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이 벌떡 일어나 모닥불에서 날아간 불씨를 밟는다. 풀에 옮겨붙었다. 불 피울 자리를 더 넓게 만들었어야 했다. 같이 풀을 뽑았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가 요새는 자칫 재앙이 되려 한다. 깜박이는 별이 추적대의 호롱처럼 보이고, 넬리의 발굽 소리가 권총 공이치기를 당기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점점 더 루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속이 텅 비어서 바람에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언덕이 타 버리든가 말든가. - P44
그날 밤 몇 시간이고 기다렸지만 샘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하릴없이 모닥불을 끄면서 필요 이상으로 흙을 높이 쌓는다. 양손 다 흙투성이로 더러워진다. 루시는 알았어야 한다. 개는 두 다리로 설 수 없고 가족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 P49
샘은 다시 빌린 목소리로 말을 한다. 어른 남자 목소리도 아니지만 샘의 본디 목소리도 아니다. "넬리가 똑똑하다면 충성을 알겠지. 똑똑하다면 벌도 달게 받을 거고." "무거워서 지쳤어. 나도 지쳤고. 넌 아니니?" "바라면 지쳤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아." 어쩌면 그게 바의 문제였을 것이다. 바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깨끗한 셔츠 한 장 없이 더러운 꼴로 침대에서 죽기 전에. 루시는 뜨거운 두피 위에 한 손을 얹는다. 머리가 아찔하다. 텅 빈 자리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온다. 밤이면 바람이 생각을 머릿속에 불어넣는 것 같을 때도 있다. - P52
"계속 가면 더 좋은 데가 나올 거야." 샘이 말한다. 이번에 가는 곳은 더 나을 거야, 바는 새로운 탄광으로 가려고 이삿짐을 쌀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더 나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루시가 말한다. 그리고 그때 루시는 느닷없이 웃는다. 바가 죽은 뒤로 한 번도 웃지 않았다. 하, 하 웃는 억지웃음이 아니라 날것으로 터져 나오며 아프게 하는 웃음이다. 샘이 바의 무모한 꿈을 좇으려는 거라면 이 방랑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샘이 원하는 게 그것인지도. 바를 영원히 등에 지고 가는 것. - P53
루시는 올라간다. 눈에 보이는 가장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자 목마른 풀이 치맛단에 손을 뻗는다.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치마가 짧아졌고 빛이 바랬다. 바싹 마른 풀이 루시의 다리에 정교한 무늬를 새기며 피를 낸다. 언덕 꼭대기에서 루시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는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귀를 꽉 닫는다. 팅러 (들려)? 마가 루시의 귀를 두 손으로 막으며 물었다. 처음에는 정적. 이어 들려오는 박동과 피가 흐르는 소리. 네 안에 있어. 너의 근원이. 바다 소리. - P54
마가 소금에 절인 자두를 생각한다. 절이면 효과가 더 강력해진다. 바가 잡아 온 짐승에 소금을 치던 것도 기억한다. 철을 닦을 때 쓰던 소금. 상처에 뿌리는 소금. 쓰라리지만 소독을 해 준다. 소금은 씻어 주고 소금은 지켜 준다. 일요일마다 부유한 남자의 식탁 위에 있던 소금, 한 주의 흐름을 각인하는 맛. 과일이나 고기를 쪼그라들게 하고, 변성시키고, 시간을 벌어 주는 소금. - P55
남자는 어때야 남자지? 트렁크를 연다. 세상에 보여 줄 얼굴이 있어야 하나? 세상을 바꿀 손과 발이 있어야 하나? 세상을 걸을 두 다리가 있어야 하나? 둥둥 뛰는 심장, 노래를 부를 이와 혀가 있어야 하나? 바에게는 남은 게 거의 없다. 남자의 형체조차 사라졌다. 스튜가 냄비 모양이듯 바는 트렁크 모양이 되어 있다. 루시는 가장자리가 녹색으로 변한 고기나 며칠 동안 얼린 고기를 염장한 적도 있다. 그래도 이런 건 한 번도 없었다. - P56
장례는 어떤 요리법을 따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마가 말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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