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의 산길
십자가의 성요한 지음, 최민순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7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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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목적은 268페이지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다. “분별 있는 독자는 항상 이 책이 지향하는 목적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일체 자연의 그리고 초자연의 지각을 통하여 속음과 거리낌이 없이 순수한 믿음 안에서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 이 책은 미완성인 채로 끝난다. 더구나 ‘설교’에 대한 내용을 다루다가 중간에 끝나버리는 바람에 아쉬움도 있다.

* 아빌라의 테레사의 책들을 읽을 때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들의 저술은 사적이고 친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리된 느낌이 덜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정독’하기에 힘들다. 죽죽 읽어나가게 되지 부분 부분에 집중하여 차근히 읽어나가기가 힘이 든다(관심을 끄는 주제가 나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종종 ‘숨겨진 보화’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 저자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하게 된다.

1) 어쩌면 그렇게 적실한 구절들을 뽑아내는지! 아마도 그만큼 성경에 통달하다는 이야기이리라.

2) 하지만 반대로 성경 구절들을 그 원래 의미와 무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내용에 끼워 맞추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의 성경 인용 및 해석에는 무리한 부분이 자주 보인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예로 든다면…

① 저자는 제욕이 영혼의 힘을 약하게 한다고 하면서 “그러니 불행하도다, 그 날에 몸가진 여자들과 젖먹이는 여자들은!”(마 24:19)이라는 구절을 인용하고는, “여기 아기뱀과 젖먹임은 욕을 배고 기름을 뜻하니, 이 욕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욕은 항상 영혼의 힘을 앗고, 나무의 곁순처럼 무성해서 영혼을 해치게 된다.”고 말한다(75p). 일반적으로 말해서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저자가 인용하는 구절은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할 때에 쉽게 피할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여자들은 불행하다는 지적일 뿐이다. 그것은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영혼을 해치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사야는 이를 놀랍게도 저 권위스런 말로 표현했다. ‘하느님이 누구의 모습이라도 닮았다는 말이냐? 어떤 모습이 그를 닮을 수 있다는 말이냐? 대장장이가 부어 만든 우상, 은장이가 금박을 입히고 부어 만든 은사슬을 걸친 우상과 같다는 말이냐?(사 40:18-19)’ 여기 대장장이는 이성을 뜻하니, 영상과 이미지의 쇠를 닦아서 인식을 만드는 것이 이성의 일이다.”(136p).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사야 본문에 나오는 ‘대장장이’를 뜬금없이 ‘이성’을 뜻한다고 말한 것은 저자의 자의적 해석이지 본문의 의미는 아니다.

“저 다윗이 하느님께 어느 때 직접 문의한 것은 자신이 예언자인 까닭이었고, 그럴 때라도 그가 사제의 옷을 입고야 문의했다는 사실이 사무엘 상권에 적혀있다. 다윗에 에비아달 사제에게 ‘에봇을 모셔오게 하였다(23:9)’라는 대문이 거기 나오는데…”(231p). 하지만 다윗이 에봇을 모셔오게 했던 이유는 그가 그 옷을 입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에봇의 가슴 부분에 있는 ‘판결 흉패’와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이다. 제사장들도 하나님께 물은 뒤 우림이 나오는지 둠밈이 나오는지를 가지고 Yes인지 No인지를 판단한 것이지, 예언이나 하나님께 문의하기 위해서 에봇을 입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었던 것이 아니다. 에봇은 오히려 제사장의 복장이지 예언자의 복장도 아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마 18:20)’ … 여기서 주의할 말은 혼자 있는 거기에 내가 있노라 하시지 않음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둘이라야 한다는 뜻인데 아무도 교회나 그 사제들을 제쳐놓고 저 혼자서 무엇을 하느님 일이라 믿거나 따르거나 다짐함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니, 그런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께서 진리를 밝혀주시거나 다져주시지 않는 법이므로 그는 진리에 약하고 냉랭한 채로 있을 것이다.”(234p). 이 말씀이 교회나 사제에 대한 내용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거기 어디에도 ‘둘이나 셋’에 반드시 ‘교회’나 ‘사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암시조차 나타나있지 않은데!

“주께서 어느 영혼에게 형상적으로 (똑똑하게) 말씀하시기를 ‘착하거라.’ 하셨다면 영혼은 그 말씀이 계시자마자 착하게 될 것이다. 또 ‘나를 사랑하라’ 하셨다면 영혼은 즉시 하느님 사랑의 실체를 스스로 가지고 느끼게 되고, 무서워 떠는 영혼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면 당장 마음이 가라앉고 대담한 힘이 솟을 것이다. …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당신이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창 17:1)’ 하시자 그는 이내 흠 없는 자가 되어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았다.”(282-283p) 저자는 ‘영어의 셋째 형’인 ‘실체적 언어’를 설명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치 천지를 창조하실 적에 사용하신 언어처럼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그런데 그것의 적용은 좀 묘하다.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는 더더욱 이상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가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자 오랜 기간 동안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하나님이 어느 순간 그에게 나타나 책망조로 온전하게 살 것을 말씀하신 것인데… 저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실체적 언어’로 된 말씀이고 즉시로 아브라함이 흠 없는 자가 ‘되었다’고 하니…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하느님의 속성 중에 아름다우심처럼 까맣게 잊혀진 속성도 아마 없으리라.(폴레-기에렌스)”(9) - 번역자가 “독자에게”에서 인용하고 있는 한 구절이다. 토저는 오늘날의 신학에는 ‘Oh!’가 없다고 한탄했다. 정작 하나님에 대해 살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감탄과 찬사가 없이 머리로만 연구할 뿐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신학은 하나님의 전지와 전능, 편재 심지어는 공의와 사랑까지 논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윗과 같은 심정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2. “피조물의 모든 유(有)는 하느님의 무한유(無限有)에 비기면, 무(無)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 무에 집착하는 영혼은, 하느님 앞에 무요, 오히려 무보다 못하다. … 집착하는 영혼은 하느님의 무한유와 절대로 결함되지 못하니, 없는 것이 있는 것과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46) -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불교의 4성체가 떠올랐다(무의식적으로!). 인생은 고해(苦)인데, 그것은 우리가 욕심을 내기(集) 때문이며, 그 욕심을 제하면(滅) 열반에 이르게 된다(道)는 가르침… 신비주의는, 그리고 신비에 대한 사람들의 철학적 진술은 서로 통하는가?…

 

3. “이 세상의 모든 주권과 자유를 하느님 영의 주권과 자유에 비기면, 그것은 가장 심한 종살이, 고생살이, 볼모살이이다.”(47) - 아!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비하면 노예의지와 같다!!!

 

4. “여기 한 마리의 새가 묶여 있다 하자. 가늘거나 굵거나 간에 묶은 줄이 끊어지지 않아 새가 날지 못한다면, 줄이 가늘다 해도 굵은 줄에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가는 줄은 끊기가 쉽다. 그러나 아무리 쉽다 해도 안 끊으면 못 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어느 것에 집착을 끊지 않는 영혼은, 비록 덕이 많다 할지라도 하느님과의 합일의 자유에 도달하지는 못한다.”(79-80) - 집착을 끊어야 함을 설명하면서 든 비유인데, 무척 마음에 든다. 줄이 가늘든 굵든 끊지 않으면 못 난다는 지적! 정곡을 찌르고 있다!

 

5. “영혼이 감성의 밤에 들어가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능동적인 것, 또 하나는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능동적이란, 영혼이 밤에 들기 위한 일을 제 편에서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것으로서, 다음에 있는 일러두기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수동적이란,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고, 영혼은 수동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88) - 이 책, [가르멜의 산길]은 능동적인 부분을 다루고, 다음 권인 [어둔 밤]은 수동적인 부분을 다룬다. 한편, 이 부분을 보면서, 이 가르침이 신비주의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을 교훈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에서 ‘성화’의 신인협동을 연상시키게 된다. [어둔 밤]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신비주의를 너무 ‘신비화’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학이 주로 이성을 도구로 사용한다면, 신비주의는 ‘감성’과 ‘영성’을 사용하는 것일 뿐 실상 지향하는 바는 같은 것 아닐까?…

 

6. “하느님의 빛이 드높고 까마득할수록 그만치 인간 지성에는 어둔 법이다.”(171) - 이와 비슷한 사상이 이 책은 물론이요 [어둔 밤]에서도 반복적으로 지적된다. 왜 이 경험을 ‘어둔 밤’이라고 하는지, 사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비춰지는 ‘빛’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둔’ ‘밤’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빛이 너무 밝기에 오히려 연약한 인간에게는 그것이 어둠처럼 보여진다는 것.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너무 밝은 빛을 본 사울이 오히려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7. “하느님께서는 마치 샘과 같으셔서 사람은 저마다 제 그릇대로 그 물을 푸기 마련인데 때로는 이상한 대롱으로 물을 퍼내게도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 당신이 아닌 그런 것으로 물을 퍼냄은 옳지 못하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리고 원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뜻에 구애됨이 없이 주실 수 있으시다.”(217) - Amen! 나는 무엇을 가지고 그 물을 푸고 있을까?

 

8. “그러나 그들이 문의하지 않았던들 잘못할 뻔했고 또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과 같이 은총의 신약 시대에 와서는 어찌하여 옛날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그럴 법한 답변은 아래와 같다.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 문의함이 옳았고,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시현과 계시를 원함이 무방했던 그 주요 원인은 그 당시엔 아직 믿음의 바탕이 잘 굳어지지 못했고 복음의 율법도 미처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묻는 것이 필요했고, 한편 당신은 말씀, 시현, 계시, 또 형상 따위 아니면 다른 여러 가지 상징으로 일러주시는 것이 필요하였다.

… 그러나 지금은 은총의 시대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바탕이 굳어지고 복음의 율법이 나타났으니, 구태여 저런 식으로 문의할 까닭이 없고 옛날처럼 당신이 말씀하시거나 응답하실 까닭도 없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 - 즉, 둘이 아닌 오직 하나인 당신 말씀 -을 주심으로써 일체를 우리에게 한꺼번에 그리고 단 한 번에 말씀하신 것이니, 다시 더 말할 것을 지니지 않으신 까닭이다.

성바오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에 의한 예전 식대로 하느님과 사귀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께 눈길을 모으라 한 것도 이 뜻이었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예전에는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1-2)’ 이 말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하느님께서는 말없이 계시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는 것이니, 옛날엔 예언자들에게 부분적으로 말씀하시던 것을 이제는 당신 아드님이신 ‘전부’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분을 통하여 다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에 이르러 아직도 하느님께 문의한다든지 어떤 시현이나 계시를 받고 싶어 한다든지 하는 사람은 바보짓을 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욕되게 하리니, 그리스도 하나만을 우러러보지 않고 다른 엉뚱한 것, 신기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 17:5)’고 말한 그때로부터 그 전에 하던 대답이나 가르치던 일체에서 손을 떼고 이분에게 넘겨주셨으니 이분의 말씀을 들으라. 다시 더 계시할 신앙도 나타낼 아무것도 내게는 없다.

… 그러므로 옛날식으로 하느님께 물음은 마땅치 않고 당신이 말씀하실 필요도 없으니, 일체 신앙의 진리를 그리스도 안에 말씀하신만큼 계시할 진리가 다시 더 없고 앞으로도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직도 무엇을 초자연의 길로 받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아니 주신 양 하느님R 모자람이 있다고 주장함이니, 아무리 믿음을 전제로 하고 믿으면서 하는 짓이라도 이것은 믿음이 약한 데서 오는 호기심뿐인 것이다.

…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를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 가장 옳은 일, 그 밖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그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면 아니 믿어야 하니, 아직도 구약 식대로 하느님과의 교섭을 꾀하는 사람은 헛된 일을 할 뿐이다.”(227-231)

- 놀랍다! 신비주의의 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이고 놀랄 일이다. 도널드 블로쉬가 [경건의 위기]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을 ‘복음주의적 신비주의자’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성 요한이 이 부분을 이야기한 것은 새로운 계시나 시현을 구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대목이 아니라, 영성의 능동적 밤 상태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현상들에 치우치지 말라고, 비록 그것이 겉보기에 긍정적이고 좋아 보일지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말 것을 교훈하면서 이야기하는 대목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모든 말씀이 ‘완결’된 지금에 와서 또 다른 이전 방식의 계시(꿈, 환상 등…)를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바보짓이라는 말이다! 이는 오늘날 신비적 성향을 갖고 있으며 추구하는 이들이 들어야 할, 신비주의의 대가의 말이다!!1

 

9. “이러한 계시를 두고 악마는 비상하게 손을 쓸 수 있다. 이러한 계시가 흔히 말과 형상 아니면 이와 비슷한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악마는 영으로만 이루어지는 다른 계시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조화를 부릴 수 있다. 그러므로 첫째 형이든 여기서 말하는 둘째 형이든 계시가 신앙에 관한 것일 때, 만일 색다르고 엉뚱한 무엇이 계시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하늘의 천사가 말했다는 보장이 있다 해도 그러하니, 이 때문에 성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갈 1:8).

그런 까닭으로 우리 신앙의 근본 바탕에 관한 것은 이미 교회에 계시되어서 그 이상 더 계시될 것이 없는 만큼 새삼스러운 계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에 포함된 잡동사니도 받아들이지 않을 각오가 필요하다. 설령 이미 계시된 것이 새로이 계시되는 일이 있더라도 신앙의 순수성을 갖기 위해서는 새로이 계시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벌써 교회에 충분히 계시되었다는 그 이유로 믿어야 한다.

… 더구나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그럴싸하고 참되게 보이더라도 새로 계시되었다는 그 신앙 진리를 믿거나 궁리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 악마가 사람을 속이고 거짓을 꾸며내려 할 때면 진리와 그럴듯한 것을 미끼로 삼아서 우선 영혼을 잡아놓고 그 다음에 속여 넘기기 때문이다.

… 사도 성베드로는 타볼산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의 영광을 뵈었으면서도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언자들의 말씀은 더욱더 굳건해졌으니 …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벧후 1:19)’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에서 뵈온 것이 사실이지만 보다 더 든든하고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계시된 예언의 말씀이니 너희 영혼이 이에 의지함은 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 악마가 손을 쓰는 계시는 어찌나 그럴듯하고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지 애써 이를 물리치지 않으면 반드시 속아 넘어간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악마는 이를 믿게 하려고 참스런 모양을 그럴싸하게 꾸며내고 다시 이것을 사람의 감각과 상상에 깊이 심어놓으면 그 당자는 틀림없이 이것이다 하고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렇든 영혼을 안심시켜 사로잡아버리므로 겸손이 없는 영혼이면 거기서 헤어나기는 어려운 일, 도리어 나쁜 것을 믿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순수하고 조심성 있고 단순하고 겸손한 영혼은 비상한 힘과 주의를 기울여서, 마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혹처럼 이 계시와 시현 같은 것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264-266)

- 계시의 ‘완결성’에 대한 신학 교과서를 보는 느낌!

그리고… 요즈음 말이 많은, 소위 ‘금이빨’이나 ‘금가루’ 사역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별한 것, 새로운 것이 계시되고 행해질 때에 그것을 무조건 성령의 역사로 믿어버리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 계시한 그 한도 내에서 행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기준을 잡는 것이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데(히 6:18) 이것이 주장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과 또 그 원리에 위배되게 행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절대 기준으로 제시되어야만 한다!

 

10. “스승이신 성령의 빛과 가르치심을 받은 이성이 저 진리들을 깨치고 나면 동시에 다른 데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진리에 대해서 스스로 언어를 구성해나가게 된다. … 물론 이성이 받은 빛은 그 자체로 보아 틀림이 없는 것이 사실이나, 이성이 이를 표현하는 말과 논리는 틀릴 수 있고 틀리기가 일쑤이다.”(271) - 언어에 대한 그의 관심은 놀랍다. 이제야 나오기 시작한 성경의 ‘언어적, 문예적 특징에 대한 관심’을 그는 이미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언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연구해야 한다! ‘문학’을 연구해야 한다! 물론 기존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연구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11. “이즈음 되어가는 일에 나는 여간 놀라지 않는다. 몇 푼짜리 생각밖에 없는 주제에 마음이 좀 고요할 때 이런 영어(靈語) 비슷한 것이 느껴지면 당장 그것에 세례를 주어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느니 하느님께서 내게 대답하셨다느니 하면서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내세운다. 하나 그렇지 않음은 물론,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다만 자문자답이 있을 따름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 대답을 하는 것은 영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그 소원과 애착하는 마음인 것을,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느니 답을 하시느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 자신이 여기에 재갈을 되게 죄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이런 따위의 추리를 없애도록 금하지 않으면 가당찮은 일들이 생기고도 남을 것이니,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둥 예삿일이 아니었다는 둥 이렇게 생각하는 데서 겸손과 극기가 아닌 허튼소리와 영의 불순(不純)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 성령께서는 차분한 이성이라야 비춰주시고 그 비추심은 차분함을 따라 있는 것, 그리고 이성이 그 차분함을 크게 얻음은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성령께서는 믿음 아닌 딴 것으로 이성을 비춰주시지 않는다. 영혼이 믿음으로 닦여져 맑을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많이 지닐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많이 지닐수록 그만치 하느님께서 비춰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는 까닭이니, 사랑이야말로 은혜가 오게 하는 길이요 원인이다.

…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의 이성은 어찌나 발랄하고 예민한지 어느 생각에 정신을 집중시키면 이내 수월하게 개념들이 떠오르고, 그 개념들은 위에서 말한 언어와 생동하는 논리로 짜여지므로,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만 이성의 작용일 뿐이니, 이성이 감각 작용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면 자연의 빛을 가지고도 다른 어느 초자연의 도움이 없이 이런 일 아니 이보다 더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기도가 훌륭하고 하느님과 통하는 줄로 착각을 하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이것을 적든지 남을 시켜 적어두든지 한다.

그러나 그 따위 짓은 아무 쓸데없는 것, 어떠한 덕의 씨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자기 과장을 하는 결과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겸손한 사랑으로 마음의 터를 닦고 진실을 일삼으며 m 생애와 고업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을 본떠서 참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영혼의 모든 복으로 가는 길일 따름, 정신으로 숱한 추리를 해야 소용없는 것이다.

… 계속적인 영어가 이성 안에 생기는 원인이 세 가지임을 이상의 설명으로 알 수 있으니, 이성을 움직이고 비춰주시는 하느님의 성령과 이성 자체의 자연의 빛과 그리고 암시로써 이성에게 말할 수 있는 악마가 그것이다.

… 대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니, 즉 영혼이 그런 언어와 상념 속에서 겸손 및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랑하는 생활을 하고 사랑을 느끼면 이는 바로 성령이 작용하시는 표이니 성령께서 무슨 은혜를 내리실 적에는 항상 이를 사랑에 싸서 내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가 발랄한 이성의 빛에서 유래할 경우에는 저러한 덕의 작용이 없이(비록 의지가 저 진리들의 인식과 그 빛 속에서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있지만) 이성만이 모든 작업을 하기 때문에 묵상이 지나고 나면 마음은 메마른 상태에 있게 된다. 그 의지가 허영과 악에 기울지 않고 구태여 악마가 새삼스레 유혹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272-276)

- 영적인 현상에 대한 균형 잡힌 가르침이다! 신비 현상, 신비 경험이 없기에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그것에 정통한 대가(大家)가 지시하는 지침이다!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명심해야 한다! 어중이떠중이 다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응답 받았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책까지 써내는 판에 찬물을 끼얹는 듯 여겨질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침이 아닐 수 없다!

 

12. “그렇다면 윤리적 선에서 하느님께 그 기쁨을 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주의할 것은 좋은 일, 단식, 자선, 고행 등의 가치가 그 양이나 질에 있지 않고 그 안에 담겨진 하느님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한결 맑고 옹골진 하느님의 사랑을 가지고 할수록 그리고 기쁨이나 낙이나 위로나 칭찬 따위에 도무지 무관심할수록 그만치 일은 가치로운 법이다.”(386) - 보통의 ‘양이냐, 질이냐’의 논의를 넘어서는 ‘사랑이다!’라는 답변! 미가의 글(미 6:6-8)을 읽는 듯한 기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13. “초자연엣 보배를 기뻐하는 데서 영혼에 생길 수 있는 해악이 주로 세 가지라 생각되는데, 속음 및 속임과 영혼 안에 있어 신앙의 파괴와 허영 및 어느 헛됨이라 하겠다.

그 첫째로 말하면, 이러한 일에 기뻐함은 남을 속이기와 스스로 속기가 매우 쉽다. … 초자연스런 일들을 과대평가하고 좋아하는 나머지 욕정이 고르지 못하게 되면, 때 아닌 때에 그런 일들을 하려고 서둔다는 것이다. 이같은 불완전이 없는 경우이면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언제 어떻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움직여주실 때에만 그들은 움직이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동해서 안 되는 것이다.

… 이 기쁨에서 오는 해악은, 발람과 기적으로 백성을 속였다는 그들처럼, 하느님께 받은 은혜들을 나쁘게 잘못 쓰는 데에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까지 써가면서 제멋대로 예언을 하고 제가 꾸며냈거나 악마가 펼쳐 보이는 시현을 공개하는 데에 있다.”(399-401) - 중간에 나온 문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 발람을 죽이려 하신 사건(민 22:22-23)과 사마리아에 불을 내리겠다고 했던 야고보와 요한(눅 9:54-55)이야기와 관련된 내용이고, 마지막 문장은 거짓 선지자들(렘 23:21, 32, 25)과 관련된 내용이다. 초자연적인 것이 잘못되었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추구 끝에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도 속을 위험성과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결과가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14. “많은 사람들이 성화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그 그릇됨을 말하려면 할 말이 만다. 얼마나 어리석으면 그들은 어느 성화가 다른 것보다 더 영험이 있다느니, 이런 성상을 통해서 빌어야 하느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느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상이 두 개라도 표현하는 것은 다만 하나뿐이니, 두 개의 그리스도상이 그렇고 두 개의 성모 마리아상이 그렇다. 그렇건마는 저렇듯 어리석은 생각이 드는 것은 하나의 만듦새에 다른 것보다 애착을 더 가지기 때문이다.

… 따라서 다른 것보다 어느 화상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푸신다든지 은혜를 내리신다면, 사람들이 그 화상을 다른 것보다 더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라 그 성화상이 잠자고 있던 신심을 새롭게 일깨워서 신자들의 정을 기도로 이끌어주는 까닭이다. …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이 결코 성화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그림일 따름인 것, 하느님의 일은 다만 그 화상이 표현하는 성인께 대한 정성과 믿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 많은 사람은 순례를 한답시고 정성보다도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믿음과 정성만 있으면 아무 성화라도 그만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더 아쉬워할 것이 없다. … 많은 사람들이 다른 성화상보다 어느 하나에 신심을 두는데, 그런 경우 그것은 자연의 기호와 취미 이상이 아닐 수가 있다.”(415-17, 422)

- 성화나 성상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것이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한편 ‘우습게’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렇지도 않은 것이, 우리는 성화나 성상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신교 안에는 ‘자리’에 대한 이해가 이들의 성화나 성상, 또는 그것의 오용에 대한 저자의 지적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이들 가운데, 그 가운데서도 열심히 있는 이들 사이에서 기도 응답이 잘되는 자리, 기도원, 또는 특정한 장소나 집회가 있다는 생각은 일반적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성화나 성상을 오용하는 이들과 동일한 책망을 들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책을 읽어가다 보니, 성 요한은 성화와 성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점점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확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래 전 사람이 이야기한다는 느낌 없이 많이 동의하면서 읽게 된다.

 

15. “하느님께서 흔히 사람의 마음을 신심으로 이끄시는 곳이 세 가지라고 나는 본다. 첫째는 풍수지리의 형국으로서, 그 아름다운 경치가 다채로워 산천초목이나 고요 적적함이 절로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일깨워준다. 이를 이롭게 쓰려면 이러한 곳을 잊고 마음을 곧 하느님께 향해야 되는데, 목적을 지향하고 가는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방법이나 동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러한 곳에 있을 때는, 그 자리를 잊어버리고 마치 그런 자리에 자기가 없는 듯, 마음속으로 하느님과 함께 있기를 힘써야 한다. … 독수자와 은수자 같은 성인들을 보면, 매력 있고 그 넓고 넓은 사막에서도 겨우 운신할 만한 자리를 골라, 좁고 솔기 짝이 없는 방이나 굴을 만들어서 그 속에다 몸을 담는다. … 성인들께서 그와 같이 하신 것은, 영스러운 취미를 즐기려는 욕심을 끊지 않는 한 영성인이 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신 까닭이다.

… 둘째는 아주 특수한 것으로 (사막이든 어디든 할 것 없이)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매우 흐뭇한 영적 은혜를 잘 내리시는 곳이다. 그러한 곳에서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면 마음이 그 곳으로 쏠리는 것이 상정이라, 이따금 불현 듯이 그곳이 가고 싶어 못 견디나, 막상 가서 보면 전과 같은 은혜를 받지 못하니 은혜가 자기 자유에 매이지 않은 때문이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은혜를,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곳에서 주시는 것, 곳과 때와 받는 누구의 자유에 매지지 않으신다.

그럴지라도 집착의 욕을 벗은 사람이면 때로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으니,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말하면, 방금 말한 대로 하느님께서 어느 한곳에 매이시지 않으나, 은혜를 그곳에서 내리신 만큼 찬미를 받으심도 거기를 원하시는 듯하기에 말이다. 둘째는 사람이 은혜를 받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더 솟아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억이 새로운 자리에서 신심이 한결 일깨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갈 일이지, 거기라야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든가, 다른 데서는 못 주시도록 장소에 매여 계신다든가 하는 생각으로 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깨끗한 곳은 물체의 공간이 아니라 영혼이 당신의 자리인 까닭이다.

셋째는 어느 특정한 장소로서, 하느님께서 기도와 섬김을 거기서 받으시고자 선택하신 곳이니, 이를테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시나이 산이 그렇고(출 245:12), 자기 아들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정해주신 자리가 그러하고(창 22:2), 우리 사부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호렙 산이 그러하다(왕상 19:8). 하느님께서 다른 자리를 제쳐놓고 왜 이런 곳을 찬미의 장소로 택하시는지, 그 까닭은 당신이 아시는 바다.”(433-435)

 

16. “성당에 대한 말부터 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성당에다 몇 벌씩 성화를 벌여놓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서, 되도록 화려하고 돋보이게 꾸미기 위해서 아기자기한 멋을 부리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고작 이뿐이니, 이것은 도리어 덜 사랑하는 짓밖에 안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려진 장식을 즐기느라고 살아 계신 분께 대한 기쁨을 앗기기 때문이다.”(422) - 성화상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보면서 떠올랐던 예전 생각… 고등학교 다닐 무렵 성탄절을 맞이해서 강단 장식을 하게 되었다. 이례적으로 강단 뒤 벽면에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가는 그림을 그려서 붙이게 되었는데, 실루엣으로 된 그림을 크게 그려서 붙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성탄절 분위기(?)를 살리려 붙여놓은 그림이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동방 박사 세 사람이 탄 낙타의 다리가 12개여야 하는데 11개밖에 없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12개의 다리가 서로 엉켜져 있는 상황에서 모두 보일 리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다리가 11개밖에 없다며 수군거리며 오히려 예배에 집중하지 못했던 씁쓸한 기억이 난다. 장식을 즐기느라, 또는 그것을 흠집 잡느라고 정작 성탄의 주인공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모습…

 

17.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보다 제 욕심 때문에 기도를 하는데, 말로는 하느님 뜻이면 들어주시고 아니면 안 들어주시리라 하지만 속에 있는 애착과 헛된 기쁨 때문에 자꾸만 빌어대는 것이다. 그러한 기원보다 차라리 그들에게 가장 긴요한 일, 이를테면 진정으로 양심을 깨끗이 한다든지, 실제로 자기 구원에 대한 것을 깨달아서 긴요치 않은 기원들을 제쳐두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438, 440) - 욕심을 가지고 자꾸만 보채는 기도에 대한 일침!!! 하나님을 설득하는 기도, 매달리고 떼쓰는 기도… 그것이 오히려 믿음의 기도요 자녀의 특권이라고까지 가르쳐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에 비하면 이 스페인의 옛 수도사는 얼마나 복음적인가!!

 

18. “설교자는 청중을 향상시키고 자신이 헛된 기쁨이나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임무가 말보다 영에 있다 함을 깨달아야 한다. … 설교하는 교리가 제아무리 숭고하고, 이를 입히는 수사(修辭)가 제아무리 세련되고 그 수법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영을 지니지 못한 이상, 그 자체만으로는 이익을 낼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 무릇 교리가 제 힘을 내는 데는 두 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한데, 그 하나는 설교하는 이의 것이고 또 하나는 듣는 이의 마음가짐이다.

… 하지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면서 자기는 지키지 않고, 좋은 정신을 말로 펴면서 자기는 지니지 않은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싫어하신다. … 흔히 우리가 보다시피, 설교자의 생활이 훌륭하면 아무리 말솜씨가 없고 수사가 모자라고 그 내용이 평범하더라도 좋은 성과를 거둔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싱싱한 영에서 뜨거운 열이 솟아 붙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화술과 교설이 썩 훌륭하더라도 거두는 성과가 아주 적은 수가 있다. 그렇다. 멋진 문체와 몸짓이며 고운 말, 깊은 도리가 사람을 움직이고 게다가 좋은 정신까지 곁들이면 대단한 교화를 내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정신이 없으면 감정과 이성에 재미나는 강론이라도 의지에 스며드는 진기는 아주 적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다.

… 하나의 음악이 다른 음악보다 낫다 해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 음악은 내게 있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했다 해도 이내 잊어버리면 마음에 붙지 못한 불이나 다름없다. 그 자체가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함을 제외하고라도, 그러한 설교에 맛을 들이는 감정은 여에로 옮아가는 길을 막는 것이니, 말솜씨며 부수적인 것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이런 일 저런 일로 설교사를 치키며 따를 뿐, 설교에서 배우는 자기 개선은 돌아보지 않는다.”(443-) - 설교에 대한 현대의 이론을 듣는 듯하다. 물론 그의 이론은 ‘청중 중심적’이어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설교에 있어서 청중에 끼치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으므로,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끝나버리고 만다. 뭔가 더~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기대가 있었는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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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
랜디 피터슨.윌리암 J. 피터슨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 책만을 소개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20세기’로 한정지은 것도 괜찮다. 20세기에 제한되기는 했지만 기독교계의 흐름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을 소개하는 제목 앞에 작은 사진을 올려놓은 것도 마음에 드는 배려다!

* 아쉬움... 각 책들의 번역판에 대한 소개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아! 마지막 부록에 한꺼번에 실어놓았다!) 100권의 제한이 아쉽다. 200권 300권도 좋았을 것을... 20세기의 한정도 아쉽다. 19세기 18세기도 다룰 수 있다면...

* 목록을 체크해보니 소개된 책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아직 안 읽은 것도 있고... 책 목록을 볼 때마다 ‘도전 정신’이 강력해지는 것은!!1 ^^;;

* 역자가 ‘역자 머리말’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이 책의 번역이 역자의 단독 번역이 아니라 3/4가량을 초역해준 자매가 있다(7p). 그렇다면 거의 ‘공역’이 아닌가! 그럼에도 책 표지, 속지 모두에 번역자로는 ‘백금산’ 목사만 소개되어 있다. 사실 초역을 해주었어도 언급조차 않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최근 고도원 씨도 [1% 행운]을 단독 번역이 아닌데 그렇게 냈다고 해서 문제가 되었었는데... 머리말에만 밝힐 것이 아니라, 다음 판을 찍을 때는 공동번역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만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예배의 특권을 즐기고, 스스로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친구들과 편안한 일에 둘러싸여 재미있고 즐거운 일에만 시간을 보내며, 존경받는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의 죄와 고통을 회피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내린 기독교에 대한 정의라면, 그것은 잃어버린 인간을 위해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에서는 아주 많이 벗어난 것이다.”(19)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소설 가운데 나오는 맥스웰 목사의 설교다. 91년도였던 것 같다. 지도하던 청년부 여름 수련회 주제를 아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로 잡아서 진행했었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충격은 꽤 컸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도전!!

2. “무디와 모트의 전도 스타일이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곧 무디의 조직은 모트를 위대한 전도자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20) - 아! 대범함! 너그러움! 요즈음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너그러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스타일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역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고 세워줄 수 있을까!

3.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전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순종하고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22) - 존 모트의 주된 관심.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교회가 가져야 하는 관심이다!

4. “성령님은 방법을 통해 일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님은 기계 위에 임하시지 않고, 사람 위에 임하신다. 성령님은(여기에 오타! 성경님이라고 되어 있네!!) 계획 위에 기름 부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기도의 사람 위에 기름을 부으신다. 기도를 자신의 삶과 사역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강한 요소로 삼지 않는 모든 설교자는 하나님의 사역에 무용한 요소가 될 것이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진전시키는 데 무기력한 사람이 될 것이다.”(36) -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은 대학 다닐 때에 읽었던 것 같다. 이 책 역시 많은 충격과 도전을 주었었다. 기도에의 헌신을 다짐하게 했던 책... 그런데 신학을 하면서는 오히려 기도와 멀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다시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기도에 헌신을 새롭게 해야겠다!

5. “[바울의 선교방법과 우리의 선교방법]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사도 바울이 주요 도시에 들어간 방법과 바울 시대의 사역환경과 현대와의 차이점을 다룬다. 제2부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제시한 방법과 새로 건립한 교회와 스스로를 위한 재정계획을 세운 방법을 살펴보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20세기의 관행과 비교한다. 제3부에서는 바울이 회심자를 훈련시켜서 신속하게 리더로 임명했던 방법과 앨런 시대의 느리고 조심스런 방법을 대조한다. 제4부에서는 교회의 권위와 훈련을 검토하면서 선교사가 성경적인 제도보다는 서양의 제도를 심어 놓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마지막으로 제5부에서는 몇 가지 결론을 내리면서 ‘회심자 안에서 회심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믿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더 쉽게 믿는다’라고 비판한다. 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인종적인 우월감과 종교적인 교만이 우리의 태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추측할 수 있듯이 앨런의 비판은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적합한 방법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속도를 늦출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많은 열정적인 독자들 덕분에 여러 판이 발간되었다. 앨런은 분명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르러 선교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42) - 대학시절 선교사들이 와서 채플 인도를 할 때면 ‘나도 선교사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고민을 하곤 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나에 대한 소명이 ‘선교’쪽이 아니라 ‘양육’쪽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확인하면서는 그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기본적인 측면에서 선교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이 책에 대한 설명을 별 생각 없이 읽어내려 갔다. ‘선교’에 대한 책이니까...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책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거다! 이 시대에도 이런 책이 필요하다! ‘선교’는 아니지만... 이 시대의 교회들이 ‘성장’과 ‘성장의 속도’에 빠져있을 때에, 앨런처럼 ‘적합한 방법’을 외치는 사람, 그런 책이 나와야 한다! 사람들이 당장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경적인 원리에 충실할 것을 외치는, 성경과 이 시대의 모습을 앨런처럼 조목조목 비교하고 따져보며 우리가 성경을 향해 돌이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외치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도...

6. “[영혼의 평화]에서 쉰 주교는 해답을 얻기 위해 심리학으로 달려가는 미국인을 목표로 삼는다. 독자에게 질병의 원인을 무의식에 돌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심리 분석학자에게서 발길을 돌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한다. 영혼의 평화는 인간적인 원천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126) - 그렇다! 이 시대는 ‘영적’인 문제를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하는 시대다! ‘용서’받아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치유’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프로이트와 융의 말씀이 절대적인 기준, ‘카논/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심리학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심리학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조수는 조수로서 역할 해야지 자신이 책임자인 듯 굴어서는 안 된다.

7. “결혼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쉽지 않았다. 캐서린은 ‘고통스런 적응 과정 없이는 어떠한 두 인생도 완전히 하나로 녹아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모든 q부에게는 어려움이 있다.’”(135) - 새로이 발견한 작가. 캐서린 마셜! 예전에 쿠르트 코흐의 [사탄의 전술전략]을 읽고서 ‘캐더린 쿨만’의 치유 사역이 옳지 못하다는 지적을 발견했었다. 그런데 전혀 상관이 없는... 이름이 비슷해서... 확인도 하지 않고 ‘캐더린 마샬’과 ‘캐더린 쿨만’을 혼동해 버렸다. --; 결국 캐더린 마샬의 책들은 무시하고 지내왔는데... 이제부터는 관심을 갖고 보아야 겠다.

8. “바깥에는 상처를 입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어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전자렌지식의 성숙은 없습니다. 차츰차츰 성장해 갈 뿐이죠.”(292) - 존슨 부부의 말이다. 멋진 표현! ‘전자렌지식의 성숙은 없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간편하고 빠른 성숙을 꿈꾸는가!!

9. “남성은 자기 삶을 구획화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신앙을 직장 또는 다른 대인관계와 쉽게 분리해서 생각한다. 이 사실은 남성이 왜 주일에는 교회 일을 하고 월요일에는 직장에서 매몰찬 수완가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남자들의 신앙은 실제적이다. 남자들의 신앙은 단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다. 남자들의 신앙은 남자들의 삶의 나머지 영역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307) - 예전 일이 떠오른다. 집 살 때의 일... 집 주인인 여자 분과 처음 만났을 때... 화장도 안하고 무척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빌라 2층,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집이었는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계약금을 건 후에야 왜 그 집이 비싸지 않은지를 알게 되었다. 집에 불이 났었다. 막내아들이 그 화재로 죽고... 거기 더 있고 싶지 않아서 아들 집으로 옮기면서 다시 수리 겸 리모델링을 한 거란다. 처음으로 내 집 마련하는 건데 불난 집이어서 찜찜하기도 하고...(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난 집에 가면 부자 된다고 좋다고 한다던데...) 결국은 가격을 좀 더 깎고, 최종적으로 (불난 집에는 보일러가 터져서 문제 생기는 경우가 만하고 해서) 보일러를 다시 깔았는지를 물었더니 깔았단다. 시공사에 물어보니 보일러 기계는 교체했지만 라인은 깔지 않았다고... 잔금 넘겨주는 날. 난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화장을 하고 왔는데 표정도 분위기도 전혀 달랐다. 거짓말 한 것에 대해서도 그래서 어쩔 꺼냐는 식으로 오히려 치고 나오는데... 다른 사정 때문에 결국 계약을 하기는 했는데... 수더분하고 좋아 보이던 사람이 화장 하는 것 하나라 그렇게 정반대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남자들이 교회에서의 모습과 직장에서의 모습이 정반대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남자든 여자든... 기본적인 마음 밭이 문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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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책읽기 - 하
테리글래스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하권은 일반 책들을 다루고 있다. 일반 고전과 시, 소설, 아동 문학에 대한 내용과 끝부분에 가서는 도서 목록을 사용하는 것과 독서 그룹에 대한 내용, 그리고 부록으로 그리스도인 선배가 쓴 책과 비기독교인들이 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이 목록들을 보면서 일반 책들에 대한 관심이 많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래 시에 대해서는 관심이 좀 적었고(그나마 진 에드워드 비이스의 [그리스도인에게 문학의 역활은 무엇인가]와 제임스 사이어의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를 보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소설을 더더욱 그랬다. 인문학 쪽에서 역사와 철학, 과학, 예술 등의 주제들은 어느 정도 읽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소개된 책 목록은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특별히 소설 부분에서 흥미로운 작가들과 작품들을 많이 발견했다. 나로서는 새로운 세계이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침입해 들어가 보기로 작정한다. (아쉬운 것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번역된 책들이 그리 많지가 않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나는 한번 시작한 책을 언제나 끝까지 읽는다.”(221) - 나와 비슷한 책 읽기 방식! 사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보면서 그가 제시하는 독서 방식이 나와는 달리 ‘훑어보는’ 식이어서 조금 주춤했었다.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리는 식으로 책을 읽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소설도 줄쳐가면서 읽으니... 가벼운 책은 가볍게, 더 진지하게 보아야 할 책은 진지하게 보아야 하겠지...

2. “독서 그룹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누비이불을 만드는 것과 흡사하다. 모든 사람들은 함께 독서한 책으로부터 각자의 개인적인 통찰력을 가지게 되며, 그 개인적인 통찰력을 그룹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놓쳤거나 인식하지 못한 것들을 깨닫거나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이 읽은 책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각 사람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만의 사각형을 가지고 있으며, 함께 모여 있는 그룹 구성원들 앞에 그 사각형을 가져와서는, 그것을 가지고 풍성한 이해라는 아름다운 누비이불을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함께 수가 놓여지면서, 더 크고 안전하며 더 넓은 이해를 형성하게 된다. 이와 같은 토론의 과정을 통해 누비이불은 우리의 눈앞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신의 단일하고 제한적인 시각과 지식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어떤 것을 독서 그룹의 토론을 통해 볼 수 있다.”(228, 233) - 1년 가까이 매주, 독서 토론 모임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서로가 그 모임에서 기대하는 것이 달라서 조금씩 삐그덕거린다. 당장 지난 월요일에도 그 문제로 이야기를 했었다. 개인적으로 도전 받고 배운 점들을 나누자는 사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자신의 이야기들을 나누자는 사람, 또 책 가운데서 발견되는 문제를 지적하는 나 같은 사람... 서로의 관심이 달라도 그것으로 더 큰 누비이불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기대하는 쪽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마음이 힘드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저자의 글을 보면서 격려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

3. “당신이 속한 독서 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몇 가지 조언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 대부분의 독서 그룹의 경우, 가장 적절한 만남은 매달 한 번씩 모임을 가지는 것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회원들이 정해진 책을 구입해서 그 책에 관한 독서를 마치기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다. ②독서 그룹의 규모를 적은 인원으로 유지하라. 한 장소에 모이기에 편리하고, 모든 사람이 토론에 참여해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은 15명 정도가 적당하다. ③독서 그룹을 가르칠 선생보다는 그룹을 관리하고, 토론을 격려하는 도우미를 필요로 한다. ④토론을 이끄는 사람은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을 토론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⑤토론 진행자는 그 저자에 관한 배경적인 지식에 관해 연구해야 한다. ⑥내가 지금 속해 있는 독서 그룹은 모임에 앞서 회원들에게 자신들이 읽고 있는 책과 독서 토론이 이루어지는 날짜, 시간, 장소를 상기시켜 주는 짧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 편지는 또한 토론 진행자가 제기하는 몇 가지 질문도 싣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회원들로 하여금 그 책에 나타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⑦간단한 다과를 제공하는 것은 만남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233~) - 흠...

4. “많은 사람들이 전통과 전통주의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펠리컨(Jaroslav pelikan)은 분명하게 양자를 구분 짓고 있다. 즉, 전통은 ‘죽은 사람들의 살아 있는 신념’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에게 도전을 던짐으로써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긍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반면,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죽은 신념’으로서, 신앙의 외적인 의식과 수사적 기교를 고수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같ㅇ츤 내적인 불꽃을 내우지 않는다.”(240) - 전통과 전통주의에 대한 정말로 멋진 설명이요 정의다!!!

5. “우리는 보다 최근에 나타난 것이 이전의 것보다 더욱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C. S. 루이스는 이러한 종류의 사고방식을 ‘연대기적인 속물근성’이라고 불렀다. 루이스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친구 바필드가 단지 현대적인 것만 믿는 그의 젊었을 때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였다는 사실과 아울러, 어떻게 자신이 이러한 태도를 치료하였는지에 대해 쓰고 있다.

바필드는 나의 소위 ‘연대기적인 속물근성’, 즉 우리 세대에 보편화된 지적인 사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뢰할 수 없다는 사고와 가정을 신속하게 해결해 주었다. 당신은 그것이 왜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에 관해 의문이 제기되었던 일이 있는가(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어디서 어떻게 결정적으로 그러한 사실이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단지 유행 때문에 사라지게 되었는가?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이것은 우리에게 그것의 진리나 허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시대 역시 하나의 ‘시대’에 불과하며, 다른 모든 시대와 같이 나름대로의 특징적인 환상들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환상들을 자신의 시대에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그것을 공격하거나 옹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와 같은 널리 퍼진 가정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예기치 못한 기쁨] 중에서)

전통은 또한 창조성의 원천이다. 역설적이지만, 스스로를 과거의 전통 속에 침잠시키는 대부분의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남긴 작품들은 가장 독창적인 작품들로 인정받고 있다. 피카소, 엘리엇, 그리고 조이스와 같은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두드러진 혁신을 이루어 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작품들이 바탕을 두고 있던 전통에 관하여 끈기 있게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과거는 너무나도 귀중한 보배다. 우리는 오랫동안 의도된 하나님이 계획을 개진하고, 전 역사를 통해 성도들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교제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현실감을 다시 포착할 필요가 있다. 신학자로서 최근의 변덕스러운 문화적, 신학적 분위기에 초점을 두고, 많은 시간을 쏟아서 그의 초기 연구에 몰두했던 오든(Thomas Oden)은 점차적으로 초기 교회가 남긴 작품들의 중요성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는 ‘한때는 30세 이상 된 사람들을 믿는다는 것을 주저했었는데, 지금은 3백 세 이하의 사람들을 믿는 데 주저하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244, 246) - 연대기적 속물근성! 다치바나 다카시에게서 발견한 미심쩍은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고전의 내용은 사실상 시시한 것들이고, 최신 과학 그것도 인쇄된 것이 아니라 그 분야 최고의 학자의 모리 소게 있는 것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과학적인 진리야마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한편 전통과 과거에 대한 저자의 글은 백금산 목사가 [큰인물 독서법]에서 말한 내용을 생각나게 한다. “고전은 형식에 있어서는 고대의 것이지만 내용은 보편적인 완성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의 정신을 현대적인 새로운 형식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 곧 대가가 되는 지름길이다. 어느 분야든지 고전이 있기 마련이다. 섣부른 자유주의자가 되지 말고 철저하게 고전에 정통하라. 그러나 고전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지 말고, 완전히 소화하여 새로운 목소리를 내라. 고전은 곧 기본기다. 기본기를 철저하게 마스터한 다음에 자유자재로 변형을 가하라. 원칙에 철저할 때에 변칙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원칙을 무시한 변칙은 반칙이다. 반칙은 추하다.”

6. “신자인 우리가 교만해져서 우리가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아시리아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바로잡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261) -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구원에 대한 진리는 기독교가 독점(?)하고 있다 할지 모르지만, 그 외의 영역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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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책읽기 - 상
테리글래스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 저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 ^^; (13p, “나는 솔직히 책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책이 없는 삶을 불완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종의 독서광이다. 나는 나에게 닥친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정신없이 서점에 들러야 하는 강박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는 책 중독자다. 책은 내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잊을 수 없는 삶의 많은 순간들을 보냈던 공간이기도 하다.”)

* 한국 번역서 소개나 짤막한 인용은 좋았다. 그런데 번역서에 대한 소개가 ‘불완전’하다. 번역되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소개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책이 발간된 후에 번역되어 나온 것이 빠진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이전에 번역된 책들, 특히 가톨릭 관련 책들은 많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성프란시스의 작은 꽃들]은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출간되기 전에(이것은 1부와 2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분도에서(1부만 다룸) 출간되었다. [미지의 구름]은 [무지의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바오로 출판사에서 오래 전에 번역되었고,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쓴 [영적인 훈련] 역시 [영신수련]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번역되었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쓴 [내면의 안식처]는 [영혼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바오로딸에서, [성 테레사의 생애]는 [천주 자비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분도출판사에서 오래 전에 출간되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책들도 [영혼의 깊은 밤]과 [카르멜 등정기]는 각각 [어둔 밤]과 [가르멜의 산길]이라는 제목으로 바오로딸에서 출간된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54-67p).

또 이 책들이나 저자에 대한 소개 역시 불완전하다. 예를 들어, “[내면의 안식처]는 슬기로운 여인이 내적인 삶에 대해 기록한 지혜서이며”(68p)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갈멜 수도회’를 세운 초기에 자기와 함께 한 수녀들에게 기도에 대해 교훈하기 위해 ‘주기도문’을 기본으로 하는 [완덕의 길]이라는 책을 먼저 저술했다. 그리고 [영혼의 성]은 좀 더 깊은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와 합일할 것인지를 교훈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이는 ‘슬기로운 여인’이나 ‘지혜서’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또 십자가의 성 요한을 소개하는데 있어서는 아빌라의 테레사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는데 저자는 이 부분도 그냥 넘어간다.

* 고전의 범위가 너무 넓지 않은가? 다치바다 다카시는 고전의 범위를 너무 축소시키는 반면(“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500년이나 1,000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검증을 받고 후세에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저자는 현대의 저작까지도 고전의 범주에 포함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오늘날 교회는 우리 신앙의 역사적 근원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독창적인 풍성함에 대한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문화적인 기억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24) - ‘기억력’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마이클 호튼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에서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반지성주의적이라는 점을 들면서 역사와 사상에 무관심한 ‘기억 상실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우리는 피아노 독주자가 아니며 심지어 조화를 이루어 연주하는 밴드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오케스트라다. 우리의 모든 다양한 전통들과 주장들은 기독교적 전통의 메시지라는 교향곡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작용한다.”(27) - 멋진 비유!!

3. “고전 작품들은 우리에게 우리보다 앞서간 과거 선배들의 실수와 업적을 동시에 가르쳐 준다. 여러분은 이 위대한 작품들이 오류가 없는 지혜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33) - 옳은 지적!

 

* 사소해 보이는 실수/오류들이 많이 눈에 띈다! --;

28p 키에르케고르를 소개하면서 Soen Kierkegaard라고 했는데, 죄렌은 Søren으로 적어야 옳다.

52p 오타인 듯 한데, ‘레르보의 버나드’가 아니라 ‘끌레르보의 버나드’라고 해야 한다.

55p 토머스 아퀴나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아퀴나스는...”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퀴나스(아퀴노)는 이태리 남부에 있는, 토머스가 태어난 지역 이름이다. 당시에는 사람 이름과 지역을 함께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Francis of Assisi는 ‘아시시’ 출신의 프란시스라는 뜻이요, William of Ockham은 오캄에서 출생한 윌리엄이라는 뜻이다. 토머스의 경우 Thomas of Aquinas라고 부르지 않아서 많이 혼동하지만, 아퀴나스는 지역 이름이기 때문에 그를 부를 때는 ‘토머스’라고 불러야 옳다. 그를 ‘아퀴나스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 프란시스를 ‘아시시는...’이라고 하거나, 윌리암 오브 오캄을 ‘오캄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68p 십자가의 존이라는 이름은 영어 이름을 그냥 직역해 놓은 것인데, 일반적으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도 ‘십자가의 존’이라는 식으로는 부르지 않는다.

74p 로렌스 형제의 책을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는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 제목처럼 [하나님 임재의 연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책 제목을 임의로 번역하기보다는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들 가운데 잘 된 제목으로 소개하는 것이 더 나았을 듯...

80p 페넬롱의 책을 [그리스도인의 완성]이라고 직역해놨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옳은 번역이다.

118p 루이스의 책 가운데 Till We Have Faces를 [우리가 체면을 가질 때까지]라고 했는데, Faces를 ‘체면’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되었다. 아마도 번역된 내용과 별도로 번역된 책의 소개를 준비해서 넣은 것 같은데, 이 정도 되는 내용은 교열하면서 맞추어줬어야 하는데, 번역자도 번역자지만 출판사에서 편집하는 일을 성심껏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144p 제임스 사이어의 책 How to Read Slowly도 [어떻게 완독할 것인가]라고 했는데, 이 책은 IVP에서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당연히 ‘천천히’ 아니면 ‘느리게’가 맞다. 이 책은 ‘완독’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200p 애니 딜라드의 책 A Pilgrim at Tinker Creek를 [그리스 수선공을 찾아간 순례자]라고 번역해놓은 것은 어이가 없다. Creek을 Greek으로 오해한 것 같은데, 이것은 ‘팅커 강/계곡의 순례’ 정도로 번역되어야 옳다. 이 책도 민음사에서 (원제목과는 무관하게) [자연의 지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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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오류 사전 2 -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
발터 크래머 & 괴츠 트렌클러 외 지음, 박정미 옮김 / 경당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권을 읽을 때보다는 조금 덜한 느낌... 그래도 몇 가지 부분들은 새로이 배울 수 있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 역사와 언어 관련

1. “미국 작별 인사 ‘good bye’는 ‘God Bye’, 즉 ‘God be with you(하나님과 함께 하라)’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종종 잘못 이해되고 있는 또 다른 미국식 작별 인사 ‘So long’ 역시 ‘다음에 만날 때까지 오랜 시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아랍어의 ‘살람 salaam’ 또는 히브리어의 ‘샬롬 shalom(평화)’에서 생겨난 말이다.”(51)

2. “‘cynical(냉소적)’이라는 말은 ‘개 같은’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kynisch’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냉소가는 개처럼 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 같다’는 것은 ‘비굴하다’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없다’라는 의미다.”(69)

3. “디오게네스가 통 속에서 거쳐했다는 사실은 분명 과장된 것이다. 그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아마도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쓴 디오게네스 전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전기에서 세네카는 ‘그렇게 소박한 생활 방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개처럼 통 속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적어 놓았다.”(89)

4.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많은 것들을 발명하거나 예견한 것(예를 들어 헬리콥터나 낙하산)은 사실이지만, 현대의 자전거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 1974년 체인과 페달까지 완벽하게 갖춘 두 발 자전가의 스케치 그림이 레오나르도의 필사본 뒷면에서 발견되었지만, 이것은 1960년대에 행해진 필사본의 복원 작업에서 한 장난꾼이 그려 넣은 것에 불과하다.”(102)

5.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갔었다는 주장에 대한 유일한 증인은 마르코 폴로 자신이다. 우리가 수많은 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과는 달리, 실제로 마르코 폴로는 콘스탄티노플과 흑해를 넘어간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론에 의하면, 그는 몽골의 쿠빌라이 칸을 만난 일도 없으며 그 황제의 칙사를 지낸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카라코룸이나 북경은커녕 그가 자신의 [동방견물록]에서 보았다고 하는 다른 도시들도 대부분 실제로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달리 말해, 마르코 폴로는 그가 쓴 책의 상당 부분을 베끼거나 꾸며낸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다음과 같은 간접 증거들을 근거로 삼고 있다. ①마르코 폴로가 보고했어야 마땅할 것들이 모두 빠져 있다. 만리장성, 서적인쇄술, 차, 젓가락 사용, 전족 등. ②중국 문헌에서 마르코 폴로에 대한 설명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③마르코 폴로가 했다고 하는 여행 경로는 뒤쫓아 가는 데 상당한 무리가 있다. ④낯선 풍습과 도시 또는 나라에 대한 묘사에 이상하게도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⑤마르코 폴로라는 인물이 책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⑥기행문의 구성 자체에 문제가 있다.”(112~)

6. “무정부주의는 원래 혼란이나 무질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최초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사람들을 폭력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공존 상태로 이끌고자 하였으며, 그러기 위해 무하한 개인의 자유와 절대적인 결사의 자유, 제한받지 않는 사유 재산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자유주의적 경향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을 요구하였다.”(132)

7. “미키 마우스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는 월트 디즈니는 기껏해야 미키 마우스의 대부일 뿐이다. 월트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와 함께 가면서 그 길을 평탄하게 해주었지만 이 만화 캐릭터를 고안해내지는 않았다. 미키 마우스가 탄생한 1927년에 디즈니는 그림 그리는 일과 도안 작업을 이미 그의 직원들에게 맡긴 상태였으며 자신은 제작과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었다. 최초의 미키 마우스는 디즈니가 데리고 있던 스타급 만화가 어브 이웍스에 의해 그려졌고, 미키 마우스라는 이름은 디즈니의 부인 릴리안이 붙여준 것이다(디즈니 자신은 ‘모르티머’라는 이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단지 이 새로운 캐릭터의 기본 아이디어만은 월트 디즈니가 그때까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만화 주인공 ‘운 좋은 토끼 오스왈드’의 사용권을 박탈당한 후에 직접 구상한 것이었다.”(135)

8.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50여 년이 지난 후인 나폴레옹 3세 시대에야 비로소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이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적인 이념으로 선택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소유권’이라는 모토 아래 일어난 것이며, 1789년 8월 26일 시민권 및 인권 선언문에는 ‘박애’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142)

9. “초기의 십자군 전쟁은 서구 제국주의보다는 동양 제국주의와 관계가 있으며 수백 년에 걸친 투르크족과 무어족의 팽창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상업적인 목적에 역점을 두고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이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훗날 많은 역사학자들이 그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처럼 크게 개인적인 이익이나 물질적인 부를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빚을 져야만 했으며 십자군 전쟁을 수입원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십자군은 현대의 종교적 자살 특공대와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191)

10.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사실 테레제에게 바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1808년에 작곡된 이 유명한 피아노곡의 원본은 유실되었으나 베토벤이 그 시기에 말파티라는 빈 출신 의사의 딸 테레제에게 빠져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녀에게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바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악보의 인쇄 작업에서 알아보기 힘든 베토벤의 필체가 잘못 읽히는 바람에 ‘테레제’가 ‘엘리제’로 바뀌어버린 것이다.”(211)

11. “1918년 감옥에서 러시아 혁명에 대해 쓴 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부의 지지자만을 위한, 한 정당의 당원들만을 -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 위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라는 것은 항상 다른 생각을 가진 자유일 뿐이다.’ 이 유명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명언은 그러나 그녀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뜻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 글을 계속 읽어보면, 이 ‘다른 생각을 가진 자’가 특히 다른 생각을 가진 공산주의자를 두고 한 말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243)

12. “제퍼슨은 초기 미국의 인도주의자와 휴머니스트를 대표하는 전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제퍼슨은 공공연하게 노예를 부렸으며 유색인종을 인종학상 열등하다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조지 워싱턴과는 달리 그는 결코 자신의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노예들 가운데 다섯 명만 제외하고 모두 경매에 붙여졌다. 제퍼슨에 의하면 흑인은 게으르고 백인보다 멍청해서 언제나 강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당시의) 대부분의 미국인들에 비하면 계몽된, 그리고 사회적 발전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판단 기준으로 볼 때 그는 틀림없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250~)

13. “수많은 책이나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중세의 종교재판관들은 비교적 온정이 있고 진지하게 법과 정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초기의 종교재판관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영혼의 구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권력에서 보호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여겼다.

‘까다롭고 독자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비판가’로 유명한 기베르는 자신의 피보호자 가운데 여러 명이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을 당시를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 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주교에게 물어보기 위해 보베의 공의회로 향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시민들은 성직자들의 아량 있는 판결을 염려하여 모두 감옥으로 몰려가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을 끌어낸 후 성문 밖에 불을 피워놓고 그들을 화형시켜 버렸다.’

그와 같이 부당한 권리 침해를 막기 위해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13세기 초에, 판결을 내리기 전에 항상 자세한 조사 절차(바로 ‘종교재판’)를 거치도록 요구하였다.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을 데려와야 했으며, 피의자의 진술을 들어보고 그가 뉘우치면 큰 처벌을 내리지 않고 방면시키도록 하였다. 이는 그 이전의 전횡이나 사사로운 형벌과 비교해볼 때 계몽된 법 해석의 방향으로 크게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는 드물었고 특히 ‘전과가 여러 번 있는 범법자’에게만 사형이 선고되었다.”(252~)

14. “독일의 [슈피겔]지와 안스바흐 시의 주관 하에 카스파르 하우저의 혈액을 가지고 DNA 분석 실험을 실시한 결과, 하우저가 바덴 공국의 군주 아들이었다는 설은 옳지 않음이 증명되었다.”(275) - 기이한 일을 다루는 많은 책들이 카스파 하우저의 이야기를 다룬다. 16세의 나이에(1828년) 나타난 말도 거의 못하고 행동도 이상한 사람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해왔는데, 이 책은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15. “로마의 카타콤은 은신처나 집회 장소가 되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기원후 2세기 중반부터 초기 기독교인들은 순수한 지하 묘소로 이용하기 위해 카타콤을 파기 시작했으며, 때때로 순교자의 무덤가에서 만나 ‘기쁜 마음으로 순교의 날이 다시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카타콤이 ‘정규’ 예배나 은신처의 용도로 이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카타콤의 위치를 당국이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고 출입구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 안에 들어갔다면 덫에 걸린 쥐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279)

 

* 과학, 의학, 생활 관련

1. “껍질째 삶은 감자가 껍질을 벗긴 후 삶은 감자보다 비타민과 무기질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입증된 바다.”(28) -

2.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고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공룡의 생존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글을 싣고 있다. 더구나 공룡은 조류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 글에 의하면 공룡은 불균형적이고 거대한 파충류가 아니라 ‘털이 뽑힌 거대한 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추측해온 것과는 달리 공룡은 냉혈 동물이 아니라 조류나 포유류처럼 온혈 동물이었으며, 조류와 마찬가지로 알을 않았고 또 그 알을 품어서 부화시켰다는 것이다. 몽골 지방에서 알 위에 웅크린 채 아마도 모래폭풍에 의해 파묻힌 듯한 공룡 두 마리가 발굴된 것을 보면 적어도 일부 공룡들은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공룡은 오늘날 유전적으로 유사한 조류의 형태로 생존하게 된 것이다.”(42) - 글쎄... 이건 좀 믿기가 어렵다.

3. “빛은 각 매체에 따라 다양한 속도로 퍼진다. 예를 들어, 진공 상태에서 빛은 초속 299,792km, 공기 속에서는 초속 299,705km, 그리고 유리 속에서는 초속 약 20만km의 속도로 퍼진다. 바꿔 말하면, 광속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진공 상태에서 빛은 가장 빠른 속도로 퍼지기 때문에 이때의 속도를 광속이라고 말할 뿐이다.”(44)

4.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신뢰할 만한 학자 가운데 세계가 납작한 원반 모양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중세의 학식 있는 수도사들 역시 지구가 원반처럼 생겼다고 주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중세의 중요한 교회 성직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원구 형태의 지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중세 사람들이 세계를 평면으로 간주했다는 속설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기원후 6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신학자 코스마스이다. 그는 세계가 평평하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몇몇 성경구절을 엄밀하게 따져보면서 지구가 육면체로 생겼고 북쪽은 높은 산에 의해 경계 지워져 있으며 그 산의 둘레를 해와 달이 돌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사실상 코스마스의 [그리스도교의 지지학]은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저서는 라틴어로 번역되지도 않았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가톨릭 교회 지리학자들로부터 다수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중세에 평평한 지구를 믿도록 교회에 의해 강요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계몽주의에 이를 때까지도 지구의 평면설을 옹호하는 가톨릭 교회 성직자에 대해 언급된 일은 결코 없었다.

우매한 성직자들에 대한 속설은 과학의 발달을 가톨릭의 반계몽주의자들과 계몽주의 학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후반에 나온 것이다. 특히 가톨릭 교회를 증오하던 미국인 의사 존 B. 드레이퍼와 미국 코넬 대학의 설립자 앤드류 딕슨 화이트, 이 두 사람에게 과학의 여사가 나중에 그런 식으로 왜곡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65~) - 이 두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는 책을 참조.

5. “인간은 자기 뇌의 10퍼센트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논제가 나오게 된 것은 아인슈타인 탓이라고들 한다.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단지 하고자 했던 말은 정해진 시점이 되면 우리의 뇌세포 열 개 가운데 한 개만이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말은 맞을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열 개의 뇌세포 가운데 한 개만이 아니라, 실제로는 모든 뇌세포가 사용된다.”(75)

6. “기원전 2,000년경에 등장한 최초의 단추들은 실용적인 기능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단지 장식용으로만 이용되었으며, 그와 같이 순수한 장식으로서의 역할은 그 후 3,000년 이상 계속 유지되어 왔다. 잠그는 용도로서의 단추는 700년경에 비로소 나오기 시작했으며 중세 말기였던 이 시대에는 그때까지 일반적인 풍성한 자루 형태의 의복이 더 좁은 형태의 새로운 유행에 밀려나야만 했다.”(79)

7. “모든 유제류(有蹄類, 발굽이 있는 포유동물) 중에서 당나귀는 지능 테스트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나타낼 때가 많다. 목초지에서 당나귀는 자신의 수염을 이용하여 전기 울타리에 전기가 통하는지 시험해보는 반면, 말이나 소는 전기 충격을 당한 후에야 그것을 깨닫게 된다. 당나귀는 그 융통성 없는 고집 때문에 지능이 낮은 동물이라는 부당한 평판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바로 그 고집이 높은 지능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당나귀가 고집을 부리고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일반적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81~) - 발람의 당나귀! ^^;

8. “맹장 수술이란 이른바 충양돌기(충수)라는 것만을 제거하는 것이며, 맹장으로 알려져 있는 대장의 보이지 않는 끝부분 자체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126)

9. “모유가 여러 가지 면에서 우유보다 신생아에게 좋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유에는 지방과 탄수화물이 더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으며, 모유의 철 성분은 우유에 든 철 성분보다 아기들의 몸에 더 잘 흡수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유가 완벽한 식품이라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모유에는 비타민D가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모유만 먹고 자라는 아이들은 구루병에 걸리기 쉽다.”(130)

10. “번개는 항상 가장 높은 곳에 내리친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번개가 가장 높은 접촉점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 좁은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는 평지에서만 그렇다. 그러므로 높은 나무들로 에워싸인 넓은 들판에서는 번개가 키 큰 나무를 택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넓은 곳에서는 번개가 나무를 때리지 않고 들판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번개는 전기가 잘 통하는 물질만을 때린가? 이 논제 역시 특정한 조건하에서만 옳다. 높이가 똑같고 하나는 나무로, 또 다른 하나는 알루미늄으로 된 전신주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을 경우, 번개는 물론 알루미늄 전신주를 때린다. 그러나 이 전신주들이 10미터 이상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을 때 번개에 맞을 확률은 양쪽 모두 똑같다.”(150)

11. “비둘기는 전혀 평화로운 동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의 역할은 잘못 주어진 것이다. ‘인디언의 고문 말뚝을 제외하고 비둘기처럼 동족을 서서히 끔찍하게 죽도록 잔혹한 상처를 입히는 동물은 또 찾아보기 힘들다.’ 비투스 드뢰셔는 콘라트 로렌츠의 실험을 그에 대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비둘기들은 두 마리 이상을 한 새장 안에 가둘 경우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서로를 쪼아댄다.”(167)

12. “사자들은 비교적 비겁한 편이다. 사자들은 스스로 먹이감을 사냥하는 것보다는 다른 동물들이 잡은 먹이를 가로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자는 가능한 한 슬그머니 싸움을 피하려 한다. 일반적인 이론에 의하면 자신들 영역을 방어할 때 사자들은 대단한 상호 협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자들은 용감성이 부족하여 무리 속으로 슬쩍 숨어버렸다. 몇몇 사자들은 곧장 침입자로 추정되는 것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다른 사자들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거나, 공격을 하더라도 영웅들을 정말로 도와야 할지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먹이를 분배할 때면 이 비겁한 사자들도 용감한 사자들과 똑같은 양을 먹어치운다.”(171~)

13. “사실은 굳이 음식을 천천히 씹어 먹을 필요가 없다. 먹은 음식이 입소에서 이미 소화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장과 위에서 비로소 본격적인 소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음식이 어떤 상태로 그곳에 도착하든지 간에, 즉 큰 조각이든 작은 조각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똑같이 화학적으로 분해되고 선별되어 신진대사에 이용된다. 그러므로 천천히 음식을 씹는 것은 기껏해야 햄이나 양고기를 덩어리째 먹다가 질식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을 뿐이며 영양소의 배분에서 볼 때 씹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193)

14. “목욕 후 욕조 둘레에 남는 때의 테두리는 우리 몸의 청결함과 반드시 관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몸에 때가 전혀 없는 상태로 목욕물에 들어가더라도 욕조에는 때가 끼게 마련이다. 그와 같은 때가 낄 수 있는 전제 조건은 비누와 광물질이 풍부한 목욕물이다. 그러면 비누 분자가 광물질과 결합함으로써 용해되지 않으며 왁스와 같은 흰색의 덩어리를 이룬다. 바로 이 덩어리 때문에 우리 자신의 몸이 아무리 깨끗해도 욕조 둘레에 때의 테두리가 생기는 것이다.”(218)

15. “위궤양이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처럼 위산 과다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박테리아를 통해 발생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의학계에서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독일 국민 세 명 가운데 한 명꼴로 가지고 있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는 위점막을 뚫고 들어가 위벽까지 구멍을 내고는 그 아래에 있는 상피세포에 달라붙어 마침내는 그 세포들을 먹어치운다. 대부분의 위궤양과 십이지장궤양 역시 크기가 2,000분의 1밀리미터도 채 안 되는 이 박테리아가 그 원인이다.”(221)

16. “최근 교통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그렇다고 남성이 더 낫다는 말은 아니다) 차를 운전한다고 나타났다. 여성은 주위 차와의 거리를 잘 인식하지 못해서 남성에 비해 주차하는 데 더 어려움을 느끼며, 옆길로 접어들어야 할 때 너무 일찍 아니면 너무 늦게 방향을 꺾는다. 그리고 빨리 앞서나가야 할 때 주춤거림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에 반해 주차할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때(이 경우 남성과 여성 모두 경쟁자에게 거칠게 반응한다)나 마력이 높은 차를 몰 때(이때 남성과 여성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정도는 같다)는 성별의 차지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242)

17. “전자레인지는 비타민을 파괴한가? 그와 반대로 전자레인지로 요리를 하면 비타민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가열 시간이 더 짧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 특히 잘 보존된다.”(246)

18. “커피는 심근 경색을 촉진시킨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 주제에 대해 지금까지 행해진 것 가운데 가장 관범위한 연구에서는 커피와 심근 경색이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282)

19. “콜레스테롤은 해롭다? 콜레스테롤은 우리 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콜레스테롤이 없다면 우리의 몸은 성호르몬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약이 때때로 성적 불능을 초래하기도 한다. 늘 그렇듯 이 경우에도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음식에서 콜레스테롤을 섭취하는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버터나 계란, 우유 등을 많이 먹는 사람은 그와 같은 콜레스테롤 함유 식품을 삼가는 사람보다 오히려 심장질환에 걸리는 일이 드물다.”(293)

20. “키스할 때 감기가 옮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속설은 현대 의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비현실적인 것이다. 감기를 옮기는 바이러스들이 우리의 입 안에서는 제대로 서식하지 못하고 따뜻한 콧속에서 더 잘 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키스를 하더라도 그때 바이러스가 옮겨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297)

21. “피는 붉은색이다? 우리의 피는 정맥을 통해 다시 심장으로 흘러들어갈 때 거의 푸른색에 가까운 보라색을 띤다. 그러나 다친 정맥을 통해 흘러나오는 피는 산소와 접촉하여 곧바로 다시 붉은색이 된다. 다른 동물의 경우 피는 초록색(털이 많은 벌레류)이나 흰색(메뚜기)을 띠기도 하고, 일부 성게 종류의 피는 오렌지색이다.”(312)

22. “불을 자주 껐다 켰다 하며 할로겐 램프의 수명이 단축된다? 이 낭설에 의하면 불을 켤 때 극도로 높아지는 전압 때문에, 그리고 처음에 램프를 점화시키는 데 필요한 전류의 강도 때문에 자주 불을 켰다 껐다 하면 할로겐이나 다른 형광등이 빨리 망가지므로 불을 계속 켜두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형광등이 점화될 때 필요한 전류의 강도는 불을 켜놓은 상태의 30퍼센트 이하에 불과하며, 불을 켤 때 극도로 높아지는 전압은 축전기(콘덴서)를 통해 완화된다. 그러므로 형광등을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해도 그 수명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불을 켤 때마다 새로 가열되는 재래식 백열등의 경우에는 해가 될 수도 있다. 급격한 온도차로 인해 필라멘트가 더 빨리 녹아 끊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열등의 전구는 싼 값이 새로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소모는 사람들에게 별로 큰 자극을 주지 못한다.”(318)

23. “고혈압은 특히 음식에 든 소금을 통해 유발된다? 독일의 [빌트 데어 비센샤프트]를 보면 ‘지나치게 짠 음식이 국민 질병인 고혈압의 주원인이라는 생각은 의사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일종의 교의(敎義=교리)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적어도 독일에서만큼은 고혈압 환자에게 싱거운 음식으로 식이요법을 시킨다 해도 기껏해야 3퍼센트의 혈압을 낮출 수 있다는 - 효과적인 치료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미하다 - 사실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고 잇다’고 적혀 있다.”(322)

 

* 기타

1. “마태복음 19장 24절과 마가복음 10장 25절에 나오는 이 유명한 성경 구절은 사실 잘못 번역된 것이다. 번역자가 아랍어의 원어 ‘gamta(밧줄)’을 ‘gamla(낙타)’와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가 되어야 옳을 것이다.”(62) - 2권에는 성경에 대한 내용이 뜨문뜨문 나온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신빙성이 있는 내용인가 하면 어떤 것들은 수긍하기 어렵다. 이 경우 ‘아랍어 원어’라고 되어 있지만, 신약 성경은 ‘아랍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코이네 헬라어’가 신약이 기록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헬라어 본문을 아람어(아람어와 아랍어는 다르다) 본문으로 바꾼 것(페쉬타)을 찾아보았는데, 거기에도 ‘낙타’로 되어 있다. 신약을 번역한다고 하면 당연히 ‘헬라어 원어’에서 번역하는 것이 옳은데 뜬금없이 ‘아랍어 원어’가 나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느 헬라어 원문에도 ‘낙타’로 나오는 것을 ‘밧줄’이라고 말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2. “자녀의 장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바로 - 물론 있을 경우에 한해서지만 - 형제자매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프랭크 설로웨이의 이론에 의하면 그렇다. 아들 혹은 딸이 훗날 개혁가가 되느냐 아니면 체제의 수호자가 되느냐는 가족 내에서의 그 어떤 변수보다도 그 아들 또는 딸이 몇 번째 자녀로 태어났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정치계, 종교계 또는 학계를 막론하고 세계 역사를 뒤바꿔 놓은 인물들은 모두 차남이나 차녀로 태어났다.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장 자크 루소, 아이작 뉴턴, 볼테르, 코페르니쿠스, 찰스 다윈 등은 모두 장남이 아니었다.”(159~)

3. “구약이나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는 곳 어디에도 날개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성경 소에서 유일하게 날개를 달고서 등장하는 것은 세라핌(스랍)과 케루빔(그룹)이지만 이들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는 수행원이다. 게다가 그들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어 천사 역에는 어차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도 천사들은 하나같이 날개를 달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날개를 단 천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4세기 말에 들어서의 일로, 추측컨대 천사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든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등을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263~) - 스랍과 그룹이 사자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에스겔 1장에서 그룹을 설명하면서 사자 형상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과 함께 소와 사람, 독수리의 형상도 같이 나오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스랍의 경우 이사야 6장에 나오지만 그 형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천사가 날개가 없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저자가 옳다.

4. “여러 사람들이 타이태닉 호의 침몰을 예언했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예견’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일같이 사람들은 교황이나 독일 수상 또는 미국의 대통령이 암살되는 꿈, 쾰른 대성당이 무너지는 꿈, 또는 바이에른 지방에서 머리가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는 꿈 등을 꾸게 된다. 그 후 실제로 교황이나 독일 수상 또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된다든가, 쾰른 대성당이 무너진다든가, 아니면 빌트바트 크로이트에서 머리가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난다든가 하는 일이 일어나면 전 세계가 그와 같은 꿈에 대해 알게 된다. 반대로 교황이나 독일 수상 또는 미국의 대통력이 살해되지 않고 쾰른 대성당이 온전하게 서 있으며 바이에른 지방에서 머리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지 않으면 그런 꿈에 대해 알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303) - 이러한 ‘예견’과 성경적인 ‘예언’은 구분되어야 한다. 예견을 예언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예언을 예견처럼 여기는 것도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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