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상상하기
개럿 그린 / 한국장로교출판사(한장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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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책을 사면서 기대했던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상상하기’(1부)와 그것이 신학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신학의 역사, 철학적 배경,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특별히 ‘해석학’에 대한 내용이 전반적으로 나온다. 새로운 시도이기는 하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철학/신학 책은 늘 이렇게 어려워야 하는가? 어려운 용어, 난해한 문장,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안 되는 사상과 주장들... 철학자/신학자들은 ‘쉽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려운 것을 어려운 그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능력’이다!

* 근대 신학자들이 교의학을 철학적 존재론적 근거 위에 세우려 한다는 것(61)에 대한 비판. 철학이 신학을 주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중세에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다. 물론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신학이 철학의 시녀이다. 이것 역시 정당하지 않다. 신학이 꼭 철학의 뒤를 따라 다녀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 책을 읽어가는 중, 저자가 바르트의 입장(신학을 계시 외에 어떤 것에도 기초하지 않으려는 태도)을 소개하는 내용을 발견한다(62). 그것은 또 다른 비판을 불러왔지만… 내게는 상당히 호감 가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 “…is”와 “…as”로 보는 것에 대한 내용이 전체적인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와 함께 ‘자연신학’과 ‘계시 실증주의’를 대조시켜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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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메모해 놓았던 것들...(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상상력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19, 67) 이것은 저자의 주장이면서, 동시에 역자가 인용한 버나드 쇼의 말이기도 하다. 생각해봄직한 주제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을 산 이유이기도 했고... 문제는 이 책이 그러한 부분을 얼마나 잘 충족시키느냐 일 텐데...

2. 17, 18c의 새로운 과학의 출현과 그것의 영향력에 대한 지적(72)에는 동의한다. 과학의 발전과 철학의 발전은 동시에 신학의 발전(?)도 가져왔다. 이전에 읽었던 구약 신학이 역사에 대한 내용이 떠오른다. 모든 사상가들은 결국 그 ‘시대의 아들’에 불과한 것일까?

3. 종교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별(74). 그것은 같은가, 다른가? 모든 것을 ‘같다’고 하는 것도, ‘다르다’고 하는 것도 일방적인 태도로 보인다. 같은 면도 있고 다른 면도 있다고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유보적’인 태도가 안전해 보이진 않는다.

4. 상상력에 대한 저자의 ‘피상적인 개관’(100-102)는 꽤 유익했고 흥미로웠다. 간단하게 말한다면... 상상력은 1)허구적인 사용과 2)실재적인 사용으로 나눌 수 있다. 허구적인 사용은 다시 ①환상적인(fantastic) 것과 ②기만적인(decietful) 것으로 나뉜다.

5. 저자는 신학에 대한 자연과학의 공헌(116)을 논하면서 ‘원자적 입자의 묘사 불가능성과 하나님의 묘사 불가능성’(119)을 비교한다. 꽤 흥미롭고 신선한 비교이다. 전체적으로 다(100%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미흡해 보이기는 하지만...

6. 뱀의 선언에 담긴 풍자!(134) “뱀의 선언에는 쓰디쓴 풍자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바로 그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약속에 의하여 속아서 파멸케 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7. 죄 가운데 있는 상상력(136) “죄 가운데 있는 상상력은 구원의 원천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적개심의 무기고 가운데 가장 파괴적인 무기가 된다.”

8. 하나님의 형상 제작 금지 이유(139)에 대한 설명은 새롭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다. “하나님에 대하여 새긴(graven) 우상을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형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이 형상, 곧 자신에 대한 인간적 형상을 이미 세우셨기 때문이다.”

9. 종교적 상상력과 패러다임적 상상력(141). “종교적 상상력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하나님에 대한 어떤 종류의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어떤 패러다임에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이다. 패러다임적 상상력은 모사(模寫)적이 아니라 유비(類比)적이다.”

10. ‘형성(formation)-기형(deformity)-개혁(reformation)’의 구도(149)는 마치 기독교 세계관의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를 보는 기분이다. 어쩌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런 구도로 잡은 것 같기도 하고...

11. 상상력에 지나치게 많은 점수를 주는 게 아닌가?(161, 164) “계시는 상상력의 행위이고, 성경은 상상력의 작품이며, 신학은 상상력의 해석이다.” “성경의영감은 올바른 상상력의 문제이다.” 나는 상상력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의 이 말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낀다.

12. 좋은 은유(195), 유비(196). “좋은 은유는 단순히 선행하는 유사한 두 개의 개별존재를 비교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 상이한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보도록 만들어준다는 사실.”(블랙) “유비의 전반적 핵심은 다른 용어와의 중요한 유사성의 윳형을 보여 줌으로써 어떤 용어에 빛을 비춰 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사용과 상당히 흡사해 보인다. 또한 이런 면에서의 ‘상상력’의 사용은 장려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상상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13. 경험과 종교적 상상(200), 종교-종교언어-신학(200) “경험은 종교적 상상의 근거(ground)이기보다는 종교적 상상의 산물(product)이다.” “종교가 상상적이기 때문에, 종교 언어는 은유적(metaphorical)이며, 그리고 신학은 해석적(hermeneutical)이다.” “한편으로 성경적 문자주의자들은 성경의 상상적 성격을 부인함으로써 이러한 기능을 혼동하는데, 결과적으로 계시와 신학을 동일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상상과 경험의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신학의 기능을 혼동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계시를 경험의 기준으로 놓기보다는 경험을 계시의 기준으로 만들게 된다.”

14. 성경을 허구적 지위에서 구출(203) “유럽의 계몽주의 이후로, 변증학의 주도적 흐름은 성경을 허구적인 지위로부터 구출하려는 것을 향하여 모아졌다. 그 이야기들의 역사적 정확성을 증명함으로써 성경 이야기를 구출하려는 보수적인 시도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이미 헌신한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을 거의 설득하지 못했으며, 다른 현대 독자들에게 아마도 성경의 사실 가능성을 손상시키는 데에만 공헌했을 뿐이다.” 근대와 현대 신학의 실패에 가까운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15. 근대 이후의 신학은 “성경은 성경이다(is)”에서 “성경을 성경으로서(as) 읽기”로(210), 신앙주의는 “as에서 is로”의 방향 전환(212). “근대의 시작 이후로, 신학자들은 성경을 성경이라(is)고 주장한 암묵적인(implicit) 가정으로부터 성경을 성경으로서(as) 읽는 명시적인(explicit) 해석으로의 한 바퀴 순환을 한 셈이 되었다.” “신앙주의로서 보이는 것은 ‘~로서’(as)로부터 ‘~이다’(is)로 이르는 이러한 놀라운 이행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16. 신학 vs 신앙학(215). “칼 바르트는 ‘신학을 신앙학(pisteology), 곧 기독교 신앙의 학문과 교리로서 전개하는’ 근대적인 경향을 비판하는데, 이것은 정당한 비판이다.”

17. 십자가의 해석학(218, 219).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그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는 주요한 인간학적 결과는 자유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하기를 허락한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놀랄 만한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이렇게 피조물의 독립(특히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포함하여)이 주어지는 것을 바로 하나님의 권능의 표현으로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의 일면(一面)일 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독립적이며 동시에 의존적이다! c.f. A. A. 후크마 [개혁주의 인각론] 참고.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에 나오는 구절들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약하고 무기력한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돕는 바로 그 방식이며, 유일한 방식이다.’ 이러한 구절들 속에서 하나님의 연약함에 대한 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세상적인 연약성을 하나님의 참된 권능의 드러남으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들이 보인다.” - 이 부분은 마치 김진홍 목사의 초기 체험담(병든 여자를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업고 다니던 중에 죽었고, 그 와중에 들었다는 음성)이나 엔도 슈사꾸의 [침묵]에 나오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18. 저자는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식은 다름 아닌 세계를 해석함으로 통해서라는 것이다.”(226) 세계의 변화와 세계의 해석… 해석학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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