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졌다. 복지원 안의 아스팔트길들은 질척한 눈으로 덮여 있다. 하늘은 유황으로 가득하고, 얼음처럼 찬바람은 가로수길의 백양나무에 게으르게 매달린 마지막 잎사귀들을 채간다. 가로수 길은 정해진 도로 규율의 본질로서 전혀 구부러짐 없이 복지원 구내를 가로질러 간다. 소녀에게 이것은 황금시대의 시작이다. - P86

소녀는 동급생들에 대한 말 없는 헌신을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동급생들이 서로 싸울 때 자신의 의견은 아랑곳없이 자기를 그들의 목적에 이용할 줄 아는 아이들을 믿고 편든다. 그리고 양쪽 편 다 소녀를 이용할 줄 아는 경우에는 동시에 두 편을 다 든다. 단순히 남들이 자기한테 털어놓은 일만 간직하면 되고, 또는 외울 것만 말하면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학급 안의 투쟁에서 소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언제나 명예로운 위치는 아니다. 본래 한 인간의 위치라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제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굽기 전의 생선처럼 속을 완전히 비워야만 다른 사람의 못된 행동, 또는 행운이나 불행을 완전히 신용있게 간직할 충분한 공간이 남는 것이다. - P90

이제 소녀가 대체로 말이 없어진 이후. 그리고 소녀의 정신적인 중립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후에는 생리적인 중립도 분명하게 나타났고, 흔들리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한 덩어리 살이 한 공간 안에서 야기하는 도발, 그런 도발은 지양된 것처럼 보인다. 이 육체는 아무런 도발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몸은 속으로부터 전혀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게 잡아보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몸을 향한, 구역질 섞인 모든 욕망은 늪 같은 그 몸 안에서 가라앉는다. 그런 욕망은 그냥 삼켜지고, 가라앉고, 질식한다. - P94

소녀는 과거에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과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기억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가 마치 꽁꽁 묶인 사람, 불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 꽁꽁 묶여 이제는 아동 복지원에 한 개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느낀다. - P97

소녀는 자주 약속을 지키러 왔다. 그리고는, 예정되어 있듯이, 텔레비전 방에 놓여 있는, 천이 다 닳아버린 긴 의자에서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와보면 거기엔 아무도 없고 소녀 혼자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소녀만 모르는 사이에 약속이 취소된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소녀는 이런 약속들이 가벼운 물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약속은 실행되기도 하고, 실행되지 않기도 하며, 내일이나 모레 실행되기도 하는데, 약속 취소는 가벼운 깃털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이다. 오직 소녀의 동경이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미리 가진 기쁨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소녀만이 가벼운, 어린아이다운 무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귀가 먹은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소녀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건들이 유실되지 않는다는 것, 어린 시절은 넓은 시간의 바다 위에서 떠돌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이해했다. - P99

토요일 오후 방 친구들이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소녀가 자기들한테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방을 떠날 때도 그것은 소녀를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서 가장 진실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소녀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소녀가 장롱이나 침대처럼 아주 당연하게 가구 목록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아침에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하루를 시작할 때 그것은 서로 혼동할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이 아침에 만나는 얼굴들은 오래오래 똑같은 얼굴일 것이기 때문에 법석을 떨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얼굴들 가운데 소녀의 얼굴도 있다. - P100

잠을 깨우는 시간이면 밖은 아직도 어둡다. 당직 사감이 문을 두드린다. […] 그들의 눈은 아직 감겨 있다. 그들의 꿈속으로 규칙이 밀고 들어온다. 꿈을 꾸고 난 뒤에 드는 첫 생각은 피할 수 없이 학교에서 볼 시험에 대한 생각이다. 매일 시험이 있다. 겨울에는 무슨 시험이든지 안 보는 날이 없다. 침대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내딛자마자 시험의 아가리로 들어가게 된다. 이 요정들은 마음속에 거부감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몸을 일으켜 맨발을 학교 실내화에 꿰고 방을 빠져나간다. 아이들은 복도를 지나 세면실로 가서 하얀 이빨을 닦는다. 소녀는 이 아이들의 너무나 당연한 반감이 부럽다. 그 분명한 전선, 너무나 완전한 그들의 나쁜 기분,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반항에 대한 이 아이들의 권리가. - P112

방과 후, 정확하게 위치가 정해진 숨을 내쉰 이후 소녀는 대개 잠이 든다. 왜냐하면 방과 후 시간의 얼굴, 그 자유시간의 얼굴에 대해서는 한번도 완전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그 얼굴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기가 행복해야 할지, 힘들어 해야 할지, 아니면 무관심해야 할지, 또는 몹시 구역질을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시간은 수많은 얼굴들을 가졌고, 일체의 계획을 벗어나 있었다. 날씨라든가, 숙제, 또는 예정된 오락에 의존하고 있던 그 시간은 대부분 커다란 비밀로 남아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 소녀는 창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창 앞에는 나무들이 점점 초록색을 띠어가고 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 - P132

무릇 인식이란 점점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고, 또 모든 이해는 눈사태처럼 진행되듯이, 처음에는 도대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다가 어느 시점부터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게 시작되고, 마침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다고 받아들일 용기가 일단 생기면 어느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힘이 되듯이, 소녀가 정말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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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전쟁 동안 쉽지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삶을 사랑했어. 아마 전쟁을 겪으면서 전보다 더 삶을 사랑하게 되었을 거야. 죽은 사람을 많이 본 어머니는 그만큼 더 삶에 밀착하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 관해서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아버지는 비록 살아나기는 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죽은 사람들 쪽에 속하게 된 거라고. 죽음에 엄습당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살갗을 갖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의 살갗은 살아있는 것을 두르고 있지만, 아버지의 경우 살갗은 살아있는 것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어.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아버지가 늘 움찔하며 손을 치웠던 것이 기억나.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후퇴만 거듭하고 있었어. 그게 아버지의 지병이었던 것 같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손을 치웠어." - P127

아버지와 나는 복도의 십자가상 아래 앉아 있다. 우리 주위에는 옷장에서 꺼낸 온갖 물건이 늘어져 있다. 우리는 옷가지와 상자, 서류철, 책, 꽃병, 낡은 그릇들 사이에 앉아 있다.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다. 할머니가 사진을 묶었던 고무 밴드는 이제 바싹 말라버려 사진들을 빼내려고 하면 툭 끊어진다. 종이상자들은 무게 때문에 찌그러졌다. 조그만 상자들은 열쇠가 없고 외투에는 좀이 슬었고 트렁크에서는 냄새가 난다.
[…]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 P128

나는 내 할머니였던 할머 니가 처음에는 남자가, 그 다음에는 동물로, 그 다음에는 기존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본다. 나는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했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모든 것이 너무 많았고, 모든 것이 너무 적었다." 내가 알지 못 하는 어떤 존재의 목소리가 말한다. "나는 금양모피를 찾으러 가는 중이야." - P141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말도 안 돼요." 내가 말한다.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너에게서 모든 게 성장하는 걸 보면 정말 멋져." 그가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허튼소리 말아요." 내가 말한다. "난 알아." 그가 말한다. "그건 정상적인 거야. 그리고 나는 삶 안으로 사라질 거야." "삶 안으로 사라진다고요?" 내가 묻는다. "그래." 그가 말한다. "나는 나가버릴 거야. 삶 안으로 말이야. 그리고 사라질 거야." "아름답군요." 내가 말한다. "그렇지 않아. 이건 아주 끔찍한 거야. 하지만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해." 그가 말한다."너는 너무 어려." - P141

내가 엄마와 점점 닮아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엄마처럼 말한다고 한다. 마치 엄마가 내 몸을 입은 것처럼. 내 살갗을 걸치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나는 엄마처럼 기침하고 엄마처럼 웃는다. 그리고 누군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면 나는 꼭 엄마처럼 무지막지한 말들을 쏟아낸다. 나는 나이를 먹었고, 엄마는 다시 사지를 쭉 뻗고 있을 만한 널찍한 살갗 속에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이지 나도 모른다. - P144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나는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지는 나에게 솨 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눈처럼 하얀 그 소리, 과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 소리가. 솨 하는 그 소리에 내 두 귀가 아주 밝아진다. 그리고 문득 나는 깨닫는다. 고요가 들어서는 그 한순간을 채우기에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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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그 무엇은 발설되건 발설되지 않건 돌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그 무엇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성가신 돌처럼 밀쳐버린다. - P65

참된 사랑을 품은 사람은 상대방이 고통을 겪을 동안에는 자신의 중요한 문제를 가볍게 접어버리며, 사랑은 순수하게 동지적인 지원을 배제하지 않고, 또 열정이란 위급한 상황에서는 현명하고 의미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감퇴시키기보다 오히려 고양시킨다는 것을. 희망에 탐닉하는 것은 현실적인 어떤 것에 탐닉하는 것과 단 한 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희망에 대한 탐닉은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희망의 실현에서 지원을 얻지 못하면 희망을 품은 자를 지극히 가파른 경사면으로 몰고 가며, 그렇기에 언젠가 그가 균형을 잃으면 떨어져 부서지게 만들거나 무엇이든 충격적인 일을 당하게 한다. - P66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면, 언제든 다시 잃게 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면, 남는 것은 여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적은 것을 가졌고 이 너무 적은 것이 언제든 다시 잃을 수 있는 것보다도 많다면 그런 것을 뭐라 형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67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의 움직이는 발끝과 침묵을 의식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 모임에서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기에, 이를테면 침묵의 공존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의 침묵은 그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향한 것임을 내가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에 의지에 반하여 침묵은 우리 두 사람을 묶어준다. 마치 대립된 두 파가 싸움을 벌이려고 들어선 말 없는 땅 한 조각이 그 두 파를 이어주고 후일 전쟁터라 불리면서 나머지 땅들과는 영원히 구분되는 것처럼. - P71

나는 사진 속의 바다에 갔을 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한다. 해변을 걷는 동안 아버지는 바다를 가리키고 흥분한 듯 두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여기는 수백만 년 전에 땅이 갈라진 곳이야. 그 때 단괴들이 생겨났고, 이 단괴들이 서로 분리 되어 유동했어." 아버지는 소리치듯 말했다. "이른바 바다라는 것은 그 단괴들 사이에 넓게 자리 잡은 물에 불과해."
그 때 처음으로 나는 이른바 바다 앞에 서 보았고 그 광대한 넓이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물고기들이 그 막대한 물의 무게를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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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들어 할머니는 가끔 분을 너무 두텁게 바른다. 또 어떤 때는 바지 지퍼 올리는 것을 잊는다. 블라우스에 얼룩이 묻어 있거나 손톱 끝이 지저분할 때도 있다. 얼굴의 솜털을 뽑는 것도 잊어버린다. 이제 할머니는 여자 같지 않다. 늙은 여자 같지도 않다. 할머니는 그저 늙은 어떤 것, 사람이 아닌 늙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보인다. 나는 늙어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변신이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 P51

이제 할머니는 그동안 쓸 만큼 쓴 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걸 먹어야 하니?" 할머니가 묻는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물론 드셔야죠." 내가 할머니 접시에 고기를 담으려 하자 할머니는 손사레를 치며 말한다. "관둬라." 할머니는 샐러드 잎만 하나씩 찍어 이 사이로 쑤셔넣는다. 그러고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되작거리다 아이스크림을 휘젓고는 녹은 아이스크림을 후루룩 마신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늘 똑같잖아. 위로 넣고 아래로 내보내고. 꼭 먹어야 하니?" "그럼요." 가끔 할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접시를 밀어서 대신 먹으라고 한다. 처음에 나는 할머니에게 너무 양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알게 된다. 할머니는 자신이 먹는 것이 여전히 사람의 음식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 P51

이제 나는 밤에 할머니 옆에서 자는 것에 익숙하다. 할머니는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밤중에 화장실을 찾지 못한다. 할머니는 평생을 지내온 집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가끔 할머니는 잠결에 말을 하거나 뭔가를 외친다. 그러면서 응답을 기다리는 것 같다. "가치 없는 것—!, 가치 없는 것—!" 그 구절의 뒷조각은 할머니의 꿈속에 머물러 있다. 내 안의 무엇인가 그 나머지 구절을 말하는 것에 저항한다.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내 꿈을 꾼다. 내 꿈속에서 나는 안다. 할머니는 그 시를 끝맺지 못할 동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내가 응답 없이 묵묵히 있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할머니가 말한다. "하나의 단어가 빽빽한 단어들의 수풀을 헤치고 길을 찾아가는 걸 보면 참 재미있어." - P53

하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는 이 여행이 일종의 귀양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생전 처음 엄마들로부터 떨어져 우리끼리 휴가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귀양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치 섬에 귀양 간 사람의 생활이 그 섬에 국한되어버리듯, 우리가 서로에게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는 나에게로 국한되고 나는 그에게로 국한되었다는 의미에서이다. - P61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뱀처럼 출렁이고 기다란 팔은 활기 있게 움직이지만, 야영장에 도착한 다음부터 그의 눈빛은 돌처럼 굳어버리고 그의 시선은 나를 막고 서는 방패 같다. 마치 실향의 고통에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만 맞설 수 있는 사람처럼. 그에 반해 나는 난파를 당해 어느 섬에 휩쓸려간 사람 같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 섬의 샘물은 말라버리고, 후일 사람들은 얼굴에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말라붙은 내 시체를 발견한다. 나는 내 여행 동료를 본다. 그는 약속을 지켜 국경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가 거기 있는 것은 그저 우리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임을 안다. 빌린 돈을 갚는 마음으로 혹은 붕괴 직전의 집을 헐어 버리는 마음으로. 국경 역에서 마침내 그를 따라잡고 나서야 나는 분명히 깨닫는다. 우리의 계획에서 남은 것은 앙상한 골격뿐이라는 것, 다시 말해 함께 도보로 국경을 넘기로 했다는 그 사실뿐이라는 것을. 그 골격을 채웠던 살은 먼 곳에 떨어져 있고, 그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는 태양빛이 내리쬐고, 나에게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그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 답하지 않았고 내 눈에서 점점 멀어져 마침내 사라졌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P61

이 휴가 동안 밤마다 나는 원칙상 내 오빠라 할 수 있는 그와 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 아주 얇은 천의 텐트만이 우리를 비와 흙에서 분리한다. 그런 텐트에 그와 함께 누워 있는 밤이면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와 등 밑의 가지와 돌을 세고 때로는 내 몸무게를 견디고 기어가는 작은 벌레의 움직임도 느낀다. 밤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말을 할까 망설인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기절해 버린 몸뚱이처럼 침묵이 버티고 누워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에서 알게 된다. 그, 평소 오빠 같던 그는 우리 사이에 기절해 있는, 아니 아예 죽어버린 듯한 이 차가운 몸뚱이 뒤에 숨었고 내가, 평소 누이 같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알지만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인가 나오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리고 그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몸에 대한 내 관심은 언제부턴가 영혼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 나는 혹시라도 내 말이 그 몸을 나에게서 떼어놓을까봐 말을 하지 못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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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가 나에게 말한다. "아가씨를 보고 있으면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 "두 분이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대학에서였지." 그녀가 말한다. "그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당시에 벌써 우리를 가르쳤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 그이 한테서 배우지 않았다면 내 안에 뭐가 남았을까 하고 말이야. 그이는 늘 배운 것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어. 누군가 나에게서 그 모든 걸 꺼내버린다면 나는 빈 껍데기처럼 오그라들고 말 거야."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든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나는 그녀의 발소리를 듣는다. 옆방의 어두운 물 속을 그녀가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외줄 타듯 가느다란 빛줄기 위로 조심스레 걸어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 P12

"그이에게 애인이 있을 것 같아?" 그의 아내가 나에게 묻는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갖다준 찻잔에 입술을 갖다댄다. 아가씨가 지닌 아름다움은 피부와 머리카락, 눈 색깔이 모두 밝다는 거야. 아가씨는 이 집 안에서 빛을 내는 구심점이야. 모든 게 끝나버렸지. 그 때 아가씨가 왔어. 밝은 구심점이 나타난 거야." 그녀는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 접시에 놓는다. 그런 다음 허리를 굽혀 자신의 혀를 내 입 속에 밀어넣는다. 그녀는 나에게서 다시 입을 떼고 말한다. "안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구나. 하지만 바깥에서 보면 눈이 멀 정도로 밝아." "그 사실을 아저씨에게도 말할 건가요?" 내가 묻는다. "물론 안 하지." 그녀가 대답한다. "비밀은 지켜야 하니까." - P13

공항에서 물고기들에게 가는 도중 그녀는 버스 창 밖을 내다보며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 곳의 아름다운 풍경,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풍경에 감탄한 그녀는 친구의 공감을 얻으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잠깐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 평원은 그녀가 지금까지 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바위들만 이빨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있었다. 돌에 덮인 그 풍경은 지평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있었다. 검은 암석들은 분명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좌절시켰을 것이다. - P22

이 섬에는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자라기엔 너무 춥기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섬에는 바람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늘 칼날 세운 바람이 불어댄다. 예전부터 그녀는 사람이 죽으면 바람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곳에 사는 동안 그녀는 늘 혼자는 아니다. 그녀가 산책할 때면 죽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 P24

폴란드 여자는 열쇠를 꽂기 위해 입김으로 한참 동안 열쇠 구멍을 녹인다. 열쇠를 돌린 그녀는 손잡이를 틀고서 문을 민다. 문이 열리자 등 뒤에서 불어온 눈발이 집 안으로 들이친다. 문지방에 서 있는 그녀는 집 안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일층에 있는 방들 문이 나지막이 열렸다 닫히는 것뿐이다. 문들이 움직이는 것은 그녀가 몰고 온 바람 때문이다. 그것은 죽어 있는 움직임, 생명이 피해가는 그 무엇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안과 밖의 구분을 소홀히 할 때 생기는 움직임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턱뼈는 낚싯줄에 걸려 그런 식으로 열리고 닫히다가 종내는 떨어져 나간다. 냇물에 빠진 책은 그런 식으로 물결에 쓸려 펄럭거린다. 이 섬에서 수천 개씩 줄에 꿰여 있는 생선 머리들 사이로 바람이 불면 물고기 머리들이 달그락거리며 텅 빈 듯한 소리를 낸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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