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의자
브레슬로프의 렙베 나흐만 / 사람들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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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짧은 경구들을 중심으로 한 책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렙베 나흐만의 기본적인 사상과 태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어린 아이와 같은 전적인 신뢰’다! (‘렙베’는 ‘랍비’에 해당하는 이디시어이다. 나흐만은 하시디즘의 창시자인 랍비 바알 쉠 토브의 증손자이다.)

* 짧은 경구들도 되어 있는데다가, 영문 대조판이어서 금방 읽어버렸다. 원래 이런 묵상집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야 제맛이기는 한데...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제목’은 제가 붙인 것입니다.)***


1. 생각(40)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머무는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이 있기를 원하는 곳에 있도록 하십시오.”

2. 모욕(52) “모욕을 침묵으로 대하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할지라도 같은 방법으로 대꾸하지 마십시오.” - 아빌라의 데레사가 수녀들을 위해서 쓴 [영혼의 성] 앞부분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왔던 것 같은데…

3. 요즘 어떻게?(66)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을 받았을 때, 당신의 어려움을 울부짖거나 불평을 말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형편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좋지 않다고 그래? 정말 좋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테야!’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을 받았을 때, 어려움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좋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좋다고 그래?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줄 테야!’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신뢰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는가?

4. 내 방식(84) “모든 일들이 반드시 당신의 방식대로 되어 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비록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5. 하나님에 대한 이해(100)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당신의 심장에 동여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두려움이 진정한 신앙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 Amen!!!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나의 심장에!!!

6. 외로운 감정(106) “외로운 감정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느낌일 뿐이요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7. 복잡한 신앙(134)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적으면 적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수고스럽고 복잡한 신앙에 몰두하게 됩니다.” - 노자의 한 대목을 보는 듯… 법이 생긴 이유에 대한 노자의 설명이 이와 흡사하다.

8. 진정한 단순함(138)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단순함입니다.” - 리챠드 포스터의 [단순성의 기독교]에서 주장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 나오는 이야기들이 조금은 황당한 듯 하여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 듯…

9. 바보 노릇(140) “당신은 사람들이 진리로부터 멀어질수록 악한 것을 멀리하는 사람들을 바보로 여긴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진리가 없을 때 악을 멀리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바보 노릇을 하는 수밖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습니다.”

10. 정확한 통솔력(144) “한상 진리에 대하여 ‘정확한 통찰력’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 현대의 ‘두루뭉실한’ ‘견해들’을 향한 일침!

11. 하나님을 꺾으라!(162) “나아가서 하나님을 꺾으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정복할 것을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며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행실을 용서하시기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바라고 있습니다.” - [빈의자]에서 유일하게(?) 어렵게 느껴진 부분이다. 구약의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처럼도 생각되고… 신약의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강청’하는 기도나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가르침도 떠오르게 하는 내용… 신앙과 기도의 적극성, 불굴의 의지를 강조하는 내용인듯…

12. 말이 나오지 않아도(178) “비록 말이 나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날이면 날마다 당신의 은밀한 장소로 나아가서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에게 얘기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 아, 감동적인! 토마스 그린의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의 첫대목에 나오는 이야기가 연상된다. 무식한 노동자인 주인공(이름이 기억이… --;)은 매일 성당을 찾아가 한동안 기도하고 돌아간다. 궁금하게 여긴 신부의 질문에 그는 답변한다. 성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저 OOO입니다.”라고 말씀드리면 “그래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답변하시고… 그 후엔 서로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온다는 이야기… 그린은 이것이 기도라고 말한다!

13. 기쁨과 어리석은 일(192) “진정한 기쁨을 찾는다는 것은 모든 영적인 일 중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당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라도 하십시오.” - 또 하나의 ‘단순성’의 모습… 루터였던가, 어거스틴이었던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말과 비슷한… 죄 안에서의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

14. 우울함(202) “우울함은 실제로 노여움이며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데 대한 하나님을 향한 불평입니다.” - 아, 그렇다! ‘우울질’적인 기질 자체가 죄 된 것은 아닐지라도, 우울하게 사는 것은 고쳐야 할 부분이 틀림이 없다! 기쁘게, 행복하게 살자!

15. 아무리 멀리…(212) “아무리 멀리 길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당신은 언제든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이 설 자리는 전혀 없다는 점을 꼭 믿으십시오.” - Amen!

16. 짝(214) “당신이 그르칠 수 있다고 믿으면 당신은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도 믿으십시오. 당신이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으면 당신은 치유할 수 있다는 것도 믿으십시오.”

17. 최악에서 최선으로(216) “기억하십시오. 일은 최악에서 최선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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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고교철학 2 - 인간과 세계
앙드레 베르제/드 니 위스망 지음, 남기영 옮김 / 삼협종합출판부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철학을 ‘역사’를 따라 살피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지만, 이 책의 방식처럼 주제별로 다루어 주는 것도 독특한 ‘재미’가 있다.

* 책의 제목처럼 ‘인간과 세계’, 인간과 세계가 서로 접촉하는 접촉점을 다룬다. “인간은 세계와 어떻게 접촉하고 관계를 맺는가?”

1권보다는 훨씬 ‘간략’(단편적?)하다는 느낌이 있다. 그렇다고 분량이 확 줄어든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 내용이 지나치게 단편적인 것은 아니다. 기초적인 입장들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반론이 소개된다. 그런데 그 반론 부분이 또한 묘미다!! 에를 들어, 백내장 수술을 받은 사람의 거리 감각에 대한 내용(209)과 조금 후에 나오는 그에 대한 반론(215)은 마치 추리 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시야를 넓혀 주는, 더 많이 관찰하고 더 많이 생각하라는 자극!


**********(이하는 읽으며 메모해놓은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주술과 기술, 주술과 종교, 주술과 과학, 주술과 예술’에 대한 일련의 논술은 생각해봄직 하다! 단지 그것이 진화론적인 관점이라는 점은 참고하고서...

2.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유대인들. 그것이 위생관념(Renan) 때문이라고? No! “위생 관념은 훨씬 후기의 관념이고, 성경에서는 병을 음식물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45) 신선한 지적!

3. 종교나 주술. 기도(43, 46). “종교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신적인 것과 결합시키는 연결 관계라는 뜻이 있다.”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주술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기도는 마술의 힘을 가진 주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종교의 기도는 숭배 행위이다. 신에게 비를 구하거나 날이 개이기를 구하는 신자, 시험 합격이나 건강을 구하는 신자에게는 종교를 주술로 격하시킬 위험이 있다.” -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청원 기도를 지나치게 낮추어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C. S. 루이스 [개인기도])

4. 과학의 특징/한계(54). “어떤 점에서 보면, 과학은 분해할 줄만 안다. 따라서 ‘과학은 창조적인 면보다는 파괴적인 면에서 더 효과적이다.’” - 과학주의, 과학만능주의를 조심할 것!

5. 심리학적 전제와 가정들에 대하여...

1) 카타르시스적 방법!(69)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자 눈이 치료되었다. 최면 상태에서 이런 증상의 심리적인 기원을 발견하게 되자, 그녀는 이런 증상에서 벗어났다. 결국,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기억을 되찾을 때, 즉 무의식적인 것이 다시 의식적인 것이 될 때, 정신 상태는 호전된다. 여기에서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무의식의 ‘정화’ 방법을 발견하였고 이들은 이 방법을 ‘카타르시스적 방법’이라 하였다.” - 이것은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 사용하는 ‘기억 치유’나 기독교에서 ‘유행’하는 ‘내적 치유’의 가장 기본적인 층을 형성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부분과 관련하여 그러한 system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무의식에 있는 것을 의식으로 끌어 올리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모든 경우가 거기에 해당되는가? 또 그러한 해결 방식이 가지는 메카니즘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사상을 전제와 가정으로 삼는 다른 것들의 무너지거나 서는 기본! 그것은 확실하게 증명되어야 한다.

2) 로르샤흐 테스트는 “보는 방식 속에 존재의 방식이 투영”된다는 전제를 가진다(86). 그래서 그림에 대한 ‘인상’의 설명에 따라 상대방은 불안증, 소심, 외향적, 폐쇄적... 등의 딱지를 붙이게 된다(87). 하지만 과연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정상적인 사람이 있을까? 지나치게 ‘획일화’ 된 공식 아닌가? 특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을 그 틀에 맞추는 식...

3) “그러나 이러한 탁월한 심리학적 방법을 하나의 체계적인 철학으로 만들려는 것, 즉 인류 문화의 모든 표현들을 정신분석학에 따라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89) 그렇다! 정신분석학이 만능은 아니다!!!

6. 반복과 성향(103) “반복은 어떤 자극에 따라서 성향을 조정할 수는 있으나 성향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더욱이 반복되는 경험이 지속되지 않으면, 조건반사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7. 이기적이지 않은 욕망은 없는가?(109, 110) “이기적이지 않은 욕망은 없다는 것이 라 로슈푸꼬의 유명한 말이다.” - 일반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으나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다. 자자도 110페이지 이후에서 로슈푸꼬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심리학자들은 욕망을 무조건 나의 모든 행위, 술책, 계산의 근원이라고 상상함으로써 욕망들을 ‘독살시킨다.’”

8. “원시사회에는 이기주의가 없었다. (개미사회에 이기주의가 없듯이.) 왜냐하면 개인은 자신을 단체와 명확하게 구별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112)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말로, 확실히 그렇다고 확언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9. 심리주의의 오류! “정신분석가들은 신경증 환자들만 만나고, 신경증 환자들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범하는 오류”(115)

10. 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욕망(121)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재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신으로서 존재하려는 계획이다.’라고 말한다.”

11. 고통의 기능에 대하여(134-)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과 고통의 목적에 대하여 말한다. 쾌락은 어떤 기능의 성취를 표현하며, 고통은 생명의 위험을 알려서 구제책을 찾게 한다.” - 무죄한 자의 ‘고난’에 대해 고민하면서 읽었던 책 가운데 필립 얀시가 쓴 [고통의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책에서 주장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고통이 가지는 의미와 목적. 그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위험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고통에 대한 그 설명이 정신적인 고통으로 연결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기본적으로 소개한 후, 그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 생각해 볼만한 것들...

“고통의 강도는 고통이 알려주는 병의 강도와 다르다.” “병의 초기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초기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정상적으로는, 즉 의술이나 수술의 도움이 없이는 병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고통이 예고라면 이 예고는 ‘고통을 가하여 병을 알려 주는’ 야만적인 에고다. 이러한 예고는 반사자극을 동반하여 고통스럽지 않게 방어할 수도 있다.” “고통은 생물적으로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병리적 현상에 불과한 것을 생리적 차원에 반영하는 사람들이다.’”

12. 감정은 표현에 대한 의식?(154) “감정은 표현에 대한 의식이다. ‘종교적인 감정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교적인 몸짓을 실천하는 것이다.’(빠스깔)” 반론! “표현과 의태가 흥분을 발동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13. 사랑과 정념(172) “참으로 사랑하는 것은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념 때문에 죽을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가장 확실한 기준이다.” - 한편, 정념 때문에 죽으려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막는 것이 사람이기도 하다...

14. 정념에 사로잡힌 사람의 논리(179, 180, 181) “정념에 사로잡힌 사람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추리로부터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결론이 먼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추리의 발판은 정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념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이상한 힘이 자기 자신 속에 자리잡고 자기의 본능을 왜곡시키고 이성의 진로를 바꾸어 놓는다고 생각한다.’” “정념은 우리의 육체가 우리의 영혼에게 멍에를 씌우는 속박의 표현이다.”(데카르트) 반론! “동물은 인간보다도 더 심한 육체의 노예이지만 동물에게는 정념이 없다.”

15. 거리 감각은 획득된 것(209), 문화에 의존하는 지각(210) “버클리는 [시각론에 대한 고찰]에서, 거리 감각은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획득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논문이 나온지 20년이 지난 후에 외과 의사 체슬든은… 태어날 때 백내장으로 맹인이 된 사람을 수술하여 시력을 찾아주는 데 성공하였다. 그 환자는 사물이 자신의 눈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거리를 파악하는 데 며칠이 걸렸고, 거리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데에 몇 주일이 걸렸다.”

반론! “체슬든의 실험도 설득력이 적다. 수술을 받은 소경은 ‘사물이 눈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닿아 있다’는 말은 그가 지각한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일 수도 있다. 그가 사용한 ‘닿는다’라는 단어는 거리가 없이 직접 접촉한다는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더욱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은 먼저 한쪽 눈만 수술 받는다. 따라서 그가 거리를 잘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215)

16. 기억은 복수?(227) “기억은 하루하루가 지나가 버리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복수와 같은 것이다.” ^^;;

17. 기억 상실증(237)에서 단어를 잃어버리는 순서! “대부분의 기억상실증의 경우에 - 손상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 ‘마치 환자가 문법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유 명사는 보통 명사보다 먼저 없어지고, 보통 명사는 동사보다 먼저 없어진다.”

18. 상상 속의 기둥 세기(267) “알랭에 의하면 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빠리에 살고 있는 알랭의 친구가 있는데, 그는 자신이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빵떼옹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빵떼옹 앞에 있는 것처럼 빵떼옹을 본다.’ 그래서 알랭이 말하였다. ‘만일 자네가 그것을 그렇게 잘 상상한다면, 기둥들을 세어보게.’ 물론 그 친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 알랭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상상력을 통해서 본다고 믿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마음의 이미지9심상)는 이미지의 착각이다. 나는 내가 상상한 것을 상상한다!” - 상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일침(一針)!

19. ‘직관-지성적 작업-창조의 원리’(284) “지성적 작업에 의해서만 직관은 창조의 원리가 된다. 가장 직관적이라고 이름이 나있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수고는 일반적으로 삭제 투성이이다.”

20. 착각=욕망에 따른 실재의 변형(292) “착각은 결코 단순한 오류, 지식의 단순한 결여가 아니라, 욕망에 따라서 실재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21. 자유 의지(313)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믿는다.’(스피노자). 인간의 독립성에 대한 의식은 곧 인간의 의존성에 대한 무의식이다.” - 생각해 볼 중요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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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상상하기
개럿 그린 / 한국장로교출판사(한장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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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책을 사면서 기대했던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상상하기’(1부)와 그것이 신학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신학의 역사, 철학적 배경,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특별히 ‘해석학’에 대한 내용이 전반적으로 나온다. 새로운 시도이기는 하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철학/신학 책은 늘 이렇게 어려워야 하는가? 어려운 용어, 난해한 문장,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안 되는 사상과 주장들... 철학자/신학자들은 ‘쉽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려운 것을 어려운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능력’이다!

* 근대 신학자들이 교의학을 철학적 존재론적 근거 위에 세우려 한다는 것(61)에 대한 비판. 철학이 신학을 주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중세에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다. 물론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신학이 철학의 시녀이다. 이것 역시 정당하지 않다. 신학이 꼭 철학의 뒤를 따라 다녀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 책을 읽어가는 중, 저자가 바르트의 입장(신학을 계시 외에 어떤 것에도 기초하지 않으려는 태도)을 소개하는 내용을 발견한다(62). 그것은 또 다른 비판을 불러왔지만… 내게는 상당히 호감 가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 “…is”와 “…as”로 보는 것에 대한 내용이 전체적인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와 함께 ‘자연신학’과 ‘계시 실증주의’를 대조시켜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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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 놓았던 것들...(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상상력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19, 67) 이것은 저자의 주장이면서, 동시에 역자가 인용한 버나드 쇼의 말이기도 하다. 생각해봄직한 주제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을 산 이유이기도 했고... 문제는 이 책이 그러한 부분을 얼마나 잘 충족시키느냐 일 텐데...

2. 17, 18c의 새로운 과학의 출현과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지적(72)에는 동의한다. 과학의 발전과 철학의 발전은 동시에 신학의 발전(?)도 가져왔다. 이전에 읽었던 구약 신학이 역사에 대한 내용이 떠오른다. 모든 사상가들은 결국 그 ‘시대의 아들’에 불과한 것일까?

3. 종교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별(74). 그것은 같은가, 다른가? 모든 것을 ‘같다’고 하는 것도, ‘다르다’고 하는 것도 일방적인 태도로 보인다. 같은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다고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유보적’인 태도가 안전해 보이진 않는다.

4. 상상력에 대한 저자의 ‘피상적인 개관’(100-102)는 꽤 유익했고 흥미로웠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상상력은 1)허구적인 사용과 2)실재적인 사용으로 나눌 수 있다. 허구적인 사용은 다시 ①환상적인(fantastic) 것과 ②기만적인(decietful) 것으로 나뉜다.

5. 저자는 신학에 대한 자연과학의 공헌(116)을 논하면서 ‘원자적 입자의 묘사 불가능성과 하나님의 묘사 불가능성’(119)을 비교한다. 꽤 흥미롭고 신선한 비교이다. 전체적으로 다(100%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미흡해 보이기는 하지만...

6. 뱀의 선언에 담긴 풍자!(134) “뱀의 선언에는 쓰디쓴 풍자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바로 그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약속에 의하여 속아서 파멸케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7. 죄 가운데 있는 상상력(136) “죄 가운데 있는 상상력은 구원의 원천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적개심의 무기고 가운데 가장 파괴적인 무기가 된다.”

8. 하나님의 형상 제작 금지 이유(139)에 대한 설명은 새롭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다. “하나님에 대하여 새긴(graven) 우상을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형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이 형상, 곧 자신에 대한 인간적 형상을 이미 세우셨기 때문이다.”

9. 종교적 상상력과 패러다임적 상상력(141). “종교적 상상력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하나님에 대한 어떤 종류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어떤 패러다임에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이다. 패러다임적 상상력은 모사(模寫)적이 아니라 유비(類比)적이다.”

10. ‘형성(formation)-기형(deformity)-개혁(reformation)’의 구도(149)는 마치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를 보는 기분이다. 어쩌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런 구도로 잡은 것 같기도 하고...

11. 상상력에 지나치게 많은 점수를 주는 게 아닌가?(161, 164) “계시는 상상력의 행위이고, 성경은 상상력의 작품이며, 신학은 상상력의 해석이다.” “성경의영감은 올바른 상상력의 문제이다.” 나는 상상력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의 이 말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낀다.

12. 좋은 은유(195), 유비(196). “좋은 은유는 단순히 선행하는 유사한 두 개의 개별존재를 비교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상이한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보도록 만들어준다는 사실.”(블랙) “유비의 전반적 핵심은 다른 용어와의 중요한 유사성의 윳형을 보여 줌으로써 어떤 용어에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사용과 상당히 흡사해 보인다. 또한 이런 면에서의 ‘상상력’의 사용은 장려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상상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13. 경험과 종교적 상상(200), 종교-종교언어-신학(200) “경험은 종교적 상상의 근거(ground)이기보다는 종교적 상상의 산물(product)이다.” “종교가 상상적이기 때문에, 종교 언어는 은유적(metaphorical)이며, 그리고 신학은 해석적(hermeneutical)이다.” “한편으로 성경적 문자주의자들은 성경의 상상적 성격을 부인함으로써 이러한 기능을 혼동하는데, 결과적으로 계시와 신학을 동일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상상과 경험의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신학의 기능을 혼동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계시를 경험의 기준으로 놓기보다는 경험을 계시의 기준으로 만들게 된다.”

14. 성경을 허구적 지위에서 구출(203) “유럽의 계몽주의 이후로, 변증학의 주도적 흐름은 성경을 허구적인 지위로부터 구출하려는 것을 향하여 모아졌다. 그 이야기들의 역사적 정확성을 증명함으로써 성경 이야기를 구출하려는 보수적인 시도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이미 헌신한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을 거의 설득하지 못했으며, 다른 현대 독자들에게 아마도 성경의 사실 가능성을 손상시키는 데에만 공헌했을 뿐이다.” 근대와 현대 신학의 실패에 가까운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15. 근대 이후의 신학은 “성경은 성경이다(is)”에서 “성경을 성경으로서(as) 읽기”로(210), 신앙주의는 “as에서 is로”의 방향 전환(212). “근대의 시작 이후로, 신학자들은 성경을 성경이라(is)고 주장한 암묵적인(implicit) 가정으로부터 성경을 성경으로서(as) 읽는 명시적인(explicit) 해석으로의 한 바퀴 순환을 한 셈이 되었다.” “신앙주의로서 보이는 것은 ‘~로서’(as)로부터 ‘~이다’(is)로 이르는 이러한 놀라운 이행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16. 신학 vs 신앙학(215). “칼 바르트는 ‘신학을 신앙학(pisteology), 곧 기독교 신앙의 학문과 교리로서 전개하는’ 근대적인 경향을 비판하는데, 이것은 정당한 비판이다.”

17. 십자가의 해석학(218, 219).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그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는 주요한 인간학적 결과는 자유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하기를 허락한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놀랄 만한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이렇게 피조물의 독립(특히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포함하여)이 주어지는 것을 바로 하나님의 권능의 표현으로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의 일면(一面)일 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독립적이며 동시에 의존적이다! c.f. A. A. 후크마 [개혁주의 인각론] 참고.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에 나오는 구절들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약하고 무기력한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돕는 바로 그 방식이며, 유일한 방식이다.’ 이러한 구절들 속에서 하나님의 연약함에 대한 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세상적인 연약성을 하나님의 참된 권능의 드러남으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들이 보인다.” - 이 부분은 마치 김진홍 목사의 초기 체험담(병든 여자를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업고 다니던 중에 죽었고, 그 와중에 들었다는 음성)이나 엔도 슈사꾸의 [침묵]에 나오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18. 저자는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다름 아닌 세계를 해석함으로 통해서라는 것이다.”(226) 세계의 변화와 세계의 해석… 해석학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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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잡학사전 2 - 이보다 맛있는 지식 만찬은 없다!
엔사이클로넷 지음, 이강훈 그림, 이정환 옮김 / 좋은생각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천하무적 잡학사전]에 이어서 읽은 책이다. 기본적인 틀은 1권과 달라진 것이 없다.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도 가끔 나오고, 새롭지만 그리 흥미를 끌지 않는 내용들, 그리고 매우 흥미롭고도 새로운 내용들이 함께 나온다. 그 가운데 몇 가지는 매우 실용적인 것도 있었고...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에 책과 그 내용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겠지만, 말 그대로 여러 가지를 모아 놓은 ‘잡학 사전’이라는 표현 그대로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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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1-22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천하무적 잡학사전 - 세상의 모든 지식을 삼켜버린다! 천하무적 지식 시리즈
엔사이클로넷 지음, 이규원 옮김, 이강훈 그림 / 좋은생각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소위 ‘잡학’에 관심이 많던 터라 처음부터 재미있게 읽었다. ‘잡학’을 낮추어 보는 태도가 만연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편견이라 할 것이다. 책 속에서 만나게 된 여러 방면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이야기들, 어이없게 느껴지는 이야기들,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 잡다한 이야기들이 나를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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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1-2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