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아무리 애원해도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호의를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당신의 선의와 연민을 갈구하는데도? 내 말을 믿어라, 프랑켄슈타인. 나는 선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 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 내 조물주인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데 하물며 내게 아무것도 빚진 바 없는 당신의 동포들은 어떻겠는가? 나를 상대도 하지 않고 증오할 뿐이다. 사막 같은 산맥과 음침한 빙하들이 내 안식처다. 수많은 날들을 여기서 방황했다. 얼음 동굴도 나는 두렵지 않다. 그러니 여기가 인간들이 불평하지 않는 내 유일한 거주지다. 이 황량한 하늘을 나는 반가이 맞는다. 저 하늘은 당신의 동포들보다 내게 훨씬 더 친절했다. 무수한 인류가 내 존재를 안다면, 당신처럼 무장을 하고 나를 파멸시키려 들 것이다. 그러니 나를 혐오하는 그들을 어찌 내가 증 오하지 않겠는가? 원수들을 봐줄 생각은 없다. 내가 불행하니 그들도 내 불행을 함께 느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신은 내 불행을 보상해주고 악행에서 구해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내 죄는 점점 더 커져서, 당신과 당신 가족뿐 아니라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마저도 그 분노 속에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동정심을 갖고 날 경멸하지 말라.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저버리든 불쌍하게 여기든 하라. 그때 는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내 말을 들어라. 죄지은 자라 해도, 아무리 잔인한 죄인이라 해도, 인간의 법은 선고를 내리기 전 변론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가. 내 말을 들어라, 프랑켄슈타인. 당신은 내게 살인죄를 씌우고, 양심에 거리낌도 없이 피조물을 파멸시키려 하고 있다. 오, 인간의 영원한 정의를 찬양할지어다! 하지만 살려달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말을 들어달라. 그다음에,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지가 있다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작품을 파괴하도록 하라." - P133

그들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이와 처녀는 따로 떨어져서 흐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이 불행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심히 흔들렸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불행하다면, 나처럼 불완전하고 고독한 존재가 비참하다는 게 조금은 덜 이상했다. 그러나 어째서 이 귀한 사람들이 불행한 걸까? 쾌적한 집(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이 있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있는데. 싸늘할 때 몸을 따뜻하게 덥혀줄 불도 있고, 배가 고플 때 먹을 맛있는 음식도 있는데. 훌륭한 옷을 입고 있고, 서로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날마다 애정과 친절로 가득한 표정을 서로 나누지 않는가. 그들의 눈물은 무슨 뜻일까? 정말로 고통을 표현하는 걸까? 처음에 나는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꾸준한 관심과 시간이 처음에 수수께끼처럼 보이던 모습들을 설명해주었다. - P147

점차 나는 훨씬 더 의미심장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또박또박 끊어지는 소리를 사용해 서로의 경험과 감정을 소통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끔 그들이 하는 말이 듣는 사람의 마음과 얼굴에 쾌감이나 고통, 미소나 슬픔을 떠오르게 할 때가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것은 진정 신과 같은 과학이었기에 나도 터득하고 싶다는 열망이 타올 랐다. 그러나 시도를 할 때마다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사람들의 발음 빨랐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명백한 연관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미스터리를 풀어낼 단서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을 쏟으며 달이 몇 번 공전할 때까지 축사에 머문 결과, 나는 이야기에 가장 친숙하게 등 장하는 물건들의 이름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 이 각각의 소리에 일치하는 관념들을 배우고 발음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이해하거나 적용하지는 못해도, 내가 분간할 줄 아는 단어들은 또 몇 개 더 있었다. ‘좋은, 사랑하는, 불행한 같은 말들이었다. 겨울은 이렇게 보냈다. - P148

처음에는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해 몹시 어리둥절했지만, 차츰 나는 그가 말을 할 때와 같은 소리를 아주 많이 낸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종이 위에 쓰여 있는 말 기호들을 그가 이해하는 거라 추측한 나는, 이 기호들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쳐올랐다. 그러나 기호가 지칭하는 소리들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 과학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지만 아직 대화를 알아 들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온 정신을 집중해 노력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아무리 오두막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도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기 전까지는 그런 시도를 해서는 안 되었다. 언어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생김새의 기형을 사람들이 눈감아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와 대조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의 기형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 P150

나는 오두막 사람들의 완벽한 외모에 찬탄했다. 그 우아함, 아름다움, 그리고 섬세한 얼굴. 하지만 투명한 물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겁에 질렸었던지! 처음에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서, 물에 비친 상이 진짜로 나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자, 쓰라리게 아픈 좌절과 울분의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 이 참혹한 기형이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 - P151

봄철의 상쾌한 소나기와 온화한 따스함에 땅의 면모가 크게 변했다.이런 변화가 있기 전에는 동굴에 처박혀 있는 것 같던 사람들이 흩어져 나와 다양한 농경기술로 일하기 시작했다. 새들이 더 명랑한 곡조로 노래했고, 나무에 새싹이 트기 시작했다. 행복하고 행복한 땅!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량하고 습하고 건강하지 못했던 그곳이 이제는 신 들의 거주지로 부족함이 없었다. 자연의 매혹적인 풍경에 내 정신이 고양되었다. 과거는 기억에서 지워지고, 현재는 고요했으며, 미래는 희망의 밝은 햇살과 환희의 기대로 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 P153

이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이상한 감정이 밀어닥쳤다. 정말로 인간이란 그토록 강력하고 그토록 덕스럽고 훌륭한 동시에 그토록 사악하고 천박하단 말인가? 인간은 어떤 때는 온갖 사악한 원칙들을 이어받은 후계자에 불과해 보이다가, 또 어떤 때는 고귀하고 신성한 특질을 한 몸에 체현한 듯했다. 위대하고 덕망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건 분별력을 갖춘 존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 같았다. 기록에 드러난 무수한 사람들처럼 천박하고 사악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저열한 타락 같았다. 이런 상황에 빠지는 건 심지어 눈 먼 두더지나 무해한 벌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친구를 살해하려 들 수 있는지, 심지어 법과 정부는 왜 존재하는 건지, 아주 오랫동안 나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악행과 유혈사태의 세세한 내용을 듣고 나니, 경이로운 마음은 사라지고 혐오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 P159

지식의 본질이란 얼마나 희한한 것인가! 일단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치 바위에 이끼가 끼듯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끔은 생각과 감정을 모두 떨쳐버렸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의 감각을 초월하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은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미덕과 선한 감정을 우러러보고, 오두막집 식구들의 다정한 태도와 쾌활한 성격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몰래 홈쳐보는 것 외에는 그들과 교류할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 충족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아가타의 친절한 말, 매력적인 아라비아 여인의 생기 넘치는 미소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온화한 훈계와 사랑받는 펠릭스의 열띤 대화는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비참하고 불행한 괴물! - P160

축사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의 실험실에서 가져온 옷의 주머니에서 종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제 그 기호를 해독할 수 있었기에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건 나를 창조하기 전 넉 달 동안 당신이 기록한 일지였다. 당신은 이 서류에 작업의 진척 상황을 세밀히 기록해놓았다. 당신도 틀림없이 이 일지를 기억하겠지. 바로 여기 있다. 내 저주받은 기원에 대해 참조할 사항이 모조리 여기 적혀 있다. 내 탄생까지 이어지는 혐오스러운 정황들이 모두 세세하게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불쾌하고 역겨운 이 몸에 대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언어는 당신 자신의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읽어가면서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내가 생명을 얻은 그날을 증오한다!‘ 나는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저주받은 창조자! 어째서 자기마저 역겨워 등을 돌릴 흉악한 괴물을 빚어냈단 말인가? 신은 연민을 갖고 자신을 본떠 인간을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내 모습은 당신의 더러운 투영이고, 닮았기 때문에 더욱 끔찍스럽다. 사탄에게는 그를 숭배하고 격려해줄 동료 악마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독하고 미움을 받는다.‘ - P174

그사이 오두막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 부유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만족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감정은 잔잔하고 평화로웠으나, 내 감정은 날마다 더욱 격해지기만 했다. 지식이 쌓일수록 내가 얼마나 비참한 추방자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물론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나 달빛에 비치는 내 그림자를 볼 때면, 덧없는 허상이고 변덕스러운 그늘일 뿐인데도,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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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비탄과 공포가 다시 덮쳐왔다. 어스름이 지고 어두운 밤이 사위를 에워쌌다. 시커먼 산맥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내 기분은 더욱 침울해졌다. 온 사방이 광활하고 흐릿한 악의 소굴 같기만 했다. 그리고 막연하게 나는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참담한 운명을 지닌 인간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 예언은 들어맞았다. 한 가지 정황이 틀렸을 뿐이다. 무수한 불행을 상상하고 두려워했지만 알고 보니 실제로 견뎌내야 할 운명은 백배 더 가혹했던 것이다. - P97

그녀의 무죄를 믿었다. 알고 있었다. 그 악마가, 내 동생을 죽인(그 사실은 단 1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놈이 심지어 소름 끼치는 놀이 삼아 이 죄 없는 이를 죽음과 치욕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내가 처한 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중의 의견이, 그리고 재판관들의 얼굴이 벌써부터 내 불행한 희생자를 단죄하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움에 법정 밖으로 황급히 뛰쳐나갔다. 피고의 고통도 나보다는 덜했다. 그녀는 결백의 힘으로 견디고 있었지만, 회한의 날카로운 이빨은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으며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 P110

나는 감방 한구석으로 물러나 나를 사로잡은 소름 끼치는 고뇌를 감추려 했다. 절망! 누가 감히 절망을 논하는가? 다음날 삶과 죽음의 섬뜩한 경계선을 넘을 불쌍한 희생자도 나만큼 깊고 쓰라린 고뇌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박박 갈면서 영혼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 P114

진짜 살인자인 나는 가슴에 살아 있는 불사영생의 벌레를 안고 있었다. 이 벌레는 희망도 위로도 허락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도 흐느꼈고, 또한 불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결백한 불행이었고, 아름다운 달을 스쳐가는 구름처럼, 한동안 숨길 수 있을지언정 그 빛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고뇌와 절망이 내 심장의 핵까지 관통하고 말았다. 나는 마음속에 지옥을 품고 있었고, 그 무엇도 지옥 불을 끌 수 없었다. - P115

아버지는 성품과 습관이 눈에 띄게 달라진 나를 고통스럽게 지켜보시다가 엄청난 슬픔 앞에 무너지는 나의 어리석음을 분별 있게 타일렀다. "빅토르, 아비도 괴롭다는 생각을 넌 하지 않느냐? 누구도 내가 네 동생을 사랑한 만큼 자식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 말을 하는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슬픔을 과하게 드러낸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큰 불행을 느낄 터인데 그걸 막는 것도 우리의 의무가 아니겠느냐? 또한 너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지나친 슬픔은 발전도 즐거움도 가로막고 심지어 일상생활까지 방해해서, 사람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버린단 말이다."
이 충고는 선의에서 우러나왔으나 내 경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여타의 감정에 쓰디쓴 회한이 뒤섞이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아마 앞장서서 비탄을 감추고 식구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에게 절망스러운 얼굴로 답하고, 최대한 아버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 P120

소나무들은 키가 크거나 풍성하 지는 않았지만 어둡고 진중하여 엄혹한 풍광을 두드러지게 했다. 저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광막한 안개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물에서 피어나 맞은편 산들을 두터운 화환처럼 휘감고 산봉우리들을 모두 짙은 구름에 숨기고 있는데, 어두운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어서, 주위를 에워싼 풍광에 우수를 한층 더하고 있었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훨씬 우월한 감수성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로 인해 훨씬 더 유약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될 뿐인데. 우리의 욕망이 굶주림, 갈증, 그리고 성욕에 국한되었다면, 거의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 한줄기, 우연한 한마디, 아니면 그 말로 전달되는 풍경 하나하나에 흔들리지 않는가. - P129

우리는 쉰다. 꿈은 잠의 독을 푸는 힘을 지녔다.
우리는 일어난다. 방황하는 생각 하나에 하루가 오염된다.
우리는 느끼고, 사고하고, 추론한다. 웃거나 흐느낀다.
어리석은 괴로움을 껴안거나, 근심을 쫓아버린다.
똑같다.기쁨이든 슬픔이든, 내 떠나는 길은 여전히 자유로우니.
인간의 어제는 결코 내일과 같지 않으리니, 변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상뿐!

* 퍼시 비시 셸리의 「무상에 관하여」의 후반부에서 인용 - P129

나는 후미진 암벽에 머무르며, 이 기적과 같은 압도적인 풍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다, 아니 광막한 얼음의 강은 산 사이로 굽이치며 흘렀고, 꿈처럼 몽롱한 산봉우리들이 후미진 강가 구석구석을 굽어보며 드높이 떠 있었다. 얼음이 반짝거리는 산꼭대기 들이 구름 위에서 햇빛을 받아 빛났다. 슬픔에 가득찼던 내 심장은 이제 환희 비슷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외쳤다. "방황하는 정령들이여, 진정 비좁은 잠자리에서 쉬지 않고 이 세상을 헤매고 있다면, 내게 이 희미한 행복만은 허락해주시오. 아니면 차라리 삶이라는 기쁨에서 나를 데려가 길동무로 삼아주시오." - P130

"악마!" 나는 외쳤다. "감히 내게 다가오겠다는 말이냐? 이 팔이 그 흉측한 머리에 가할 맹렬한 복수의 일격이 두렵지도 않으냐? 어서 꺼져, 이 더러운 벌레! 아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내 발길에 짓밟혀 먼지가 되어버려! 아, 네 비참한 목숨을 끝내버리고 네놈이 그토록 사악하게 살해해버린 희생자들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런 반응은 예상했다." 악마가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끔찍한 흉물을 저주하지. 그러니 살아 있는 그 어떤 생물보다 비참한 나를 얼마나 증오하겠는가! 하지만 당신, 내 창조자인 당신이 나를 혐오하고 내치다니. 나는 네 피조물이고, 우리는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지 않는 한 끊을 수 없는 유대로 얽혀 있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감히 당신이 이렇게 생명을 갖고 놀았단 말인가?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겠다. 내 조건에 동의한다면 나도 인간들과 당신을 평화롭게 내버려두겠다. 하지만 거절한다면, 살아남은 당신 친구들의 피로 배부를 때까지 죽음의 밥통을 채울 것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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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성공으로 흥분한 가운데 태풍처럼 나를 몰아친 그 다채로운 감정들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삶과 죽음의 경계야말로 이상적인 목표였다. 내가 최초로 돌파해 어두운 세상에 폭포수처럼 빛이 흘러들게 만들었기에. 새로운 종이 생겨나 조물주이자 존재의 근원인 나를 축복하리라. 헤아릴 수도 없는 행복하고 탁월한 본성들이 내 덕에 탄생하리라. 나만큼 자식의 감사를 받아 마땅한 아버지는 이 세상에 다시없으리라. 이런 생각들을 따라가던 나는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지금은 불가능해도) 시간이 지나면 겉보기에는 죽음으로 부패된 육신에도 새 생명을 줄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 P66

완벽한 인간은 언제나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야 하고, 정념이나 찰나의 욕망에 휘둘려 마음의 평정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지식의 추구가 이 법칙의 예외가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 매진하고 있는 공부가 사랑하는 마음을 약하게 하고 어떤 연금술로도 합성할 수 없는 소박한 즐거움을 아끼는 취향을 망가뜨리려 한다면, 그 공부는 분명 불법적이며 인간의 정신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 법칙이 항상 준수되었다면, 그리하여 어느 한 사람도 가족의 애정이 주는 평온을 깨뜨리는 목적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는 노예국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나라를 삼키겠다는 야욕을 갖지 않았을 것이요, 아메리카는 좀더 서서히 발견되어 멕시코와 페루 제국은 파멸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 P68

살면서 일어나는 다양한 우연들도 사람의 감정만큼 변덕스럽지는 않다. 나는 생명 없는 육신에 숨을 불어넣겠다는 열망으로 거의 2년 가까운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 이 목적을 위해 휴식도 건강도 다 포기했다.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열정으로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하지만 다 끝나고 난 지금, 아름다웠던 꿈은 사라지고 숨막히는 공포와 혐오만이 내 심장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 P72

아! 산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 무시무시한 얼굴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미라가 다시 살아나 움직인다 해도 그 괴물처럼 참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미완의 상태에서 괴물을 찬찬히 뜯어본 적은 있다. 그때도 흉물이었다. 하지만 그 근육과 관절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단테도 상상 못했을 괴물이 되어버렸다. - P73

마치 고독한 길을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걷는 사람처럼, 한 번 뒤돌아보고는 다시 걷고, 영영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악마가
바로 뒤에서 그를 따라 걷고 있음을 알기에.

콜리지의 시 「늙은 수부의 노래」 중에서. - P74

함께 걸어가는 길에 클레르발은 내 기운을 북돋워주려고 애썼다. 흔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진심이 배어나는 동정심으로 달래주었다."불쌍한 윌리엄!" 그가 말했다. "그 어여쁜 아이가. 이제는 천사가 된 어머니와 함께 잠들어 있겠구나. 친구들은 슬퍼하고 흐느껴 울겠지만 그애는 이제 평온하게 쉬고 있어. 암살자의 손길도 느끼지 못할 테고, 그 보드 라운 몸을 뗏장이 덮고 있으니 아픔도 모를 테지. 우리는 이제 더이상 그애를 불쌍하게 여겨서는 안 돼.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장 괴로운 법이야. 시간밖에는 아무 위로가 없으니까. 죽음은 악이 아니라든가, 인간의 마음은 사랑하는 대상의 영원한 부재 앞에서도 절망을 극복한다는 식의 스토아학파의 주장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지. 카토마저도 동생의 시신 앞에서는 흐느꼈으니까." - P95

여정은 몹시 우울했다. 처음에는 슬픔에 빠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 어서 빨리 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고향이 가까워지자 발길을 늦추게 되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물밀듯 밀어닥치는 착잡한 감정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익숙했으나 6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스쳐지나갔다. 그 시간 동안 모든 게 얼마나 변했을까? 확실한 건 급작스럽고 황막한 변화 한 가지가 일어났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수천 가지 작은 상황들이 서서히 또다른 변화들을 일으켰으리라. 훨씬 조용히 진 행된 변화들이겠지만 결정적 의미가 덜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었다. 뭐라 형용할 수도 없는 수천 가지 이름 없는 죄악 때문에 온몸이 떨렸다. - P95

길은 호숫가를 따라 이어지다가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좁아졌다. 쥐라의 검은 산등성이와 몽블랑의 빛나는 정상이 전보다 더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아이처럼 흐느꼈다. "다정한 산들아! 내 아름다운 호수야! 방랑자를 어찌 이렇게 반가이 맞아주는 거냐? 봉우리는 선명하고, 하늘과 호수는 파랗고 잔잔하구나. 이는 평화의 전조일까, 내 불행을 조롱하기 위한 걸까?"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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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내내, 일을 끝낸 제본업자가 말없이 처음에 온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리다는 단 한 번 몸짓도 단 한 번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한참, 이제 분명히 알고 있듯 곧 남편이 될 사람의 크고 근면한 손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침대가에 그대로 앉아서 밀랍 같은 어머니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감긴 눈썹, 불현듯 더 크고 강해 보이는 코, 모호하고 불합리하게 행복하게 웃는 것 같은 입술, 너무나 친숙하던 그 모습이 갑자기 달라 보였고, 이제야 세세한 것 전부를 포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 무언가 오래된 것, 날카로운 것, 강한 것이 안에서 서서히 풀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 P44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아가씨는 예쁘지 않다. 그녀의 얼굴은 예쁘지도 추하지도 않은 매우 흔한 얼굴이다. 당시 서민층 젊은 여성에겐 일반적으로 입술, 볼, 피부를 꾸미는 화장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보건대, 극히 평범하고 무난해 보인다. 감춘 듯 언뜻언뜻 비칠 뿐인 젊음의 광채를 띤 검은 눈, 온화함과 인내심 가득한 가축과 다를 바 없이 슬프고 주눅든 표정, 목뒤로 빗어 시골 여자같이 튀어나온 너른 이마를 도드라지게 한 밤색 머리칼, 풍만한 가슴의 작은 몸뚱이에 솟은, 검정 벨벳 띠를 두른 가는 목, 대단치 않은······ 그런 아가씨가 조베카처럼 번화한 거리, 그것도 페라라에서, 어제 못지않게 오늘도 늘 은밀한 저녁식사 자리로 가기 전이면 특히 활기를 띠고 고무되는 그 시간에 도망치듯 지나가는 모습이 사진기 렌즈는 물론 누군가의 눈에도 예사롭게 보였을 리 없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 P69

말과 행동, 상상과 실행에는 어쨌든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
하지만 염탐하고 보고하는 즐거움, 추측하고 추론하는 즐거움, 이제 막 공식화된 비타협적이고 굳건한 의도를 뒤엎고 가없이 불투명한 미래로 미루는 공상의 은밀한 즐거움은 그 날 끝 무렵에 생긴 사건의 실체 앞으로 돌연 중단돼야 할 운명이었다. - P77

식당 안으로 안내되어 그가 들어오자, 혼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던 가장은 얼굴을 들고 반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 보았다. 의사는 가장의 바로 앞에 마주 앉더니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 성, 아버지, 직업, 심지어 주소까지······ 그의 자기소개는 꼭 규정에 따른 호적부 신고 같았다. 그 특이하고 어떤 면에서는 마비시키는 것 같은 정중한 태도나 식당 분위기에 갑자기 형성된 긴장감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의 긴 소개는 어쩌면 지겹고 현학적이며 그 장황한 상세함으로 인해 최소한 기괴해 보였을 수 있다. - P79

엘리아 코르코스! 그가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그전까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집안의 네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름이 있었어? 의사 직업의 프록코트, 하얀 실크넥타이,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식탁 가장자리 위까지 살짝 솟아오른 챙이 널따랗고 치켜올라간 검은 모자(이 모든 것이 중고품으로 구입했기 때문인지 어딘지 낡고 가볍게 색이 바랬고), 마치 이상한 것을 다루고 불신하는 것같이 조곤조곤 발음하면서 더러 짧은 문장이나 개별 낱말을 사투리로 섞어 풀어내는 장광설, 정상적인 재료보다 더 연약하고 섬세하며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 사람의 얼굴, 그리고 그의 원래 가족이 아무리 평범하고 게다가 현재 독신남으로 혼자 살고 있다고 해도 여실해 드러나 보이는 개인의 재정적 지위, 이 모든 것이—그들이 금세 알아차린 바와 같이—그가 부유한 계층에 속하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질적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 P79

"두 갈랫길이 있다면, 하나는 힘들고 어렵고 불확실한 길, 또하나는 쉽고 평탄하고 아주 편한 길 앞에서 솔직히 말해 사람이 어떤 길을 택할지는 너무 자명하지요!" 마지막으로 콧수염 아래 입술이 이따금 감지할 수 없게 옆으로, 분명히 냉소적으로 씰룩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들어서게 된 길은 진짜로 평탄한 걸까요? 진짜로 쉽고 아주 편리한 걸까요? 그걸 누가 아나요?" - P84

그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그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위대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가끔씩 페라라가 아직 오스트리아 치하였을 때 광장에서 하얀 제복의 병사들이 총검을 장착하고 대주교 궁전 앞에서 보초를 서던 아득한 시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사람들은 그 병사들을 증오와 경멸의 눈길로 보았다. 그 당시, 1860년대 이전에는 그도 무척 젊었고 때로는 사람들과 똑같이 그랬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불쌍한 젊은이들, 대개 보헤미아나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특사 추기경의 포도밭 말뚝처럼 거기에 서 있게 된 그 젊은이들한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무기 앞에서는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 명령이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 P96

훌륭한 거실로 불리던 방, 델라기아라 거리 쪽으로 나 있고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어두침침하고 커다란 방의 찬장에 꽂혀 있는 기도서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구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그 냄새로 배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우실리아가 더러 그 방에 들어가 어둠속에 몇 시간 동안 앉아 혼자 생각에 잠길 때면(젬마가 죽은 뒤인 1926년 그녀가 집안 가정부 자격으로 들어와 엘리아와 여코포와 함께 살게 된 뒤에도, 심지어 1943년 엘리아와 야코포가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난 뒤에도, 훌륭한 거실을 마치 은신처같이 이용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불쌍한 살로모네 코르코스 씨도 그 방 안에 뼈와 살을 갖춘 모습으로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마치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고, 소리 없이 숨을 쉬며, 그녀 옆에 앉아 있는 것처럼.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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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 그들을 내리덮었다. 캐드펠은 마음을 가다듬은 뒤 먼저 리샤르트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거대한 어둠과 끊임없이 흔들리는 초라한 불빛, 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머나먼 곳, 추정할 길 없는 시간, 다가와 그를 휩싸는 고독, 온갖 문제들과 사람들을 휘감은 세계, 그 모든 것들이 영원의 무늬를 이루어 잠에 빠진 호흡만큼이나 완전한, 규칙적인 리듬이 되었다. - P219

환영으로 인한 것이든 죄악으로 인한 것이든 종교적 발작에 빠져 자신의 몸을 내던지면서도 그는 날카롭고 딱딱한 물체에 부딪치거나 혀를 깨무는 법이 없었다. 술 취한 사람을 다룰 때처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이 고통에 짓눌린 수사를 살펴보는 동안, 그로서는 마음 한 켠에서 일어나는 신랄한 생각을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종교적인 열정의 과잉 또한 과음과 다름없는 도덕적 문제야. - P225

캐드펠은 콜룸바누스 수사의 몸을 덮어주고 머리를 잘 받쳐준 뒤에 제자리로 돌아가 종교적인 의무를 이어갔다. 그러나 콜룸바누스 수사를 찾아온 뭔지 모를 것 때문에 집중력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뒤였다. 마음을 모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저기 엎어져 있는 젊은이에게 더 자주 눈길이 갔고, 그가 숨을 잘 쉬고 있는지 확인하느라 더 자주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뭔가 소득을 얻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했던 밤이 무겁게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밤은 덧없는 숭배처럼 무의미하고 잡념처럼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길고 음울하고 지루한 밤이었다. - P222

"이제 뭘 해야 하죠? 아시는 게 있으면 말씀 좀 해주세요. 우린 아직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어요. 오늘이 바로 아버님을 매장하는 날인데도요."
"나도 알고 있네." 캐드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지난밤 일어난 일을 놓고 내내 의혹을 느끼던 중이었어. 이 모든 것을 계획된 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네. 또 하나의 기적을 일으켜 수도원의 목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지. 하지만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는 것을 보니 억지로 꾸민 일이라고 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콜룸바누스 수사는 전에도 이런 발작을 몇 번이나 일으킨 적이 있네. 굉장히 격렬하고 특이한 발작이지. 아마 거짓으로 꾸며내긴 힘들 게야. 발작이 덮칠 땐 마치 악마가 그의 몸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거든. 시장의 광대도 콜룸바누스 수사의 발작을 흉내낼 수는 없을 걸세. 그래, 칼날 위에서 춤을 추듯 천국과 지옥의 뜻에 따라 공중으로 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있는 법이지." - P226

"나도 알고 있네." 캐드펠이 말했다. "나도 자네와 같은 웨일스 사람이야. 하지만 연민의 문을 꽉 닫아두어서는 안 되네. 자네도 나도 그러한 연민의 감정을 필요로 할 때가 올지 누가 알겠나!" - P227

"야심가들은 수도복을 입고서도 엄청나게 출세를 한다잖아요. 혹시 부수도원장님이 원장 자리에 오를 때를 대비해 길을 다져놓느라 저러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자기가 먼저 수도원장이 되려고 남몰래 계획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성인들이 예언자로 쓰는 이라고 여기저기 소문 날 사람은 부수도원장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잖아요."
"부수도원장께서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셨겠구먼." 캐드펠이 말했다. "하지만 외경이 사라지고 나면 그분도 이런저런 생각을 할 걸세. 성녀의 일생을 기록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은 바로 부수도원장이야. 그 기록의 마지막에 이번 순례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겠지. 아마 콜룸바누스 수사는 그저 익명의 수도사 정도로 적히기 쉬울 걸세. 그의 역할도 그저 성인과 부수도원장을 연결하는 사자쯤으로 축소될 테고. 연대기 작가들은 몽상가들 이 소리 높여 스스로의 이름을 외쳐대는 것만큼이나 손쉽게 온갖 이름들을 편집하고 삭제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친구는 무척이나 완고한 노르만 가문 출신일세. 그런 사람들이 평생 정원이나 가꾸는 성직자로 남겠거니 생각하면서 젊은 아들을 베네딕토 수도원에 집어넣는 법은 없지." - P236

성처녀가 잠든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순교했다가 기적적으로 부활한 뒤 성처녀는 부수녀원장으로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동시에 그녀는 악마의 손에서 달아나듯 자기를 추적하는 크래독 왕자의 손을 피해 달아난 소녀, 금욕과 성스러움을 낭만적으로 사랑한 신앙심 깊은 철부지 아가씨이기도 했다. 이 순간 캐드펠의 마음은 둘로 분열되어, 그녀와 그녀를 필사적으로 추적했던 연인 모두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 젊은이는 거친 열정에 사로잡혀 영과 육이 한꺼번에 절멸되었다. 그에게 기도를 바치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위니프리드 성녀가 아니라 오히려 그일지도 모르는데. 결국, 그를 위해 기도한 이는 오직 위니프리드 성녀뿐이리라. 그녀도 초연함과 불가사의함을 두루 갖춘 웨일스인이었고, 그러니 아마 그의 멸절당한 육신을 끌어모아 다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한마디쯤 기도를 남기지 않았을까? 열정을 억제할 수 있으며 의심을 품지 않는 인간, 그러나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한 바로 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자신을 그토록 탐내던 사람이 있었던 시절을 돌아보며 작은 기쁨을 느끼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 P239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경스러운 죄악에 대한 두려움, 그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동정, 그리고 엉뚱한 오해에 대한 죄책감으로 생긴 침묵이었다. 진실이 번갯불처럼 머리 위로 떨어져 모두를 압도했다. 리샤르트는 화살을 맞고 죽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비겁한 자가 두터운 은폐물 사이에서 뛰어나와 그의 등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성녀가 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 한 사악한 인간이 저지른 일이었다. - P251

"땅에는 그보다 더 끔찍한 고해를 듣고서도 머리칼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제들이 얼마든지 있어. 자신이 용서받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것이 오히려 오만이지." - P267

"참 이상한 일이죠!" 잠시 후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동안은 누굴 아무리 증오해도 그렇게 야비한 짓은 해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네." 캐드펠은 컵을 휘저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리는 괴로움에 처하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니까. 확실히 용서받을 방법이 있다는 것만 알면 그 어떤 짓이라도 저지르고말고." - P267

"우리 여자들,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기르느라 평생을 희생해요. 그런데 아이들은 자라고 나면 우리 얼굴에 먹칠을 하는 식으로 보답하죠.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죠?"
"아드님은 부인께 온당하게 보답할 겁니다." 캐드펠은 쾌활하 게 말했다. "아드님이 속죄하는 동안 묵묵히 지켜보되, 아드님의 죄를 변명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아드님은 그에 대해 무척 고마워하고 사랑으로 보답할 겁니다." - P269

남자나 여자나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들입니다, 휴 신부님. 상처를 입으면 똑같이 피를 흘리지요. 물론 저 부인이 가엾고 딱한 여자인 건 사실이지만, 가엾고 딱한 남자들 또한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못지않게 튼튼한 여자도 있고, 우리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여자들도 있습니다." 캐드펠은 마리암을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 쇼네드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 P271

카이는 자신의 나귀를 내버려둔 채 아네스트의 나귀에만 안장을 올려주었다. 캐드펠 수사는 등자 대신 자연스럽게 자신의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발을 받쳐 밀어 올리는 순간, 그녀의 옷자락에서 향기로운 체취가 흘러나왔다. 팔목에 그녀의 부드러운 살갖이 스친 그 찰나야말로 이 길고 지루한 하루를 통틀어 그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대들 두 사람처럼 선랑한 이는 다시 만나볼 수 없을 게야." 캐드펠이 말했다. "존 형제는 실수를 저질렀네. 하지만 누구에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법이지. 이번만큼은 존 형제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 P276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엥겔라드는 다소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뿐 그들이 할 일은 무척이나 간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휴 신부님과 부수도원장님을 찾아가야죠. 그분들께 사건의 경위를 정확히 설명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밖에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을 죽인 게 잘한 일은 아니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전 제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뿐 아니라 그는 자기를 비난할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제나 최선의 길이니까. 캐드펠은 그 천진함에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머지않아 저 성품도 다치게 되겠지. 이미 한 차례 부당한 누명을 쓰고도 그의 천진함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고, 청년은 아직도 사람이란 이성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 P303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입니까?" 캐드펠은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 단잠을 방해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쯤은 자기방어를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그는 당혹감과 위축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귀더린에서 운구해 온 것에 대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경이로운 일을 이루어내더라도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을 텐데요." 그러나 제롬 수사가 보다 열정적으로 호응해줄 말상대를 찾아 떠난 뒤, 캐드펠은 스스로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놀라지 않는가? 혹시 내가 기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는 것일까? 그래, 진정한 기적이라면, 그 까닭 같은 건 있을 수 없으니까. 기적이란 이성과 합치될 수 없으니까. 기적은 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생겨나는 법, 합리적인 기적은 기적이 아니니까. 그러자 문득 기쁨과 위안이 찾아왔다. 정말이지 세상이란 특이하고 괴상한 곳이라 생각하며, 그는 다시금 유쾌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P331

"귀더린 사람 중 아직까지도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휴 신부님 한 분밖에 없을 것 같구먼." 캐드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분께 양심의 짐을 지우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단 말이지. 그래, 휴 신부님께는 역시 알리지 않는 편이 낫겠소."
"그분이 진실을 알게 될 염려는 없습니다. 그 일에 대해 의문을 품으신 적도 없고, 질문 한번 하신 적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전 그분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침묵에는 여러 미덕이 있잖습니까." - P336

평화로운 세월의 거리를 두고 돌이켜보아도 당시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웨일스 출신의 작은 성녀(그분께 축복이 있기를)께서는 당신이 늘 원하던 곳에 그대로 누워 계시며, 그것이 기쁜 나머지 그곳 사람들을 살뜰히 돌보아주시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 우리가 가질 권리가 있으며, 아마도 우리가 가져야 마땅할 것을 가지고 있지. 전체적으로 보면 만족스러운 귀결이야. 교환한 살인자의 시체라 해도 신앙의 대상이 되면 진짜와 거의 다름없는 구실을 하는 법. 물론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야! 이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저 귀더린의 선량한 주민들은 앞으로도 줄곧 좋은 일들을 기대해도 될 성싶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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