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들어 할머니는 가끔 분을 너무 두텁게 바른다. 또 어떤 때는 바지 지퍼 올리는 것을 잊는다. 블라우스에 얼룩이 묻어 있거나 손톱 끝이 지저분할 때도 있다. 얼굴의 솜털을 뽑는 것도 잊어버린다. 이제 할머니는 여자 같지 않다. 늙은 여자 같지도 않다. 할머니는 그저 늙은 어떤 것, 사람이 아닌 늙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보인다. 나는 늙어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변신이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 P51

이제 할머니는 그동안 쓸 만큼 쓴 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걸 먹어야 하니?" 할머니가 묻는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물론 드셔야죠." 내가 할머니 접시에 고기를 담으려 하자 할머니는 손사레를 치며 말한다. "관둬라." 할머니는 샐러드 잎만 하나씩 찍어 이 사이로 쑤셔넣는다. 그러고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되작거리다 아이스크림을 휘젓고는 녹은 아이스크림을 후루룩 마신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늘 똑같잖아. 위로 넣고 아래로 내보내고. 꼭 먹어야 하니?" "그럼요." 가끔 할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접시를 밀어서 대신 먹으라고 한다. 처음에 나는 할머니에게 너무 양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알게 된다. 할머니는 자신이 먹는 것이 여전히 사람의 음식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 P51

이제 나는 밤에 할머니 옆에서 자는 것에 익숙하다. 할머니는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밤중에 화장실을 찾지 못한다. 할머니는 평생을 지내온 집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가끔 할머니는 잠결에 말을 하거나 뭔가를 외친다. 그러면서 응답을 기다리는 것 같다. "가치 없는 것—!, 가치 없는 것—!" 그 구절의 뒷조각은 할머니의 꿈속에 머물러 있다. 내 안의 무엇인가 그 나머지 구절을 말하는 것에 저항한다.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내 꿈을 꾼다. 내 꿈속에서 나는 안다. 할머니는 그 시를 끝맺지 못할 동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내가 응답 없이 묵묵히 있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할머니가 말한다. "하나의 단어가 빽빽한 단어들의 수풀을 헤치고 길을 찾아가는 걸 보면 참 재미있어." - P53

하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는 이 여행이 일종의 귀양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생전 처음 엄마들로부터 떨어져 우리끼리 휴가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귀양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치 섬에 귀양 간 사람의 생활이 그 섬에 국한되어버리듯, 우리가 서로에게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는 나에게로 국한되고 나는 그에게로 국한되었다는 의미에서이다. - P61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뱀처럼 출렁이고 기다란 팔은 활기 있게 움직이지만, 야영장에 도착한 다음부터 그의 눈빛은 돌처럼 굳어버리고 그의 시선은 나를 막고 서는 방패 같다. 마치 실향의 고통에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만 맞설 수 있는 사람처럼. 그에 반해 나는 난파를 당해 어느 섬에 휩쓸려간 사람 같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 섬의 샘물은 말라버리고, 후일 사람들은 얼굴에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말라붙은 내 시체를 발견한다. 나는 내 여행 동료를 본다. 그는 약속을 지켜 국경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가 거기 있는 것은 그저 우리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임을 안다. 빌린 돈을 갚는 마음으로 혹은 붕괴 직전의 집을 헐어 버리는 마음으로. 국경 역에서 마침내 그를 따라잡고 나서야 나는 분명히 깨닫는다. 우리의 계획에서 남은 것은 앙상한 골격뿐이라는 것, 다시 말해 함께 도보로 국경을 넘기로 했다는 그 사실뿐이라는 것을. 그 골격을 채웠던 살은 먼 곳에 떨어져 있고, 그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는 태양빛이 내리쬐고, 나에게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그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 답하지 않았고 내 눈에서 점점 멀어져 마침내 사라졌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P61

이 휴가 동안 밤마다 나는 원칙상 내 오빠라 할 수 있는 그와 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 아주 얇은 천의 텐트만이 우리를 비와 흙에서 분리한다. 그런 텐트에 그와 함께 누워 있는 밤이면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와 등 밑의 가지와 돌을 세고 때로는 내 몸무게를 견디고 기어가는 작은 벌레의 움직임도 느낀다. 밤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말을 할까 망설인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기절해 버린 몸뚱이처럼 침묵이 버티고 누워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에서 알게 된다. 그, 평소 오빠 같던 그는 우리 사이에 기절해 있는, 아니 아예 죽어버린 듯한 이 차가운 몸뚱이 뒤에 숨었고 내가, 평소 누이 같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알지만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인가 나오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리고 그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몸에 대한 내 관심은 언제부턴가 영혼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 나는 혹시라도 내 말이 그 몸을 나에게서 떼어놓을까봐 말을 하지 못한다. - P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