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본성들은, 게다가 긍정적인 것들일수록, 일시적으로만 유지될 뿐 나머지 단계를 건너뛴다. 디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 P119

"오늘 연회는 꽤 성공적이었지, 안 그래?"
"그야말로 불꽃놀이였죠."
앙투안은 대답하며 카펫 위에 드러눕더니 몸을 뒤집어 엎드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 같았고, 영원한 고독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귀에 빈정거리며 심술궂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아름답고, 낡고, 허식적이고." - P121

커다란 밤나무들이 분홍빛 하늘에서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며 하늘을 거의 뒤덮었다. 늘 너무 이르게 켜지는 가로등들은 겨울의 소중한 가이드 역할에서 여름의 기생충으로 전락하며, 직업적 자부심에 손상을 입었다. 여름의 가로등은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저녁 해와, 하늘 전체에 드리울 기세로 일찌감치 하늘을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는 여명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 P123

루실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침대에 누웠다. 햇살이 카펫 위에서 급속도로 수그러들었고, 길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두 달 전에 방 안에 스며든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 바람처럼 살랑거리며 방 안에 감도는 바람이 아니라 대담하고 날랜 바람이었고, 이 바람이 솔솔 잠이 오게 하는 것과 달리, 번쩍 잠을 깨게 하는 활기찬 바람이었다. 이 두 바람 사이에 앙투안이 있었고, 삶이 있었다. - P124

문득 불안해졌다. 누군가 그녀와 함께 있는 걸 지루해 하는 것이 그 반대보다 훨씬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삶이 몹시 만족스러웠기에 이 침대에 누워 한없는 부드러움을 느끼며 점차로 어둠에 휩싸여갔다. 그녀는 지구는 둥글다는 것과 복잡해 보이는 삶에서 그녀에게는 어떤 불행도 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 P125

고독 속에서도 더러 완벽한 행복의 순간이 있다. 위기의 순간엔 외부적인 어떤 것보다도 기억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한다. 우리는 우리가 혼자서, 아무 이유 없이 행복했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행복 – 우리가 누군가로 인해 불행할 때 그 누군가와 필연적이며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어 보이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복 – 은 실은 매끄럽고, 둥글고, 흠 없는 무언가로 더할 수 없이 자유롭게, 우리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물론 잠깐일 수도 있지만, 틀림없이 가능하다) 나타난다. 이 기억은 우리에게 이전에 다른 누군가와 공유했던 행복보다 더 위안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다른 누군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와 공유했던 행복은, 실수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반을 두었던 허무한 기억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 P125

그들은 이 밤, 이 격렬함 속에서 조금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기적의 뗏목처럼 밀려온 잠에 기어올라 축 늘어져서 정신을 잃었다. 어쨌든 마지막 결속의 의미로 서로의 손을 살며시 잡은 채였다. - P129

그녀는 그가 낮에는 이토록 무사태평하고 몽상적이며, 밤에는 그토록 거칠고 정확한 것이 좋았다. 마치 사랑이 그의 안에서 잠자던, 오직 쾌락만이 확고 불변의 유일한 법칙인 무사태평한 이교도를 깨운 것처럼. - P129

그들은 똑같은 이단의 두 신도가 되었고, 이 이단은 이제 그들이 서로 간에 어떤 변덕을 부리든, 그들의 힘을 넘어서서 존재했다. 앙투안은 정신적으로는 그녀에게 적대적일 수 있었으나, 그의 육체는 이제 그녀의 육체의 반쪽인 바, 그는 완전해진 기분을 느끼기 위해 그녀의 육체가 필요하고 그리울 터였다. 그들의 육체는 친구 사이인 두 마리 말과도 같았다. 말들은 주인들의 불화로 인해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국은 쾌락의 햇빛이 찬란한 정경 속으로 함께 질주할 터였다. 그녀에게는 그 반대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욕망에 저항할 수 있으리라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야 할 필요성도, 정당성도 없었다. 이 불평 많은 루이 필리프 시대 같은 프랑스에서, 그녀는 뜨겁고도 격렬한 피에 이끌리는 것보다 더 고귀한 도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 P136

어떤 비겁들은 미신에 빠지기 십상이다. - P138

루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빠르게 스 쳤다. ‘저 봐, 나 없이도 웃고 있네.‘ 그럼에도 그녀는 기쁨에 찬 동작으로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루실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으나 그는 웃음을 돌려주지 않은 채 짧은 목례를 보이고는 돌아섰다. 일순, 불빛이 휘황하고 수목이 우거진 프레카틀랑이 음산해졌다. 돌연 사람들의 경박함이며 지적 빈곤함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고, 이 장소, 이 세계, 그녀 자신의 삶이 절망적으로 권태로워졌다. 앙투안이 없다면, 그의 금빛 눈과 그의 방과 일주일에 세 번씩 그의 품에 안겨서 보냈던 몇 시간의 진실이 없다면, 즐겁다고 할 수 있을 이 소란하고 혼란스런 세계를 이루는 각각의 디테일들은 실력 없는 실내 디자이너의 치졸한 창작품에 불과해지리라. 클레르 상트레는 추해 보였고, 조니는 우스꽝스러웠으며, 디안은 반송장 같았다. - P138

루실은 생각했다. ‘다들 개야. 개들. 할 수만 있다면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를 갈가리 물어뜯을 거라고.‘ - P140

이곳의 모두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들의 작은 비밀을 은폐하고 키워가고 보호하기 위해서, 상상력으로 넘쳐났다. 오직 그, 앙투안을 제외한 모두가. - P145

그가 그녀를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사실이 아닐까? 그녀는 샤를에게 얹혀살고 있었고 그가 제공하는 선물에 무감하지 않았다. 선물의 가격보다는 의도에 더 감동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선물을 수락했다. 그녀는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능력이 되고 거기에 존경까지 하는 남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낀 만큼, 그것이 부인해야 할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앙투안은 엄청난 해석의 오류를 범했다. 그는 그녀가 그것 때문에 샤를을 떠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샤를을 포기하지 못한 거라고. 그는 그녀가 그런 계산이 가능한 여자라고 믿었고, 그녀를 평가 했으며, 틀림없이 경멸했다. 그녀는 질투심이 거의 필연적으로 저속한 추론을, 행동을, 판단을 이끌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 P147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종류의 일에서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수천 번이나 알려지고 확인된 통념이었다. 그녀는 여성주의 철학에 빠진 기분이었다. 짜증스러웠다. ‘내가 디안과의 관계에 대해 물은 적 있어? 난 질투하지 않아. 그런 내가 괴물일까? 그래, 만일 내가 괴물이라면 그걸 내가 어떻게 바꾸겠어? 아무것도 못 바꿔.‘ 하지만 그녀가 바뀌지 않는다면 앙투안을 잃을 터였다. 이 생각이 그녀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 P149

가끔씩, 뜻하지 않았던 잠시 잠깐에, 절망적으로 사지를 부들거리기를 멈추었을 때, 태양의 열기와 바닷물의 차가움과 모래의 부드러움을 느끼기를 잊었을 때, 앙투안과의 추 억이 그녀에게 돌처럼 쿵, 하고 떨어져 내렸고,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힌 듯 해변에 누워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벌린 채, 하지만 손바닥에 못 박히는 대신 심장에 날카로운 기억의 투창이 꽂혀서 행복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심장이 뒤집히고, 텅 비어버릴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비어버리는 동시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에. - P151

여기서 그와 함께 수영하고, 바닷물이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줄 그의 젖은 금발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리라. 파도 사이에서 그에게 키스하고, 여기서 멀지 않은 아직은 한적한 방갈로들 뒤의 모래언덕에서 그를 사랑하고, 저녁엔 그와 꼼짝도 하지 않고서 분홍빛으로 물드는 지붕 위로 날아드는 비둘기들을 바라볼 수도 있었으리라. 시간이 그저 죽여야 할 것이 아닌 다른 것, 애지중지하고 아끼고 지나가지 못하게 할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 P152

그녀는 앙투안을 그의 젊음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금발이어서 사랑하고 청교도적이어서 사랑하는 것처럼, 그여서 사랑했다. 그가 관능적이어서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서 사랑하고, 아마도 지금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돼버렸다. - P153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그녀와 태양 과 안락한 삶과 심지어 사는 맛 사이에 장벽처럼 놓였다. 사실 그녀는 부끄러웠다. 행복은 그녀의 유일한 도덕이었고 불행은, 그것이 스스로 부과한 것인 이상(게다가 그녀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러는 것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나무라곤 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 P154

‘이제 나는 대가를 치르는구나‘ 루실은 혐오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생에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나, 당대의 사회적, 도덕적 금기는 그녀를 잠식해버렸다. 다른 이들은 천 번도 더 직시했으나 그녀는 부끄러운 병이라도 되는 양 늘 조금은 물러서있었건만.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근심이 깊어졌고, 그런 만큼 혐오감도 깊었다. 그녀는 고통이라는 병을 얻었다. 이 고통은 어떤 달콤함도 끼어들지 못하는 고통이었고, 가장 불쾌한 방식의 고통 중 하나였다. - P154

그는 새벽 3시에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공기에 술이 깨어 정신은 말짱했다. 한마디로 그는 젊은 남자였다. 이따금 불행 또한 희열감이 가져다주는 것과 유사한 힘과, 활력과, 일종의 열의를 북돋는다. - P157

그는 그녀가 2년간 고집스레 유지한 이미지에 익숙했고, 다른 사람을 바라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순간, 침대에 똑바로 앉아 여명을 받으며 꼿꼿이 유지하고 있는 이 자존심, 그녀가 잠시 존재를 잊었던 사교적 인물로서의 그녀 안에 내재된 이 자존심이야말로 이제부터 그녀의 가장 가깝고도 친근하고도 소중한 지원군이 될 터였다. 문득 30여 년간 단련한 승마 덕분에 버스 밑을 유연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걸 발견한 타고난 기수처럼,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자신의 자존심이 자신을 구하는 것을 목도했다. 무시되었거나 잘못 사용되었던 이 정신적 자산은 최악의 상황을, 다시 말해 앙투안이 그녀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차단했다. - P165

어떤 희망도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희망을 가질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억이란 루실의 쾌락과 그 자신의 쾌락이었으나, 그마저도 그를 안도하게 하기보다는 번민하게 했다. 상대방이 느끼는 쾌락의 강렬함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강렬함을 다른 이에게서도 똑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느낀 적이 없었던 경우에는 더더욱.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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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맥없이 흰 장미와 무시무시하게 부푼 커튼에 골을 부렸다. 이따금 그녀에게도 다가와 온갖 시골 냄새를 풍기며 애원했다. "산책하러 가자, 나랑 산책하러 가자." 한기로 움츠러든 몸이 이를 거부했고 단편적인 꿈들로 뇌가 몽롱했으나, 점차 미소로 입가가 느슨해졌다. 새벽, 시골의 새벽··· 테라스에 서있는 네 그루의 플라타너스 나무들, 하얀 하늘을 바탕으로 윤곽이 너무도 선명한 이파리들, 개의 발밑에서 자근거리는 자갈 소리, 영원한 유년시절. 이 유년 시절에 관한 작가들의 한탄과,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내가 어렸을 땐‘이라는 주제만 나왔다 하면 그 즉시 시작되는 모든 인간의 봇물 같은 토로 외에 또 어떤 매력을 부여할 수 있을까? 아마 잃어버린 절정의 무책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 P19

기침이 나왔다. 아침 빈속에 담배를 피운 것이 잘못이었다. 빈속엔 담배를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게다가 술을 마셔서도 안 되었다. 과속으로 운전을 해서도, 과도하게 사랑을 나누어서도, 심장에 무리를 주어서도, 돈을 낭비해서도, 그 무엇도. - P21

자동차의 라디오에서 콘체르토가 흘러나왔다. […] 그녀는 문화를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감성적인 기억에 의해서만 좋아했다. ‘스무 번도 더 들은 거잖아. 그때 내가 불행했었는데 이 음악이 내 고통과 데칼코마니처럼 들어맞는 것 같았어‘ 그 고통이 누구 때문이었는지는 이미 잊었다. 분명 이미 오래전 일이었다. 상관없었다. 아름다운 날들이 있었고 그녀는 당시 자신의 생각과 모습을, 그게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더는 더듬지 않았다. 이제 이 새벽의 바람 속에서 오직 현재만이 그녀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 P21

클레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테이블의 꽃들을 극도로 섬세하게 매만지고 있는 저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한때는 기관총을 쥐었거나 한밤 중에 총탄을 발사하는 전투기의 조종간을 잡았었다니··· 인간이란 정말이지 예기치 못할 존재였다. 인간에 대해선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도 클레르는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 P33

그녀는 무례를 범하는 것에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잔인하게 구는 것엔 더더욱. - P36

"우린 끝에서부터 관계를 시작하네요. 대개 커플들이 사과하며 관계를 끝내잖아요.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미안해, 더는 널 사랑하지 않아, 라면서요."
"그 정도만 되어도 우아하겠네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상처가 되는 건 정직한 말이에요. 미안해, 널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내 의무겠지, 같은." - P38

"이봐요, 아가씨. 아마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더 많을걸요."
루실은 웃음을 터뜨렸다. 디안과 샤를의 시선이 그들에게 얹혔다. 그들은 자기들의 ‘피보호자‘들 맞은편의 테이블 가장 자리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부모는 이쪽에, 아이들은 저쪽에. 성인처럼 굴기를 거부하는 서른 살짜리 늙은 어린이들. 루실이 웃음을 그쳤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얼마나 하잘것없는 삶인가. 만일 존재하는 것이 그토록 행복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자살 했으리라. - P40

공유된 웃음의 힘과 위험과 미덕에 대해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사랑도 그에 비하면 우정이나 욕망, 또는 절망과 다를 바 없이 강력하지 않다. - P43

그녀는 그들에게 드리우는 기이한 평화를 느꼈다. 술집 주인, 취객, 음악, 조명은 여전히 존재했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더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가 택시로 그녀를 집 앞에 내려주었다. 그들은 주소도 교환 하지 않은 채 예의바른 어조로 작별 인사를 했다. - P49

짐승을 함정에 몰아넣는 함성과도 같은 떠들썩한 소문들이 파리의 봄을 휘젓고 다녔다. 이 세계에선 매우 특수한 경우인 이 의아한 역전으로, 이전엔 디안을 돋보이게 하고 명예롭게 하던 모든 것이 그녀의 손실이 되었다. 미모는 ‘더는 젊은 날의 그것이 아니‘었고, 보석은 ‘충분하지 않았‘으며(일주일 전만 해도 그중의 지극히 하잘 것 없는 하나만으로도 어떤 여자에게도 눌리지 않기에 충분했었는데 말이다), ‘적어도 그녀에게 남을‘ 롤스로이스조차 빛을 잃었다. 가엾은 디안. 선망이 손바닥 뒤집듯 뒤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칠로 닳을 것이고, 심장은 다이아몬드에 부딪쳐 상처 입을 것이며, 그녀의 발바리는 차 안에서 산책하리라. 마침내, 마침내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할 수 있게 되었다. - P51

다른 사교계 여자에게 자기 애인의 남성적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교계 여자보다 더 정확하고 기술적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의상디자이너를 평가할 때는 애인에게 갖다 붙일만한 형용사들을 남발하는 여자들이, 애인에 대해 평가할 때는 몸무게나 신장 관련 수치만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 P54

디안은 파리에선 기본이 되는 이 원칙을 잊었다. 바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 사과해선 안 된다는 것과, 꺼림칙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 - P55

그러니까 이 어린 여자도 알고 있었다. 이 여잔 그걸 알 권리가 없었다. 앙투안은 그녀 거였다. 앙투안의 웃음도, 앙투안의 슬픔도. - P59

이 세계에서 그녀가 혐오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두 연인이 다른 한 사람의 바로 등 뒤에서 암묵적으로 결탁하고, 클레르 같은 목격자 들이 그걸 재밌어하며 낄낄대는 것이었다. 루실은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았다. - P62

그녀는 자기 얼굴 위의 이 주의 깊고 온화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이 얼굴을 이제 자주 보게 될 것이며, 거기에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를 이 정도로 욕망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꿈은 꾸었으리라. - P64

심장이 똑같이 옥죄어드는 기분이었다. 똑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건 이게 다인데. 이건 결코 진정한 내 것이 될 수 없겠지. 이 여잔 날 떠날 거야‘ 이 순간에 어떻게 다른 머리칼을,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분명 오직 이 돌이킬 수 없는 기분에 달려있었다. - P68

서로 간에 불꽃이 일어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다. 순식간에, 그들은 예전에 알았던 쾌락을 더는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육체의 한계를 잊었다. 수치심이라든지 담대함이라든지 하는 단어들이 그만그만하게 추상적이 되었다. 이제 한두 시간 뒤에는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이 부도덕하게 여겨졌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어떤 동작도 결코 불쾌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고, 육체적 사랑에 관해 서툴고 유치한 날것의 언어들을 재발견하며 소곤거렸다. 그들은 주거나 받은 쾌락에 대한 자랑과 감사를 끊임 없이 서로에게 돌렸다. 또한 이 순간이 특별하다는 걸, 한 인간에게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보다 더 멋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예기치 않았으나 이제는 필수적이 되어버린 육체적 열정이 – 하마터면 그들 사이에서 스치고 지나갈 뻔했던 – 진정한 이야기를 만들려하고 있었다. - P70

"난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널 볼 수 없어, 마음이 아프지 않고는 네가 떠나는 걸 볼 수 없고,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 앞에서 너한테 얘기할 수 없을 거야." - P71

불안은 – 분명 질투심보다 더 근원적으로 – 열정의 강력한 가속장치라는 걸 알 정도로 그는 충분히 책을 읽었다. 게다가 그는 스캔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는, 이 연회장 한복판에서 손을 뻗어 루실을 품에 끌어안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걸 확신했다. 이 확신 때문에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지 않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모호하고 강렬한 기쁨마저 느꼈다. 은폐의 기쁨 말이었다. - P80

많은 은밀한 관계들이 이런 식으로 침묵과, 질문의 부재와, 되짚지 않는 문장과, 작정하고 선택한 평범한 단어, 너무 평범해서 엉뚱해 보이는 단어에 의해 발각된다. - P83

"사람들은 점점 두려운 거예요. 늙는 게 두렵고, 가진 걸 잃을까 봐 두렵고, 원하는 걸 얻지 못할까 봐, 삶이 지루해질까 봐, 자기가 지루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운 거죠. 늘 불안하고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거예요." - P86

루실은 생각했다. ‘디안이나 앙투안 얘기만 나왔다 하면 거북해져서 이렇게 말문이 막히면 안 되는데. 바보 같으니라고. 샤를에게 진실을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앙투안이 좋아요, 그와 함께 웃고 싶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요. 이렇게. 하지만 날 사랑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최악의 말을 할 수 있겠어? 샤를은 아마 내가 앙투안과 자는 건 참아도 함께 웃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어 할 거야. 당연해, 질투하는 이에게 웃음보다 더 끔찍한 건 없으니까.‘ - P88

모진 걸 싫어하는 그녀는 자신이 모질어질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것에 반가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도, 누구도, 어떤 애원으로도 그녀가 이튿날 앙투안을 만나는 걸, 앙투안의 육체와 숨결과 목소리를 되찾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 았고, 평소 모든 계획이 늘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유동적이었던 그녀였던 만큼, 이 집요한 욕망이 좀 전에 앙투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날뛸 듯한 기쁨보다 더 크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 P89

별안간 힘 센 사랑 – 그와 동시에 행복한 사랑 – 을 발견했고, 자신의 존재가 오직 한 존재로 한정되기는커녕 무한해지고 채우기 불가능해지고 열광적인 존재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표 없이 흘려보냈던 그녀는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에 초조해했다. - P90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진실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녀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가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비겁했다. - P91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육체는 한없는 열광과 경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 감정은 기억력이 순간의 격렬함에 의해 증발해버리는 절대적인 감정이어서, 헤어진 뒤에도 구체적인 기억을, 가령 어둠 속에서 속삭였던 말 하나, 또는 동작 하나를 절망적으로 더듬어보려 해도 허사인, 그런 절대적인 감정이었다. - P92

그들은 거의 넋이 나가서 몽유병 환자들처럼 헤어졌다가, 그로부터 채 두 시간이 못 되어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 요소, 유일한 현실이라는 듯 오로지 다시 만날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머지는 전부 의미 없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이 그들을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절 속에서, 다른 것들 속에서, 기다림 때문에 장애물이 되어버린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그들을 지탱해주었다. - P92

그들은 매번 다소 겁에 질린 얼굴로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행여 교통체증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그는 그를 붙잡고 늘어질 출판사 협력 작가를 맞닥뜨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한 사람들처럼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 P92

그녀는 그들의 열정을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위태위태하고 환상적인 선물로 간주했다. 그래서 거의 미신적인 믿음으로 다음 단계를 계획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기를 좋아했고, 그를 그리워하기를 좋아했다. 그와 떳떳하게 함께 살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숨는 것도 좋아했다. 매 순간의 행복으로 충분해했다. 혹여 그녀가 두 달 전부터 상투적인 사랑 노래에 감동하는 자신에게 문득문득 놀라는 일이 있다 해도, 사랑 노래의 대략적인 주제인 ‘독점욕‘이나 사랑의 ‘영원성‘ 따위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도덕은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인 바, 의도치 않았으나 뿌리 깊은 냉소주의에 필연적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감정을 분별할 수 있다면 자연히 이 냉소주의에 이르게 되고, 사기꾼들이나 허언증 환자들만이 평생토록 너저분한 낭만주의에 빠져 지낼 수 있다는 듯이. - P95

그녀는 앙투안을 사랑했으나, 샤를에게 애착이 있었다. 앙투안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샤를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두 남자를 평가하면서 그녀는 정작 자신에게는 – 그 둘 사이에 걸쳐있는 자신을 경멸할 만큼 –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충족감의 철저한 결여가 그녀를 잔인하게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녀는 행복했다. - P96

앙투안은 누구일까? 어디 출신이고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을까? 그녀는 침대에 앉았다가 문득 거북해져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와서 무례를 범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그녀는 앙투안이 ‘타인‘이고, 그의 손이며 입술이며 눈이며 육체에 대해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꼭 그와 굳게 맺어진 공모자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 P97

우리는 행복할 때 다른 이들을 기꺼이 자신의 행복의 조력자로 간주한다. 다른 이들이 의미 없는 참관자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때는 오직 우리가 더는 행복하지 않을 때다. - P104

그는 정말이지 그녀가 혼자서 삶을 헤쳐 나갈 수 없으리라 여겼고, 그 순간 그녀는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그에게 안전감 이상의 애착을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무책임을 받아들였다. 15년 전 그녀의 무의식적 선택, 영원히 청소년기에 머물겠다는 그 결정을 인정해주었다. 똑같은 결정에 앙투안은 틀림없이 분노하리라. 어쩌면 그녀가 되고 싶은 사람과 샤를이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완벽한 일치가 그 모든 열정보다 더 강력하고, 그녀에게 그 모든 열정을 부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 P106

그가 루실에게 춤을 청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지그시 얹혔다. 그와 마주 댄 손바닥의 감촉, 그리고 그녀의 볼과 그녀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있는 그의 볼 사이에 확보된 야릇한 거리감, 그녀가 정확히 감지한 그 욕망의 거리감에 그녀는 동요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군중을 의식하여 그들을 속이기 위해 슬쩍 지루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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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녹은 초에 달라붙은 초콜릿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거고, 그게 바로 생일날의 맛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초콜릿일 뿐이고, 그저 평범한 초콜릿이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빠는 이런 내 생각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어느 해 8월 26일엔가 정비소에서 아빠와 함께 있을 때 이런 내용을 설명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자 아빠는 되도 않는 소설 그만 쓰고 12호 몽키 스패너나 건네 달라고 했다. 나는 아빠한테 8호 린치를 건네주었다. - P99

「여긴 아주 오래전에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야. 아주아주 오래된 곳이라는 말이야. 아무한테도 여기에 대해서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맹세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비비안이 내 손을 거두었다.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어. 이제 우리는 서로 믿는 사이잖아.」
비비안이 나더러 입을 다물라고 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왜냐하면 어찌나 멋진지 나는 그럴 수만 있다면 온 세상에 대고 마구 고함을 질러 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P111

그 아이가 어찌나 예쁘던지 나는 그 아이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서 비비안이 되고 싶었다. 비비안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으니까. 그러다가 곧 내가 정말 그 아이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면 거울을 쳐다보지 않는 한 비비안을 볼 수 없게 될 거고, 그럴 바엔 차라리 비비안이 내 살갗 속으로 들어오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더라도 내가 그 아이를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면 적어도 내가 가는 곳마다 그 아이를 데려갈 수는 있을 터였다. - P113

나는 감히 비비안한테 같이 살자는 말을 다시 꺼내지 못했다. 비비안이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마음을 정리한 터였다. 그래서 그저 이따금 넌지시 암시만 할 뿐이었다. 예컨대 동물이 그려진 벽지를 더 좋아하는지 꽃이 그려진 벽지를 더 좋아하는지 같은 걸 묻고는 이내 다른 화제로 옮겨 가는 식이었다. 어쨌든 그건 급한 일도 아니니까. 우리가 서로 알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물었을 때, 비비안은 어깨만 으쓱했다.
「잘 모르겠어. 아마 2주 정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나는 비비안을 좋아했다. 그 아이도 시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 P121

1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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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계획이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훈장을 타고, 그런 다음 돌아오면 모든 사람이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 적어도 그러는 척이라도 해줄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담배도 피울 수 있는데, 그야 뭐 텔레비전을 보면 언제나 그랬다. 게다가 그런다고 해서 딱히 불을 낼 위험도 없어 보였다. 어차피 전쟁터는 노상 불바다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린다면, 군인들이 죄다 약간 더러워 보인다는 거였는데, 그게 과연 내 마음에 들지는 영 확신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소총 한 자루와 매일 갈아 신을 깨끗한 양말이 필요할 터였다. 만일 그것들이 없다면,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 같았다. - P20

그렇긴 해도 주유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펐다. 주유소는 태어나서 줄곧 살아왔던 곳이고, 또 주유소 말고는 다른 아는 곳도 없을뿐더러, 주유소는 나한테 썩 잘 어울리는 곳이기도 했다. 아빠는 다른 데도 여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보다 이런 게 약간 낫거나 저런 게 약간 낫거나 할 수 있지만, 결국 다 마찬가지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이따금 도(道) 소속 제설차를 고치기도 하던 소규모 자동차 정비소의 휘발유나 윤활유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냄새였다. 지금 이 순간 그 냄새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 P23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그때부터 아빠는 나한테 일거리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나는 셸 점퍼를 입고서 자동차 기름 탱크 채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손님들이 그걸, 그러니까 셸 점퍼를 좋아할 뿐 아니라 쌈박해 보인다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쌈박하다는 건 뭔가 좀 멋진 건가 보다고 느꼈다. - P23

책상 위에 놓인 멋진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사진을 가리키며, 아빠는 나한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나도 겉모습은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와 비슷하지만, 그 속에 든 엔진은 2CV용 엔진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아빠는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솔직히 확신은 들지 않았다. 알파 로메오처럼 멋진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도대체 뭐하러 기름 냄새 맡으며 엔진을 들여다본단 말인가? 나는 자동차란 잘 굴러가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알파 로메오처럼 그렇게 새빨갛고 그렇게 멋들어진 자동차라면 특히 더 그렇다. - P30

나는 기억을 잘 못한다. 적어도 기억해야 마땅한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이따금 쓸 데없는 세부 사항 같은 건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기도 했다. 예컨대 아빠의 연장통에 적힌 번호들은 절대 외우지 못하면서도 그 안의 확대기들을 정돈하는 순서는 틀리지 않는 식이었다. 어쨌든 숨을 헐떡이며 소나무 사이를 오르는 사이에 학교는 아득히 멀어져 갔고, 주유소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행여 누군가가 〈한 달 전〉 또는 〈10년 후〉라고 말한다면, 나는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러니까 내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 순간, 뭔가에 베이면 눈물이 나고, 입에 문 카랑바르가 턱에 철커덕 달라붙어 행복한 지금 이 순간에 비추어 어떻게 해야 그 시간을 위치시킬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 P32

고원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같았다. 풀이 짧게 깎여 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산들 사이사이로는 대양만큼이나 드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이곳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본래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반짝이는 것만큼이나 좋다. 이내 깎아 놓은 꼴의 내음 속으로 나는 코를 들이박았다. - P41

별안간 붉은 빛이 희게 변하면서 고원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고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풀밭 위로는 엄청나게 큰 바위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와 있었는데, 그 바위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두 눈을 감기 직전에 나는 커다란 진홍빛 꽃이 달린 뿌연 잠두를 보았다. 꽃대에서는 이슬을 머금은 딱정벌레가 해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거룩한 아기야, 우리 동물들도 너를 경배한단다. - P41

산이라고 하면, 이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산은 언제나 거기에 꼼짝 않고 있고, 어느 누구한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 모양 그대로일 따름으로, 등만 돌리고 돌아서면 눈 깜짝할 사이에 초콜릿이나 18호 스패너로 변하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계곡이며 주유소, 고원을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이다. 설사 겨울에 눈이 내린다 해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데, 그건 그냥 변장을 했을 뿐 사실상 같은 거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놀이 비슷한 것이었다. - P50

비비안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지금처럼 계속 바위 밑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고,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때까지 지낼 만한 곳을 찾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정말이지 바깥에서 자는 거라면 질색이니까. 내 침대가 그리웠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그 침대에서 잤다. 아무튼 난 그렇게 믿고 있다. 비록 그사이 내가 자라서 발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다 하더라도 비행기 무늬가 찍힌 커다란 내 베개를 떠올리면 아랫배가 울컥하고 죄어 왔다. 난 내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고 느꼈다.
[…] 나는 노란색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 P69

나는 비비안이 계속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나의 제일 친한 친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전에 학교에서는 나를 빼고 모두가 친한 친구들이었다. 이를테면 커다란 우정의 비눗방울 같아서, 나만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위에서 뱅뱅 맴도는 식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토성의 고리가 떠올랐는데, 어느 납작한 초콜릿 포장에 그 형태가 그려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 그림을 내 침대맡에 붙여 놓았다. - P78

이윽고 밤이 되었고, 나는 할 수 없이 움막 안으로 돌아왔다. 한구석에서 바랜 짚단을 발견한 나는 그걸 바닥에 펼친 다음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낀 채 그 위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그간 전쟁이며 훈장, 영웅적인 금의환향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부끄러웠다. 나중에 집에 돌아갔을 때 비겁한 녀석이란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여왕님이 있었다. 여왕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맹세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영웅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거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80

나는 겨울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겨울은 흰색이고 회색이고 검은색이며 기분 좋은 연기 냄새가 난다고, 겨울은 거짓말의 계절이고, 주유 손잡이는 뜨거우니까 조심하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손가락을 꽁꽁 얼게 만드는 계절, 사람들이 뭘 하겠다고 약속은 하지만 사실은 실내에 있는 게 더 좋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계절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아직 겨울이 되려면 기다려야 하니까 지금은 겨울에 대해 말하기기 쉽지 않았다. - P93

비비안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따라서 웃었다(나는 계속 울면서 동시에 웃었다). 그러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자동차 먼지를 싹 씻어 내리는 것과도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바깥으로 나가 비가 나를 씻어 내게 했는데, 그러는 나를 보고 엄마는 얼른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죽게 된다면서 고함을 지르곤 했다. 비비안의 웃음소리가 나를 씻겨 주었으므로 앞으로 우리 사이에는 깨끗하고 맑은 공기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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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화감독(위대한 다큐멘터리 감독은 거의 없다)은 그의 몫이 아니었고, 동시대 많은 이들이 누린 뛰어난 재능도 그의 몫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줄 뿐이었다. - P18

나는 부엌 저편으로 걸어가 어머니가 액자에 끼워 벽에 걸어놓은 조그만 신문기사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아버지가 만든 첫번째 영화에 대한 기사였는데, 리뷰 내용 대부분이 호의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좀체 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짧은 문장이 하나 있었다—기사 말미의 문장으로, 이 문장에서 그 비평가는 아버지의 영화를 "젊은 천재의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이후 세월이 흐른 뒤 깨닫게 된 것인데,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단어들과 그것들에 실린 무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엌 식탁에 홰를 친 새처럼 앉아, 만트라를 암송하듯이, 나는 머릿속에서 그 단어들을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내가 그 단어들을 충분히 여러 번 말하면, 그 뉘앙스를 모사하면, 분명 모든 것이 그 단어들처럼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 P20

어머니는 참을성 있게 아버지 말을 듣고 있었다. 데이비드를 옹호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의 결함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데이비드를 나쁘게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가 싸움을 원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저 어안이 벙벙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아 있었고, 아버지가 마침내, 이 사람의 성격에 대해 당신이 진짜 아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알아야 할 건 많지 않아. 데이비드는 아주 단순한 사람이거든. 제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신이 알지 모르겠지만." - P26

"기억해." 아버지가 말했다. "결국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은, 처음에 단순해 보이는 사람들이야." - P27

그해 여름의 저녁에는, 간혹 인근 언덕 지대에서 코요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와 나가고 없을 때 나는 걸핏하면 내 침실 창문 밖에 있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집 뒤쪽의 가파른 경사지에 사는 녀석들의 울음소리를 듣곤 했다. 녀석들은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어 해가 거리 저편으로 떨어지고 나면, 멀리서 개들처럼 우짖었다. 뒤뜰의 잔디 너머로,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어두운 대양과 요트 정박지에 있는 자그마한 집들의 불빛들이 보였다. 나는 내 유년의 모든 때를 그 지붕에서 보냈을 것이다. 바다를 내다보면서, 충분히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 뭔가 의미심장한 발견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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