에 본 불탄 계곡의 모습을 평생 생생히 기억했다. 맨 정신으로 그렇게 꿈같은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마지막 남은 햇빛이 파스텔색으로 눈부신 광경을 그려내고, 하얀 구름 몇 점이 높이 떠서 계곡 너머의 햇빛을 받고 있었다. 다른 구름들은 갈비뼈 모양으로 회색이나 분홍색을 띠었다. 가장 낮게 걸린 구름은 부사드산과 퀸산의 꼭대기에 닿아 있었으며, 이 장관 아래에 검은 계곡이 있었다. 완전히 적막한 모습으로. 기차가 그 계곡을 지나가며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죽어버린 이 세계를 깨울 수 없었다. - P51

그레이니어는 말 두 마리와 수레 한 대를 빌려서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강가의 길을 따라 출발했다. 자기 땅에 임시로 지낼 만한 곳을 지은 뒤, 겨울 내내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누가 들으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시도 덕분에 그는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페허가 된 지 역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심장에 고인 슬픔이 검게 변해서 정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곳에 실제로 뭉쳐 있던 덩어리에서 정신 나간 희망이 만들어낸 모든 생각이 불에 타 사라지는 것 같았다. - P54

봄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몇 명이 가족과 함께 돌아와 모이 계곡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했다. 그레이니어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5월에 강가에서 야영하면서 낚시질로 무지개송어를 잡고, 캐나다인들이 모렐이라고 부르는 아주 향기롭고 희귀한 버섯을 찾아다녔다. 불길이 휩쓸고 간 땅에서 솟아나는 버섯이었다. 여러 날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던 그레이니어는 옛 집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까지 온 것을 깨닫고 자신과 글래디스가 물가를 오갈 때 항상 이용하던 골짜기를 올라갔다. 모두가 죽어버린 땅에 벌써 새싹과 꽃이 지천으로 올라와 있는 광경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 P53

성경책도 보이지 않았다. 주님이 자신의 말씀이 기록된 책조차 지키지 못했다면, 그레이니어가 보기에 그것은 이 곳을 찾아온 불길이 하느님보다 더 강했다는 증거였다. - P54

그녀와 아기의 물건이었던 어떤 것이 이 근처에 묻혀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엄습했다. 어떤 물건이지? 어쩌면 글래디스가 사 온 초콜릿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상자 속에서 컵처럼 오목한 하얀 종이에 싸여 있는 초콜릿이었다. 정신 나간 생각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글래디스와 아이는 매주 한 번씩 초콜릿 한 개를 빨아 먹었다. 그 하얀 종이컵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습이 갑자기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종이컵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면, 컵이 사라져 버렸다. - P55

파괴되어 얼마 남지 않은 숲에 동물들이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레이니어가 모래 빛깔의 펑퍼짐한 암말이 느릿느릿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데, 오렌지색 나비 무리가 곰을 조심하라고 알리는 어두운 보라색 표지판 더미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마법처럼 팔랑거렸다. 마치 나무가 없는 이파리들 같았다. 진흙길에는 사람보다 곰의 흔적이 더 많았다. 길 한가운데에 곰들이 똑바로 오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늦여름이 되면 녀석들이 먹이를 찾아 아래쪽 월귤 나무 밭으로 내려올 것이다. 검게 탄 능선에 벌써 월귤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 P59

"넌 왜 본성을 따르지 않는 거냐. 다른 늑대들이 울면 너도 따라 울어야지." 그는 잡종 강아지에게 말했다. 그러고 똑바로 일어서서 협곡을 향해 길고 슬프게 울었다. 날이 거의 어두워진 때라 조용하게 흐르는 낮은 강 저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레이니어는 황혼 녘에 늑대 소리가 들리면 자주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힘껏 늑대처럼 울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쌓이곤 하는 묵직한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늑대 합창단과 저녁에 이렇게 한바탕 공연을 하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났다. - P63

그는 쿠트나이 밥에게 이런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 "늑대처럼 운다고, 자네가?" 밥이 말했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런 일이 있다고 했어. 사람들 말로는. 살아 있는 늑대가 언제나 사람을 길들일 수 있다고 말이야." - P54

수면 위로 튀어나온 80피트 길이의 가문비나무가 속까지 완전히 타서 협곡으로 떨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초록색 바늘 이파리 뒤로 연기가 꼬리처럼 늘어진 것이, 불꽃으로 그려낸 뱀 같았다. 불타는 이파리들이 강물에 떨어지면서 쉭쉭 소리를 냈다. […] 집 지붕에서 자라던 이끼가 둥글게 꼬부라지면서 희미하게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오두막 벽의 통나무들은 압력을 받아 대구경 탄약통처럼 폭발했다. 화덕 옆 탁자 위에서는 불길에 휩싸인 잡지가 검게 그을려 구부러지며 한 페이지씩 공중으로 날아가 허공을 떠돌았다. 유리창도 산산조각 나고, 커튼 가장자리가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토마토, 콩, 캐나다 버찌를 넣어둔 단지들은 부엌 개수대 위의 선반에서 녹아내렸다. 갑자기 오두막 안의 모든 램프에 불이 켜졌다. 탁자 위에서는 뚜껑이 녹은 소금 단지가 폭발했고, 곧 집 전체에 성냥처럼 확 불이 번졌다. - P89

그 뒤로 그레이니어는 겨울에도 오두막에서 살았다. 대개 1월에 눈이 높이 쌓이면, 계곡은 영원한 침묵 속에 정지해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기차 소리와 멀리서 늑대 들이 합창하듯 울어대는 소리, 가까이에서 코요테가 미친 듯이 날뛰는 소리로 가득할 때가 많았다. 그레이니어 본인도 늑대처럼 울부짖는 것을 일종의 스포츠처럼 즐겼다. - P91

비행기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가파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의 장기들이 척추에 달라붙었다. 여름밤에 오두막에서 아내와 딸이 후드의 사르사를 마시던 순간이 보였다. 그다음에는 기억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오두막이 나타나고, 그의 숨겨진 유년 시절에 갔던 장소들, 광대한 황금빛 밀 밭, 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열기, 그를 감싼 두 팔,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번 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었다. - P95

"하느님에게는 연단에 서서 설교를 하는 사람과 숲에 사는 은자가 모두 똑같이 필요해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내가 은자 같지는 않은데." 그레이니어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그날 하루가 끝나갈 무렵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가 은자인가? 이런 것이 은자인가? - P108

그는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하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숲 속 오두막에서 혼잣말을 하다가 자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참이었다. 심지어 개도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밤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화덕의 틈새에서 밝게 너울거리는 불꽃을, 커튼처럼 점점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칠흑같은 어둠을 빤히 바라보았다. - P109

늑대와 코요테가 밤새 쉬지 않고 울어댔다. 수백 마리는 되는 것 같았으니, 그레이니어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많은 짐승들이 내는 소리였다. 어쩌면 올빼미, 독수리 같은 다른 짐승도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어떤 동물 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산꼭대기와 능선에서 모이강을 내려다보는 동물 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녀석들이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울어대는 것 같았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짐승들을 그 무엇도 달랠 수 없다는 듯이. 그레이니어는 감히 잠을 자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징조 같아서였다. 어쩌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경보일 수도 있었다. - P112

저쪽 2번가에서 감리교 신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보너스 읍내에서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는 아직 드물게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예배가 있는 시간에 읍내에 나왔을 때. 교회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가 글래디스와 함께 거의 매주 예배에 나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체로 교회에 간 것을 후회하는 편이었다. 교회에서 그는 자주 울었다. 모이산 속에서 살 때는 자잘하게 할 일이 워낙 많아서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슬프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찬송가가 시작되면 기억이 났다. - P120

그레이니어는 이 광고를 여러 번 읽었다. 목구멍이 조여들고, 뱃속이 펄떡거리면서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비록 아주 조금이기는 해도, 자신이 대로를 걷는 동안 내내 틀림없이 노 젓는 배처럼 흔들거린 것 같았다. 자신이 미쳐 버린 건지, 정신병을 고친다는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 건지 고민스러웠다.
미인이라니! - P124

일몰 때 그는 딱 멈춰 섰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절벽이었다. 스푸르스 호수라고 불리는 물가로 내려가는 뒷길을 발견한 그는 수백 피트 아래에 있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평평한 수면이 잔잔하고, 흑요석처럼 검었다. 주위를 에워싼 절벽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잡아먹고, 상록수와 상록수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이중으로 둘러쌌다. 그 너머로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캐나다 로키산맥이 보였다. 꼭대기에 눈을 얹고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산은 구름에서 영양분을 취했다. 마치 땅이 창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웅장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그의 삶을 채운 숲은 너무나 울창하고 높아서 세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볼 수 없게 그의 시야를 대체로 가려버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산을 하나씩 가질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산이 많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저주가 사라지고, 욕망이라는 전염병도 스르르 날아가 저기 먼 계곡에 내려앉았다. - P127

발밑에서 바람이 우르룽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한데 모여 포효처럼 변하더니 사람들의 청각 그 자체를 쪽쪽 빨아들여 목소리로 변했다. 그 목소리가 콧구멍으로 들어와 마침내 사람들의 뇌 속으로 침투해서 계속 높이 올라가며 점점 더 끔찍하고 아름답게 변했다. 배의 경적 소리, 기관차의 외로운 기적 소리, 오페라 가수의 노랫소리, 플루트 소리, 계속 신음하는 것 같은 백파이프 소리 등 비슷한 모든 소리의 출발점인 이상적인 소리였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암흑이 되고, 시간이 영원히 사라졌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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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그레이니어는 사방에 그 중국인이 있는 것 같았다. 길에 서 있는 중국인. 숲속의 중국인. 양손을 밧줄처럼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걷고 있는 중국인. 개울에서 거미처럼 사사삭 기어 나오는 중국인. - P11

기차가 도착하는 지점에는 대장이 당나귀라고 부르는 거대한 엔진이 웅크리고 있었다. 거대한 무쇠 드럼통 두 개를 붙여놓은 모양의 이 엔진에서 한쪽 드럼통은 케이블을 풀어내고 다른 한쪽은 케이블을 감아들이면서 통나무를 끌어가는 한편, 동시에 고리를 반대편으로 보내주면 그 쪽의 초커가 다음 통나무를 고리에 끼웠다. 이 엔진은 나무를 태우는 구식 증기엔진으로, 쿵쿵, 웅웅,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폭포처럼 쏟아냈다. 길을 오가는 말들은 마치 침묵 속에서 거대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증기 소리와 기계 소리에 그들이 내는 소리가 모두 지워진 탓이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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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없다, 다만 시간의 몰려옴이 있을 뿐. 설명할 수 없고, 공허하며, 무형의 시간, 그녀는 그것을 향해 움직이도록 기대될 뿐이다. 앞쪽으로. 앞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현재를 지나쳐버린다. 망각의 은총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있는 그 현재.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었을까. 현재의 가시성이 없이. - P152

그녀는 그 전날과 같은 장소에 앉아 있다. 첫날과 같이. 그녀를 보려고 몸을 왼쪽으로 돌린다, 그녀는 혼자다, 몸은 부동. 그녀의 손은 그녀의 소지품들과 함께 무릎 위에 마주 잡고 있다. 그녀는 인공으로 모조된 밤의 고요한 매달림 속에서 떠돌고 있다 움직이지 않기도 하고 바람이 일면 동등하게 흔들리는 불꽃처럼. 그늘과 어둠 속에서 지나간 것들 속에 머물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눈은 먼 곳을 향해 뜨고 있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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