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피운 바람에서 세기에 남을 오르가슴을 경험했다. 일전에 네우스는 그것을 한번 경험하면 환희보다 두려움이 앞설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리카르트에게 들킬 두려움,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또 뭔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거리로 나갔을 때 사람들이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다. 하지만 오르가슴에 관한 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P63

천천히 가더라도 꾸준히 가는 자가 승리하는 법이다. - P71

굳게 닫혀 책장에 꽂힌 책은 책으로 말한다.
책등의 절망 섞인 무력감은
매복한 자들이 입을 싸매 버린
두 눈을 부릅뜬 감옥에 갇힌 자의 그것과 같다.
—가스통 라포르그 - P74

그리고 차. 책 말고 차도 있었다. 그는 하루에 예닐곱 번 정도 차를 마셨다. 그는 녹차를 마시면 몸의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탁 트인다고 했다. 그녀가 몰랐던 것은 독서에 특별히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아드리아 선생이 채식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알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가 깔끔하고, 월급을 잘 주고, 특히 크리스마스 때는 돈을 두 배나 주고, 잔소리하지 않으며, 말수가 적은 것으로 충분했다. 마치 그의 나이쯤 되면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듯했다. 불필요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절대. 그녀보다 서른 살이나 많았지만, 완벽한 남자였다. - P78

토니야말로 자주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렸고, 토니의 그러한 열정에 그녀는 사실 우쭐해지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가 아닌 아드리아 선생이 그랬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왜 토니는 다른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거지? 왜 한 번이라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까? 토니의 집에 있는 책이라고는 전화번호부(총 두 권)뿐이었다. 한쪽은 너무 없고, 다른 쪽은 너무 많고. 그녀는 생각했다. 책을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토니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최근 세 번의 월요일 오후에 뭘 했는지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을 빼곤. - P79

책을 손에 넣고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사용 흔적이 아주 많은 가죽 책갈피가 표지 안쪽에 달라붙어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황색은 거의 옅어져 있었고, 돋을새김으로 정확히는 알 수 없는 환상의 동물을 그려 놓은 것 같았다. 특이 사항을 적는 노트에 어떤 책을 살펴보았는지 꼼꼼하게 적고선, 유리병에 노트를 넣어 두는 걸 깜빡했다. 그 옆에는 열일곱 개의 책갈피, 열두 개의 저자 사인 및 헌정 메모, 무명의 독자가 남긴 속 깊은 감상(그중 두 개는 인덱스카드로 옮겨질 만했다.), 구매 목록, 회계 내역, 책 페이지 사이에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던 문서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문서 하나가 마치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진열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1929년 봄 바르샤바의 모이세스 우처라는 보석상이 이디시어로 쓴 편지가, 자신과 부인이 외아들 요세프가 최근 의대를 무사히 졸업하고 예루살림스카야가에 사는 레비 가문의 미리암 레비와 약혼을 한다는 소식에 매우 기쁘며, 새 출발을 하는 부부의 앞날에 축복과, 번영, 장수를 기원한다는 내용을 수신인에게 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물건들에 대해 거의 성찬식급의 경외를 갖고 있는 아드리아 선생은, 사랑스러운 손길로 유리병을 쓰다듬고 크게 숨을 쉬더니 슈바르츠의 책과 첫 만남을 가졌다. - P81

최근 안드로마케의 엉덩이를 좀 더 지켜보고, 아리아드네의 깜짝 놀랄 가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는 앞쪽으로 풍부하고 모양이 잘 잡힌 가슴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항상 무시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먼지를 털어 내고, 아드리아 선생의 가까이에 있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인덱스카드를 채우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문단을 보려 수십 번 몸을 기울인 끝에, 아리아드네의 가슴이라는 관찰 대상 하나가 탄생했고, 그는 자신이 캉드쉬의 『전원 음악』 (안트베르펜, 1902)에 나오는 양치기 여인 피다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기 직전의 폰키엘로가 된 듯한 상상에 빠졌다. - P84

푹푹 찌던 어느 날, 아드리아 선생은 몸살로 누워 있었다. 아드리아 선생이, 침대에, 분홍색 잠옷을 입고 누워 있음. 드디어 새로운 소식이었다. 넓은 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는 대여섯 권의 책을 빼고선, 완전히 다른 남자 같았다. 수염이 좀 더 허예진 건가? 조명 때문이겠지. 아드리아 선생은 그녀에게 침대의 가장자리로 와서 앉아도 좋다고 했다. 인덱스카드를 채울 시간은 앞으로도 많을 거예요. 그리고 몇 초간 조용히 팔을 뻗더니 말했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말아요, 뭐라도 옮으면 안 되니까. 토니하고 어쩜 이렇게 다를까, 그녀는 생각했다. 별로 심하지도 않은 감기에 걸린 어느 날, 토니는 그녀에게 추워서 몸을 덥혀야겠으니 침대 옆에 와서 누우라고 오후 내내 졸랐다. - P85

"이유가 뭔지 알아요?" 분홍색 잠옷을 입은 아드리아 선생이 현관의 계단에서 멈추었던 712권의 책에 대한 대화를 재개하며 말했다.
"아니요. 모릅니다."
"지식을 좇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지식이란 소심해서, 어딘가에 숨어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습성이 있어요. 전 그렇게 발견되지 않고 언제나 숨어 버리는 지식을 좇으려 합니다······." - P86

그제야, 그 앞에 진짜 빅토리아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침대 옆에 앉아 200년은 보낸 것 같은 여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식으로 가공한 다이아몬드처럼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강렬하게 반짝였고, 그런 그녀가 정말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 옆에 앉아,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아름다운 가슴과 엉덩이의 곡선이 강조되었다. 아드리아는 많은 독서를 통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인생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모든 것이 당신의 아름다움만을 빛나도록 하는 데 쓰이는 나이가 있다는 걸, 예를 들면 귀니첼리의 노래 『거미와 나비』 (밀라노, 1800) 같은 작품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바로 빅토리아가 그 나이였다. 아드리아 선생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 P86

질투는 세상을 바꾸어 왔다. 머리에 씌워진 왕관의 주인을 바꾸었고, 몸에 달린 머리를 날려 버리기도 했다. 맥베스와 그의 아내가 움직인 것은 결국 야망이 아닌 질투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질투는 부자를 불행하게 만들었고, 가난한 자를 악하게 만들었으며, 무심한 자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 아드리아 선생은 살면서 처음으로 질투라는 것을 실제 느꼈다. 어둡고, 지칠 줄 모르며, 곡해하며, 신맛에, 잔인하며, 쓰디쓴 질투. - P88

"그럼 그걸 카드에 적거나, 아니면 당신이 적는 거죠. 예를 들면······" 그리고 책을 펼치더니, 그가 원하던 페이지까지 재빠르게 넘겼다. "번역해 보죠." 그는 경고했다. 그리고 목청을 다듬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하여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오, 여왕이시여.‘ 왕자가 말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주먹으로 이를, 칼로 콩팥을 날려 버릴 거예요. 그래도 일부가. 당신의 일부가 남아 있다면, 오 내 사랑, 당신을 향해 죽을 때까지 전쟁을 할 거예요.‘ 당신도 알아주기를, 오, 인간이여, 사랑과 미움 사이에는 정말 얇은 피부와 같은 작은 차이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미 상황을 짐작했던 디도는 장작더미에 불을 지르고, 고꾸라지며 자신의 배에 칼을 꽂았다." 얼마간 침묵만이 맴돌았다. - P90

"선생님은 읽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이 책들을 읽을 뿐이에요. 망각과 잊힌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게 분명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드로마케는 페레스 하라미요의 작품 『가지에 달린 금』(부에노스아이레스, 1931)에서 벨리 사리오가 적의 심장을 부숴 버리듯, 아주 쉽게 그의 큰 비밀을 간파해 냈다.
"그 잊힌 것들을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되살려 내고 싶은 거죠." - P92

"그러니까 형식에 좌우된다는 소리입니다." 그는 팔을 들었다. "잘 쓰인 작품의 단어들 사이에는 그것을 쓴 사람이 들어 있다는 말이죠."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이 형상화하는 이미지에 그녀는 매우 놀랐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드리아 선생은 계속했다.
"그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입니다. 글의 형식에는 영혼이 있어요. 잘 쓰인 책은 잊힐 수가 없지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네?"
"아주 평범한 ‘당신을 사랑합니다.‘ 와 같은 어구조차 강한 의지와 형식적 성공이 뒷받침되는 문장 안에 잘 직조되면, 어떤 영혼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죠? 당신을 사랑합니다." - P94

그녀는 고통받는 자의 위로였으며, 아픈 자의 건강이었고, 죄인의 안식처였으며, 이상향, 천사들의 여왕, 상아탑, 성 빅토리아, 구슬픈 아리아드네, 동정녀 중의 동정녀, 그리고 슬픈 안드로마케였다. 심지어 새로운 연인이 반쯤 잠들게 했다. 마치 신비주의적 계시처럼, 불가사의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아드리아 선생 이마의 활활 타는 불이 가라앉아. 빅토리아는 마치 새로운 니케처럼, 『마법사의 제자』에 나오는 훌륭한 견습생을 넘어서는 것처럼, 그녀는 새롭고 깊고 그리고 초월적인 힘을 통해, 서서히 그리고 단호하게 기름 부음을 받아, 권위를 얻고, 성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안룬드의 『숲』 참조.) 심지어 그녀의 눈빛조차 새로운 힘을 가진 아름다운 사제의 것으로 변했다.
"곤사가가 이사벨라에게 말했다." 빅토리아는 처음으로 의례를 집행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의 열을 제거 할 것이니, 너의 고통을 나에게 바치거라.‘ 수련을 시작한 수사는 그를 부드럽게 바라보았고,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아드리아 선생이 갑자기 눈을 떴다. 마치 그 단어들을 말한 자가 빅토리아가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듯. 몇 줄의 침묵이 지속되었다. 그녀는 그것을 비판으로 이해하고, 얼른 경구를 끝마쳤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주세페 그릴리, 나폴리, 1912." - P95

3페이지에서 이미 좋은 경구 하나가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네, 코임브라여, 커튼이 쾌활한 웃음으로 벽을 치고 오르며, 너의 집 창문이 매일 열린다면." 커튼의 쾌활함, 코임브라의 새날을 열어젖히는 여인의 쾌활함······. 세아브라 핀토가 이 발상을 써 내려갈 때, 빅토리아는 그 앞에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작가가 죽었을 때, 이 부분을 읽게 된다면 아주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 P99

복도에서는 『아프리카 시선』의 먼지를 뒤집어쓴 아드리아 선생의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그는 책 하나하나, 책등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청소하는 데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안드로마케의 멋진 도서관이 불명예와 망각이라는 소홀함에 무너지지 않도록. - P100

렘브란트 선생은 이제 너무나 큰 듯한 내 방, 그리고 아 슬프구나, 외로움만 가득한 방을 택했지. 햇살이 비치면 가장 아늑한 방이니까. 그림을 잘 보관했으면 좋겠구나, 사랑하는 아들아, 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항상 지녔으면 한다. 그곳에서 네 일이 잘되니 네가 더 이상 집에 돌아올 일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러니 내 늙은 형상을 기억하는 의미로,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전 네 어머니가 너에게 세상 빛을 처음 보여 준 방을 기억하는 의미로 간직하기 바란다. 그래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항상 잘 보관하다가 네 자식들, 그리고 네 자식의 자식들에게 보여 준다면, 언젠가 한번은 네 할머니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겠니, 가여운 사람. 그리고 네게는 너의 기원을 상기시켜 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의 상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죽음은 없으니까. - P110

"새로운 소식이란 말입니다. 사제여." 바루크 베네딕투스 안슬로 올손이 끼어들었다. "언제나 진실보다 느린 법이지요." - P112

"굶겨 죽이는 것은," 하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많은 마을에서 사기꾼들과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방법이지요. 자신의 거짓말로 영원히 배고픔을 채우며 살도록 두는 것입니다." - P116

"자긍심과 자만심은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지." - P127

그건 음악이야. 심장에서 나왔으니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P134

갑작스레 힘을 쓴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벽에 기대어, 벽아, 그저 행복한 벽아, 내가 다시 너에게 기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라고 말했다. - P139

"어디서 시작했든 상관없어. 조성이란 없어. 주제와 발전부는 신기루일 뿐이야······. 예상치 못한 음악이 음악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렇다면 불협화음은요?"
"그것도 신이 창조하신 것이지." - P142

스승은 분노, 그리고 무엇이든 남기지 않고는 생을 마감할 수 없다는 죽어 가는 자의 급한 마음을 담아 음표를 불러 댔다. 마치 기억, 그의 마지막 생각, 그의 대담함으로 탄생한 생각의 닻이라도 내리겠다는 듯, 시작 주제의 광기가 끝나자 푸가 부분 간의 완벽한 균형으로 이루어진 정석적인 대위법이 이어졌다. 그다음에는 다시 여섯 개의 주제가, 모두 한결같이······ 한결같이 조성이 없었다. 마치 모든 조성이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고, 으뜸음도, 딸림음도, 버금딸림음도, 어떤 음의 위계도 없다는 듯이. - P143

이제 전부를 오르간으로 연주해 보겠어, 카스파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풀무질을 하며 들어 보게, 혹시 자네가 실수한 게 있는지.
"실수하지 않았어요, 스승님. 카스파어는 으스대지 않고 말했다. 그는 그저 음악이라면 언제나 잘해 냈다. "만약 실수한 게 있다면······."
"생각 자체에 실수 같은 건 없어, 카스파어." 그는 다소 퉁명스럽게 제자의 말을 끊었다. "좀 더 너그러워지려 노력해 보게. 그렇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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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림에 푹 빠진 동안 시간이라는 관념은 증발해 버렸고, 마침내 시계를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원 약속에 한참 늦은 후였다. 소름 돋는 경험을 안고 현대 미술관에서 나온 그는, 아주 신나게 여러 자동차의 주차 위반 딱지를 끊고 있는 단속원을 헉헉거리며 지나, 십칠 분이나 늦었으니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십사 시간을 더 처벌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여전히 헉헉거리며, 의사를 만날 수 있는지 창구에 물었다. 의사 누구 말인가요. 내 사망 날짜와 시간을 알려 줄 의사 말입니다. 3층으로 가세요. - P37

외로움이라는 맹수의 발톱이 얼마나 잔인한지 조금씩 알아가게 된 지금, 혼자서 울 시간은 앞으로 충분할 것이다. - P38

입이 딱 벌어진 아구스티는 생각했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들 앞에 펼쳐진 미래 또한 매우 끔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 P42

태양이 바다에서 목욕한다는 게 거짓이라고 말하지 말아 줘.
—펠리우 포르모자 - P43

하지만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서사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제멋대로 보여 준 채, 아닌 척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속이려 든다. - P49

"편지는 읽히기 위해 존재하지. […]"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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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대담함을 쏟아부은 페레 브로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떤 연주든 슈베르트 앞에서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그제야 그는 슈베르트를 좀 더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는 곧 7번 객석의 슈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웃음 지으며 박수를 멈추지 않았고, 브로스는 앞니 하나가 없는 그의 미소를 유심히 살폈다. 공연장에는 여전히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3층 저 멀리에서, 호박색의 힘차고 부드러운 박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용한 투명 슈베르트와, 피셔의 대담함과, 아니면 미친 피아니스트와의 연대를 표하고 싶다는 듯 쏟아졌다. 마치 집중호우 전의 굵은 빗방울들이 후두둑 모여들듯, 조금씩 조금씩 퍼져 나가던 박수 소리는 전 관객의 기립 박수로 마무리되었다. 페레 브로스는 피셔의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인 책을 관객에게 흔들며, 슈베르트가 계속 박수를 치는지 한 번 더 확인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원히 무대를 떠났다. - P31

아구스티는 작별 인사라도 몇 마디 하고 싶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에우랄리아는 자신의 인생에 깃든 빛이었고, 그 말들이 그의 절망적인 사랑에 대한 조촐한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문을 여는 순간마다, 그의 영혼에는 눈물이 고여 버렸다. 아마데우는 조심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마도 그의 고통에 함께한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 P33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이 커진 그는 집을 너무 일찍 나섰다. 병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진료 시간 한 시간 전이었다. 자신의 유통 기한을 알고 싶은 집착을 생각하니 스스로가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형 선고를 받기에 앞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는 에우랄리아를 생각하며 빈 카페로 걸어갔다. 아내가 함께 와 주었다면, 그리고 건강과 무관한 다른 대화로 그의 정신을 분산시켜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이기적이군. 차가운 세상에서 살게 된 아내에 대해서는 연민도 없이 그녀가 필요하다고만 생각하다니, 정말 이기적이야. - P35

방 전체는 짙은 황토색 느낌이 물씬 났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오른쪽 창문으로 옮겨 갔다. 창문은 무엇이 빠져나가는 지점이 아닌, 방과 그림 속 인물을 비추기 위해 아주 강렬하고 거침없는 햇살이 들어오는 통로였다. 제목을 따르자면 그림 속 그 인물은 철학자로서, 렘브란트가 그를 그린 사 세기 전부터, 식탁보가 늘어진 원형 탁자 앞에 앉아 창문을 통해 들어 오는 환한 빛을 잘 이용해, 지혜가 가득 담긴 책을 읽는 중이었다. 가슴팍 중간까지 내려온 철학자의 수염과 그의 전체 모습은 고요함, 평안함, 난 아픈 데가 없어요, 난 죽음의 소식을 전해 줄 의사와의 만남도 예정된 바 없어요, 내 주변의 그 누구도 죽지 않았어요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같은 방 창문의 반대편에는 상아탑에서부터 조급함, 질병, 불쌍한 나의 사랑 에우랄리아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채워진 현세로 내려오는 계단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짐작건대, 그림 앞쪽에는 탁자 위에 놓인 책만큼 두꺼운 책들로 가득한 책장이 있을 터였다. 어째서 내가 저 철학자가 아니란 말인가? - P36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갤러리를 홍보하고 노르웨이 관광을 독려하기 위해 기획된 오슬로 국립 미술관 순회 전시회에 선보인 스물여섯 점의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짧게나마 행복한 이 순간에는 최종 선고에 대한 두려움, 에우랄리아와의 닿을 수 없는 거리, 카를라의 차가움, 세르지의 반항 섞인 눈물, 그리고 아마데우의 침묵······ 을 잊을 수 있었다. 이 수많은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정말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듯, 마치 좀 더 집중적으로 그림을 관찰하여 지혜의 진정한 샘을 파 보겠다는 듯, 철학자의 그림 앞으로 대여섯 번 되돌아왔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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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는 관객들의 싸늘한 냉기가 느껴진다. 무대 인사를 하며 무의식중에 앞줄에서 본 것이 헛것이 아닐까 봐,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다. 당연히 착각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당장 짐을 싸서 무대를 떠나야만 해결될 일이다. 어떤 여자의 기침. 어떤 남자의 기침. 아득히 멀고 큰 그 기침 소리가 연주 홀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괜찮아, 오른쪽에는 아무 일도, 아무것도 없어. 얼음, 적, 그리고 죽음만이 있을 뿐. - P9

도이치 번호 960의 안단테 소스테누토 악장은 다뉴브강의 안개로부터 찾아오는 죽음과 같아서 처음에는 아주 멀리 있다가 조금 지나면 소스라치리만치 가까이에 와 있다. 페레 브로스는 삼 분간 지속되는 이 주제 부분의 극적인 긴장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매우 서서히 진행되는 크레센도의 조절은 금으로 만든 손에 다이아몬드 열 개가 각각의 손가락에 박히지 않은 이상 거의 연주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재현부에서 그는 청중을 압도적인 고요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고, 연주 홀의 벽을 감싸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유만으로,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그는 파르도에게 잠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붉으락푸르락하며 그를 따라오는 매니저 를 뒤로한 채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가 문을 쾅 닫았다. 내가 말이야 저자의 목소리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내가 없으면 스케줄도 못 짜고, 일정도 기억을 못 한다고! - P14

두 친구는 튜닝이 안 된 비를 한참 동안 말없이 듣고 있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땅 위에 버려진 금속성의 물체를 두드리며 도#의 소리를 쉬지 않고 냈다. 꽤나 거슬렸다. - P16

트루욜스 선생에게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아홉 살 때부터, 뵈브 암발로 채워진 잔을 들어 올리고 있는 마흔일곱 살까지, 총 삼십팔 년간 손떨림증은 가시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항상 완벽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훌륭하고, 안정감 있고, 자신만만하고, 강렬하고, 미묘하고, 부드럽고, 무결하기 위해 연습한 시간을 위하여 그는 술잔을 들이켰다. 항상, 항상, 항상, 항상.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나서, 헛된 시간이여, 그는 지금에 와서 당장 그만두겠다고, 수백 개의 전구가 달린 거울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골방에서, 그것도 연주회 중간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 연습을 해 놓고도 슈베르트가 무섭다니. 그를 내보내라고, 기세등등한 샴페인 잔에 낮게 소리쳤다. 그를 쫓아내 버려. 그는 여기 있을 권리가 없다고! - P20

친구의 차가운 반응에 낙심할까 봐 얼른 전화를 끊고 그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왜 이토록 잔인한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내 호텔로부터, 내 갈망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고, 내가 그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구나.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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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두 가지 마음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에요. 선택지가 하나뿐인 선택도 있나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러 가는 건 해야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하고 싶은 마음일 거예요. 하지만 소년에게는 군인을 따라가는 선택지밖에 없어요. 살아남으려면, 그게 유일한 선택지예요. 소년은 아마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지 몰라요. 그러니 전쟁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어요. 소년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에요. - P150

불행한 사람들은 더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려요. 그러면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 P158

불행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허리를 끈으로 묶고 가듯이요. 그래서 불행에서 한 발 멀어질 때마다, 다른 누군가를 한 발 더 끌어 올리는 거예요. 그 뒤에 있는 사람도, 그리고 또 그 뒤에 있는 사람도요. - P159

나는 거대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버린 사람들을 상상해요. 회오리바람 속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어요. 내 탓도, 다른 누군가의 탓도 아니에요. 그저 회오리 바람이 너무 강한 것뿐이에요. 우리들을 휩쓸어 버리는 그 거센 바람을 나는 운명이라고 불러요. - P165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야. 그렇지만 우리를 붙드는 건 언제나 남아 있는 것들이지. 그렇지?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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