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리를 타고 달리면서 보면 언덕이 물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마가 늘 말하던 큰 바다가 누런 풀로 일렁인다. 멀리 보이던 산이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어느 날 루시는 산이 파란색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녹색 수풀과 회색 바위, 능선 깊이 새겨진 보라색 그림자가 있다.
땅에도 색이 생긴다. 물줄기가 넓어진다. 부들, 쇠비름, 야생 마늘과 당근. 산은 험준해지고 골짜기는 깊어진다. 이따금 그늘진 수풀 아래에서 선연한 녹색으로 풀이 자란다.
여기가 아빠가 그렇게 찾던 야생의 땅인가? 작은 몸뚱이가 땅에 완전히 집어삼켜질 듯한 이 느낌—땅이 그들을 보이지 않게, 용서처럼 묻어 버릴 것 같은 느낌. 루시의 몸이 줄어들며 루시 안의 텅 빈 자리도 줄어든다. 거대한 산 아래에서, 우뚝 솟은 참나무 사이로 걸러지며 녹색이 되는 금빛 빛살 아래에서 하찮디하찮은 존재가 된다. 먼지 맛보다 생명의 맛이 더 많이 나는 바람 속에서는 샘조차도 유순해진다. - P63

광부 아내들 중 땅 안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던 이들이 있었다. 문명 세계. 산지 너머 비옥한 평야 지대에 살다가 광부 남편의 뒤를 따라 서쪽으로 온 여자들이었다. 남편이 보낸 편지에는 탄가루 이야기는 없었다. 이 여자들은 밝은색 드레스를 입고 왔지만 서부의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드레스 색은 그들의 희망만큼이나 빠르게 바래 버렸다. - P64

루시의 가장 간절한 꿈,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은 용이나 호랑이를 물리치는 꿈이 아니다. 황금을 찾는 꿈도 아니다. 루시는 먼 땅에서 기적을 본다. 군중 속에서 자기 얼굴이 튀지 않는 곳. 집으로 가는 긴 도로를 따라 걸어갈 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 - P65

루시는 속으로 말한다. 기억해? 바가 탐광하는 법 가르쳐 주던 것. 기억해? 바 손목의 기름 화상 자국. 기억해? 바가 들려주던 이야기. 기억해? 생살이 나오도록 물어뜯은 손톱. 기억해? 술 마시면 코를 골던 것. 기억해? 바의 흰머리. 기억해? 바의 허풍. 기억해? 돼지고기에 후추를 친 걸 좋아하던 것. 기억해? 바의 냄새.
[…]
기억해? 말 타는 법 가르쳐 주던 것. 기억해? 벗어 놓은 바의 부츠가 바의 발 모양을 하고 있던 것. 기억해? 바의 냄새. 씻지 않게 된 이후 말고, 술을 마시게 된 이후 말고, 그 전의 냄새. - P69

이제 샘은 배가 고프다거나 춥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평선 위에서 맴도는 나지막한 회색 구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집이 제대로 서지 못한다는 사실, 호랑이 두개골이 제아무리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 봤자 귀리가 떨어지고 총알도 떨어진 지금 굶주림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고집으로 이겨 내겠다는 듯이. 루시는 앞날에 대해 말하려고 애쓴다. 샘이 하는 이야기는 오래전에 죽은 과거에 관한 것뿐이다. - P77

풀밭이 평평하고 푸르게 펼쳐져 있다. 아픈 발을 쉴 수 있게 부드러운 벨벳 천을 펴 놓은 것 같다. 멀리 길게 이어진 강이 있고 그 옆에 작은 얼룩이 하나 보인다. 스위트워터가 틀림없다. 루시는 새로운 세계를 깊이 들이마신다. 냄새가 혀끝에 축축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루시는 앞으로 나가는데—
바람이 어깨를 건드린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며칠간처럼 매섭고 거센 바람이 아니라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다정하다. 바람에서 느껴지는 슬픔 때문에 루시는 뒤를 돌아본다. - P89

강에 닿자—
지금껏 루시에게 물은 탄광에서부터 시작해 목이 졸린 듯 얕게 졸졸 흘러내리는 물이었다. 이 강은 드넓다. 살아 있는 생명체다. 강둑에 부딪히며 사납게 날뛴다. 마가 바도 물이라고 했는데, 오늘 이전에는 물이 어떻게 그런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 P90

샘은 팔꿈치를 대고 뒤로 기대며 느긋하게 말한다. "사람들이 우리가 싫다고 하면 떠나면 되지. 우리도 싫으니까."
루시는 놀라서 샘을 쳐다본다. 샘은 어처구니없게도 씩 웃는다.
석 달 동안 두려워하며 숨어 다녔는데, 샘은 그걸 마치 게임처럼 여긴 거다. 어디에 있든 제집처럼 여기는 샘, 힘들수록 반짝이는 샘. 샘이 그렸던 지도, 샘이 가겠다고 한 경로가 단지 몇 달이나 몇 년의 여정이 아니었음을 루시는 깨닫는다. 그것은 한평생의 시작이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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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 벌떡 일어나 모닥불에서 날아간 불씨를 밟는다. 풀에 옮겨붙었다. 불 피울 자리를 더 넓게 만들었어야 했다. 같이 풀을 뽑았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요새는 자칫 재앙이 되려 한다. 깜박이는 별이 추적대의 호롱처럼 보이고, 넬리의 발굽 소리가 권총 공이치기를 당기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점점 더 루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속이 텅 비어서 바람에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언덕이 타 버리든가 말든가. - P44

그날 밤 몇 시간이고 기다렸지만 샘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하릴없이 모닥불을 끄면서 필요 이상으로 흙을 높이 쌓는다. 양손 다 흙투성이로 더러워진다. 루시는 알았어야 한다. 개는 두 다리로 설 수 없고 가족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 P49

샘은 다시 빌린 목소리로 말을 한다. 어른 남자 목소리도 아니지만 샘의 본디 목소리도 아니다. "넬리가 똑똑하다면 충성을 알겠지. 똑똑하다면 벌도 달게 받을 거고."
"무거워서 지쳤어. 나도 지쳤고. 넌 아니니?"
"바라면 지쳤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아."
어쩌면 그게 바의 문제였을 것이다. 바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깨끗한 셔츠 한 장 없이 더러운 꼴로 침대에서 죽기 전에. 루시는 뜨거운 두피 위에 한 손을 얹는다. 머리가 아찔하다. 텅 빈 자리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온다. 밤이면 바람이 생각을 머릿속에 불어넣는 것 같을 때도 있다. - P52

"계속 가면 더 좋은 데가 나올 거야." 샘이 말한다.
이번에 가는 곳은 더 나을 거야, 바는 새로운 탄광으로 가려고 이삿짐을 쌀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더 나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루시가 말한다. 그리고 그때 루시는 느닷없이 웃는다. 바가 죽은 뒤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하, 하 웃는 억지웃음이 아니라 날것으로 터져 나오며 아프게 하는 웃음이다. 샘이 바의 무모한 꿈을 좇으려는 거라면 이 방랑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샘이 원하는 게 그것인지도. 바를 영원히 등에 지고 가는 것. - P53

루시는 올라간다.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자 목마른 풀이 치맛단에 손을 뻗는다.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치마가 짧아졌고 빛이 바랬다. 바싹 마른 풀이 루시의 다리에 정교한 무늬를 새기며 피를 낸다. 언덕 꼭대기에서 루시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는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귀를 꽉 닫는다. 팅러 (들려)? 마가 루시의 귀를 두 손으로 막으며 물었다. 처음에는 정적. 이어 들려오는 박동과 피가 흐르는 소리. 네 안에 있어. 너의 근원이. 바다 소리. - P54

마가 소금에 절인 자두를 생각한다. 절이면 효과가 더 강력해진다. 바가 잡아 온 짐승에 소금을 치던 것도 기억한다. 철을 닦을 때 쓰던 소금. 상처에 뿌리는 소금. 쓰라리지만 소독을 해 준다. 소금은 씻어 주고 소금은 지켜 준다. 일요일마다 부유한 남자의 식탁 위에 있던 소금, 한 주의 흐름을 각인하는 맛. 과일이나 고기를 쪼그라들게 하고, 변성시키고, 시간을 벌어 주는 소금. - P55

남자는 어때야 남자지? 트렁크를 연다. 세상에 보여 줄 얼굴이 있어야 하나? 세상을 바꿀 손과 발이 있어야 하나? 세상을 걸을 두 다리가 있어야 하나? 둥둥 뛰는 심장, 노래를 부를 이와 혀가 있어야 하나? 바에게는 남은 게 거의 없다. 남자의 형체조차 사라졌다. 스튜가 냄비 모양이듯 바는 트렁크 모양이 되어 있다. 루시는 가장자리가 녹색으로 변한 고기나 며칠 동안 얼린 고기를 염장한 적도 있다. 그래도 이런 건 한 번도 없었다. - P56

장례는 어떤 요리법을 따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마가 말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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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작다. 그런데도 송아지 가죽 부츠를 신고 남자다운 걸음걸이로 걷는다. 샘의 그림자가 뒤로 뻗어 루시의 발끝을 건드린다. 샘은 그림자가 진짜 키이고 몸뚱이는 거추장스러운 일시적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내가 카우보이가 되면, 샘은 말한다. 내가 모험가가 되면. 최근에는, 내가 이름난 무법자가 되면. 내가 어른이 되면. 열망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다. - P18

먼지바람이 코를 쓸고 가 루시는 멈춰 서서 기침을 한다. 목구멍이 울컥거린다. 어제 저녁밥을 길에 쏟아 낸다.
바로 떠돌이 개들이 달려와 토사물을 핥는다. 순간 루시는 머뭇거린다. 샘의 부츠가 초조하게 바닥을 치고 있는데도. 루시는 하나 남은 혈육을 버리고 개들 사이에 쭈그리고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두고 개들과 싸우는 상상을 한다. 개의 삶은 배와 다리로 이 루어진 삶, 뛰고 먹는 삶이다. 단순한 삶. - P18

연기와 화약 구름 속에서 바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샘." 루시는 자기도 울고 싶지만 꾹 누른다. 이제 본디 자기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샘, 이 등신아, 바오베이(아가야), 멍청아." 달콤함과 신랄함을, 다정함과 욕을 섞어. 바처럼. "가자." - P22

샘이 학교에서 왼쪽 눈에 자두 같은 멍이 들어 돌아온 날, 바가 루시에게 으르렁거렸다. 루시의 옷은 잘못의 증거처럼 멀끔했다. 겁쟁이. 비겁한 계집애. 사실 루시는 샘이 놀리는 아이들에 맞서는 걸 보았지만 샘이 소리를 지르는 게 용감한 건지는 잘 몰랐다. 소란을 피우는 게 용감한 것인가, 아니면 루시가 그랬던 것처럼 침이 타고 흐르는 얼굴을 조용히 숙이고 있는 게 용감한 것인가?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 P29

루시는 내려다본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샘의 얼굴을 언제나 내려다본다. 진흙처럼 갈색이고 진흙처럼 무정형이고 질투 날 정도로 쉽게 감정이 나타나는 얼굴이다. 여러 감정이 나타나지만 두려움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려움이 있다. 처음으로 동생 얼굴에서 자기 모습을 본다. 그리고 지금이, 학교에서의 괴롭힘이나 차가운 총구의 감각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용기의 순간임을 루시는 깨닫는다. 루시는 눈을 감는다. 주저앉아 팔에 얼굴을 묻는다. 가만히 있는 게 지당한 방법이라고 판단한다. - P33

바는 일확천금을 얻으려 했고 등 뒤에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평생 식구들을 몰고 다녔다. 언제나 더 새로운 곳을 향해. 더 거친 땅으로. 반짝이는 부가 벼락같이 나타나리라는 약속을 좇아. 몇 해 동안 아버지는 금을, 주인 없는 땅이나 파헤쳐지지 않은 금맥이 있다는 소문을 좇았다. 가 보면 언제나 똑같이 파헤쳐지고 망가진 언덕, 돌 파편만 가득한 시내뿐이었다. 탐광은 바가 가끔 가는 도박 굴에서 하는 게임이나 마찬가지로 운에 좌우되는 일이었고 바는 언제나 운이 없는 쪽이었다. 마가 단호하게 이제부터는 석탄으로 일한 만큼 버는 삶을 살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탄광에서 탄광으로, 짐마차를 타고 언덕을 넘고 또 넘었다. 통 바닥에 마지막 남은 설탕을 긁어내는 손가락처럼. - P37

루시가 세 살인가 네 살 때 바가 가르쳐 준 요령이었다. 루시가 놀다가 짐마차를 놓쳐 버렸을 때다. 엄청나게 넓은 하늘이 루시를 짓눌렀다. 풀밭이 끝이 없이 일렁였다. 루시는 샘처럼 날 때부터 용감하고 항상 싸돌아다니는 아이가 아니었다. 루시는 울음을 터뜨렸다. 몇 시간 뒤에 바가 루시를 찾아내고는 루시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더니 위쪽을 보라고 했다.
이 지역에서 하늘 아래 한참 서 있다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구름이 정처 없이 흘러간다. 그러다가 구름이 돌아서 나를 향해 소용돌이치듯 모여든다. 한참 있다 보면 언덕이 작아진다. 아니, 내가 자라난다. 원한다면 언덕을 넘어 저 멀리 파란 산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거인이 되었고 이 땅이 모두 내 땅이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또 길을 잃으면,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너도 이 땅에 속한다는 걸 잊지 마라. 바가 말했다. 겁내지 말고. 팅워?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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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 모두 우리가 셋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둘이고 자주 둘이고 영원히 혼자이지만 우리는 셋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 게 좋았다. 언제나 곁눈질을 하던 관계에서 드디어 셋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 것이 좋았고 셋이서 오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음을 알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 - P172

비교할 게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할 확률이 높다. 아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근처를 둘러보면 민아와 해든이 있었다. 아름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을 때. 끼어 있다는 감각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민아와 해든은 아름에게 부표 같았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을 전부 이해할 순 없고 부표가 떠다니는 것을 보며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었다. 이들이 이쯤 있으니, 나는 그보다 한두 파도 뒤를 떠다니고 있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다행이라고, 그 정도만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고, 손을 휘저어 가까스로 해든이든 민아든 누구의 손끝에라도 닿을 수 있다면 잘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왜 그들이 그렇게 필요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이 훌륭하니까, 라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 P195

바람이 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아름은 우리를 묶은, 특히 나를 그들에게 묶은 이 마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야 좋아하는 마음. 너에게 없는 것이 내게 있고 내게 없는 것이 너에게 있길 바라는 마음. 혹은 기꺼이 그렇게 착각하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 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단단해진 종아리를 쉬게 두었다. - P205

실은 출판사에서 표지 시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사진은 두 개였다. 민아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과, 언젠가 아름이 실수로 깨뜨린 도자기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으로 작품을 찍은, 작품으로서 찍은 사물, 인간 아닌 것이었다. 깨진 접시. 얼기설기 겹쳐진 사금파리 대여섯 조각. 늦은 오후의 빛을 온몸으로 반사하는 듯, 주변 공기를 금빛으로 부드럽게 부풀린 듯한 민아의 뒷모습과 깨진 그릇의 파편을 쌓아올린 무채색의 사진. 그것은 아름이 처음부터, 그리고 줄곧 남기고 싶어하던 우정과 결함의 흔적이었다. 애정과 서툶의 증거.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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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지적하는 입장도 힘들지만, 친구에게 지적받는 입장은 더 힘들지 않을까. 해든은 아름의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민아와 함께 일할 때도 항상 민아에게 배우는 입장이던 아름, 이제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와서 자신이 세운 원칙과 일하는 방식을 배워야 하는 아름을. 친구일 때는 볼 수 없던 흠 같은 것, 수십 년 산 나무의 깊은 옹이 같은 것을 볼 때마다 친구일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뾰족한 마음이 그를 향했지만, 그 흠까지 포함한 아름의 어딘지 고집스럽고 어수룩하고 열심인 모습을 보며 해든은 생각했다. 나는 저 사람을 미워해봐야 오래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 P137

역할이라는 거 정말 어렵지. 그 역할로 인정받고 싶을 때는 더욱더, 그러던 중에 넘어졌다고 생각하면 더욱 더, 자괴감에서 회복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이런 깨달음도 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이 생각도 언젠가 했던 생각이다. 생각이 돌아왔다. 직업을 바꿨는데도. 어라, 지난여름에 했던 생각이 또 똑같이 도돌이표. 민아에게 게으르고 나태하고 뭉개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 싫다는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왔는데, 여전했다. 나라는 캐릭터라는 거 정말 지겹고도 낯설지. 그런 애라는 거 아는데도, 모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140

그래, 가끔 선배가 좋게 말해주지 않을 때가 있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좋게 말한다는 건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한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충분히 말해준다는 뜻이었다. 아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 P143

이제 퇴원해? 일은? 일하면서 뭐 먹니? 죽 좀 보내줄까? 아님 반찬? 고기?
되레 그런 걱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어색해한 건 민아 자신이었다. 어, 아니, 응, 고마워······ 같은 말을 어물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언제 이렇게 달라진 걸까. 내가 알던 엄마는 언제까지의 엄마인 걸까. 그리고 나는 평생에 걸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몇 명이나 오해하며 살아갈까. - P168

지금 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또다른 생의 자신은 어딘가에서 더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건 아무래도 소용없고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우리는 퍽 잘 어울리지 않은가, 하고 민아는 생각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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