뽁뽁이를 터뜨릴 때마다 정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뽁뽁이 하나에 술과의 추억과 뽁뽁이 하나에 술을 향한 사랑과 뽁뽁이 하나에 숙취의 쓸쓸함과 뽁뽁이 하나에 그럼에도 다음 술에 대한 동경과 뽁뽁이 하나에 에세이와 뽁뽁이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우, 그래, 술책을 쓰자. 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술과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술과 함께 익어간 인생의 어느 부분에 관해서. 써보자. 쓰자고. - P13

오바이트라는 행위에는 포스트모던한 구석마저 있었다. 단일 식품에 위액을 섞어 어느 정도 해체한 후 전혀 다른 질감을 가진 형태로 바꿔 무규칙적으로 다시 섞은 다음, 역순으로 쏟아져 내리게 함으로써 플롯의 순서도 뒤집어놓는다. 매우 더럽고 전위적인 방식의 포스트모던이었다. 그렇게 뒤집힌 플롯을 따라 시간을 거꾸로 더듬어가며 기억에 없는 음식들이 기억에 있는 음식들로 넘어갈 때까지 토하고(오, 그래, 계란말이부터는 기억난다, 우욱, 뭐 이런 식으로…), 엄마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화장실 청소까지 깨끗이 해 증거인멸까지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억이 또 끊겼다... - P20

나도 원이처럼 술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화장실에서 보낸 포스트모던한 밤은 끔찍했고,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나로서는 기억이 툭툭 끊기는 경험도 끔찍했고, 다음 날의 숙취, 숙취로 인한 같은 두통 역시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니라고 혼자 조용히 이를 갈았다. - P29

하지만 나는 술꾼의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2주 정도 지나자 입가에 맴돌던 술맛과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을 때의 엷은 흥분, 들떠서 떠들던 분 위기들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술 생각이 났다. 속담도 생각났다. 첫술에 배부르랴? 술이 또 마시고 싶었 다. 잘 조절해서 그렇게 취할 때까지만 마시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수능이 끝나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겠지만 원래 음주처럼 금기를 어기는 일은 ‘쫄리는‘ 상황에서 더 재미있는 법이다. - P29

그래서 수능 D-80일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백 일주도 먹었으니 이번에는 ‘80일간의 세계일주(酒)를 먹자고 제안했다. 신경 써서 지은 만큼 나는 이 이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나를 힐난과 경악의 눈으로 쳐다봤다. 특히 원이는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했다. 말을 한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원이도 비로소 알게 된 것 같았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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