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그들을 내리덮었다. 캐드펠은 마음을 가다듬은 뒤 먼저 리샤르트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거대한 어둠과 끊임없이 흔들리는 초라한 불빛, 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머나먼 곳, 추정할 길 없는 시간, 다가와 그를 휩싸는 고독, 온갖 문제들과 사람들을 휘감은 세계, 그 모든 것들이 영원의 무늬를 이루어 잠에 빠진 호흡만큼이나 완전한, 규칙적인 리듬이 되었다. - P219

환영으로 인한 것이든 죄악으로 인한 것이든 종교적 발작에 빠져 자신의 몸을 내던지면서도 그는 날카롭고 딱딱한 물체에 부딪치거나 혀를 깨무는 법이 없었다. 술 취한 사람을 다룰 때처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이 고통에 짓눌린 수사를 살펴보는 동안, 그로서는 마음 한 켠에서 일어나는 신랄한 생각을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종교적인 열정의 과잉 또한 과음과 다름없는 도덕적 문제야. - P225

캐드펠은 콜룸바누스 수사의 몸을 덮어주고 머리를 잘 받쳐준 뒤에 제자리로 돌아가 종교적인 의무를 이어갔다. 그러나 콜룸바누스 수사를 찾아온 뭔지 모를 것 때문에 집중력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뒤였다. 마음을 모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저기 엎어져 있는 젊은이에게 더 자주 눈길이 갔고, 그가 숨을 잘 쉬고 있는지 확인하느라 더 자주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뭔가 소득을 얻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했던 밤이 무겁게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밤은 덧없는 숭배처럼 무의미하고 잡념처럼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길고 음울하고 지루한 밤이었다. - P222

"이제 뭘 해야 하죠? 아시는 게 있으면 말씀 좀 해주세요. 우린 아직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어요. 오늘이 바로 아버님을 매장하는 날인데도요."
"나도 알고 있네." 캐드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지난밤 일어난 일을 놓고 내내 의혹을 느끼던 중이었어. 이 모든 것을 계획된 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네. 또 하나의 기적을 일으켜 수도원의 목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지. 하지만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는 것을 보니 억지로 꾸민 일이라고 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콜룸바누스 수사는 전에도 이런 발작을 몇 번이나 일으킨 적이 있네. 굉장히 격렬하고 특이한 발작이지. 아마 거짓으로 꾸며내긴 힘들 게야. 발작이 덮칠 땐 마치 악마가 그의 몸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거든. 시장의 광대도 콜룸바누스 수사의 발작을 흉내낼 수는 없을 걸세. 그래, 칼날 위에서 춤을 추듯 천국과 지옥의 뜻에 따라 공중으로 제 몸을 던지는 이들이 있는 법이지." - P226

"나도 알고 있네." 캐드펠이 말했다. "나도 자네와 같은 웨일스 사람이야. 하지만 연민의 문을 꽉 닫아두어서는 안 되네. 자네도 나도 그러한 연민의 감정을 필요로 할 때가 올지 누가 알겠나!" - P227

"야심가들은 수도복을 입고서도 엄청나게 출세를 한다잖아요. 혹시 부수도원장님이 원장 자리에 오를 때를 대비해 길을 다져놓느라 저러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자기가 먼저 수도원장이 되려고 남몰래 계획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성인들이 예언자로 쓰는 이라고 여기저기 소문 날 사람은 부수도원장님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잖아요."
"부수도원장께서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셨겠구먼." 캐드펠이 말했다. "하지만 외경이 사라지고 나면 그분도 이런저런 생각을 할 걸세. 성녀의 일생을 기록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은 바로 부수도원장이야. 그 기록의 마지막에 이번 순례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겠지. 아마 콜룸바누스 수사는 그저 익명의 수도사 정도로 적히기 쉬울 걸세. 그의 역할도 그저 성인과 부수도원장을 연결하는 사자쯤으로 축소될 테고. 연대기 작가들은 몽상가들 이 소리 높여 스스로의 이름을 외쳐대는 것만큼이나 손쉽게 온갖 이름들을 편집하고 삭제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친구는 무척이나 완고한 노르만 가문 출신일세. 그런 사람들이 평생 정원이나 가꾸는 성직자로 남겠거니 생각하면서 젊은 아들을 베네딕토 수도원에 집어넣는 법은 없지." - P236

성처녀가 잠든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순교했다가 기적적으로 부활한 뒤 성처녀는 부수녀원장으로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동시에 그녀는 악마의 손에서 달아나듯 자기를 추적하는 크래독 왕자의 손을 피해 달아난 소녀, 금욕과 성스러움을 낭만적으로 사랑한 신앙심 깊은 철부지 아가씨이기도 했다. 이 순간 캐드펠의 마음은 둘로 분열되어, 그녀와 그녀를 필사적으로 추적했던 연인 모두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 젊은이는 거친 열정에 사로잡혀 영과 육이 한꺼번에 절멸되었다. 그에게 기도를 바치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위니프리드 성녀가 아니라 오히려 그일지도 모르는데. 결국, 그를 위해 기도한 이는 오직 위니프리드 성녀뿐이리라. 그녀도 초연함과 불가사의함을 두루 갖춘 웨일스인이었고, 그러니 아마 그의 멸절당한 육신을 끌어모아 다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한마디쯤 기도를 남기지 않았을까? 열정을 억제할 수 있으며 의심을 품지 않는 인간, 그러나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한 바로 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자신을 그토록 탐내던 사람이 있었던 시절을 돌아보며 작은 기쁨을 느끼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 P239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경스러운 죄악에 대한 두려움, 그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동정, 그리고 엉뚱한 오해에 대한 죄책감으로 생긴 침묵이었다. 진실이 번갯불처럼 머리 위로 떨어져 모두를 압도했다. 리샤르트는 화살을 맞고 죽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비겁한 자가 두터운 은폐물 사이에서 뛰어나와 그의 등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성녀가 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 한 사악한 인간이 저지른 일이었다. - P251

"땅에는 그보다 더 끔찍한 고해를 듣고서도 머리칼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제들이 얼마든지 있어. 자신이 용서받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것이 오히려 오만이지." - P267

"참 이상한 일이죠!" 잠시 후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동안은 누굴 아무리 증오해도 그렇게 야비한 짓은 해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 없네." 캐드펠은 컵을 휘저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우리는 괴로움에 처하면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니까. 확실히 용서받을 방법이 있다는 것만 알면 그 어떤 짓이라도 저지르고말고." - P267

"우리 여자들,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기르느라 평생을 희생해요. 그런데 아이들은 자라고 나면 우리 얼굴에 먹칠을 하는 식으로 보답하죠.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죠?"
"아드님은 부인께 온당하게 보답할 겁니다." 캐드펠은 쾌활하 게 말했다. "아드님이 속죄하는 동안 묵묵히 지켜보되, 아드님의 죄를 변명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아드님은 그에 대해 무척 고마워하고 사랑으로 보답할 겁니다." - P269

남자나 여자나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들입니다, 휴 신부님. 상처를 입으면 똑같이 피를 흘리지요. 물론 저 부인이 가엾고 딱한 여자인 건 사실이지만, 가엾고 딱한 남자들 또한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못지않게 튼튼한 여자도 있고, 우리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여자들도 있습니다." 캐드펠은 마리암을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 쇼네드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 P271

카이는 자신의 나귀를 내버려둔 채 아네스트의 나귀에만 안장을 올려주었다. 캐드펠 수사는 등자 대신 자연스럽게 자신의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발을 받쳐 밀어 올리는 순간, 그녀의 옷자락에서 향기로운 체취가 흘러나왔다. 팔목에 그녀의 부드러운 살갖이 스친 그 찰나야말로 이 길고 지루한 하루를 통틀어 그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대들 두 사람처럼 선랑한 이는 다시 만나볼 수 없을 게야." 캐드펠이 말했다. "존 형제는 실수를 저질렀네. 하지만 누구에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법이지. 이번만큼은 존 형제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 - P276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엥겔라드는 다소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뿐 그들이 할 일은 무척이나 간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휴 신부님과 부수도원장님을 찾아가야죠. 그분들께 사건의 경위를 정확히 설명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밖에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사람을 죽인 게 잘한 일은 아니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전 제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뿐 아니라 그는 자기를 비난할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제나 최선의 길이니까. 캐드펠은 그 천진함에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머지않아 저 성품도 다치게 되겠지. 이미 한 차례 부당한 누명을 쓰고도 그의 천진함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고, 청년은 아직도 사람이란 이성적인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 P303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입니까?" 캐드펠은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 단잠을 방해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반쯤은 자기방어를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그는 당혹감과 위축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귀더린에서 운구해 온 것에 대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경이로운 일을 이루어내더라도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을 텐데요." 그러나 제롬 수사가 보다 열정적으로 호응해줄 말상대를 찾아 떠난 뒤, 캐드펠은 스스로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놀라지 않는가? 혹시 내가 기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는 것일까? 그래, 진정한 기적이라면, 그 까닭 같은 건 있을 수 없으니까. 기적이란 이성과 합치될 수 없으니까. 기적은 인간의 인과를 초월하여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생겨나는 법, 합리적인 기적은 기적이 아니니까. 그러자 문득 기쁨과 위안이 찾아왔다. 정말이지 세상이란 특이하고 괴상한 곳이라 생각하며, 그는 다시금 유쾌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P331

"귀더린 사람 중 아직까지도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휴 신부님 한 분밖에 없을 것 같구먼." 캐드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런 분께 양심의 짐을 지우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단 말이지. 그래, 휴 신부님께는 역시 알리지 않는 편이 낫겠소."
"그분이 진실을 알게 될 염려는 없습니다. 그 일에 대해 의문을 품으신 적도 없고, 질문 한번 하신 적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실 전 그분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침묵에는 여러 미덕이 있잖습니까." - P336

평화로운 세월의 거리를 두고 돌이켜보아도 당시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웨일스 출신의 작은 성녀(그분께 축복이 있기를)께서는 당신이 늘 원하던 곳에 그대로 누워 계시며, 그것이 기쁜 나머지 그곳 사람들을 살뜰히 돌보아주시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 우리가 가질 권리가 있으며, 아마도 우리가 가져야 마땅할 것을 가지고 있지. 전체적으로 보면 만족스러운 귀결이야. 교환한 살인자의 시체라 해도 신앙의 대상이 되면 진짜와 거의 다름없는 구실을 하는 법. 물론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야! 이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저 귀더린의 선량한 주민들은 앞으로도 줄곧 좋은 일들을 기대해도 될 성싶었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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