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우리를 친구로 대해주는 건 우리가 건드리지 않을 때 뿐이야. 톱날이 파고 들어간 다음부터는 전쟁이 벌어지는 거라고. - P20

안의 절친한 친구이며 역시 나이가 많은 빌리는 보통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덤 앞에서는 한두 마디 말을 했다. "안 피플스는 평생 남을 속인 적이 없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적도 없어요. 어렸을 때, 아이였을 때 하다못해 막대사탕 하나도 안 훔쳤습니다. 그러고는 상당히 오래 살았습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잘 지낼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다른 사람들도 "아멘"이라고 말했다. 대장이 말했다. - P25

이 첫 키스로 그는 구멍에 빠졌다가 다른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지금까지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힘을 쓰다가 몸을 돌려 하류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데이지 꽃들 사이에서 키스를 하며 그날 오후를 다 보냈다. 그는 찬란한 기분이었다. 원래 몸속에 있어야 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온몸을 채운 것 같았다. - P46

불길은 그렇게 계곡을 집어삼켰다. 메도크릭에는 인적이 없었다. 그는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그곳에 있는 통에서 물을 마신 뒤 그대로 다시 걸었다. 곧 검게 탄 숲을 지나가게 되었다. 겨우 며칠 전만 해도 푸르던 나무 들이 이제는 거대한 창처럼 변해 있었다. 세상은 회색, 하얀색, 검은색으로 변해서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불꽃도 없었지만, 불길의 기세와 열기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재가 너무 많고, 숨 막히는 연기도 너무 짙었다. - P49

나무가 탁탁 타는 소리와 불길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렇게 걷다 보니 검게 탄 모든 나무가 아직도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굽잇길을 돌자 불길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리고, 반 마일쯤 앞에서 불길이 보였다.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커튼이 밤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아직 거리가 있는 데도 열기 때문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릎으로 주저앉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헤치며 지나온 뜨거운 재 속에 그렇게 앉아 울었다. - P50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석양 무렵에 본 불탄 계곡의 모습을 평생 생생히 기억했다. 맨 정신으로 그렇게 꿈같은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마지막 남은 햇빛이 파스텔색으로 눈부신 광경을 그려내고, 하얀 구름 몇 점이 높이 떠서 계곡 너머의 햇빛을 받고 있었다. 다른 구름들은 갈비뼈 모양으로 회색이나 분홍색을 띠었다. 가장 낮게 걸린 구름은 부사드산과 퀸산의 꼭대기에 닿아 있었으며, 이 장관 아래에 검은 계곡이 있었다. 완전히 적막한 모습으로. 기차가 그 계곡을 지나가며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냈지만, 죽어버린 이 세계를 깨울 수 없었다. - P51

그레이니어는 말 두 마리와 수레 한 대를 빌려서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강가의 길을 따라 출발했다. 자기 땅에 임시로 지낼 만한 곳을 지은 뒤, 겨울 내내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누가 들으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시도 덕분에 그는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페허가 된 지 역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심장에 고인 슬픔이 검게 변해서 정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그곳에 실제로 뭉쳐 있던 덩어리에서 정신 나간 희망이 만들어낸 모든 생각이 불에 타 사라지는 것 같았다. - P54

봄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 몇 명이 가족과 함께 돌아와 모이 계곡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했다. 그레이니어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다가, 5월에 강가에서 야영하면서 낚시질로 무지개송어를 잡고, 캐나다인들이 모렐이라고 부르는 아주 향기롭고 희귀한 버섯을 찾아다녔다. 불길이 휩쓸고 간 땅에서 솟아나는 버섯이었다. 여러 날 동안 북쪽으로 나아가던 그레이니어는 옛 집에서 소리를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까지 온 것을 깨닫고 자신과 글래디스가 물가를 오갈 때 항상 이용하던 골짜기를 올라갔다. 모두가 죽어버린 땅에 벌써 새싹과 꽃이 지천으로 올라와 있는 광경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 P53

성경책도 보이지 않았다. 주님이 자신의 말씀이 기록된 책조차 지키지 못했다면, 그레이니어가 보기에 그것은 이 곳을 찾아온 불길이 하느님보다 더 강했다는 증거였다. - P54

그녀와 아기의 물건이었던 어떤 것이 이 근처에 묻혀서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엄습했다. 어떤 물건이지? 어쩌면 글래디스가 사 온 초콜릿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상자 속에서 컵처럼 오목한 하얀 종이에 싸여 있는 초콜릿이었다. 정신 나간 생각이었지만, 그는 굳이 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글래디스와 아이는 매주 한 번씩 초콜릿 한 개를 빨아 먹었다. 그 하얀 종이컵이 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습이 갑자기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종이컵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면, 컵이 사라져 버렸다. - P55

파괴되어 얼마 남지 않은 숲에 동물들이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레이니어가 모래 빛깔의 펑퍼짐한 암말이 느릿느릿 끄는 수레를 타고 가는데, 오렌지색 나비 무리가 곰을 조심하라고 알리는 어두운 보라색 표지판 더미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마법처럼 팔랑거렸다. 마치 나무가 없는 이파리들 같았다. 진흙길에는 사람보다 곰의 흔적이 더 많았다. 길 한가운데에 곰들이 똑바로 오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늦여름이 되면 녀석들이 먹이를 찾아 아래쪽 월귤 나무 밭으로 내려올 것이다. 검게 탄 능선에 벌써 월귤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 P59

"넌 왜 본성을 따르지 않는 거냐. 다른 늑대들이 울면 너도 따라 울어야지." 그는 잡종 강아지에게 말했다. 그러고 똑바로 일어서서 협곡을 향해 길고 슬프게 울었다. 날이 거의 어두워진 때라 조용하게 흐르는 낮은 강 저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그 뒤로 그레이니어는 황혼 녘에 늑대 소리가 들리면 자주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힘껏 늑대처럼 울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쌓이곤 하는 묵직한 것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늑대 합창단과 저녁에 이렇게 한바탕 공연을 하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났다. - P63

그는 쿠트나이 밥에게 이런 변화를 설명하려고 했다. "늑대처럼 운다고, 자네가?" 밥이 말했다. "그렇게 된 거로군. 그런 일이 있다고 했어. 사람들 말로는. 살아 있는 늑대가 언제나 사람을 길들일 수 있다고 말이야." - P54

수면 위로 튀어나온 80피트 길이의 가문비나무가 속까지 완전히 타서 협곡으로 떨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초록색 바늘 이파리 뒤로 연기가 꼬리처럼 늘어진 것이, 불꽃으로 그려낸 뱀 같았다. 불타는 이파리들이 강물에 떨어지면서 쉭쉭 소리를 냈다. […] 집 지붕에서 자라던 이끼가 둥글게 꼬부라지면서 희미하게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오두막 벽의 통나무들은 압력을 받아 대구경 탄약통처럼 폭발했다. 화덕 옆 탁자 위에서는 불길에 휩싸인 잡지가 검게 그을려 구부러지며 한 페이지씩 공중으로 날아가 허공을 떠돌았다. 유리창도 산산조각 나고, 커튼 가장자리가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토마토, 콩, 캐나다 버찌를 넣어둔 단지들은 부엌 개수대 위의 선반에서 녹아내렸다. 갑자기 오두막 안의 모든 램프에 불이 켜졌다. 탁자 위에서는 뚜껑이 녹은 소금 단지가 폭발했고, 곧 집 전체에 성냥처럼 확 불이 번졌다. - P89

그 뒤로 그레이니어는 겨울에도 오두막에서 살았다. 대개 1월에 눈이 높이 쌓이면, 계곡은 영원한 침묵 속에 정지해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기차 소리와 멀리서 늑대 들이 합창하듯 울어대는 소리, 가까이에서 코요테가 미친 듯이 날뛰는 소리로 가득할 때가 많았다. 그레이니어 본인도 늑대처럼 울부짖는 것을 일종의 스포츠처럼 즐겼다. - P91

비행기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가파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엔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의 장기들이 척추에 달라붙었다. 여름밤에 오두막에서 아내와 딸이 후드의 사르사를 마시던 순간이 보였다. 그다음에는 기억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다른 오두막이 나타나고, 그의 숨겨진 유년 시절에 갔던 장소들, 광대한 황금빛 밀 밭, 길 위에서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리는 열기, 그를 감싼 두 팔, 다정한 여자의 목소리가 차례로 나타났다. 이번 생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었다. - P95

"하느님에게는 연단에 서서 설교를 하는 사람과 숲에 사는 은자가 모두 똑같이 필요해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내가 은자 같지는 않은데." 그레이니어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그날 하루가 끝나갈 무렵 속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가 은자인가? 이런 것이 은자인가? - P108

그는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하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숲 속 오두막에서 혼잣말을 하다가 자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참이었다. 심지어 개도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밤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화덕의 틈새에서 밝게 너울거리는 불꽃을, 커튼처럼 점점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칠흑같은 어둠을 빤히 바라보았다. - P109

늑대와 코요테가 밤새 쉬지 않고 울어댔다. 수백 마리는 되는 것 같았으니, 그레이니어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많은 짐승들이 내는 소리였다. 어쩌면 올빼미, 독수리 같은 다른 짐승도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어떤 동물 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산꼭대기와 능선에서 모이강을 내려다보는 동물 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녀석들이 한 마리도 빠지지 않고 울어대는 것 같았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짐승들을 그 무엇도 달랠 수 없다는 듯이. 그레이니어는 감히 잠을 자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엄청난 징조 같아서였다. 어쩌면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경보일 수도 있었다. - P112

저쪽 2번가에서 감리교 신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보너스 읍내에서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니어는 아직 드물게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예배가 있는 시간에 읍내에 나왔을 때. 교회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가 글래디스와 함께 거의 매주 예배에 나오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체로 교회에 간 것을 후회하는 편이었다. 교회에서 그는 자주 울었다. 모이산 속에서 살 때는 자잘하게 할 일이 워낙 많아서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슬프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찬송가가 시작되면 기억이 났다. - P120

그레이니어는 이 광고를 여러 번 읽었다. 목구멍이 조여들고, 뱃속이 펄떡거리면서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비록 아주 조금이기는 해도, 자신이 대로를 걷는 동안 내내 틀림없이 노 젓는 배처럼 흔들거린 것 같았다. 자신이 미쳐 버린 건지, 정신병을 고친다는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 건지 고민스러웠다.
미인이라니! - P124

일몰 때 그는 딱 멈춰 섰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절벽이었다. 스푸르스 호수라고 불리는 물가로 내려가는 뒷길을 발견한 그는 수백 피트 아래에 있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평평한 수면이 잔잔하고, 흑요석처럼 검었다. 주위를 에워싼 절벽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잡아먹고, 상록수와 상록수의 그림자가 그 호수를 이중으로 둘러쌌다. 그 너머로 아직 햇빛을 받고 있는 캐나다 로키산맥이 보였다. 꼭대기에 눈을 얹고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산은 구름에서 영양분을 취했다. 마치 땅이 창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웅장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그의 삶을 채운 숲은 너무나 울창하고 높아서 세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볼 수 없게 그의 시야를 대체로 가려버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산을 하나씩 가질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산이 많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저주가 사라지고, 욕망이라는 전염병도 스르르 날아가 저기 먼 계곡에 내려앉았다. - P127

발밑에서 바람이 우르룽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가 한데 모여 포효처럼 변하더니 사람들의 청각 그 자체를 쪽쪽 빨아들여 목소리로 변했다. 그 목소리가 콧구멍으로 들어와 마침내 사람들의 뇌 속으로 침투해서 계속 높이 올라가며 점점 더 끔찍하고 아름답게 변했다. 배의 경적 소리, 기관차의 외로운 기적 소리, 오페라 가수의 노랫소리, 플루트 소리, 계속 신음하는 것 같은 백파이프 소리 등 비슷한 모든 소리의 출발점인 이상적인 소리였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암흑이 되고, 시간이 영원히 사라졌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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