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내가 나에게 말한다. "아가씨를 보고 있으면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 "두 분이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대학에서였지." 그녀가 말한다. "그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당시에 벌써 우리를 가르쳤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 그이 한테서 배우지 않았다면 내 안에 뭐가 남았을까 하고 말이야. 그이는 늘 배운 것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어. 누군가 나에게서 그 모든 걸 꺼내버린다면 나는 빈 껍데기처럼 오그라들고 말 거야."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든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나는 그녀의 발소리를 듣는다. 옆방의 어두운 물 속을 그녀가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외줄 타듯 가느다란 빛줄기 위로 조심스레 걸어서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 P12
"그이에게 애인이 있을 것 같아?" 그의 아내가 나에게 묻는다.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갖다준 찻잔에 입술을 갖다댄다. 아가씨가 지닌 아름다움은 피부와 머리카락, 눈 색깔이 모두 밝다는 거야. 아가씨는 이 집 안에서 빛을 내는 구심점이야. 모든 게 끝나버렸지. 그 때 아가씨가 왔어. 밝은 구심점이 나타난 거야." 그녀는 나에게서 찻잔을 받아 접시에 놓는다. 그런 다음 허리를 굽혀 자신의 혀를 내 입 속에 밀어넣는다. 그녀는 나에게서 다시 입을 떼고 말한다. "안쪽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구나. 하지만 바깥에서 보면 눈이 멀 정도로 밝아." "그 사실을 아저씨에게도 말할 건가요?" 내가 묻는다. "물론 안 하지." 그녀가 대답한다. "비밀은 지켜야 하니까." - P13
공항에서 물고기들에게 가는 도중 그녀는 버스 창 밖을 내다보며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 곳의 아름다운 풍경,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풍경에 감탄한 그녀는 친구의 공감을 얻으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잠깐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 평원은 그녀가 지금까지 본 무엇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지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바위들만 이빨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있었다. 돌에 덮인 그 풍경은 지평선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있었다. 검은 암석들은 분명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계획을 좌절시켰을 것이다. - P22
이 섬에는 나무들이 자라지 않는다. 나무가 자라기엔 너무 춥기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섬에는 바람을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늘 칼날 세운 바람이 불어댄다. 예전부터 그녀는 사람이 죽으면 바람으로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곳에 사는 동안 그녀는 늘 혼자는 아니다. 그녀가 산책할 때면 죽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서 맴돌기 때문이다. - P24
폴란드 여자는 열쇠를 꽂기 위해 입김으로 한참 동안 열쇠 구멍을 녹인다. 열쇠를 돌린 그녀는 손잡이를 틀고서 문을 민다. 문이 열리자 등 뒤에서 불어온 눈발이 집 안으로 들이친다. 문지방에 서 있는 그녀는 집 안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일층에 있는 방들 문이 나지막이 열렸다 닫히는 것뿐이다. 문들이 움직이는 것은 그녀가 몰고 온 바람 때문이다. 그것은 죽어 있는 움직임, 생명이 피해가는 그 무엇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안과 밖의 구분을 소홀히 할 때 생기는 움직임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턱뼈는 낚싯줄에 걸려 그런 식으로 열리고 닫히다가 종내는 떨어져 나간다. 냇물에 빠진 책은 그런 식으로 물결에 쓸려 펄럭거린다. 이 섬에서 수천 개씩 줄에 꿰여 있는 생선 머리들 사이로 바람이 불면 물고기 머리들이 달그락거리며 텅 빈 듯한 소리를 낸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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