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녀를 육체적으로는 소유했으나, 인간으로서는 완벽하게 놓쳤다. 물론 그들은 함께 웃었고, 웃음은 사랑의 고유한 특성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프레카틀랑에서 눈물이 차오른 루실의 눈을 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를 엄습했던 그 기이한 향수를 되새기면서,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이 쾌락으로 맺어지고, 웃음으로 맺어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고통으로도 맺어져야 했다. 그녀가 그와 다른 의견을 내세울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는 그에게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을 터였다. 떠나버렸으므로. - P170

어떻게 두 달 동안 둘이서 그토록 행복했으면서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어떻게 그토록 비관적이고 이기적이고 분별없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후회했고, 그래서 몰래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보름 동안 그녀 생각만 했는데도, 정작 그녀는 그가 자기를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녀는 그, 앙투안의 뿌리 깊은 어리석음 때문에 불행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속히 그녀를 찾으러 가야 했다. 가서 모든 걸 설명하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하리라. 그녀를 품에 안고서 용서를 구하고, 몇 시간이고 키스하리라. - P172

칸 역에 도착 하니 침대칸이 남아있었다. 밤새, 그들의 뒤엉킨 얼굴들 위로 열차의 울부짖음과 조명 빛들이 어른거렸다. 더러 열차가 철컹거리며 기차역에 정차할 때면, 철도원이 쇠막대로 바퀴 상태를, 파리로 향하는 그들의 여로를, 그들의 운명을 점검했다. 속력은 그들의 쾌락을 증폭시켰다. 열차가 미친 듯 질주하면, 고이 잠든 벌판에 대고 이따금 격렬한 신음을 쏟아내는 건 바로 그들이었다. - P177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할 줄. 또한 그가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완벽할 줄. 모든 것이 그녀가 짐작하던 대로 전개되었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절망감이 그녀 안에서 그에게 사랑받았다는 희미한 자부심과 뒤섞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이렇게, 이 커다란 아파트에 홀로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는데··· - P181

루실은 신비롭고 기이한 병의 포로가 된 기분이었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렇게 부르기가 망설여졌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비판적인 두 존재가 그 지경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그 지경으로 단단히 밀착되어서,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기에 단지 ‘사랑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터무니없게 여겨졌다. 그녀는 덧붙일 다른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은 결국 우리가 충만함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실은 언젠가, 어느 훗날엔, 이 충만함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 어찌하면 좋을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행복했고, 두려웠다. - P184

두 사람은 어긋나고 위태했던 공동의 과거 속을 달렸던 반면, 평화롭고 영구적일 수 있을 공동의 미래를 꿈꾸지는 않았다. 루실은 계획들과 평범한 삶을 앙투안보다 더 두려워했다.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홀린 사람들처럼, 펼쳐지는 현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태양이 서로에 대한 허기가 충족되지 않은 채 한 침대에 누운 그들을 비추며 바라보았고, 저녁이면 지는 태양이 열기가 가신 부드럽고 비할 데 없는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순간순간 그들은 지극히 행복해서, 더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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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어쩌면 비비안하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 아이 집에 자꾸 가서 그때마다 덧창이 닫혀 있는 걸 보다 보면 그 아이가 덜 보고 싶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는 비비안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는 데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단단히 매달렸고, 그런 까닭에 시간이 약이란 말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 P179

날씨가 더웠다. 여기 계곡에선 여름이 곧 물러가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여름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느긋하게 머무르면서 편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꼭 나처럼, 앞날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 P189

나는 산을 오르면서 엄마 생각을 했고, 엄마 머리에서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며 찌직찌직 전기가 튀는 엄마의 포옹을 상상했다. 눈물이 방울져 내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신 울지 않겠다는 내 다짐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 P191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부끄럽다. 나는 비비안이 미웠다.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셈이었다. 아니, 그게 사실이었다. 나는 비비안을 사랑한 것만큼이나 강렬하게 그 아이를 증오했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그 아이를 마크레 녀석만큼이나 미워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석보다 더 미워했을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마크레 녀석은 적어도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언제나 나를 놀리고, 깎아내리고, 때리고, 다른 애들 보는 데서 나를 모욕했다. 그야 뭐 늘 있는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하루는 사랑하는 척하다가 이튿날엔 모르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 P204

나는 이 모든 걸 받아들였다. 모르는 것보다, 내 머리에 감당하기 어려운 뭔가를 이해하라고 억지를 쓰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나았다. 내가 비비안을 배반한 거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내 잘못 때문이란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왜냐하면 뭐든 언제나 내 잘못이었고, 그런 것엔 이골이 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은 마치 내 낡은 초록색 벨벳 파자마처럼 편안했다. - P215

나는 내가 아이 시절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 모든 건,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했다. 비비안의 우정뿐 아니라 그 아이의 짜증까지도 사랑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 두 가지는 모두 비비안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다 아름다웠다. 그러니 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 P215

처음엔 동굴로 가려는 건가 싶었지만, 비비안은 나더러 제자리에서 맴돌라고 하지 않았다. 어딜 걷고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높은 고원을 감싸는 어둠뿐이었는데, 그 어둠이 어찌나 짙던지 번개가 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우리 두 사람만 보일 따름이었다. 그런 밤에는 심지어 어둠을 가르며 걷는 우리 두 사람조차 진짜로 존재하긴 하는 건지, 행복하기 위해 서로를 만들어 낸 건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자연스럽게 들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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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갈래?"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런 초대를 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고, 한편에서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어머니가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저 수영 팀이에요."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팀이라."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맞다. 물론 그래야지." 그런 다음, 그것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영원히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테라스로 통하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 P33

나는 늦게까지 수영 연습을 했고, 차우네 식구들과 저녁을 먹었고, 늦은 밤에 혼자 해변을 산책했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와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아버지 마음에 상처를, 입히려 한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버린 책임을, 소식 한 자 없이 지나가는 그 세월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에게 전가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려는 듯이 보였고, 나는 남은 생을 밖에서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저녁마다 어머니와 데이비드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리면서—걱정이 됐다. - P35

내 거실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영화의 프리미어 시사회 날 밤에 찍은 사진이 있다. 그들은 뉴욕의 어느 소극장 밖에 서 있고, 아버지는 위쪽으로 보이는 마르키의 불빛을 가리키고 있다. 아버지는 슈트 차림으로, 어머니는 긴 이브닝드레스 차림으로,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본 내 기억 속 유일한 때다. 그들은, 그 둘은,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살짝 숙이고, 자신들이 아직 보지 못하는 무언가에 맞서, 서로를 감싸안은 모습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다. - P45

휴스턴은 예전의 휴스턴이 아니다. 나는 이곳에 오래 살아서 오일 붐을 기억하고 있다.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 마을은 하룻밤 사이에 도시가 됐고, 마을은 예전의 것들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더이상 그 시절을 낭만적으로, 일부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는 바라보지 않지만, 이따금은 그 시절이, 대기에 흐르던 그 에너지와 그때의 낙관과 희망이 그립다. 내가 좋아한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세상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걸어들어 와, 당신 눈빛이 마음에 든다며 백 달러짜리 지폐를 내밀 수도 있었다. 그다음날 밤에는 누군가에게 백 달러짜리 지폐를 건네는 사람이 당신이 될 수도 있었다. - P51

"당신은 자연스러워." 그날 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진짜야."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뜻인가?"
"비현실적이기도 해. 좋은 의미로." - P53

일 년 후 우리는 같이 살게 되었고, 다시 일 년 후 우리는 결혼을 했다. "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거야." 결혼식 날 밤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 점을 분명히 알아둬. 왜냐하면, 좋든 싫든, 당신은 이제 내게서 떨어질 수 없으니까."
"그거 협박이야, 약속이야?"
"둘 다지." - P54

"있잖아, 폴." 그녀가 말한다. "가끔씩은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아. 그건 죄악이 아니잖아."
"뭐가 죄악이 아니야?"
"행복한 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건 죄악이 아니야." - P57

대학 때 이후로는 대마초를 피워보지 않았는데, 부엌 식탁에서 대마초를 얇게 펴 마는 동안 아마도 캐런은 평생 이런 것을 피워본 적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녀가 내 행동을 못 마땅하게 여기리라 생각하며 수영장으로 나가 불을 켠다. 그런 다음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가 담뱃불을 붙이고, 잠시 후 수면 위에 반듯이 누워, 별들 아래서 유유히 떠다닌다. 중력 없이, 짝도 없이, 길을 잃고서. - P66

나는 방문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자기들 삶의 어떤 시기에는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고 상상해본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내 방문 앞에 서서, 내가 한 번도 데이트해보지 못한 온갖 여자아이들에 대해서 친구들과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 P68

대신, 내 아내는 우울해 보인다. 그녀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녀가 자기 자신의 삶에 너무나 낙담하고, 지치고, 모든 환상이 깨진 나머지, 다른 누구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P72

나는 마흔여섯의 나이에 대마초를 피우는 습관이 들어버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희극적이며, 굉장히, 정말 굉장히 슬프게 느껴지는 일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뭔가가 잘못되었어!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 P76

"내 인생은 끝났어요." 탤벗이 말한다. "나는 열여덟 살인데 내 인생은 끝났어요."
"스탠퍼드 말고도 학교는 많아."
"나한테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나의 의식 상태가 변질돼 있지 않다면, 나는 뭔가 친절한 말을, 이 아이를 위로해줄 만한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탤벗을 보며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편입할 수 있잖아. 줄곧 그런 제도가 있었어."
"네. 아마도요." - P79

나는 그가 내 대답에 보여주는 관심이 고마웠고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차분하면서도 사려 깊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 P90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있어 가장 큰 방해 요인이지요." […]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 P92

그에게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가슴속에서 따뜻한 일렁임을 느꼈다. 그것은 내 또래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열뜬 흥분과는 또다른 종류의 감정, 좀더 부드럽고 보다 포괄적인 온기였다. 나는 그가 내게 숨김없이 질문하는 것과 내가 이야기할 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는 나를, 내가 상상하기에 자신의 동료를 대할 것 같은 태도로, 성인으로, 대등한 사람으로 대했다. - P93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 자기를 넘어서는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 이해하지 못 할 수준, 하고 그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도, 보어조차도, 그 지점에 도달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 P94

나는 팔꿈치를 괴고 누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순간이면 그의 얼굴은 언제나 더없이 온화하고 순해 보였고, 그러면 나는, 기숙사 방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가 언젠가 내가 결혼할 남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과는 아주 다른 감정이다. 나는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남은 생을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가정을 일구고 그의 곁에서 늙어갈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런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란 것을, 불행하지 않을 수 있으리란 것을, 나는 알았다. - P99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고, 나와 함께 있는데도 취할 만큼 나를 믿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봐야 단둘이 보낸 두번째 시간이었고, 우리의 공식적인 첫 데이트였는데도,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편안하고 평온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마치 평생토록 어떤 깊은 방식으로 그를 알아온 것 같았다. 와인을 마시고 웃으면서 조그만 부엌에서 그의 곁에 앉아 있을 때, 내 마음이 은밀하게 떨렸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 P101

나는 어떤 일도,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어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나누는 모든 말들은 그 바깥의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소녀 시절 품었던 환상, 아버지의 친구분들이나 학교 선생님들—그러니까 항상 나이가 많은 남자들—이 연루된 환상에 대해 고백할 때면 로버트는 미소를 짓곤 했다. 나는 그때 이미 내 안에 어떤 충동이 있었고, 그런 상사 편의 열병을 고백함으로써, 그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용할 수도 있었을 그 기회를 잡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소녀 시절의 성적 로망을 듣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P106

그것이 로버트가 내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 이상 나아갈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희로써 의도된 종류의 희롱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단지, 자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일부는 그가 그 순간에 뭔가를—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해주길 바랐지만, 그가 나를 안으려는 의도를 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나는 로버트가 우리 관계에 대해 나처럼 죄의식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을 다음 단계로 가져가는 것에 대한 그의 양면적인 감정은, 그로 인해 훗날 내가 자신에게 분개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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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 아저씨에 따르면, 자기 고향에선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픈 일만 만들어 낼 뿐이라서, 아예 말하는 습관을 버렸다고 했다. 더구나 양치기는 사람 만날 일도 없으니. 사람들이 만일 자기한테 말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던졌다면 기꺼이 대답을 했을 테지만, 이제껏 아저씨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대부분의 시간을 벙어리로 지낸다는 거였다.
나도 동의했다. 그건 내가 주유소에 있을 때하고도 약간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는 대신에 장난감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말을 되는 대로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데 있었다. 그래야 내 안에 말이 쌓여 있지 않으니까. - P153

땀범벅이 되어 잠에서 깼을 때, 새벽빛은 마티 아저씨가 거실 한쪽에 마련해 준 내 침대 맞은편 벽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암튼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고, 그래서 엄마를 상상했다. 상상 속 엄마를 꼭 끌어안고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날이 완전히 밝은 다음에도 나는 기다렸다. 환한 빛이 괴물들을 완전히 쫓아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니까.
하지만 괴물들이 무서운 건, 그놈들은 항상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몸을 숨긴다는 점이다. - P157

그날 아침, 떠오르는 아침 햇빛으로 노랗게 물든 마티 아저씨의 방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이상하고, 정상이 아니고, 문제투성이다. 좋다, 그야 뭐 그렇다 치자. 모든 사람이 틈만 나면 그렇게들 말하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말로키오, 자기만의 악몽과 자기만의 마크레가 있다. 그저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 P159

〈그래서?〉라고 묻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건 나쁜 소식을 불러오는 종류의 질문이라는 걸 나는 일찍부터 알았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네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말했어. 그래서 네 할머니는 너를 무척 사랑하지만 이제는 세상을 떠나셨지. 그래서 대답은 〈아니야〉가 맞아, 산타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아.」 나는 이런 식으로 〈그래서〉란 말을 한 보따리는 더 댈 수 있다. - P167

나는 마티 아저씨에게 날 재워 주고 먹여 주면 일손을 보태겠다고 제안했다. 아저씨는 내가 양을 접해 본 경험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내가 최근 들어 제일 가까이서 본 양이라곤 아기 예수님 탄생 연극 때 마르탱 발리니가 연기한 양이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나만큼 양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고, 양들도 나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문제는 내가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서,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뭔가에 꽉 막혀서 버벅거린다는 거였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티 아저씨는 내가 곧 흥분 상태에 빠지리라는 걸 눈치채고는, 나한테 양의 앞과 뒤를 분간할 줄 아는지 물었다. 그거라면야 물론 알고 있었다! 마티 아저씨는 내 어깨를 두번 툭툭 치더니 말했다.
「좋아, 넌 합격이야.」 - P171

나는 사튀르냉이 죽은 이후 그토록 슬펐던 적은 없었다. 사튀르냉이 차에 치어 죽었을 때 엄마는 나를 꼭 안고 달래 주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시간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슬픔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건지, 내 참.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얼마 후 잠이 깼을 때 나는 덜 슬펐고, 조금씩 조금씩 나쁜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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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마크레 녀석 얼굴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만 녀석의 부리부리한 두 눈이 심술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날 따름이었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녀석이거늘. 모든 것은 아득히 먼 옛이야기일 뿐이었다. - P133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마지막으로 비비안을 만났을 때 뭔가 허튼짓을 하거나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한 게 분명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그때 우리는 소원을 빌었고, 비비안은 행복해 보였다. 그냥 비비안이 나를 배신했고, 그래서 이 지경이 된 것이었다. 본래 여자들은 말이 많은 법이고, 기회만 있으면 배신하므로, 절대 믿을 게 못 된다. 조로도 결혼을 안 했고, 내가 주름 잡힌 유니폼 때문에 조로보다 덜 좋아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슈퍼맨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만 봐도 맞는 말이다. 만일 헌병들한테 내가 있는 곳을 알려 준 장본인이 비비안이라면? 아니, 그 아이는 절대 그랬을 리 없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다. 헌병들은 고원을 이 구석 저 구석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으리라. 그게 전부다. - P134

번뜩 계시처럼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 커다란 당나귀 울음 소리를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이 모든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고원 같은 것도 비비안도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나는 절친한 여자 친구도 없고, 동굴에서 기도하지도 않았고, 산에서 물을 마시지도 않은 거였다. 어쩌면 나란 사람 자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습의 나, 튀브 다리의 바보인 나조차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보통 사람, 정상적인 사람,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소년으로 절벽에 난 Z자 길을 기어오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몹시 현기증이 났고, 이거야말로 이 희한한 이야기 중에서 유일한 사실이며, 그 후 추락했다. 지금은 계곡 구석에 떨어져서 서서히 죽어 가는 중이다. 생명이 꺼져 가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정신 나간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 P135

나는 하나씩 떨어져 있는 단어들이라면 대부분 이해하지만, 그것들을 붙여 가며 읽으려고 하면 그때부터, 학교에서 리본 댄스를 할 때처럼 모든 것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렸다. 리본이야 원래 뒤섞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었는데도 나는 그 리본조차 올바른 순서대로 섞지를 못 했다. 하물며 편지를 읽어야 한다니, 말을 말아야지. - P137

갑자기 시커먼 분노가, 골짜기를 온통 막아 버릴 만큼 엄청난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건 순서대로 뒤섞여 주지 않는 리본에 대한 분노였고, 내가 읽지도 못 할 편지를 쓴 비비안에 대한 분노였으며, 나 자신과 내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아빠, 그런 아빠를 용서하는 엄마에 대한 분노였으며,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틀어막았다고 확신하는 순간에도 어떻게 된 건지 내 방으로 끊임없이 기어 들어오는 개미들에 대한 분노였다. 그건 1번 위치에 놓았는데도 빵을 태워 버리는 토스터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고, 또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허기와 목마름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 P138

조금씩 조금씩 통증이 사라졌다. 나는, 예전에 언젠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처럼, 둥둥 떠다녔다. 초록색 선들과, 눈깔사탕처럼 동그랗게 쏟아져 내리는 빛, 뿌옇게 날리는 모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 속에 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물에서 구조해 주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커다란 평온을 느꼈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나는 머지않아 물에 도달한다는 걸, 파도가 나를 물가 모래밭으로 밀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떨떨할 테지만 무사한 상태로 말이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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