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종횡무진 책읽기 - 상
테리글래스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 저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다! ^^; (13p, “나는 솔직히 책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책이 없는 삶을 불완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일종의 독서광이다. 나는 나에게 닥친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정신없이 서점에 들러야 하는 강박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는 책 중독자다. 책은 내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잊을 수 없는 삶의 많은 순간들을 보냈던 공간이기도 하다.”)
* 한국 번역서 소개나 짤막한 인용은 좋았다. 그런데 번역서에 대한 소개가 ‘불완전’하다. 번역되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소개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책이 발간된 후에 번역되어 나온 것이 빠진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이전에 번역된 책들, 특히 가톨릭 관련 책들은 많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성프란시스의 작은 꽃들]은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출간되기 전에(이것은 1부와 2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분도에서(1부만 다룸) 출간되었다. [미지의 구름]은 [무지의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바오로 출판사에서 오래 전에 번역되었고,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쓴 [영적인 훈련] 역시 [영신수련]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번역되었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쓴 [내면의 안식처]는 [영혼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바오로딸에서, [성 테레사의 생애]는 [천주 자비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분도출판사에서 오래 전에 출간되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책들도 [영혼의 깊은 밤]과 [카르멜 등정기]는 각각 [어둔 밤]과 [가르멜의 산길]이라는 제목으로 바오로딸에서 출간된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54-67p).
또 이 책들이나 저자에 대한 소개 역시 불완전하다. 예를 들어, “[내면의 안식처]는 슬기로운 여인이 내적인 삶에 대해 기록한 지혜서이며”(68p)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갈멜 수도회’를 세운 초기에 자기와 함께 한 수녀들에게 기도에 대해 교훈하기 위해 ‘주기도문’을 기본으로 하는 [완덕의 길]이라는 책을 먼저 저술했다. 그리고 [영혼의 성]은 좀 더 깊은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와 합일할 것인지를 교훈하기 위해서 쓴 책이다. 이는 ‘슬기로운 여인’이나 ‘지혜서’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또 십자가의 성 요한을 소개하는데 있어서는 아빌라의 테레사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는데 저자는 이 부분도 그냥 넘어간다.
* 고전의 범위가 너무 넓지 않은가? 다치바다 다카시는 고전의 범위를 너무 축소시키는 반면(“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500년이나 1,000년 정도의 시간 속에서 검증을 받고 후세에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저자는 현대의 저작까지도 고전의 범주에 포함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오늘날 교회는 우리 신앙의 역사적 근원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독창적인 풍성함에 대한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문화적인 기억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24) - ‘기억력’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마이클 호튼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에서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 특징 가운데 하나로 반지성주의적이라는 점을 들면서 역사와 사상에 무관심한 ‘기억 상실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우리는 피아노 독주자가 아니며 심지어 조화를 이루어 연주하는 밴드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오케스트라다. 우리의 모든 다양한 전통들과 주장들은 기독교적 전통의 메시지라는 교향곡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작용한다.”(27) - 멋진 비유!!
3. “고전 작품들은 우리에게 우리보다 앞서간 과거 선배들의 실수와 업적을 동시에 가르쳐 준다. 여러분은 이 위대한 작품들이 오류가 없는 지혜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33) - 옳은 지적!
* 사소해 보이는 실수/오류들이 많이 눈에 띈다! --;
28p 키에르케고르를 소개하면서 Soen Kierkegaard라고 했는데, 죄렌은 Søren으로 적어야 옳다.
52p 오타인 듯 한데, ‘레르보의 버나드’가 아니라 ‘끌레르보의 버나드’라고 해야 한다.
55p 토머스 아퀴나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아퀴나스는...”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퀴나스(아퀴노)는 이태리 남부에 있는, 토머스가 태어난 지역 이름이다. 당시에는 사람 이름과 지역을 함께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Francis of Assisi는 ‘아시시’ 출신의 프란시스라는 뜻이요, William of Ockham은 오캄에서 출생한 윌리엄이라는 뜻이다. 토머스의 경우 Thomas of Aquinas라고 부르지 않아서 많이 혼동하지만, 아퀴나스는 지역 이름이기 때문에 그를 부를 때는 ‘토머스’라고 불러야 옳다. 그를 ‘아퀴나스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 프란시스를 ‘아시시는...’이라고 하거나, 윌리암 오브 오캄을 ‘오캄은...’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68p 십자가의 존이라는 이름은 영어 이름을 그냥 직역해 놓은 것인데, 일반적으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고 부른다. 영어로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도 ‘십자가의 존’이라는 식으로는 부르지 않는다.
74p 로렌스 형제의 책을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는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 제목처럼 [하나님 임재의 연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책 제목을 임의로 번역하기보다는 이미 번역되어 있는 책들 가운데 잘 된 제목으로 소개하는 것이 더 나았을 듯...
80p 페넬롱의 책을 [그리스도인의 완성]이라고 직역해놨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옳은 번역이다.
118p 루이스의 책 가운데 Till We Have Faces를 [우리가 체면을 가질 때까지]라고 했는데, Faces를 ‘체면’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되었다. 아마도 번역된 내용과 별도로 번역된 책의 소개를 준비해서 넣은 것 같은데, 이 정도 되는 내용은 교열하면서 맞추어줬어야 하는데, 번역자도 번역자지만 출판사에서 편집하는 일을 성심껏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144p 제임스 사이어의 책 How to Read Slowly도 [어떻게 완독할 것인가]라고 했는데, 이 책은 IVP에서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당연히 ‘천천히’ 아니면 ‘느리게’가 맞다. 이 책은 ‘완독’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200p 애니 딜라드의 책 A Pilgrim at Tinker Creek를 [그리스 수선공을 찾아간 순례자]라고 번역해놓은 것은 어이가 없다. Creek을 Greek으로 오해한 것 같은데, 이것은 ‘팅커 강/계곡의 순례’ 정도로 번역되어야 옳다. 이 책도 민음사에서 (원제목과는 무관하게) [자연의 지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