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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
랜디 피터슨.윌리암 J. 피터슨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 책만을 소개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20세기’로 한정지은 것도 괜찮다. 20세기에 제한되기는 했지만 기독교계의 흐름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책을 소개하는 제목 앞에 작은 사진을 올려놓은 것도 마음에 드는 배려다!
* 아쉬움... 각 책들의 번역판에 대한 소개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아! 마지막 부록에 한꺼번에 실어놓았다!) 100권의 제한이 아쉽다. 200권 300권도 좋았을 것을... 20세기의 한정도 아쉽다. 19세기 18세기도 다룰 수 있다면...
* 목록을 체크해보니 소개된 책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아직 안 읽은 것도 있고... 책 목록을 볼 때마다 ‘도전 정신’이 강력해지는 것은!!1 ^^;;
* 역자가 ‘역자 머리말’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이 책의 번역이 역자의 단독 번역이 아니라 3/4가량을 초역해준 자매가 있다(7p). 그렇다면 거의 ‘공역’이 아닌가! 그럼에도 책 표지, 속지 모두에 번역자로는 ‘백금산’ 목사만 소개되어 있다. 사실 초역을 해주었어도 언급조차 않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최근 고도원 씨도 [1% 행운]을 단독 번역이 아닌데 그렇게 냈다고 해서 문제가 되었었는데... 머리말에만 밝힐 것이 아니라, 다음 판을 찍을 때는 공동번역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만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예배의 특권을 즐기고, 스스로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친구들과 편안한 일에 둘러싸여 재미있고 즐거운 일에만 시간을 보내며, 존경받는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의 죄와 고통을 회피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내린 기독교에 대한 정의라면, 그것은 잃어버린 인간을 위해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에서는 아주 많이 벗어난 것이다.”(19)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소설 가운데 나오는 맥스웰 목사의 설교다. 91년도였던 것 같다. 지도하던 청년부 여름 수련회 주제를 아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로 잡아서 진행했었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충격은 꽤 컸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도전!!
2. “무디와 모트의 전도 스타일이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곧 무디의 조직은 모트를 위대한 전도자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20) - 아! 대범함! 너그러움! 요즈음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너그러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스타일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린 사역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고 세워줄 수 있을까!
3.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전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순종하고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다.”(22) - 존 모트의 주된 관심.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교회가 가져야 하는 관심이다!
4. “성령님은 방법을 통해 일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님은 기계 위에 임하시지 않고, 사람 위에 임하신다. 성령님은(여기에 오타! 성경님이라고 되어 있네!!) 계획 위에 기름 부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기도의 사람 위에 기름을 부으신다. 기도를 자신의 삶과 사역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강한 요소로 삼지 않는 모든 설교자는 하나님의 사역에 무용한 요소가 될 것이요,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진전시키는 데 무기력한 사람이 될 것이다.”(36) -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은 대학 다닐 때에 읽었던 것 같다. 이 책 역시 많은 충격과 도전을 주었었다. 기도에의 헌신을 다짐하게 했던 책... 그런데 신학을 하면서는 오히려 기도와 멀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다시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기도에 헌신을 새롭게 해야겠다!
5. “[바울의 선교방법과 우리의 선교방법]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사도 바울이 주요 도시에 들어간 방법과 바울 시대의 사역환경과 현대와의 차이점을 다룬다. 제2부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제시한 방법과 새로 건립한 교회와 스스로를 위한 재정계획을 세운 방법을 살펴보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20세기의 관행과 비교한다. 제3부에서는 바울이 회심자를 훈련시켜서 신속하게 리더로 임명했던 방법과 앨런 시대의 느리고 조심스런 방법을 대조한다. 제4부에서는 교회의 권위와 훈련을 검토하면서 선교사가 성경적인 제도보다는 서양의 제도를 심어 놓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마지막으로 제5부에서는 몇 가지 결론을 내리면서 ‘회심자 안에서 회심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믿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더 쉽게 믿는다’라고 비판한다. 앨런은 이렇게 말한다. ‘인종적인 우월감과 종교적인 교만이 우리의 태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추측할 수 있듯이 앨런의 비판은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적합한 방법에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속도를 늦출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많은 열정적인 독자들 덕분에 여러 판이 발간되었다. 앨런은 분명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르러 선교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42) - 대학시절 선교사들이 와서 채플 인도를 할 때면 ‘나도 선교사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고민을 하곤 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나에 대한 소명이 ‘선교’쪽이 아니라 ‘양육’쪽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확인하면서는 그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다. 기본적인 측면에서 선교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이 책에 대한 설명을 별 생각 없이 읽어내려 갔다. ‘선교’에 대한 책이니까...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책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거다! 이 시대에도 이런 책이 필요하다! ‘선교’는 아니지만... 이 시대의 교회들이 ‘성장’과 ‘성장의 속도’에 빠져있을 때에, 앨런처럼 ‘적합한 방법’을 외치는 사람, 그런 책이 나와야 한다! 사람들이 당장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경적인 원리에 충실할 것을 외치는, 성경과 이 시대의 모습을 앨런처럼 조목조목 비교하고 따져보며 우리가 성경을 향해 돌이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외치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도...
6. “[영혼의 평화]에서 쉰 주교는 해답을 얻기 위해 심리학으로 달려가는 미국인을 목표로 삼는다. 독자에게 질병의 원인을 무의식에 돌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심리 분석학자에게서 발길을 돌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한다. 영혼의 평화는 인간적인 원천으로부터는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126) - 그렇다! 이 시대는 ‘영적’인 문제를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하는 시대다! ‘용서’받아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치유’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프로이트와 융의 말씀이 절대적인 기준, ‘카논/정경’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심리학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심리학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조수는 조수로서 역할 해야지 자신이 책임자인 듯 굴어서는 안 된다.
7. “결혼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쉽지 않았다. 캐서린은 ‘고통스런 적응 과정 없이는 어떠한 두 인생도 완전히 하나로 녹아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모든 q부에게는 어려움이 있다.’”(135) - 새로이 발견한 작가. 캐서린 마셜! 예전에 쿠르트 코흐의 [사탄의 전술전략]을 읽고서 ‘캐더린 쿨만’의 치유 사역이 옳지 못하다는 지적을 발견했었다. 그런데 전혀 상관이 없는... 이름이 비슷해서... 확인도 하지 않고 ‘캐더린 마샬’과 ‘캐더린 쿨만’을 혼동해 버렸다. --; 결국 캐더린 마샬의 책들은 무시하고 지내왔는데... 이제부터는 관심을 갖고 보아야 겠다.
8. “바깥에는 상처를 입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어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전자렌지식의 성숙은 없습니다. 차츰차츰 성장해 갈 뿐이죠.”(292) - 존슨 부부의 말이다. 멋진 표현! ‘전자렌지식의 성숙은 없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간편하고 빠른 성숙을 꿈꾸는가!!
9. “남성은 자기 삶을 구획화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신앙을 직장 또는 다른 대인관계와 쉽게 분리해서 생각한다. 이 사실은 남성이 왜 주일에는 교회 일을 하고 월요일에는 직장에서 매몰찬 수완가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남자들의 신앙은 실제적이다. 남자들의 신앙은 단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다. 남자들의 신앙은 남자들의 삶의 나머지 영역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307) - 예전 일이 떠오른다. 집 살 때의 일... 집 주인인 여자 분과 처음 만났을 때... 화장도 안하고 무척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빌라 2층,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집이었는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계약금을 건 후에야 왜 그 집이 비싸지 않은지를 알게 되었다. 집에 불이 났었다. 막내아들이 그 화재로 죽고... 거기 더 있고 싶지 않아서 아들 집으로 옮기면서 다시 수리 겸 리모델링을 한 거란다. 처음으로 내 집 마련하는 건데 불난 집이어서 찜찜하기도 하고...(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난 집에 가면 부자 된다고 좋다고 한다던데...) 결국은 가격을 좀 더 깎고, 최종적으로 (불난 집에는 보일러가 터져서 문제 생기는 경우가 만하고 해서) 보일러를 다시 깔았는지를 물었더니 깔았단다. 시공사에 물어보니 보일러 기계는 교체했지만 라인은 깔지 않았다고... 잔금 넘겨주는 날. 난 전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화장을 하고 왔는데 표정도 분위기도 전혀 달랐다. 거짓말 한 것에 대해서도 그래서 어쩔 꺼냐는 식으로 오히려 치고 나오는데... 다른 사정 때문에 결국 계약을 하기는 했는데... 수더분하고 좋아 보이던 사람이 화장 하는 것 하나라 그렇게 정반대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남자들이 교회에서의 모습과 직장에서의 모습이 정반대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남자든 여자든... 기본적인 마음 밭이 문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