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내내, 일을 끝낸 제본업자가 말없이 처음에 온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리다는 단 한 번 몸짓도 단 한 번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한참, 이제 분명히 알고 있듯 곧 남편이 될 사람의 크고 근면한 손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침대가에 그대로 앉아서 밀랍 같은 어머니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감긴 눈썹, 불현듯 더 크고 강해 보이는 코, 모호하고 불합리하게 행복하게 웃는 것 같은 입술, 너무나 친숙하던 그 모습이 갑자기 달라 보였고, 이제야 세세한 것 전부를 포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 무언가 오래된 것, 날카로운 것, 강한 것이 안에서 서서히 풀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 P44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아가씨는 예쁘지 않다. 그녀의 얼굴은 예쁘지도 추하지도 않은 매우 흔한 얼굴이다. 당시 서민층 젊은 여성에겐 일반적으로 입술, 볼, 피부를 꾸미는 화장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보건대, 극히 평범하고 무난해 보인다. 감춘 듯 언뜻언뜻 비칠 뿐인 젊음의 광채를 띤 검은 눈, 온화함과 인내심 가득한 가축과 다를 바 없이 슬프고 주눅든 표정, 목뒤로 빗어 시골 여자같이 튀어나온 너른 이마를 도드라지게 한 밤색 머리칼, 풍만한 가슴의 작은 몸뚱이에 솟은, 검정 벨벳 띠를 두른 가는 목, 대단치 않은······ 그런 아가씨가 조베카처럼 번화한 거리, 그것도 페라라에서, 어제 못지않게 오늘도 늘 은밀한 저녁식사 자리로 가기 전이면 특히 활기를 띠고 고무되는 그 시간에 도망치듯 지나가는 모습이 사진기 렌즈는 물론 누군가의 눈에도 예사롭게 보였을 리 없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 P69
말과 행동, 상상과 실행에는 어쨌든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 하지만 염탐하고 보고하는 즐거움, 추측하고 추론하는 즐거움, 이제 막 공식화된 비타협적이고 굳건한 의도를 뒤엎고 가없이 불투명한 미래로 미루는 공상의 은밀한 즐거움은 그 날 끝 무렵에 생긴 사건의 실체 앞으로 돌연 중단돼야 할 운명이었다. - P77
식당 안으로 안내되어 그가 들어오자, 혼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던 가장은 얼굴을 들고 반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 보았다. 의사는 가장의 바로 앞에 마주 앉더니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 성, 아버지, 직업, 심지어 주소까지······ 그의 자기소개는 꼭 규정에 따른 호적부 신고 같았다. 그 특이하고 어떤 면에서는 마비시키는 것 같은 정중한 태도나 식당 분위기에 갑자기 형성된 긴장감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의 긴 소개는 어쩌면 지겹고 현학적이며 그 장황한 상세함으로 인해 최소한 기괴해 보였을 수 있다. - P79
엘리아 코르코스! 그가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그전까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집안의 네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름이 있었어? 의사 직업의 프록코트, 하얀 실크넥타이,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식탁 가장자리 위까지 살짝 솟아오른 챙이 널따랗고 치켜올라간 검은 모자(이 모든 것이 중고품으로 구입했기 때문인지 어딘지 낡고 가볍게 색이 바랬고), 마치 이상한 것을 다루고 불신하는 것같이 조곤조곤 발음하면서 더러 짧은 문장이나 개별 낱말을 사투리로 섞어 풀어내는 장광설, 정상적인 재료보다 더 연약하고 섬세하며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 사람의 얼굴, 그리고 그의 원래 가족이 아무리 평범하고 게다가 현재 독신남으로 혼자 살고 있다고 해도 여실해 드러나 보이는 개인의 재정적 지위, 이 모든 것이—그들이 금세 알아차린 바와 같이—그가 부유한 계층에 속하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질적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 P79
"두 갈랫길이 있다면, 하나는 힘들고 어렵고 불확실한 길, 또하나는 쉽고 평탄하고 아주 편한 길 앞에서 솔직히 말해 사람이 어떤 길을 택할지는 너무 자명하지요!" 마지막으로 콧수염 아래 입술이 이따금 감지할 수 없게 옆으로, 분명히 냉소적으로 씰룩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내가 들어서게 된 길은 진짜로 평탄한 걸까요? 진짜로 쉽고 아주 편리한 걸까요? 그걸 누가 아나요?" - P84
그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그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위대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가끔씩 페라라가 아직 오스트리아 치하였을 때 광장에서 하얀 제복의 병사들이 총검을 장착하고 대주교 궁전 앞에서 보초를 서던 아득한 시절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사람들은 그 병사들을 증오와 경멸의 눈길로 보았다. 그 당시, 1860년대 이전에는 그도 무척 젊었고 때로는 사람들과 똑같이 그랬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불쌍한 젊은이들, 대개 보헤미아나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특사 추기경의 포도밭 말뚝처럼 거기에 서 있게 된 그 젊은이들한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무기 앞에서는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 명령이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 P96
훌륭한 거실로 불리던 방, 델라기아라 거리 쪽으로 나 있고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는 어두침침하고 커다란 방의 찬장에 꽂혀 있는 기도서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가구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그 냄새로 배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우실리아가 더러 그 방에 들어가 어둠속에 몇 시간 동안 앉아 혼자 생각에 잠길 때면(젬마가 죽은 뒤인 1926년 그녀가 집안 가정부 자격으로 들어와 엘리아와 여코포와 함께 살게 된 뒤에도, 심지어 1943년 엘리아와 야코포가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난 뒤에도, 훌륭한 거실을 마치 은신처같이 이용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불쌍한 살로모네 코르코스 씨도 그 방 안에 뼈와 살을 갖춘 모습으로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마치 아직도 세상에 살아 있고, 소리 없이 숨을 쉬며, 그녀 옆에 앉아 있는 것처럼.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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