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는 맛도 있고 향도 있지만 소리도 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술이 내는 소리까지도 사랑한다. 캐럴라인 냅이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책에서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처럼. - P33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 P33

똘똘똘똘똘똘똘똘.
났다! 소리가. 소리가 났다! 이렇게 ‘만들어낸‘ 소리는 또 왜 이리 유난히 아름다운지. 소나기 아래서 빗물을 빨아들이는 나무의 요정 같은 소리가 테 이블 위로 잔잔히 퍼졌다. 나는 신약 발견에 성공한 과학자처럼 소주병을 테이블에 놓자마자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승리의 만세를 불렀고,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좋겠네..."). 이게 뭐라고 진작 해보지 않았담. 역시 똘똘똘똘 소리는 가느다란 병목을 빠르게 빠져나가려는 소주와 두꺼운 몸체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려는 소주의 속도 차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병목까지 채워가며 마시는 한, 소주 한 병을 마시는 내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브라보! 브라보, 병목현상! - P35

똘똘똘똘소리 하나 듣겠다고 소주 한 잔 마실 때마다 그렇게까지 번거로울 일인가 싶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유의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집요해지는 나를 볼 때가 나, 잘 살고 있구나, 라는 가느다란 뿌듯함이 드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게다가 차가 막히거나 컴퓨터가 느려지거나 조직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는 등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을 초래하는 병목 현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세상에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소주 첫 잔을 받아들며 다시 한번 엄숙히 새길 수도 있다. - P36

첫 번째 세트에서 남은 B병과 두 번째 세트에 서 남은 D병을 둘이서 사이좋게 하나씩 가방 속에 넣고 헤어지면, 마치 소중한 목걸이의 펜던트를 반 쪽씩 나눠 가진 것처럼 돈독해진 우애를 느낄 수 있다…기보다 훗날 집에서 불현듯 술이 마시고 싶지만 나가서 사 오기는 귀찮은 순간이 왔을 때 맞다! 그 날 가져다 놓은 게 있었지! 손벽을 치며 과거의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물론 술 빼놓는 것을 잊어버린 채 그 가방 그대로 들고 출근했다가 별생각 없이 회사 동료들 앞에서 가방을 여는 일이 생긴다면 과거의 나를 매우 원망하게 될 것이다. 가방 속 소주 한 병과 복잡한 회사 동료들의 얼굴을 황망히 바라보며 ‘세상에 다 좋기만 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엄숙히 새길 수도 있다… - P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뽁뽁이를 터뜨릴 때마다 정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뽁뽁이 하나에 술과의 추억과 뽁뽁이 하나에 술을 향한 사랑과 뽁뽁이 하나에 숙취의 쓸쓸함과 뽁뽁이 하나에 그럼에도 다음 술에 대한 동경과 뽁뽁이 하나에 에세이와 뽁뽁이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우, 그래, 술책을 쓰자. 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술과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술과 함께 익어간 인생의 어느 부분에 관해서. 써보자. 쓰자고. - P13

오바이트라는 행위에는 포스트모던한 구석마저 있었다. 단일 식품에 위액을 섞어 어느 정도 해체한 후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 형태로 바꿔 무규칙적으로 다시 섞은 다음, 역순으로 쏟아져 내리게 함으로써 플롯의 순서도 뒤집어놓는다. 매우 더럽고 전위적인 방식의 포스트모던이었다. 그렇게 뒤집힌 플롯을 따라 시간을 거꾸로 더듬어가며 기억에 없는 음식들이 기억에 있는 음식들로 넘어갈 때까지 토하고(오, 그래, 계란말이부터는 기억난다, 우욱, 뭐 이런 식으로…), 엄마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화장실 청소까지 깨끗이 해 증거인멸까지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이 또 끊겼다... - P20

나도 원이처럼 술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화장실에서 보낸 포스트모던한 밤은 끔찍했고,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기억이 툭툭 끊기는 경험도 끔찍했고, 다음 날의 숙취, 숙취로 인한 같은 두통 역시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니라고 혼자 조용히 이를 갈았다. - P29

하지만 나는 술꾼의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2주 정도 지나자 입가에 맴돌던 술맛과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을 때의 엷은 흥분, 들떠서 떠들던 분 위기들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술 생각이 났다. 속담도 생각났다. 첫술에 배부르랴? 술이 또 마시고 싶었 다. 잘 조절해서 그렇게 취할 때까지만 마시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수능이 끝나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겠지만 원래 음주처럼 금기를 어기는 일은 ‘쫄리는‘ 상황에서 더 재미있는 법이다. - P29

그래서 수능 D-80일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백 일주도 먹었으니 이번에는 ‘80일간의 세계일주(酒)를 먹자고 제안했다. 신경 써서 지은 만큼 나는 이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를 힐난과 경악의 눈으로 쳐다봤다. 특히 원이는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했다.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원이도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았다… - P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그가 질문했다.
"행운을 기원하는 기도야 번영, 평화, 조화
"너는 믿어? "
"어떤 거? 행운?"
"아니,기도 말이야."
"글쎄. 그렇지만 내 기분을 좋게 해. 그 정도면 됐잖아?"
"응, 맞아." - P262

그때 우리의 행운의 물건이 떠오른 나는 어떻게 자라는지 보려고 찾았다. 작은 쳄브라 소나무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내가 옮겨 심었던 때처럼 앙상하고 휘어진 채였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나무도 벌써 일곱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나무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평화나 조화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끈기를 드러냈다. 삶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런 집착은 네팔에서는 미덕이 아닐지 모르지만 알프스에서는 그렇다. - P263

한번은 난데없이 그가 말했다. "저녁에 축사 앞에 앉아 있을 때 행복했지?"
그때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응 무척."
"7월이 되면 밤이 되어 평온이 찾아들던 것 기억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어. 그리고 내가 젖을 짜려고 일어났을 때는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은 채였지. 둘은 아직 잠들어 있고 나는 마치 그 모든 것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내 가족이 내가 있어서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것 같았지." - P2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나만 일을 쉬어야 해? 왜 나만 병원에 있어야 해? 야 네 애가 저렇게 누워 있는데 너는 병원에 오는 게 그렇게 귀찮니?가 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억누르고 있던 말들이었다. 원색 크레파스로 아무렇게나 북북 그어놓은 듯한 날것의 감정들, 지하철에서 흔히 보이는 광인들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초점 없는 혼잣말과 욕설이 은정의 입에서 방언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 - P26

왜 유능한 여자는 식으로 절구 속에서 마늘처럼 빻아지고 마는 걸까? 다 큰 어른들이면서 왜 동료를 저런 식으로 모함하는 걸까? - P30

헤어 디자이너는 오랫동안 지현이 꿈꾸던 외길이었고, 아무도 응원해주지 않았지만 혼자서 눈물나게 노력해 드디어 얻어낸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어느 순간부턴가 조금씩 자랑스럽지 않아졌다. 머리를 자르는 일, 단백질을 먹고 소화시켜 머리카락으로 바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 일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술들이 갑자기 낯설고 이상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산업의 어디까지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일까. 지현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 P36

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함께 온 남자친구의 허락을 받아야 긴머리를 짧게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 는 것일까. 남자들은 대체로 안 된다고 했고, 그러면 여자들은 그냥 머리끝을 다듬거나 귀여워 보이는 파마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갔다. - P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같이 갈래?" 나는 그에게 물었다. 농담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해본 말은 아니었다. 일이 끝난 것이 아쉬웠다. 그동안 누군가와 이렇게 잘 지내본 적이 없었다.
"아니야,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너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고 나는 남아 있는 사람이야. 늘 그렇듯이, 그렇잖아?" - P201

내가 지켜야 했던 것은 혼자 지내는 능력이었다.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거처를 정해 마음 편히 지내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고독과의 관계는 항상 어렵기만 했다. 나는 고독과 친숙해지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 P233

호수는 움직이는 밤하늘이었다. 바람은 잔물결을 이쪽에서 저쪽 해안으로 밀어냈고, 까만 물 위의 물결을 따라 펼쳐진 별빛은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다가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곤 했다. 나는 그대로 멈춰서 그 그림 같은 광경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없을 때의 산의 삶을 체험한 것 같았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게 있었고 거기서 제법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이런 산이 나와 함께 있어준다면 외롭지 않을거라고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 P2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