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 거듭난 자의 삶에 드러나는 힘 토저 대표작 시리즈 5
에이든 토저 지음, 한상국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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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에 읽었을 책을 다시 읽었다. 87년도면 대학교 4학년 때! Tozer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흡수했었을까? 다시 읽으면서 몇몇 군데 새로 줄을 친 것(10군데 미만이다!)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제대로 읽은 듯싶다.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은 [거듭난 자의 생활]. 1978년 초판이고 1981년 재판된 책이다. 책값이 1,000원!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같은 제목으로 1999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고, 2006년에 [능력 - 거듭난 자의 삶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개정되어 나왔다. 하지만 원서의 제목은 ‘Born After Midnight’으로 동일하다. 첫 번째 장의 ‘깊은 밤을 지나 태어나다’가 원제목을 반영한다.

 

깊은 밤… 그리고 태어남… Tozer는 그리스도인 됨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됨은 단지 출발(시작)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이 시대의 어두움(깊은 밤)을 지적한다. 현대화 될 수 없는 구원의 방법, 그리고 복음… 그는 그 시대의 교회가 현대화 되는 것을 염려한다. 나 역시 이 시대 교회의 현대화를 염려한다. 하지만 염려와 반대와, 그가 말한 ‘방어적인 자세’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러면 어떻게? 대안? 비판하려면 대안을 말하라는 것 또한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나는 이 표현을 대학 다닐 때에 김진홍 목사의 책에서 읽었고, 그 당시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대안… 대신할 수 있는 방법! 해결책! 꼭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만 하는 걸까? 원래부터 있었던, 성경에 기록된 방법을 다시 제시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아,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싶다! Tozer가 지적하는 ‘Oh!’가 있는 신학의 무게 있는 외침을 다시금 듣고 싶다! 다시금… 깊은 밤을 지나, 통과하여, 새로이 태어나고 싶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내가 이와 같은 글을 쓰게 된 유일한 자격이라고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이 그의 피로써 사신 교회의 영적 싸움에 대한 서글픈 관심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좋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때때로 가치 없는 도구를 통해서도 값있게 일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돌려져야 할 것이다. 기타 이곳에서 발견되는 약점이 있다면 인간의 약점 때문이므로 그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3)

- 많이 보게 되는 ‘겉치레’의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왠지 Tozer가 하는 말이기에 ‘빈 말’로 들리지 않는다. 신앙에 관련된 글을 쓰는 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관심과 자격… 인기와 재물을 위해서 책을 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쓴 글/책이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돌려져야 할 것!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저자의 약점으로 돌려져야 할 것!

 

2.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시도록 요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채우시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냉랭하고 그의 불운한 상태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축복스런 성령께서 만족시키는 충만함을 가지고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소원의 진공상태가 없는 것이다.”(8) - 요청이 아니라 허용이라고? 어떻게 허용한다는 것일까? 원하지 않으므로 요청하지 않는 것이요, 결국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일까? … 이와는 반대되는 기도자와 기도의 자세…

“종종 그의 영적 열망이 너무나 크고 중요한 나머지 그 열망들이 그의 생애에 있어 모든 다른 관심들을 떠밀어내는 일이 나타난다. 그와 같은 사람은, 매년 매월 지역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대표 기도를 하고 있지만, 그러한 차겁고 안일하며 의례적인 기도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 당황한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서로 알겠다는 듯이 쳐다보지만, 그는 소경이 책망을 받으면서도 더욱 외친 것처럼 더욱 더 외치게 되는 것이다.”(8) - 아!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3. “그러나 우리는 오래 기도하는 무리들이나 강하게 울고 부르짖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행위들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9) - 이 ‘그러나’가 중요하다! 자신의 논지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쪽 주장을 하고서는, 그것이 치우친 것이 될 새라 오해의 여지를 막기 위해 ‘그러나’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선하심은 가장 높은 기도이며, 그것은 우리의 가장 낮은 필요의 부분까지 내려오시는 것이다.”(10) -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실상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을 초월하며,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것의 효용과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이런 모든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들이 하나로 줄어들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욕망을 허락하실 수 없는 것이다.” (10) - 그 하나의 욕망이란… 부흥을 향한 욕망이다!

“부흥의 교리와 승리 생활의 교리를 배우는 것은 용이하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둡고 힘든, 스스로를 포기하는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는 일은 전연 별개의 일이다. 여러 사람이 여기에 부름을 받으나 선택되어지는 자는 적다.”(10) - 이론 VS 실재, 그리고 실제

왜냐하면 약속된 땅으로 실제 건너가려는 많은 사람들은, 잠깐 동안 서서 갈망하는 눈으로 강을 바라보다가는 슬픈 듯이 되돌아서서 모래 위와 같은 옛 생활의 어느 정도 안전성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은 것이다.”(10) - 찬송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가네”…

“늦게까지 앉아서 기도하는 데에는 공로가 없다. 그러나 일상적인 것을 지나 특별한 것으로 지나가려면 진정한 마음과 결심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같이 행하지 않는다. 이것을 밀고 나가는 자는 이러한 특별한 체험이 깊은 밤을 지나서야 도달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10) - 늦게까지 기도하는 것 자체가 공로와 자랑이 될 수는 없다.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의 진정과 결심의 표현일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사람만이 깊은 밤/어둔 밤을 지나 원하던, 약속된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5.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영적 체험의 질(質)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내적 증거의 교리를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한 예이다. … 복음적인 교사들의 계열에서도 증거(witness), 체험(experience), 감정(feeling)이라는 용어들이 의도적으로 회피되고 있는 실정이다.”(11) - 내가 비난 받는 것과 같은 태도일까? (내가는 가끔 너무 성경의 가르침만을 고수하고 영적인 체험을 무시한다고 비난받곤 하기에…) 하지만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믿음’과 관련하여 ‘논리 vs 내적 증거’를 비교하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다가 밤낮으로 측정기를 달아 놓고 분에 넘친 경건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리스도의 명분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11) - 밤낮으로 측정기를 달아 놓는 것은 지나친 일일 수 있지만,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시대에는 ‘분에 넘친 경건주의자’가 너무 많기에 더더욱!!!

 

6. “우리가 진정으로 오순절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사도신경적 후손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 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영의 증거를 가진 자가 참 후손인 것이다.”(12) - Amen!

 

7. “그들은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 큰 능력과 큰 은혜가 그들의 생애를 특징지어 주게 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당하는 것이 즐겁도록 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비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하다. … 그들은 종교적인 감정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성경 자체가 증거를 담당한다’라든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사람은 그 자신 속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라는 성경 말씀을 교묘하게 둘러대며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내적 증거 대신에 본문으로부터 이끌어낸 논리적인 결론들로 대치시키고 있다. 질문실에서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와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당신은 주님이 당신을 받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원합니까?’ ‘예.’ ‘그래요, 그러면 이것을 읽으세요. 내게로 오는 자를 나는 결단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예.’ ‘ 자, 만일 그가 당신을 내어 쫓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멘. 자, 그가 지금 다신을 받아 들였습니다. 당신은 그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어리둥절하여 구하던 그 사람은 억지로 웃음을 띠게 강요되어지고, 그가 그리스도에게 개종케 되었노라고 증거하게 된다. 그는 정직하고 진정을 구했으나 잘못 인도되었던 것이다. 그는 영적 논리의 제물로 떨어진 것이다. 그와 같은 확신은 흔들리는 삼단논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증거도 없고, 즉시로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내적 변화의 앎도 없는 것이다.”(12-14) - 이것은 소위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영적 논리’의 허점을 명백하게 지적하는 부분이다.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성경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순전히 ‘논리’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 견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16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이 ‘논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토저가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가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8. “찰스 웨슬리가 쓴 승리적인 찬송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영은 피에 대답하시며,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탄생됨을 말하여 준다.’ 논리적인 결론으로 말해서, 구원받는 것을 나타내는 이와 같은 노래 구절은 분명히 이단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단적일지라도 나는 그와 같은 영광스런 이단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더욱 크게 사용하실 것이다.”(14) - 영광스런 이단!! 현 세대와 이 시대의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배치되는, 그래서 이단적이라고 모욕당하는 성경적인 가르침! 그것이 이단으로 불린다면 그것은 진정 영광스런 이단일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기꺼이 그 영광스런 이단에 참여할 것이다.

 

9. “첫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는 개종(conversion)이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 오늘날은 모든 것이 처음 믿는 행위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주어진 순간에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게 되고 그 후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된다. … 우리들은 개심자들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열심히 인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믿는 행위를 취하기만 하면 그들은 그들의 모든 책임을 단번에 다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로 하여금 성경에서는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기괴스럽고 적용될 수도 없는 조직계통의 창시자가 되는 결과를 초래케 한다.”(15) - ‘믿게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지적한다. 믿음/구원은 시작일 뿐이다!

사도행전에서의 믿음이란 어떤 신자에게나 하나의 시작이었지 끝이 아니었다. 즉 시작하는 여행이었지 누워서 주님의 승리의 날을 기다리라는 침대가 아니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단번에 되어지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감명을 받고 그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어느 곳으로 주님이 가시든지 그를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 생각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16) - ‘믿음’은 과정!!

“여기에서 우리는 개종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어려운 점들은 덜 나타내고, 마음의 평화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가 누릴 세상적 성공들만을 잘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되어 진다. 우리는 우리를 듣는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지금 알맞고, 존경할 만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정치적 거물들이나 성공적인 실업계의 거물이나 심지어는 헐리우드의 수영장 세트 등과 함께 대단히 인기 있게 되었음을 확신시켜야만 한다. 지옥에 가야 마땅할 죄인들이 이처럼 확신이 되어서,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accept)하려고 떼를 지어 나오는 것이다.”(17) - 현대 복음전도, 아니 ‘복음 세일즈’에 대한 신랄한 지적!! 무엇을 얻기 위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교회들…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종족의 일원으로서 중대한 혼란의 짓눌림 속에 빠져 있으며, 그들이 그곳에서 쉽사리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솔직한 진리를 말해주기 전까지는 우리들의 청중 앞에서 완전히 정직하게 설 수 없다. 그들이 만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대부분 분명코 멸망할 것이다.”(18) - ‘솔직한 진리’… 하지만 인기는 없는, 그리고 실제적인 결과도 가져오기 힘든… 하지만 전해야만 하는 유일한 진리! 멸망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천국행 기차를 탄 것처럼 속이는 장삿속…

“초기의 신자들은 그들에게 모든 희생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인기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충분하게 이해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섰었다. 그들은 그 순간부터는 그들의 생명과 자유가 위험스럽게 되어지는 미움 받는 소수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18) - 복음… 참된 복음… 성경에 기록되고, 초기의 참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랐던 그 복음…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복음이 맞는가… 우리는 서로 속고 속이는 자들은 아닌가?

 

10. “유사한 기독교 기구 속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카드에 사인을 하여 주겠다고 초대하고 있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등잔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이 경우 죄인의 모든 의무는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이루어진다. 그 후에는 양동이를 들고 와서 세상이 제공하고 있는 모든 대등한 것들을 종교의 이름으로 받아서 최대한 즐기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 관한 이러한 개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 이러한 시도는 언제나 인간과 그의 필요를 가지고 시작하여서 그 다음에 하나님을 향하여 주의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야망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인간을 찾으시고 있는 분인 것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먼저이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 있는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에 두었고 인간의 구원을 다음에 두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은 현재도 그렇고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이 출발하는 진정한 지점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 무엇이건 그 이외의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은 분명코 신약 성서적 기독교신앙은 아닌 것이다.”(22-24) - 하나님이 먼저! 인간의 필요가 우선할 수 없음! 심지어 인간의 ‘구원’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 구원,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는 결국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동시대의 덴마크 사람들을 향하여 그 시대의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며,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외쳤던 것처럼…

 

11. “그 중에 가장 나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나약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모욕이 되는 것이다.”(28) - 고등학교 때 해롤드 쿠쉬너의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라는 책을 읽었었다. 유대교 랍비인 쿠쉬너는 자기 아들인 아론이 조로증(早老症, 빨리 늙는 병.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서 빨리 늙고 빨리 죽는다)에 걸린 것 때문에 고민하던 끝에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토저가 지적하는 ‘최고의 모욕’의 실예라고 할 수 있겠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현재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들인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 성경은 진리이지만 ‘모든’ 진리를 다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있지 않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결론을 무리하게 주장하는 것 역시 쓸데없는 짓이다. 이러한 것들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제한적으로(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 때문에 모든 것을 철저하게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므로!) 알게 될 것이다.

 

12. “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불붙은 화염검을 그룹들에게 주어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게 되었을 때부터 재앙은 쌓이기 시작되었던 것이고, 인간 역사란 것도 결국 이 재앙의 발전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31) - 흠… 창세기 3:24에는 하나님께서 그룹들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셨다고 되어 있지, 그룹들에게 화염검을 주었다고 되어 있지 않다. 원문이나 다른 번역본들을 살펴보아도 토저의 설명을 지지해주는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화염검은 스스로 회전하는 성질의 것이었지, 그룹들의 손에 들려지는 일반적인 ‘검’이 아니다.

 

13.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가정하고 주저앉아 살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 위기 가운데서 사는 것에 대하여 마치 위기가 존재치 않는 것처럼 여기면서 살라고 주장하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는 것이 나에겐 언제나 어려운 과제인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섬긴다고 하나 내가 보기엔 그들은 세상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동시에 할애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계가 불타고 있는 동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압력을 가하게 되면 그들은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까지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고 이유를 대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인간타락을 실제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인지 의아심마저 갖는 것이다.”(32-33)

 

14. “나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말에 있어서는 긴데 행함에 있어서는 짧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능력 있는 언어는 사용하나 우리의 행위는 악한 행위인 것이다.

나는 시인 워즈워드가 실제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의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을 믿는 진정한 이방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포한 시를 쓴 것에 상당한 동감을 갖게 된다.

세상에서 말은 많이 하고 행하기는 아주 적게 하는 기관을 들라면 교회 말고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느 공장이고 원료가 되는 재료는 그렇게 많이 쓰면서 완공품을 그처럼 적게 낸다면 6개월이 못가서 파산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즉 미국의 어떤 마을에서 어느 주일날 드린 기도의 일퍼센트의 십분의 일만 응답되어도 하룻밤 사이에 마을이 변화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수백만 마디의 말을 퍼부어 대지만 그 기도들이 응답이 되는지 어떤지를 결코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으며 만일 그 기도들이 응답받는다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실망하거나 당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너무 심한 이야기를 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우리가 말들에 정착하는 까달은 행위들이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취하여 그것을 짊어지고 가기 보다는 ‘주여 내가 매일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34-36) - 날카로운 지적, 깊이 있는 생각, 정곡을 찌르는 표현, 우리의 실체를 숨김없이 그대로 다 드러내는 단호함… 이것이 내가 토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다.

 

15. “하나님의 양들이 위험 속에 처할 때에 목자가 별들만 바라다보며 ‘영감적인’ 주제들이나 묵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목자는 무기를 움켜쥐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42) - 실제적인! 그러나 ‘실용적’이지 않은! 우리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그에 대응하는 부분에 있어서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16. “어떤 이는 마귀를 통째로 등한시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며, 어떤 이는 마귀를 너무 심하게 여기는 경향을 취하는 사람이 있다.”(43-44) - C. S. 루이스가 그의 [스크류테이프의 편지]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 이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마귀를 처음으로 보고 계시록 20장에서 마귀를 마지막으로 본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마귀는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지상에서의 끝날까지 마귀가 있을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존재는 못되나(omnipesence는 하나님만의 속성이므로) 마귀도 여러 곳에서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인데(ubiquitous), 그가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한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omnipresence와 거의 같은 효과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 유비쿼터스라는 단어를 여기서 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토저가 말하는 마귀는 유비쿼터스 능력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쉽다.

 

17. “진리와 사교(미신) 사이에는 겨우 머리칼 하나같은 차이밖에 없는 것이다.”(45)

 

18. “성경적인 방법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 앞에 언제든지 주님을 놓는 것이고, 우리의 비전의 중심에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사탄이 숨어 들어오게 되는 경우에는, 사탄은 오직 여백이 있을 경우에만 나타나게 되는데 밝은 빛의 끝에서 그림자와 같은 모습으로만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거꾸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즉 사탄을 우리의 비전의 중심에다 놓고 하나님은 가장자리 끝에다 두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46) - 그 무엇도 하나님의 우선권과 중심되심을 흩트려 놓을 수 없다. 사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원수를 내쫓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들어오시게 하는 방법이다. 양들은 이리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양들은 목자 곁에 가까이만 머물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탄이 무서워하는 것은 기도하고 있는 양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46) - 흔히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마치 돌을 줍는 시늉을 하면 개가 도망가듯이, 성도가 무릎을 꿇으면 사탄이 도망간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토저는 명백하게 말한다. 사탄이 우리의 기도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기도는 사실상…

 

19. “이단들은 우리의 생각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에 우리는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두 가지 입장이 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생각은 우리 자신을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예측하여 주는 것이다.”(48) - 긍정적 사고, 적극적 사고, 긍정의 힘… 등을 주장하는 것은, 토저에 의하면 ‘이단’이라고 할만한 행위이다. 우리의 말에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전혀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요, 그것을 정도 이상의 힘을 가진 것처럼 가르치는 것도 잘못이다.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처음부터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예로 들면서 우리의 말도 그런 능력을 가진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잘못되었다.

 

20. “진정한 위대함은 성품 속에 있는 것이지 능력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계셨고 우리들은 몰랐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내려가도록 마드신 곳에서 우리들은 기어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다.”(54, 56)

 

21.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자일수록 신문 보도자는 그에 관하여 더욱 찾을 거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그의 동료들의 존경을 귀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얼마 동안은 그들이 싫어하는 그늘 속에 억지로 가리우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바쁜 세상을 그가 그 곳에 있다고 하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60-61) - 참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가!!

 

22. “이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판단되어진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취하려는 언덕에 얼마나 기어 올라갔는가의 거리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 바닥에 있으면 완전한 실패자이다. 꼭대기에 있으면 완전한 성공자이다.”(62) - 이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다.

“우리가 창조되어진 목표를 성취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그러나 죄가 이것을 뒤틀어 놓았다. 그리고 이것이 첫째 진리와 최고의 영예자가 되고자 하는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가득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와 같은 탐욕 때문에 전 세계가 마치 귀신과 같이 질주하고 있으며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어지게 되었다.”(63) - 뒤틀어진 욕망, 야망…

“우리 주님은 분명 실패자로서 죽으셨다. … 그럼에도 소위 고백하는 교회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고 있으며 사람이 판단하고 있는 방법을 따라 판단하고 있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모든 것에서 돌아서야만 한다. 특히 복음의 사역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마음들을 살펴봐야 하고 그들 내면 속 깊은 곳에서의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그 어떤 사람도 기꺼이 실패자가 되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성공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자기의 성공의 영광이, 만일 하나님이 바라신다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기를 원하게 되기 저까지는 종교적인 활동에서 도덕적으로 성공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64) - 기꺼이… 실패자가 되기를 원하는 상태…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성공시키는 것은 그 종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지점까지 훈련시키셨을 때에는 그 종에게 성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종이 성공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볼 때 더욱 가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사람ㅇ게 성공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실패자가 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실패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65) - 세상의 가치 기준, 평가 기준과는 정 반대 되는…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읽으며 Amen!할 수밖에 없다.

 

23. “종교적인 교훈은 그것이 아무리 건전하다고 하여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빛을 가지고 올 수 있으나, 시력을 나누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비춰주심이 없는 말씀만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가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지만, 종종 보게 되면 구원이 없는 진리가 있을 수는 있는 것이다.(67) - 말씀과 성령!

 

24.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에야말로 보통 일상적인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75) - 일상의 영성?

 

25. “그 어떤 헌물이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드려지게 된다면 하나님이 너무 작다고 하실 헌물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무엇이건 예수님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보다 더 크게 나타나 보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살 수는 있을 것이며, 때로는 이것이 더욱 영웅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더 큰 상급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78)

 

26.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질서를 반대로 하고 있으나, 아직도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일처리를 옛날 아담의 통치방식대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큰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얼마나 여러 가지인가?’ 등등이 기독교 일들을 평가하려 할 때 묻는 질문들이다. … 그러나 영의 세계 속에서는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인간들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늘의 맛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맛이 있고, 우리의 심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 아니고 아담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으나 부끄럽게도 이방 철학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영혼 하나가 하나님께 있어서는 별이 총총한 우주보다도 더욱 귀하다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천문학은 공간과 물질과 운동을 다룬다. 반명 신학은 생명과 개성과 존재의 신비를 취급한다.”(80-82) - 영적인 생각… 그것을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것은 ‘얼마나 큰가, 많은가, 여러 가지인가?’하는 것과는 반대라는 것이다!

 

2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죄를 제거하는 것이며, 우리의 죄를 새롭게 정제(精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날카롭게 주목해야만 한다.”(87)

 

28. “신학에는 오(Oh)가 없다. 이것이 불길한 것은 아니라 해도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특색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려진 것을 지적인 용어로 표현하려는 것인데,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표현할 말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지성 앞에서 놀랍고 광대하고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실 때에는 지성은 침묵에 빠지고 심령은 ‘오, 주 하나님이시여!’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신학적 지식과 영적 체험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상속되어 내려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친숙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용어상의 차이 정도가 아니다. 그 차이는 실제적이고 중요하고 때로는 치명적이다.”(94) - 토저는 상속되어 내려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학적 지식과, 친숙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영적 체험을 대조시키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분명 신학은 ‘이성’을 주된 도구로 사용하고, 영적 체험은 ‘경험’을 주된 도구로 사용하기에 차이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어떠한 찬탄이나 Oh!라는 외침이 없다고 하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영적 체험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해서도 안 된다. 둘은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에도 ‘Oh!’가 있어야 한다! 있다! 칼빈의 저작을 보라! 박윤선 주석을 보라! 이성적인 추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친숙한 관계와 그로 말미암은 찬탄이 거기 드러나 있지 않은가! 이런 신학을 하고 싶다! Oh!가 있는 신학!

 

29. “문제 자체는 새것이 없고, 문제 자체는 그 어느 것도 현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가 진리의 성령 안에서 깊이 밝혀지지 않는 한 시간이 경과하는 것 자체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육적인가 하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 그러면 도대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갖는 관계,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우선권을 갖는 것이다. …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는 결단코 현대화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96-99) - 현대화… 새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진리’가 문제다.

 

30. “상상력도 축복이 될 수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와 그것이 얼마나 잘 훈련되어있느냐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다. … 상상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부정할 수도 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imagination’과 ‘imaginary’라는 단어를 잘못 혼동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상상적인(imaginary)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실제적인 책이 바로 성서이다. … 종교의 영역에서 상상력이 깨끗하게 된 값어치는 자연적인 물질들 속에서 그 물건들의 그림자인 영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100-103) - 허구로서의 상상과 현상 뒤에 숨어있는 실제를 파악해 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 한편 이러한 구분은 김지찬 교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에서 말하는 allegory와 allegorazation의 구분과 비슷하다.

 

31.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의 아들이다. 그는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 살며, 그들로부터 그들이 전에 얻었던 개념을 받고 있으며 아담 때부터 계속해서 타락한 생(生)의 소견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면 새 왕국을 이루고 있는 법칙들과 원칙들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게 된다. 거란 그가 받아온 사고방식과 훈련은 옛날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대단히 지혜롭고 기도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세상의 방식을 따라 하늘의 생애를 살아보려고 노력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육적 생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105) - 세상의 방식으로 영적인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 처음부터 생소한 영적인 내용을 알아차리기는 힘들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 새것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새것에는 새것에 따르는 원리가 있음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옛것과 그 원리도 벗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32. “인간의 활동영역 중에서 아마 종교 활동의 영역처럼 낭비되고 허비되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의 한 시간, 기도모임에서의 한 시간이 그냥 다 낭비될 수 있는 것이다. … 어떤 이는 평생 동안 교회를 참석하고 있으나, 그것 이상 조금도 더 나아지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 보통 교회에서 보면 해가 바뀌어도 매주일 똑 같은 기도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듣게 되는데, 어떤 이는 그것들이 응답될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 앞으로 나가지 않고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속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너무나 많다. 그것은 단순히 말해서 낭비하는 운동인 것이다. … 이와 같은 비참한 낭비 뒤에는 대개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잘 모르고 있든지, 믿지 않고 있든지, 불순종하고 있는지 어느 한 가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잘못 교훈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그저 겨우 반 밖에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이렇게 하여 급히 왕국으로 들어오게 된 후에는 더 이상 말하여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못한 것이다. 새로 회심하게 된 자는 망치가 있고 잘라내는 톱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알면서도 청사진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무엇을 지어나가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막연한 생각조차도 못하고서, 그저 매주일마나 나와서는 자기의 연장을 갈아놓고 집에 돌아가서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어두는 식의 옛날 늘 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살기 시작한다.”(108-110)

 

3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물건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따라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진짜 보화로는 여기지 말아야 한다. … 보화란 다음과 같은 4가지 4중 시험에 따라 발견될 수 있다. ①그것은 우리가 가장 가치를 두고 있는 것, ②그것은 우리들이 잃어버리기를 가장 싫어하는 것, ③그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할 때마다 가장 많이, 여러 차례 우리의 생각이 향하는 것, ④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114) - 보화… 또는 우상!! 그것을 밝혀내는 구체적인 4가지 기준!

 

34. “어떤 이든지 혼자 살기에 충분할 만큼 현명하거나 선하거나 강한 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광범위하게 우리가 서로 의존하게 만드셨다. … 하나님 자신 다음으로 우리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122)

 

35. “하나님 안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깨어지지 않은 현재만 있을 뿐이다.”(123)

 

36. “우리들은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우리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야기를 통하여, 모범을 통하여, 심리상태를 통하여, ‘주님을 위하여 일하러 가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섬김을 받으시려 하심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등한히 하고서, 마치 하나님께서 노동자들이나 모으시는 것처럼 ‘봉사’하도록 몰아대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주된 것은 틀림없이 경배하는 편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만하고 복음에 내포된 실천들을 등한히 여길 위험성은 적은 것이다. 누구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봉사에 대한 의무를 금방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되면 즉시로 순종과 선한 일로 인도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순서다. 이것은 결코 거꾸로 뒤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134-135)

 

37. “우리를 형성하는 몇 가지 능력들을 살펴보자. ①친구들-우리는 다 우리들의 동반자에 의해서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 ②문학-우리가 무엇을 즐겨서 읽느냐에 따라서 끝에 무엇이 되어질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③음악-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거절할 수 없는 신비스런 끌림이 음악 속에는 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 주게 되고 또한 도덕적이건 비도덕적이건 어떤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예비해 준다. ④즐거움-인간의 구조는 어느 정도는 즐거움을 필요로 하도록 구조가 되어 있다. ⑤야망들-세계의 위대한 사도들은 모두 다 야심적이었다. ⑥사고-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일상적인 생각 속에 엄청난 능력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137-139)

 

38. “당신 자신에 관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당신이 의사에게 가는 것은 위로를 받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발견하고 그에 관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짓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151-152) -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의사를 대하는 태도와 같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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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둔밤
십자가의 성요한 지음, 최민순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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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멜의 산길]과 마찬가지로 자의적으로 해석/소개하는 성경 본문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별히 다윗의 시를 인용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구절이 기록된 배경과 내용과 무관하게 자신이 원하는 ‘표현’에만 중점을 두고 인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윗의 경우를 포함하녀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자.

 

1) 다만 스스로 아는 바는 이따금씩 그 불꽃과 타오름이 자기 속에서 어찌나 세차게 일어나던지 사랑에 할딱이며 하느님을 그리워한다는 그것이다. 그것은 다윗이 이러한 밤에 있으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을 표현한 바로 그대로이다. 즉 "내 마음이 불타기에(풀어 말하자면, 관상의 사랑에서) 내 콩팥이 바뀌었나이다(시 72:21)." 콩팥이 바뀌었다 함은 감각적 기호의 욕구가 변했다는 것으로 이는 곧 감성의 길에서 영성의 길로 옮겨짐을 뜻하고 영성의 길이란 바로 메마름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욕구의 중절을 말한다. 다윗은 또 이르기를 "나는 무(無)로 돌아가 없어졌어도 몰랐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우리가 말한 대로 영혼이 어디를 거쳐 가는지 모르는 채 전에 맛보던 천상 및 지상의 모든 것에 죽어버리고 이유도 모르는 채 다만 사랑에 반한 까닭이다.(59-60) - 저자는 본문의 원래 의미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과 유사한 표현이 있으면 그대로 자신의 증빙 구절로 삼는다.

 

2) 이 메마르고 어둔 관상의 밤이 빚어내는 첫 번째 중요한 이익이 바로 자기와 자기 비참에 대한 지견(智見)이다. … 이에 대한 썩 좋은 예증이 출애굽기(33:5)에 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자,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을 알게끔 하시고자 사막에서도 꾸미고 다니던 화사한 옷과 몸치장을 벗어던지라 하시었다. … 너희가 입은 옷은 명절의 화사한 옷이라, 비천한 그대로의 너희를 느끼지 못하니 그 옷을 벗어버려라. 그래야만이 앞으로 너희가 걸친 옷의 궁상을 보고 너희가 무엇이며 대접받을 사람이 못 됨을 알 수 있으리라.(63-64) - 이것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 동행하시지 않겠다고 하시자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하여 동행하시게 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중의 의미로 모든 장식을 제할 것을 명하셨다. 어느 면에서는 저자가 말하는 바와 통한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일 뿐 저자가 말하는 ‘어둔 관상의 밤이 주는 유익’과는 무관한 내용일 뿐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영혼이 제 발로 서고, 감정이나 감각에 기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예언자도 자신을 들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즉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이는 욕을 끊어 기대지 않음이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이는 감성을 가지고 추리하지 않음이다.) 기다려보리라.(이는 하느님께서 내게 알려주실 것을 관상하고자 함이다.)(합 2:1)(67) - 하지만 이 구절은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가운데 횡행하는 악과 그로 인한 호소의 결과 이스라엘 전체가 외침(外侵) 받으리라는 말씀을 들은 후에, 다시금 호소하고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저자가 말하는 욕을 끊음이나 감성으로 추리하지 않음, 하나님의 알려주실 것에 대한 관상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인용이다.

 

4) 신적인 극은 영혼을 변화시켜 신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점령하고는 영혼의 일체가 되다시피 밀착해 있는 묵은 인간의 본성과 애집을 벗겨낸다. 신적인 요소가 영혼 본체를 어두움의 심연 속에 삼켜버리면서 어찌나 난도질을 해서 바수어놓던지 영혼은 처절한 죽음을 당하듯 스스로의 비참을 맞대어봄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녹아나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 이 고통과 고뇌가 실로 형언키 어려운 것이지만 다윗은 “죽음의 밀물에 이 몸은 말리우고”, “명부의 그물이 이 몸을 휘감았고”, “막다른 골에서 하느님을 부르고”(시 17:5-7)라고 서술하였다.(99) - 앞부분의 설명은 그런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윗의 탄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가? 다윗의 이 탄식은 저자가 말하는 현상과 관련된 표현이 맞는가?

 

5) 이 애집이나 습성이란 것이 영혼의 실체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므로 영혼은 위에서 말한 자연 및 영성엣 가난이나 공허 말고라도 심한 불안과 내적 고뇌를 치르기가 일쑤인데, 에제키엘(24:10)의 말씀이야말로 이 경우를 잘 밝혀준다. “나무를 많이 넣고 불을 지펴라. 고기를 푹 삶아서 국물을 쏟아버리고 뼈는 태운 다음….” 이로 미루어 영혼의 실체가 감성 및 영성적으로 겪는 가난과 공허가 어떤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두고 예언자는 또 “솥을 숯불에 올려놓아 달구어라. 놋쇠가 달아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타고 녹이 다 가시게 하여라.”(에제 24:12)하고 말씀하였다. 이로 보아 관상의 불로 정화를 당하는 것이 영혼에게 얼마나 큰 고통일 것인지 알아들을 수 있다.(102) - 에스겔이 말하는 것은 악한 위정자들이 백성을 얼마나 힘들게 하고 짐승을 잡아먹듯이 벗겨먹는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지 ‘관상의 불로 정화를 당하는 고통’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인용을 보면 과연 저자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면에서는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을 하면서도, 금방 돌변하여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마치 베드로처럼… --;

 

6) “주께서 돌멩이로 내 이를 부스시고 나를 땅에다 짓밟으시니 나는 언제 행복하였던가. 나의 넋은 평안을 잃었는데, ‘나의 영광은 사라졌고, 주 야훼께 바랐던 모든 것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하며 쫓기는 이 처참한 신세, 생각만 해도 소태를 먹은 듯 독약을 마신 듯합니다. 주여 이 몸 잊지 마시고, 굽어 살펴주십시오. 이것을 마음에 새기며 두고두고 기다리겠습니다.”(애 3:1-21, 뒷부분만 발췌) 예레미야가 통곡한 그 고난과 고생은 영혼이 영성의 밤과 정화 안에서 당하는 고초를 여실하게 묘사한다.(105-106) - 아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마음의 아픔과 고통을 ‘애가’로 노래한 것이다. ‘영성의 밤과 정화 안에서 당하는 고초’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7) 틀림없이 이 사랑에 굶주린 나머지 “개처럼 짖어대는 그들, 읍내를 여기저기 쏘아 다니나이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헤매나이다. 배부르지 않으면 울부짖나이다.”(시 58:15-16)라고 한 다윗의 말 그대로다. 왜냐하면 이 하느님의 사랑과 불의 접촉이 영을 말리고 욕구에 한껏 불을 질러주는 까닭에 영혼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증을 풀려고 몸부림을 치며 말할 수 없는 갈망을 품고 갖은 모양으로 하느님을 소원하는 것이다.(128) - 어쩌면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정반대의 내용을 인용하는지!! 다윗의 원수들이 악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개떼처럼 쏘아 다니는 내용을 묘사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불의 접촉을 받아 사랑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가!

 

8) 욥(7:2-4)이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늘을 갈구하는 종처럼,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처럼.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눠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지고, 나는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이 영혼에는 모든 것이 옹색하다. 자기 자신도 하늘도 땅도 일체가 좁을 뿐, 욥이 여기서 우리 문제를 들어 영적으로 말하듯이 영혼은 어둠에까지 아픔에 차 있다.(129) - 이 부분은 ‘우리 문제를 들어 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 가운데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하소연하는 본문이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정화를 우리는 어둔 밤이라 부른다.”고 하신 성인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인간이 치러야 하는 정화, 즉 밤이 감성 및 영성의 두 가지라 했고 그의 양상 역시 능동 및 수동의 두 가지라 했습니다. 능동의 밤은 곧 “다름 아닌 끊음과 씻음으로서, 세상의 바깥 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일체를 끊고 씻어버림”인데 [가르멜의 산길]은 이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둔 밤]은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을 소재로 하는 것입니다.(5) - 역자의 머리말에 나오는 부분인데, [가르멜의 산길]과 [어둔 밤]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다.

 

2. 그들은 기도드릴 때에도 마찬가지다. 기도 중에 할 일이란 오직 맛과 감각적인 신심을 발견하면 그만인 줄로 알아서 억지로라도 그 감각적인 것을 짜내느라 애쓰기 때문에 머리와 다른 능력들이 피로하고 지칠 따름이다. 그러자니 감각의 맛을 느끼지 못할 경우 그들은 맥이 풀리고 조금도 기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으로 해서 참다운 신심과 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사실 참다운 신심이란 자기를 믿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 하나로 인내와 겸손으로 무미한 속을 끝까지 버티는 데 있는 법이다. (41) - 기도에 있어서 ‘감각이나 맛’에 치중하는 것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바른 기도와 바른 믿음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요, 인내와 겸손 가운데 ‘무미’한 상황을 끝까지 버티는 데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3. 영성의 일에 맛을 즐기는 사람들인 만큼 그 맛이 없으면 영성의 일도 권태로운 것, 그러기에 기도 중에 자기가 바랐던 그 맛이 생기지 않아서 만족감이 없으면(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시고자 맛을 거두시는 일이 있다)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으려 하든지 아니면 억지로 하게 된다.

그들은 이와 같은 나태로 (완덕이란 하느님을 위하여 제 뜻, 제 재미를 없애는 길이건만) 완덕의 길을 제쳐놓고 제 뜻, 제 재미를 따라서 하느님 뜻보다도 제 뜻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느님도 원하시기를 바라고 하느님 뜻에 자기 뜻을 맞추기를 꺼려하므로 하느님 뜻이라면 따르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제 뜻, 제 재미가 없는 일이면 하느님의 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제 마음이 흡족하면 하느님도 좋아하시리라 믿으니 결국 하느님을 가지고 자기를 측량함이 아니라, 자기를 가지고 하느님을 측량하는 것이다.(44) - 위의 내용과 흡사한, 그리고 보다 좀 더 이끌어 간 내용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기도한 것 같지 않다는 실망에서 더 나아가 기도를 하지 않거나 억지로 하게 되고, 또한 자기의 뜻과 재미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판단하게 된다. 잘못된 기준을 가지는 것의 위험성!

 

4. 초심자들이 하느님의 길에 나아가는 법이 유치하고 아집과 자애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훨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어 하느님을 유치하게 사랑하는 법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법으로 하도록 이끄신다.

그들이 영성 수행 중에 맛과 기쁨을 한창 누릴 때, 그리고 하느님 은혜의 태양이 눈부시게 비친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빛을 몽땅 어둠으로 바꾸시고 전에는 마음대로 언제든지 하느님 안에서 맛볼 수 있던 영의 감로수, 그 생수 구멍을 밀폐하신다.

이제는 어둠 속에 버려져 상상과 추리의 감정을 가지고는 어디로 갈 바를 모르게 된다. 이제는 그전처럼 묵상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미 내관(內官)이 밤 속에 깊이 잠겨든지라 하느님은 그들을 말라비틀어지게 놓아두시니 항용 기쁘고 즐겁기만 하던 영성의 일이나 완덕 공부에서도 아무런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그와는 엉뚱하게 그런 일들에서 맛없음과 쓰거움을 맛볼 따름이다.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이 제법 자라남을 보시고 어린 티를 벗어나 굳세어지도록 그들을 젖가슴에서 떼치시고 팔에서 풀어놓으시면 제 발로 걸을 줄을 익힌 그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가므로 자못 신기로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47-48) - 처음 신앙을 시작하고 처음 기도를 시작한ㄴ ‘초심자’는 유치해도 괜찮다. 더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심자의 단계를 넘어섰는데도 불구하고 그 유치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어둔 밤을 허락하신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5. 저 메마름이 흔히는 이 밤과 감각욕의 정화로부터 오지 않고 죄와 결점, 혹은 나약과 미온, 아니면 어떤 언짢음이나 몸의 불편함에서 올 수 있으므로 여기 몇 가지 표징을 적어서 메마름이 저 정화에서 오는가, 아니면 위에서 말한 결함들에게 오는가를 가려내야 하겠는데 그 중요한 것을 댄다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서도 아무런 낙을 못 얻는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이 어둔 밤에 두시어서 감성욕을 씻어 닦게 하시므로 어느 것에든 빠지거나 맛들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표징은 이러하니,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하미라 믿고 행여 하느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메마름(건조)과 미지근함(미온)의 두드러진 차이는, 미온은 의지와 마음이 나른하고 풀려서 하느님 섬김에 열심히 없는데, 정화적 건조(씻어내는 메마름)는 하느님을 섬기지 못함에 대한 걱정 및 시름과 함께 열심히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셋째 표징은 아무리 자기편에서 할 일을 다 해도 그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이나 추리를 도무지 할 수 없는 그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시지만 그전처럼 감성을 통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전에는 개념을 분석 종합하던 추리를 통해서 묵상을 하던 것이 이제는 추리의 지속이 없는 순수 관상을 하게 되어 하느님께서는 이 순수 관상의 길로 당신을 주시므로, 여기에는 영혼의 하부 구조인 어느 감성도 - 내부 감각이든 외부 감각이든 -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이나 환상 따위는 이 관상의 어느 상념에도 기댈 수가 없고 이를 바탕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49, 50, 53) - ‘어둔 밤’은 ‘메마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메마름은 꼭 ‘정화’의 표징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그의 나태와 악한 태도에서 오는, 그저 ‘메마름’에 불과한, ‘정화하지 못하는’ 메마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것은 ‘묵상’(상상의 감각으로 묵상하고 추리함)과 ‘관상’(순수 영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을 만남)의 차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6. 감성의 밤 -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하느님께서 영혼을 감성의 생활에서 영성의 생활, 즉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주셔서 영혼은 제 능력으로 하느님 일을 추리할 수조차 없게 되는 - 그러한 밤의 메마름에서는 영성인들이 큰 고생을 하게 마련인데, 메마름만이 아니라 길을 잃은 듯한 걱정 때문에 그들은 좋은 일에 맛이나 멋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 영혼 복이 다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 깨우쳐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들은 뒷걸음질을 쳐서 길을 버리거나 혹은 고삐를 늦추거나 함으로써 적어도 전진하는 데에 지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지나친 부지런함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묵상과 추리의 길로만 가려고 한 나머지 본성의 힘을 너무 피로하게 만들면서 자기들은 게으름과 죄 탓으로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야말로 쓸데없는 생각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들을 첫 번째 길과는 아주 다른 길, 즉 관상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하나는 묵상과 추리요, 다른 하나는 상상과 추리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걱정할 것 없이 끝까지 인내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좋고, 순박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일이니, 당신은 그들을 그저 맑고 밝은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갈 길에 필요한 것을 꼭 주실 것이고, 그들이 하느님 은혜를 받을 만큼 자격을 얻으면 영의 어둔 밤을 통하여 저 빛을 주실 것이다.

감성의 이 밤에서 영성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절대로 묵상이나 추리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인데, 때가 이미 그럴 때가 아니라 영혼을 정적 속에다 버려두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만 같고, 한편 또 정녕 자기가 게으른 탓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마음이 없는 양 여길지 몰라도,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아니할망정 꾸준히 기도하면서 참는 것만도 큰 일을 하는 셈이다.

여기서 다만 할 일이라곤 모든 지식과 사색에서 영혼을 해방시켜서 자유분방하게 만드는 일이니 무엇을 생각하고 묵상해야 될까에 대해서는 염려를 놓고 다만 하느님 안의 고요하고 사랑 겨운 지견에 만족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의지도 욕망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일체의 집착은 영혼을 어지럽혀서, 여기서 주어지는 관상의 정적과 무위의 맛을 앗아가기 때문이다.(55-57) - ‘감성의 어둔 밤’과 그것을 통과하는 법에 대한 결정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으로서, 이 책의 가장 핵심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어서 좀 길지만 옮겨 적어 보았다.

 

7. 나아간 사람들이 지니는 불완전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습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것이다.

습성적인 불완전은 애착과 불완전한 습성으로서 미처 감성의 전화가 이르지 못한 영 안에 아직 뿌리처럼 남아 있는 그것이다. 두 가지이ㅡ 정화가 서로 틀리는 점은 뿌리와 가지의 차이, 케케묵은 때를 벗기기와 새로운 때꼽재기를 지우기와의 차이일 것이다. 사실 이미 말한 대로 감성의 정화는 영혼에게 다만 관상의 문과 시초일 빠름인 것, 영을 하느님께 합일시키기보다 차라리 감성을 영에게 적응시키는 데에 쓰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묵은 인간의 때가 - 비록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지만 - 그 영에 남아 있어서 비누와 짙은 잿물이라 할 수 있는 이 밤의 정화로 씻어내지 않으면 영은 하느님과의 순수한 합일에 도달할 수가 없다.

현실적 불환전은 어떠냐 하면 모든 사람이 다 불완전에 떨어지는 것이 똑같지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영성적 취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감각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말한 것보다 더 큰 부조리와 위험에 떨어진다. … 게다가 악마란 놈은 저 지각과 감흥 따위를 어찌나 구수하게 그럴듯하게 그려 넣는지 영혼은 그런 모든 시현이나 감흥을 믿음으로 끊어버리거나 힘차게 막을 만한 조심성이 없이 그만 홀딱 반해서 넘어가고 만다. … 이를 기화로 악마는 으레 그들을 자만과 교만으로 가득 채우면 그들은 허영과 오만에 끌려서 탈혼이나 다른 외모 등 성인과 같이 여겨지는 겉모앙이 그럴듯하게 보여지기를 꺼리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사람에게 영성의 감 즉 정화의 필요를 다져두기 위함인데, 나아간 사람들치고 제아무리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이미 말한 본성의 애착이나 불완전한 습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는 만큼 하느님과의 합일에 다다르려면 우선 정화부터 필요한 것이다. … 그러므로 합일에 도달하려면 영의 둘째 밤에 들어가야 하니 여기서는 감성도 영성도 일체의 지각이나 맛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캄캄한 속을 순수한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86-88) - 여기서 말하는 ‘나아간 사람’이란 ‘감성의 어둔 밤’을 거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의 ‘정화’를 받았다 할지라도 다시금 또 한 번의 ‘정화’인 ‘영성의 어둔 밤’을 거쳐야 비로소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에 대한 설명.

 

8. 사실 영혼에 있어서 완전히 정화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즉 감성과 영성인 때문이니 하나의 정화가 없이 다른 것의 정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것, 감성의 정화가 제대로 있으려면 진실된 영성이 정화가 있은 다음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성의 밤이라 하던 정화는 정화보다도 차라리 욕의 혁신이나 제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유인즉 감성면의 결함과 혼란은 모두 다 영성에 그 힘과 뿌리가 있기 때문이니 좋고 나쁜 습성도 실상은 여기에 있는 것, 그러기에 이것들이 정화되기까지는 감성의 모반과 사악이 잘 씻어질 수 없다.(89) - 일반적인 순서는 ‘감성의 어둔 밤’이고 그 다음이 ‘영성의 어둔 밤’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서 그 순서를 뒤바꾸어 영성의 정화가 먼저 있은 후에야 감성의 정화가 제대로 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

 

9. 하느님께서는 묵은 인간을 이들에게서 실제로 벗기시고자 아울러 새 인간, 즉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하느님께 창조된 인간을 만드시고자 이들의 능력과 애착과 감성을 모두 다 - 영의 것이든 감각의 것이든 그리고 밖의 것이든 안엣 것이든 - 벗겨버리시고, 지성을 어둡게, 의지를 메마르게, 기억은 텅 비게, 애착은 극도의 불안과 고민거리로 돌리시어서, 그전에 영적 보배들에게서 느끼던 맛과 감각을 없애주신다.(90) - ‘영성의 어둔 밤’이란 거의 ‘인성’(인간적/감각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 모두를 포함한)의 제거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신비주의에서 주장하는 하나님과의 ‘합일’을 위해서 인간적인 요소를 전적으로 벗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하지만 ‘합일’이 과연 성경적인 개념일까?

 

10. 여태까지 영혼을 비춘다, 무지에서 정화시킨다던 그 하느님의 빛을 어찌하여 여기에서는 어둔 밤이라 일컫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이 하느님의 지혜가 영혼에게 밤과 어둠일 뿐 아니라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첫째는 하느님의 지혜가 아득히 높아 영혼의 역량을 초월하기에 어둠이라 이르는 것이요, 그 둘째는 영혼의 더러움과 낮고 낮음으로서 그러기에 괴롭고 아프고 캄캄하다는 것이다.

첫째 이유를 밝히려면… 하느님의 일들이란 그 자체가 밝고 환할수록 그만치 영혼에게는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이니,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 빛이 밝을수록 올빼미의 눈동자는 더욱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태양을 쏘아볼수록 시각이 약한 탓으로 안총이 흐려져서 어두워지는 것이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성 디오니시오와 다른 신비신학자들이 주부적 관상을 일러 어둠의 빛살이라 하는데 이는 빛과 정화를 받지 못한 영혼을 두고 하는 말로서 그가 지니는 자연적 지성의 힘이 초자연의 큰 힘을 담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 우리 이성이 하도 약해서 미치지 못하므로 그 무한한 빛에 눈이 캄캄하고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캄캄한 관상이 처음엔 영혼에게 괴로운 것이 빤하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주부적 관상이 지극히 좋은 뛰어남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 이를 받는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탓으로 지극히 나쁜 비참을 많이 지니는 까닭이니 하나의 주체 안에 상반되는 둘이 용납될 수 없음에서 괴로움과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 마치 흐리고 언짢고 병든 눈에 밝은 빛이 쏘아 들어오면 아파지는 것처럼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도 아프다는 것이다. 영혼이 제 불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괴로움… 영혼이 그의 자연적 도덕적 영성적 약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신령한 관상이 영혼을 굳세게 만들고 휘어잡을 양으로 하나의 폭력을 쓰는 까닭인데 가뜩이나 약해서 괴로운데다가, 더구나 호된 힘이 쏘아붙일 경우이면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다.(94-97) - 상당히 공감 가는 설명이다.

 

11. 둘째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고통이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오지 않음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고통은 그 지혜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나약과 불완전에서 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정화가 없이는 하느님의 빛과 맛과 낙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니(불이 다려져도 탈 준비가 되기까지는 곧 변화할 수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토록 고통이 큰 것이다.(122) - 저자는 ‘관상’을 ‘사랑의 하나님의 불’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이를 통해 여섯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그 가운데 두 번째 항목에 해당한다.

 

12. 셋째로 여기서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연옥의 연혼들이 고통을 받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연옥 불이 그들에게 다려지더라도 그들에게 불완전이 없다면 불이 힘을 쓰지 못하고 각고(覺苦)도 없을 것이니 거기서는 불완전이 타는 재료인 만큼 그것이 없으면 다시 더 탈 것이 없는 것이다.(123) - 저자의 ‘정화’ 개념은 결국 ‘연옥’ 개념과 연결된다! 이 책의 76페이지에서 정화를 말할 때 ‘조명의 길(Via purgativa)’이라고도 한다고 했는데, 여기 나오는 purgativa는 연옥을 가리키는 Purgatory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또한 131페이지로 가면 장 요약에서 ‘어찌하여 이 무시무시한 밤이 연옥인가’라는 문구가 나온다. ‘어둔 밤’, ‘무지의 구름’, ‘마른 샘’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이 과정이 결국은 ‘연옥’과 관련이 있는 사상인 것일까, 아니면 저자가 그것을 서로 연관시키고 있는 것일까?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13. 하느님의 빛이 천사를 비추실 때 사랑 안에서 무리 없이 순순히 밝혀주시기는 그 성질상 순령(純靈)으로 그러한 내리심에 준비가 갖춰진 까닭이지만, 인간은 순수 영이 아니고 나약하므로 하느님의 빛이 쪼이면 마치 앓는 눈에 햇살처럼 쓰리고 아릴뿐, 도리어 어두컴컴하게 되는 것이다.(133)

 

14. 여기서는 영혼의 내적 충동과 행위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신스럽게 움직이자면 우선 자연엣 식량(識量)이나 활동에 있어 캄캄해지고, 잠들고, 고요해져야만 마침내 힘을 못 쓰게 됨을 아는 것으로 넉넉하다.

아! 영스런 영혼아, 네 욕구가 어두워지고 네 애호가 메말라 죄어지고 네 능력들이 어떠한 마음공부도 할 수 없으리만큼 무능한 때가 있거든 그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행복으로 알라. 하느님께서 너 자신에게서 너를 해방시키시고 네 가진 바를 네 손에서 거두심이니 네 힘으로는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손이 부정하고 더럽기 때문에, 지금처럼 충분히 완전하게 또 안전하게 일하지 못하리라. 이제는 하느님이 네 손을 잡으시고 마치 장님을 이끄시듯 어디로 가는지 너도 모르는 캄캄한 속을 이끌어주시니 네 눈과 발을 가지고는 아무리 잘 간다 해도 길을 가늠하지 못하리라.(151)

 

15. 영혼이 하느님을 더 가까이할수록 약한 탓으로 캄캄한 어둠을 더 느끼고 더 깊어지는 것, 태양에 바싹 가까이 하는 자가 제 눈의 약함과 부정 탓으로, 엄청난 빛을 감당 못하여 아찔 캄캄해지는 것과 같다. 하물며 무한량한 하느님의 영스러운 빛은 인간 자연 본성의 이성을 초월하여 가까이할수록 장님이 되고 어두워지는 것이다.(153)

 

16. 마치 일찍이 본 일도 없고 그와 비슷한 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 무엇을 보았을 때, 그것을 알고 맛보면서도 아무리 애를 써야 무어라 말할 수도 이름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 감각을 통하여 파악한 일이 이러하다면 감각을 통하지 않고 들어온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언어는 영혼에게 가장 내밀하고 영스러워서 온갖 감각을 초월하므로 내외 감각의 모든 조화와 능력을 중절 및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다.(158) - 말이 필요 없는, 아니 말을 할 수 없는 영역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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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상식을 뒤엎는 역사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창해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꼭 그런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일본 사람들의 책은 상당히 ‘실제적’인 내용에 치중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많이 다룬다는 느낌이다. 아니, 문제를 생활과 관련시킨다고 해야 옳을까?

이 책 역시 음식에 대한 여러 내용들을 다루고 있지만, 계속해서 실생활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실용 정신은 배워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이론 중심인 책들과는 달리 더 빨리 친숙해지고, 그 내용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음식과 관련한 재미있는 ‘여행’을 한 기분…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카레라이스라고 하면 마치 인도 요리 같지만 인도에는 카레라이스라는 요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카레나 ‘커리(curry)’라는 말조차 지금은 거의 죽은 말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인도 사람들은 대부분 카레라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인도사람은 걸쭉한 재료를 밥에 얹어서 먹는 요리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정도다.

인도 요리의 보물창고로 알려진 [조리 사전]에는 약 3천 종류의 조리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카레라는 이름의 요리는 불과 25종이다. 이처럼 카레라는 말은 본고장인 인도에서조차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며, 카레라이스는 크로켓 등과 마찬가지로 서양 요리를 바탕으로 변천된 요리인 것이다.(28-29)

 

2. 드넓은 황무지를 개척하려면 가족이 모두 땀 흘려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질보다 양이 중시되었고, 여유 있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드는 습관 따위는 도저히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집 안에서 한가롭게 맛을 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노력보다는 드넓은 밭을 개간하면서 개울에서 고기를 낚거나 숲으로 들어가 짐승을 사냥하는 쪽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즉 미국은 겉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남성형 사회인 것이다.(54-55) - 미국 음식이 맛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3. 차의 카페인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영국인의 경우에는 평생 10만 잔 이상의 홍차를 마신다고 한다. 차의 원산지는 미얀마 북부에서 중국의 운남성에 이르는 지역 일대다. 차를 마시는 습관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이다. 처음에는 종기나 방광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고 졸음을 쫓아주는 한약의 일종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술을 금지하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3세기 중반부터 순수한 기호품으로서 마시게 되었고, 글부터 약 1세기 정도 지나 본격적인 차 재배가 시작되었다.”(61)

 

4. 차라는 이름은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사전 [이아(爾雅)]에 처음 등장한다. 그 뜻은 ‘쓰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인데 아마 달였을 때의 쓴맛에서 유래된 것 같다.

차의 표준 중국어인 북경어에서도 ‘차’라고 발음하는데 원래는 광동어의 ‘차’에서 비롯된 말이다. 육로로 전파된 차는 그 집산지가 광동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그대로 정착됐다. 몽고의 ‘차이’, 북인도의 ‘차야’, 이란의 ‘차’, 터키나 러시아의 ‘챠이’, 아랍의 ‘샤’, 한국의 ‘차’ 등은 모두 어원이 광동어의 ‘차’다. 즉 ‘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육로를 경유해 차가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바닷길에는 복건어인 ‘테’가 현지어로 정착됐다. 말레이반도의 ‘테이’, 남인도나 스리랑카의 ‘테에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유럽의 ‘테’ 또는 ‘테이’, 그리고 영국의 ‘티’가 그런 지역에 해당한다. 이 ‘테’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바닷길을 경유해 차가 전파된 지역으로 어원은 복건어의 ‘테’이다.(65) - 차의 전파 경로에 따라 명칭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한편 저자는 일본의 경우 바닷길을 경유할 수밖에 없음에도 ‘차’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복건 지역에서 차를 선적하기 훨씬 전에 광동으로부터 유학 승려들이 차의 묘목을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5. 적어도 커피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0세기 초에 아랍의 의사인 라지(Rhazes, 865-923)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소호, 심장강화작용, 이뇨작용 등을 인정한 라지가 ‘반(bun)’이라고 불리는 야생 커피열매를 부수어 끓여서 ‘반찬(Bunchun)’이라는 이름을 붙여 환자들에게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지금처럼 커피 원두를 끓여 마시는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 아랍인이라는 점은 사실인 듯하다.(68, 69)

 

6. 이탈리아에서는 숙적인 이슬람교도들의 음료를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강해 애호가들과 배척자들 사이에 난투극 직전까지 가는 등 대립이 심화됐다. 그런데 중재에 나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판결로 대립은 종결됐다. 우르바누스 8세는 이런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맛있는 음료를 이슬람교도들만 독점하게 할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커피에 설탕이나 밀크를 넣는 스타일을 고안한 사람은 빈에 ‘카페 트빌리나’를 개업한 폴란드인(일설에 의하면 크로아티아인이라고도 한다) 프란츠 게오르그 코르시츠키다.(74) - ^^;

 

7.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와인을 찬물에 섞어 마셨다는 사실은 뜻밖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와인 1에 냉수 3의 비율이 기준으로 와인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교양이 없는 야만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와인에 물을 섞게 된 배경에는 취하는 것을 방지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서 아껴 마셔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에 질그릇 같은 거친 용기를 사용해서 쉽게 증발하는 바람에 내용물이 농축되어 신맛이나 단맛이 매우 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발효를 억제시키기 위해 송진이나 바닷물같은 이물질을 첨가했지만, 농축된 와인을 마시기 좋도록 하기 위해 물을 섞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91)

 

8. 현재의 이슬람 법학자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알라가 돼지고기를 금지한 가장 큰 이유는 그 지저분한 습성과 음식물이 매우 불결하다는 돼지의 생태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돼지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사람들에게 지저분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사육하는 쪽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이, 각지의 유적에서 대량의 돼지 뼈가 발굴되면서 밝혀졌다. 따라서 환경론과 동시에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문이 든다.(113, 115) - 베르베르의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는 매우 특이한 주장을 하는데, 많은 종교에서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는 이유는 돼지가 인간과 가장 가까운(유전적으로도!) 위치에 있기 때문이며, 인류의 조상일 수도 있는 가능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9. 지저분하고 부정한 동물로서 금기의 대상이 된 돼지에 비해 소는 청결하고 신성한 동물이라는 이유에서 금식의 대상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일찍이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에게 있어서 소는 노역의 대상이었고, 우유나 버터를 공급하는 원천이었으며, 쇠똥은 비료와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따라서 소는 그들의 생존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존재라는 이유에서 숭배의 대상이 돼왔다. 힌두교의 신학자에 의하면 소에는 3억 3천만의 신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수소는 링가(linga: 남근, 음경)와 함께 시바 신앙의 상징이고, 암소는 크리슈나 신의 시종이라는 이유에서 지금도 소를 죽이는 행위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행위보다 더 무거운 죄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힌두교도에게 있어서 소는 숭배해야 할 성스런 동물이고 식용으로 이용한다는 괘씸한 발상은 있을 수도 없다.

같은 소이면서도 물소는 죽음의 신 야마가 타고 다니는 동물로 여겨져 죽이든 먹든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도 별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은 기원전 1500년경에 북인도에 침입했는데, 그 당시에는 소를 식용하는 데에 아무런 금기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종교적인 행사에는 반드시 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기원전 1000년경의 북인도에서는 가장 선호한 음식이 쇠고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는 쇠고기를 먹는 행위 자첼ㄹ 악행이라고 설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물 살해에 직접 관여하지만 않는다면 육식에는 너그러운 편이었고, 석가모니 자신도 세상을 뜰 때까지 육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가난한 농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음식이 궁핍한 상태에서도 농사짓는 데 필요한 소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농민들은, 여전히 쇠고기를 식용하는 지배자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느꼈다.

이것이 나중에 불교의 불살생 계율을 도입한 힌두교에 영향을 끼쳐, ‘신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육류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는 논법을 내세워 대중들에게 큰 지지를 얻으면서 5세기경에는 힌두교 교리의 하나로 정착됐다.(117-123)

 

10. 어쩔 수 없이 우유를 마시고 싶은 경우에는 쇠고기를 먹는 뒤에 6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반대로 유제품을 먹었을 경우에는 30분 동안은 쇠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따로 조리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쇠고기용과 치즈용 도마를 따로 준비해야 하는 식으로 그야말로 성가시기 짝이 없다. 경건한 유대교도인 경우에는 쇠고기와 우유를 같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음식 재료마다 사용하는 조리 기구를 따로 준비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귀찮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가 들어간 커피조차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129) - 유대인의 경우…

 

11. ‘철의 위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의 어떤 작가는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면서 부화 직전의 달걀 요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깃털이 자라 병아리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달걀을 뜨거운 물에 삶은 것인데, 태국의 ‘카이한한’이나 필리핀의 ‘바루트’도 같은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먹는 광경은 그야말로 엽기다. 마치 짐승 같은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밥에 달걀을 풀어 비벼 먹는 것이 더 기분 나쁘다고 한다.

북미의 원주민인 포모족은 도토리 가루에 붉은 점토를 섞어 구운 빵을 먹고, 남미의 티무브족은 흙을 생선 기름으로 튀긴 프라이를 즐겨 먹는다고 한다. 또 북미의 코만치족은 사슴의 분뇨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남서부의 톤족 사이에는 예로부터 소의 분뇨를 조미료로 사용한 ‘피엔치차이’라고 불리는 요리가 있었다고 한다.

곤충은 과일과 함께 인류의 식생활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음식물이다. 일본에서도 메뚜기볶음이나 꿀벌의 애벌레를 식용하는 지방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나가노 현 이나 지방의 ‘자자무시 요리’는 유명하다. ‘자자무시’는 수생 곤충의 애벌레를 총칭하는 말이다.

전 세계에서 먹을 수 있는 곤충은 약 5백여 종에 이른다고 하는데, 지금도 곤충을 상식(常食)하고 있는 지역은 중국,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다. 중국 내륙 지역의 농민은 누에의 번데기나 귀뚜라미를 즐겨 먹고 베트남에서 라오스와 태국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는 물방개, 개미, 나비, 매미 등을 즐겨 먹는다.

나비는 몸통을 버리고 날개를 그대로 씹어 먹고, 개미는 수프의 재료로 이용하면 신맛이 있어 꽤 먹을 만하다고 한다. 물방개나 매미는 야채와 함께 기름으로 볶으면 맛도 있고 소화가 잘된다고 한다. 또 태국의 일부 주민은 물장군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고, 라오스의 산악 지대에 사는 주민은 바퀴벌레 알이나 거미를 튀겨서 먹는다고 한다. 그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미각을 즐기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30년대 초, 라오스인의 식생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긴 영국인 음식 문화학자 W. S. 브리스트는 용기를 so 여러 가지곤충들을 먹어본 결과 그 진미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절찬했다.

“무엇 하나 맛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몇 가지 종류는 정말 맛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물장군은 특필할 만한 것으로 야채의 풍미도 느낄 수 있다. 불에 구운 물장군이나 끓는 물에 절반 정도 익힌 거미는 미묘한 향기를 풍기는데 씹으면 수플레(souffle, 서양식 달걀 요리의 일종으로 달걀흰자를 거품내서 생선이나 육류로 만든 하얀 소스를 첨가해 불에 구운 요리)처럼 부드러워 결코 기분 나쁜 맛이 아니다. 흰개미, 매미, 바퀴벌레의 밧은 양상추와 비슷하고, 큰 거미의 일종인 네필라(nephila)는 양상추와 감자를 섞은 맛이다. 이런 곤충들을 먹어본 이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단순히 선입관에 의해 곤충식(昆蟲食, 곤충을 먹는 것)을 판단하고 있었나보다. 곤충이나 거미 등을 포함한 절지동물을 먹는 데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없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매미를 즐겨 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매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매미는 마지막 탈피를 하기 직전의 번데기일 때가 가장 맛이 좋다. 그리고 성충인 경우에는 교미가 끝난 이후에 하얀 알이 가득 들어 있는 암컷이 맛있다.”(140-144) - 엽기적인 요리들에 대한 내용.

 

12.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먹는 행위는 야만적이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며, 위생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천한 행동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낳은 단순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의 문명의 선진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는 유럽에서조차도 오랜 세월 동안 수식 문화(手食文化,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 먹는 식사 문화)가 이어져 내려왔고, 젓가락 문화가 침투해 있는 일본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으로 밥을 주물러 만드는 초밥을 만들어 먹는 것은 물론이고 토스트, 패스트푸드인 햄버거 등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사용해 먹고 있지 않은가.

수식을 하는 인구는 전 세계의 40퍼센트인 약 25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인도의 힌두교도나 서아시아의 이슬람교도는, 음식물은 신이 내려주신 신성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매우 강해 식기를 비롯한 식사 도구는 더러운 것이고 손이 가장 청결하다는 종교적인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과거에는 유럽인들도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이 문화권에서는 오른손은 청결하지만 왼손은 부정하다는 관념이 철저해 신께서 내려주신 음식물을 만질 수 있는 것은 오른손뿐이라고 믿고 있다. 설사 선천적인 왼손잡이라 해도 왼손으로 식사하는 경우는 없다. 사용하는 손가락도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등 세 손가락만으로 정해져 있고,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인 베르베르족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속담도 있다. “한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증오를 상징하고, 두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오만하다는 뜻이다. 세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뜻이며, 네 손가락이나 다섯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대식가라는 증거다.”

힌두교도 등 수식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제2관절부터 끝부분까지만 사용해 마치 코끼리가 코를 사용하듯 능숙하게 손을 놀리면서 음식물을 입으로 옮긴다. 카레처럼 젖은 음식도 문제없다. 잡는다, 쥔다 라는 과정을 통해 입뿐 아니라 손의 감촉도 즐긴다는 이유에서 “먼저 손으로 맛보고 이어서 입으로 그 맛을 음미한다”라고 표현할 정도다.(149-151)

 

13. 젓가락의 기원은 중국이다. 약 3천4백 년 전, 은(殷) 왕조의 수도였던 은허라는 지역에서 수많은 무기와 식기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으로 만들어진 젓가락이 발굴됐는데, 그것은 일상적인 식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바치는 공물을 집기 위해 사용한 예기(禮器)로 추정되고 있다.

젓가락이 탄생한 배경에는 위생적인 면이나 뜨거운 음식을 집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손님이나 윗사람과 함께 식사할 때 손을 사용해 음식을 흐트러뜨리거나, 서로 많이 잡기 위해 보기 흉한 다툼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없애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에 기록돼 있다.(155-156)

 

14.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이 스파이의 국적을 조사할 때 젓가락과 숟가락을 주어 식사를 하게 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즉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식기를 손으로 집어 들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젓가락을 식기 위에 걸쳐놓는 것이 일본인, 반대로 식기를 탁자에 내려놓은 채 젓가락과 숟가락을 번갈아 사용하며 식사하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젓가락과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는 것이 한국인이라고 구별했던 것이다.(163)

 

15. 한국의 인사말로는 ‘안녕하십니까’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1960년대에 일반화된 용어이고, 그 전에는 ‘식사는 하셨습니까?’라는 용어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인사말이었다. 식사를 나누어 먹는다는 동료의식과 음식에 대한 세심한 가치관이 낳은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165) - 흔히 ‘식사하셨습니까?’는 굶기를 밥먹듯하던 시절에 나온 인사말이라고 하는데… 전혀 새로운 해석으로 보인다. 우리의 이야기를 남이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좀 묘한 기분이다. 그것도 좀 다른,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가 가해진 해석을…

 

16. 식사 도중에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는 것이 매너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원래 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는 사인이었다.(177) - 서양인들의 식사 매너에 대한 내용 중… 한편 젓가락에 대한 내용 중에서도 그 끝을 뾰족하게 하지 않고 뭉툭하게 하는 것 역시 무기로 쓸 수 없게 하기 위한 것(157p)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17. 식사를 마치면 접시 위에 나이프와 포크를 교차해두는 습관이 있다. 지금은 식사를 마쳤다는 사인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원래는 17세기에 이탈리아 귀족이 시작했을 때에는 그렇게 교차해 두는 것이 종교적인 심벌인 십자가를 표현한 것으로 신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경건한 매너였다.(183)

 

18. 샐러드가 유럽이나 미국인의 일반적인 식탁에서 독립된 요리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세기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는 약용 요리나 육류 요리 이후의 지방분을 제거하기 위한 첨가물에 지나지 않았고 레스토랑 메뉴에도 샐러드라는 품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유럽에서 탄생한 샐러드이지만 그 내용물은 소금만으로 맛을 낸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 야채를 먹는 습관이 미국으로 건너간 19세기 중반부터 샐러드는 독립된 ‘요리’로 바뀐다.

미국인의 식생활은 로스트비프에 야채를 첨가하는 간소한 내용인데 불을 사용하는 요리에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던 그들이 생 야채에는 유난히 신경을 썼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샐러드 소스가 개발된다. 야채 샐러드 소스이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프렌치 드레싱도 프랑스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1884년 미국에서 탄생한 드레싱이다. 프렌치라는 이름은 프랑스인이 고안했기 때문이라고도, 프랑스 요리의 전채로 사용되는 것이 어울리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정설은 없다.

또 드레싱과 야채를 섞는 동안에는 전화도 받지 말라고 할 정도로 신경을 쓰는데 이런 속담이 있다. “샐러드를 만들 때에는 네 명이 필요하다. 기름을 넣는 낭비를 좋아하는 사람, 식초를 넣는 인색한 사람, 소금을 넣는 고문변호사, 그것들을 모두 섞는 미치광이.” 즉 기름은 듬뿍 넣고 식초는 약간 넣고 소금은 미묘한 판단으로 간을 맞추고 마지막에는 단번에 섞어야 한다는 샐러드 요리의 비결을 설명하는 말이다.(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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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직공이 되라 - 건전한 성경 해석의 비결 자세히 읽기 시리즈 1
김지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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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은 긴장하고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무척 ‘쉽게’ 풀어가고 있다. 공부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를 듣는 느낌! 게다가 성경의 예, 신학의 예만이 아니라 그에 앞서 일반적인 내용들을 예로 들고 있어서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오히려 한 편으로는 ‘내가 신학 책을 읽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평소에 생각해오던 ‘신학적/성경적 주제’를 ‘쉽게 쓰기’에 매치되는 책이다! 신학 책이라고 해서 꼭 어려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편으론, ‘좀 가볍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 구어체 분위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어체 표현이 눈에 거슬린다. 특히 “아니 된다”라는 표현! 기왕 구어체로 글을 쓰려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 이 책의 목적은 29페이지에서 제시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려는 목적은 한가지이다. 성경 기자가 탁월한 시인과 수사학자인 만큼, 성경 해석자인 우리도 시인과 수사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 목적에 매우 ‘충실’하게 전개되어 간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도(355페이지 이하)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결론과 적용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언어의 직공이 되어야 한다. 성경 기자가 언어적 설득 장치들을 탁월하게 구사한 언어의 장인이라면, 우리는 이를 찾아낼 줄 아는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① 우선 이것을 위해서 성경 기자가 탁월한 언어의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언어의 직공이 되는 첫 번째 길이다.

② 두 번째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 기자가 사용한 언어 장치들을 통해 그가 본 것을 볼 줄 아는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③ 세 번째로 이런 상상력을 소유한 언어의 직공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와의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

④ 네 번째로 언어의 직공이 되려면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 해석의 문제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선택을 요구하는 삶과 행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직공이 되는 것은 삶의 직공이 되는 것이리라.”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해석이란 성경 본문의 의미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본문에 깔아놓은 저자의 의도의 단서들을 열심히 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이 작업을 소홀히 하였다. 한 번의 독서에서 얻은 첫인상에 근거하여 쉽게 본문의 의미를 결정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신학교 교수인 고든 피(Gordon D. Fee)와 더글러스 스튜어트(Douglas Stuart)는 “대학과 신학교 강단에서 수년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잘 읽는 단순한 일도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털어 놓는다.

인간의 언어는 다중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중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요모조모로 뜯어보고, 곱씹어 보아야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요리저리 뜯어가며 생각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다. 너무나 조건 반사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으레 알고 있는 내용이거니 생각하고, 건성건성 읽는다.

알프레드 코집스키(Alfred Korzybski)는 인간이 기호에 보이는 반응을 신호 반응(signal reaction)과 상징 반응(symbolic reaction), 혹은 의미 반응(semantic reaction)으로 나누었다. 신호 반응은 모든 동물이 보이는 조건 반사적 반응이다. 이 반응은 생각할 틈도 없이 일어나는 반응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신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 성경을 대할 때 신호 반응보다는 의미 반응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자세히 읽는 것뿐이다.

언어의 층에 대한 이해 없이는 본문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요소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 언어의 층에 대한 세밀하고도 다각도적인 연구가 부족하였다. 그저 사전을 이용해 단어를 찾아내고 번역을 한 다음 바로 신학적 내용이나 역사적 내용에 대한 연구로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나의 물건을 표현하는 데는 하나의 언어밖에 없다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새로운 인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언어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성경 기자가 전달하려는 내용(신학적, 역사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이 될 수도 있는데, 단지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그저 선택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5-7) - 아주 설득력이 있다!!

 

2. 성경 기자가 전달하려는 신학적 역사적 내용은 여러 가지 방시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단지 그 중에서 한 가지를 그저 선택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전달하려는 정확한 내용은 그가 실제 선택한 언어적 형식으로만 표현이 가능했기에 그런 형식을 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가 취한 언어적 형식을 통해 그가 하려는 말을 표현했다고 보기보다는, 그가 택한 언어적 형식 자체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구체적이고도 정확한 내용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16) - 흠…

 

3. 어거스틴은 창세기 10:9의 “니므롯이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할 때 “여호와 앞에서”란 표현을 가지고 고민을 하였다. 헬라어로는 ‘엔안티온 퀴리우 투 데우’인데 “앞에서”란 의미의 전치사 ‘엔안티온’이 때로는 “대항하는”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이 때문에 어거스틴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 아니면 “여호와에게 대항하는 특이한 사냥꾼”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논의는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쓸데없는 것임이 드러난다. ‘엔안티온’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전치사 ‘리프네’는 “대항하는”의 의미가 없이 항상 “앞에서”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거스틴이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었다면 이런 식의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23) - 어거스틴이 큰 교부이기는 하지만 그가 성경의 원문을 모르고 라틴어 성경만을 읽었다는 점은 깊이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내용들을 얼마나 놀랍게 다루었는가 하는 찬탄과,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의 본래적인 의미와 무관한 사색도 많이 있지 않겠느냐는 염려를 함께 느낀다.

 

4. (성경) 문예성에 대한 지식 없이는 순수한 신학은 결코 제자리에 설 수가 없다. 문자들에 대한 이해가 시들어지고 쇠퇴할 때, 신학 또한 비참하게 쓰러지고 쇠퇴하게 된다. 마치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준비를 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언어와 문자를 먼저 흥왕시킨 다음에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가능한 한 많은 시인들과 수사학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 같은 연구를 통해서만 거룩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젊은이들에게 시와 수사학을 열심히 하도록 권면하시기를 바란다.(25) - 저자의 말이 아니다. 마틴 루터의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백금산의 [큰 인물 독서법]에 나온 존 스튜어트 밀에 교육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어려서부터 헬라어를 배워서 헬라 원전들을 읽었고, 8살 때부터인가는 라틴어를 배워서 라틴 원전을 읽었다고 한다. 이런 철저한 교육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에게서 놀라운 저작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지금 읽고 있는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에 나오는 몽테뉴에 대한 내용이다. 몽테뉴 역시 어려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 아버지가 프랑스 말을 모르는 독일인 교사를 불러서 라틴어를 배우게 했고 그의 주위에서는 아무도 프랑스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 아예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세계적인 학자가 나올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히브리어 헬라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은 사람이 신학을 한다면 얼마나 대단할까! 결혼 초에는 ‘아들을 낳으면 어려서부터 히브리어, 헬라어를 가르쳐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는데… --;;

 

5. 성경 해석자들은, 최근까지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에 소리의 부분에 대해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소리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중립적 용기가 아니다. …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는, 본래 언어는 사고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말하는 자의 감정과 감동을 알려면, 이를 표출하는 기본 장치인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35) - 소리… 히브리어, 헬라어의 발음이나 억양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중국 사람은 다양한 억양에 익숙하니 유리할까? ^^;

 

6. 이것은 주로 읽혀질 목적으로 기록된 구약성경 본문에는 더 더욱 잘 들어맞는다. 구약성경 본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오랜 구전(口傳) 단계를 거쳤을 뿐 아니라, 기록된 문서도 읽혀질 목적으로 성문화된 것이기에, 우리는 성경 본문이 지니는 소리의 차원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아니 된다. 특별히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흔히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본문은 원래 눈으로 보도록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로 듣도록 기록된 것이다. … 따라서 소리의 요소는 현대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성경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도 그들의 성경을 미크라(reading aloud, 크게 읽기)라고 부르는 것은 이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성경 학도들은 성경을 눈으로 읽는 데 익숙해 있을 뿐,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은 등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읽도록 의도된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성경 해석자들과 설교자들은 원문을 읽고, 원문의 소리가 메시지 전달에 끼치는 효과를 살펴보는 훈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38) - 성경이 ‘읽혀질 목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귀로 듣도록 기록’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현대의 책과는 그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분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7.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는 성경 기자의 결론은 때늦은 헌신이라도 헌신이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음을 보여 줌으로 늘상 때를 놓치는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이 되고 있다.(76)

 

8. 문장에서는 이차적인 의미, 즉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가 일차적인 의미, 즉 일상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보다 중요하다. … 비유적 언어의 사용은 문장의 핵심적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비유법은 일반적 의미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하나의 대상 또는 사상과 접촉을 가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언어를 서술적으로,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데만 익숙하기 때문에 비유적 언어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언어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실의 언어와 감성적이고 시적인 비유적 언어로 구분되어 있다는 고정 관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비유적 언어는 실재를 바루고 묘사하는 데는 부족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비유적 언어의 사용은 언어의 기능상 필수적인 것이며, 시 뿐 아니라 모든 양식의 글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 인간의 언어는 어떤 수식도 없이 그저 사실의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비유적 형상을 옷 입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가장 사실적인 데에 바탕을 둔 지적 활동에서조차 비유가 존재한다.(102, 104)

 

9. 비유는 지식의 가장 귀한 원천 가운데 하나이며, 알려진 것으로부터 미지의 것으로 나아가는 왕도이다. 비유는 일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신학적 용어가 비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105)

비유란 일종의 렌즈이다. … 렌즈는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을 보게 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렌즈를 통해 그것을 본 다음에는 그 렌즈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비유라는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하나님에 대해 친숙하게 되는 것이다. 비유는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식 장치이다.(106)

두 가지 사실이 비교되어 사용될 때에는 모든 면에서 이 둘이 비교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특정한 관점에서 둘이 유사하기 때문에 비교되고 있는 것일 뿐 모든 면에서 둘이 유사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109)

 

10. 성경은 종교적 문헌이나 역사 문서로 이해해 왔는데, 이런 문학적 기교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종교적 문헌이면서 동시에 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글이다.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위에 근거해 있으면서도 독자를 설득시키는 능력은 어떤 세계 문학 고전보다도 탁월하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이런 언어적 장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성경의 성격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성경의 성격에 합치하는 것이다.(111)

 

11. 토끼와 자식, 여우와 마누라의 유사성은 이미 습관화되어 있는 인식이다. 이를 죽은 비유(dead metaphor)라 한다. 상투어가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인식이 이처럼 습관화되어 있는 비유를 우리는 죽은 비유라고 한다.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기보다는 일종의 상투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의 비유는 당시 고대 근동 아시아의 문헌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신선하고 개성적이며 독창적임을 볼 수가 있다.(114, 121)

 

12. 정의와 공법은 힘 있게 그러나 자상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 “정의는 단순한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투쟁하는 도전이요 쉬지 않는 돌진이다.”(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132-133)

 

13. 은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의 실제 삶을 지배하고, 우리의 세계 인식을 통제하고 있다. 은유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은유는 사고와 행위의 문제이다.… 결국 은유란 한 종류의 사물을 다른 종류의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경험하는 비유의 일종이다. … 은유는 표현 기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사고와 행동을 요구한다. 은유는 이런 점에서 명령적인(injunctive) 힘을 가지고 있다. … 이같은 은유의 힘을 가리켜 ‘자기 달성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어떤 은유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미래가 바뀌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142, 146, 155, 156)

 

14. 이런 강한 신뢰감은 언뜻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무례한 태도로 보이는 요구도 가능케 한다. “여호와여…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 35:2). 우리는 여기서 상당히 충격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대 근동 아시아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방패를 드는 일은 하급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방패를 드는 일을 부탁하는 것은 하급자의 일을 부탁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만큼의 친밀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결구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친히 손 방패를 드시고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도우시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은유인 것이다.(160)

 

15. 에센파는 제7일에 노동을 쉬는 문제에 관해서 유대의 어떤 종파보다 엄격하였다. 그들은 안식일 하루 전날에 미리 음식을 장만하였을 뿐 아니라 안식일에는 불도 지피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안식일에는 어떤 그릇도 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으며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그들은 조그만 연장으로 안식일 외의 다른 날에 30cm 가량의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면 빛을 정면으로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옷으로 감싼 후에 파놓은 구덩이 안에 들어가 편히 누웠다. 그리고는 파낸 흙을 몸 위에 덮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서만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부러 그런 곳을 물색해 두었다.”(204) - 요세푸스의 기록이다. 특이한…

 

16.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포로들의 상황은 정말 그러하였다. 물론 그들의 포로 생활이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처참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이나 그 밖의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은 주로 엘리트들이었는데다가, 포로지에서 상당한 자유와 경제적 자립을 누린 것을 되어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아우슈비츠 같은 집단 수용소를 연상해서는 아니 된다.

바벨로 포로들에게 임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경제적 위기나 정치적 위기나 신체적 위기가 아니었다. 이들의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 신학적인 위기였다. 한때는 여호와는 살아계신 유일하신 참하나님이시요, 자신들은 이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믿었으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오면서 이 같은 신앙에는 커다란 균열이 일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훼파되고 지성소마저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고, 다윗 계열의 왕이 눈이 뽑혀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여호와는 한 분뿐이신 참하나님이신가라는 점에 회의가 들기 시작하였다.(229)

 

17. 우리는 여기서 선지서의 한 특징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상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징을 대할 때 상상력이 필요하다. 마음대로 지어 내는 상상력이 아니라 ‘상징을 뚫어보는 좋은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238)

 

18. 현대 성경 해석자들에게 있어서 알레고리 하면 곧바로 중세 성경 해석자들의 자의적인 영해(알레고리컬한 해석)를 떠올린다. 그러나 앞서 살핀 대로 우리가 여리서 다루고자 하는 알레고리는 풍유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비유도 분류상 알레고리의 영역에 속한다. 물론 이같은 분류에 강력히 반대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지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유와 알레고리를 날카롭게 구분하다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구분상 알레고리에 들어가야 할 이야기들이 나온다는 데 있다. 만일 이 둘을 엄밀히 구분하여 비유는 하나의 중심적인 상응점을 보이고, 알레고리는 다양한 상응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씨뿌리는 이야기와 마가복음 12:1-9의 악한 농부들의 이야기는 알레고리에 속한다. 상응점이 여러 개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알레고리와 비유의 구별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한 영어 학자는 알레고리와 비유는 상호 호환할 수 있는 용어이며 단지 관용어적 차이밖에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는 너무 지나친 표현이지만,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케어드가 이야기했듯이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allegorization, 알레고리화)의 세계를 구분해야 한다. 알레고리는 저자가 숨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마땅히 숨은 의미를 찾아내야 올바른 해석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알레고리제이션은 원래 저자가 의도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숨은 의미를 억지로 이야기 위에 부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원래 알레고리가 아닌 것을 알레고리처럼 해석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결국 여기서도 모든 의미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의도가 해결의 열쇠이다. 시를 산문으로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산문을 거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듯이, 알레고리가 아닌 본문을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알레고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결국 우리는 알레고리와 알레고리제이션의 차이를 인식하고, 한 본문이 알레고리로 쓰였다면 알레고리로 해석하여야 한다.(245-) - 흠… allegory와 allegorazation이라… 토저가 말하는 imagination과 imaginary에 대한 이야기와 비슷하다!

 

19. 문장은 그저 단어들의 합산이 아니다. 훌륭한 글,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은 쓴 사람의 세밀한 계산에 의해 쓰여진 글이 대부분이다. 치밀한 구도와 정확한 언어의 선택이 없이는 독자를 설득시키지 못한다. 결국 성경 기자는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기교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설득 언어 장치를 우리는 흔히 수사법이라고 부른다.”(264) - ‘수사법’이라고 하면 보통 ‘말을 꾸미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것은 그런 ‘꾸밈’이 아닌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장치이다. A. W. Tozer는 힘들여 쓴 글일수록 읽기 쉽다고 주장하곤 했는데,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20. 성경에는 풍자와 아이러니가 많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성경이 산출된 이스라엘의 문화가 수치 지향적인 문화이기 때문이다. 흔히 문화는 수치 지향적인 문화와 죄책 지향적인 문화로 구분된다. 수치 지향적인 문화(shame-oriented culture)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할 것인가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죄책 지향적인 문화(guilt-oriented culture)에서는 죄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으면 범죄자는 언제나 사회 안으로 복귀할 수 있다. 반면에 수치 문화에서는 범죄는 비판, 모욕, 거절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런 문화에서는 가장 무서운 것이 조롱이다. 우린 이런 모습을 히브리 성경에서 볼 수가 있다. 조롱거리가 되는 것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290-291)

 

21. 셈족은 흑백으로 구분하는 사고에 능한 이들이다. 서양인들이 “나는 A보다 B를 더 사랑한다”고 표현한다면, 히브리인들은 “나는 A를 사랑하고 B를 미워한다”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309)

 

22. 히브리어에서는 형용사나 부사가 많지 않기에 자칫하면 같은 형용사나 부사가 지나치게 많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신선감과 충격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과장법은 진부한 형용사를 효과적으로 대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324)

 

2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표현은 오경에 자주 등장한다. … 이 경우 꿀은 벌에서 나오는 꿀이 아니라 포도에서 나오는 꿀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다른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젖과 꿀은 신들의 음료요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젖과 꿀이 풍요로운 신들의 동산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가나안을 일종의 낙원에 비교하는 것이다.(331-332) - 정중호 교수는 [레위기 만남과 나눔의 장]에서 소제에 꿀을 섞지 말라는 부분을 설명하면서, 여기에서 사용된 꿀이라는 단어는 벌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벌꿀을 가리키는 단어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24. 욥의 이 말(욥 7:17-20)은 시편 8:4-5을 패러디한 것이다.(341) - 하지만 욥기는 시기적으로 시편보다 앞서지 않는가! 먼저 나온 말이 나중에 나온 말을 패러디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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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위기
도날드 G.블로쉬 / 소망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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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드는 저자다. 신학적 성향에는 조금 차이가 있는 듯도 싶지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저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박식함과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촘촘하게 엮어가는 글 솜씨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 두껍지 않은 얇은 책임에도 그 안에서 발견하는 내용들을 상당히 풍성하다. 앞으로도 관심을 두고 찾아보아야 할 저자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 그의 책이 국내에 그리 많이 번역되지 않은 것이 아쉽고… 그나마 번역되어 나온 책들도 비싸다는 것이 아쉽다… --;;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이 정확하지 못한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 저자는 블룸하르트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데, 이 인물은 일반 책에서는 그 이름을 발견하기 힘들다. 사실 관심을 가져야 할 인물들(이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부자父子이므로…) 들임에 틀림없는데… 경건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병 고침과 악령축출(아버지 블룸하르트), 그리고 사회활동과 정치가로서의 활동(아들 블룸하르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고, 이들은 바르트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 교회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에서 저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대조시키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논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발견하기 힘든 방식이다. 로잔 이후로는 진보와 보수가 서로에게 배울 점들을 배우고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회들은 대부분 두 가지의 필요성을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이 문제로 인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씌여진 당시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 두 가지 형태의 영성에 대한 설명은 매우 유익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를 비교하는 도표도 함께 제공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교회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관심에서와 같이,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도덕적이고 교리적인 실제 문제들에도 그리 깊이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가지는 대부분의 관심은, 교회의 조직화된 기구를 유지하는 것과 관계되고 있다.”(3) -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관심들… 교회는 그 관심을 교회 자체에만 두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다수의 여론과 염려와는 달리 한국 교회의 80% 이상이 교회의 ‘생존’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2. “주일학교의 교과 과정은 대체로 그 교회가 가진 성서적 교회적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칭의, 기도, 경건, 회개와 같은 주제들이 실제로는 무시되고 있다. … 그러나 개인적인 변화 없이 순전한 사회개혁이 있을 수 있는가? 오늘날 본회퍼의 주장을 잘못 이해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본회퍼는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헌신이라는 비밀스러운 훈련 없이 그런 복음 전파는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세속 세계에 영적인 것을 전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결코 같은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본회퍼를 비판할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빠뜨리고 있었던 것으로는 마귀의 세계에 대한 신학이다. 그것은 결국 그가 발전시킨 ‘성년이 된 인간(the man come of age)’과 같은 생각들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복음주의적 전통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본회퍼가 마귀의 실체를 심각하게 다루지 못했다고 하면, 로빈슨(J. A. T. Robinson), 파이크(James Pike), 해밀턴(William Hamilton), 하워드 무디(Howard Moody), 알타이저(Thomas Altizer), 하비 콕스(Harvey Cox)와 같은 세속 신학자, 또는 급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현대성(modernity)이라는 장밋빛 색안경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실제적으로 ‘성(聖)’과 ‘속(俗)’을 같은 것이라고 하고 만다. 이 사람들 중의 몇몇은 기독교적 세속성이란 속된 것과 외설적인 것, 그리고 혼전 성관계와 혼외 성관계를 모두 수용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 알타이저와 해밀턴은 성(性)을 새로운 영역의 신성한 것이라고 봄으로써 새로운 쾌락주의에 빠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매클레오드(George Macleod)는 세속 신학자들보다 좀 더 성서적이고 현실적인 발언을 한다. ‘반드시 세속 세계는 하나님의 활동 영역이고 하나님께서는 만물 안에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 계신다고 말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훈련시키려고 사탄을 거기에 풀어 놓으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거기에 또한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을 기억하라.’”(3-5)

-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자기의 색깔을 확실하게 드러내며, 소위 세속적인 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에 대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나열되는 신학자들의 이름… 왠지 골치 아픈 내용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일괄할 수 있기 위한 도구가 되어줄 것 같은 기대감도 함께 갖게 한다.

 

3.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자녀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도리어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5) - Amen!

 

4.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사적인 생활에서만 순종의 삶을 살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공적인 생횔 영역에서도 순종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나 나그네요 유랑자로 살 것이다.”(6) - 점점, 그리고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드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까지! ^^;

 

5. “신앙이 빈약해짐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의 위기가 왔다. 세속적 신학자들(secular theologians)은 신앙적인 개념이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는 무슨 의미 있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불트만(Bultmann)에 따르면, 성서에 나오는 고대의 그림 같은 언어(picture-language)를 세속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탈신화화(脫神話化, demythologized)할 필요가 있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진리를 불신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언어 대신에 정치적 언어를 이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반대로, 윌리엄 호던(William Hordern)은, 지금도 기독교 신학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God-talk)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12) - ‘God-Talk’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을(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쨌든 현대인들에게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깃은 기본적으로는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실제적인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었다. 호던의 지적처럼 우리는 복음을 희석시키거나 변질시키지 않고 그대로 내놓고자 할 필요가 있다.

 

6. “현대 문화의 세속화도 복합된 축복일지 모른다는 견해에도 진실한 요소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는 문화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도 식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죽었을 때는 사람도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그를 지으신 창조주, 그 분으로부터 그의 존재의 의미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죽으심은 사라졌던 신들이 재등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는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곧, 그 문화의 형이상학적 영적 공백을 차지하려는 우상들이 재등장하는 것이다.”(13) - 이것은 정확히 마이클 호튼이 그의 책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의 6장 ‘이교도로의 복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수많은 이교도와 그들의 우상들이 미국과 유럽 세계에 승리의 행진을 하며 들어왔다! 그것이 과연 ‘성숙’이고 ‘성년’이 된 것일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인간이 도덕적 영적 성숙을 얻었는가? … 만일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기술적 지식과 능력이라고 한다면, 현대인은 성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목표가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라고 한다면, 인간은 새로운 요람기(a new infancy)로 후퇴한 것이 되고 만다(Abraham Heschel).”(13)

 

7. “그러나 온전한 갱신은 종국적으로 새로이 성령을 부어 주심에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결국 우리 시대의 헌신의 갱신은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재발견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14) - 어지러운 신학적 개념들을 나열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성령으로 결론을 맺는다! 아, 그의 신학은, 그가 제시하는 방향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타당성 있어 보인다.

 

8. 건전한 교리에서 벗어난 거룩한 생활은 곧 도덕주의(moralism)가 되고 만다. 동시에 거룩한 생활이 따르지 않는 바른 교리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행하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우리는 흔히 신학에 대한 경시를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라는 것이다. 이런 류의 흐름은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다음과 같은 경구를 반영하고 있다. 즉 ‘누구나가 어떤 개념들에 매달리지 않고도 여전히 경건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사고가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파고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경건한 생활을 경시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참으로 사람은 자기가 그 진리에 헌신하지 않고 그 진리를 바로 알 수는 없는 것이다(Pascal). 내적인 헌신을 잃은 교리는 생명이 없다. 헌신적인 삶이 없는 신앙은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과오들 중의 하나였다. 루터와 칼빈은 모두 신앙이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구주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뢰와 확신에 있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적 신학(theologia dogmatica)은 영적인 삶의 신학 또는 헌신의 신학(theologia vitae spiritualis)과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거룩한 헌신의 삶은 과거에 우리가 얻는 구원에 대한 표징(sign)과 거울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이 구원이 사람들의 삶 속에 실현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단인가? 우리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헌신의 삶이, 우리의 구원이 쟁취되어지고 계속적으로 회복되어지는 전투장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칭의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과거의 희생이 오늘의 현실에 적용되어가는 수단인 것이다. 우리의 행함(works)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함과 무관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14-15) - 주옥(珠玉) 같은 글이요 문장이다! 건전한 교리와 경건한 생활의 균형! 교리적 신학과 헌신의 신학의 균형!

 

9. “참된 경건은 그의 비판 기능을 날카롭게 해주기도 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참된 것과 잘못된 것 사이를 식별해야 할 필요를 더 많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은 지식과 총명(식별력, 빌 1:9)으로 넘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시험해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변덕스러움과 종잡을 수 없는 상상력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종교는 정박(碇泊)할 자리가 없다. 그러나 반면에 기독교의 헌신생활은 성서적 계시, 곧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3)에 닻을 내라고 있다.”(16) - ‘하나님의 말씀, 성서적 계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우리의 비판과 식별, 시험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성경의 기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참으로 우리가 접하고 경험하고 배우는 모든 것은, 그 무엇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시험해 보아야만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버려서도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기초와 기준!!!

 

10. “하나님의 죽으심(the death of God)을 경험한 시대는 이제 신자들이 삶 속에서 그의 아들이 부활하는 능력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18)

 

11. “본회퍼는 신앙의 궁극적인 관심을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관심과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옥중서한]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삶임을 지적하였다. 내세 지향적 신앙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이것이 본회퍼가 전통적 경건이 보여주는 내세를 다스리는 이신론(理神論)적 하나님 사상을 반박하면서 ‘내재하시는 초월자(the beyond in the midst)’로서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이유이다.”(23) - 내세 지향적 신앙과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의 균형!

 

12. “신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세속 철학을 서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반면, 급진 신학자들은 종교를 초월하여 세속적인 신앙에로 파고들려고 한다. 이런 형태의 신학에서 우리는 신정통주의의 비관론에 비교해서 인간의 능력에 관한 뚜렷한 낙관론을 보게 된다. 바르트와 브룬너가 인간의 무력함과 비참함을 강조한 반면 세속 신학자들은 영웅적 행위에 매력을 느낀다. … 이 신학자들이 세속적인 성인들(secular saints)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주목할 만큼 흥미로운 일이다.”(25) - 흥미로운 논평.

 

13. “우리는 이 운동이 조금 더 깊은 신학적 기반 위에 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참된 연합은 사랑이나 선한 뜻만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결국 진리를 기초로 하여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맥케이(John Mackay)와 배서디(Bela Vassady)같은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여 살아가려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복음주의적으로 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27) -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균형!

 

14. “우리도 성경말씀에 적용해 쓰려고 할 때 무오성(inerrancy)이라는 개념보다 전혀 과오가 없고 확실하다는 개념(infallibility)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신앙적이고 신앙고백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과학적이고 변증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29) - inerrancy와 infallibility

 

15. “많은 신학자들이 헌신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Evangelical Theology)]에서 헌신이 없는 신학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32) - 바르트는 보수주의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경건을 지향하는 인물이다. 내가 신대원을 다닐 당시만 해도(90-92년) 총신에서는 바르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럼에도 바르트에 대해 심정적으로 친밀감을 느끼게 된 것은 한 교수님으로부터 바르트의 일화를 들으면서였다. 그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학적인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신학자 바르트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서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다는 이야기…

 

16.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삶에서도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35) -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 차이가 나서는 안 된다!

 

17. “어떤 등대도 개인적인 회개(repentance)와 돌아섬(conversion)이 없이 세워질 수 없다. 이것은 교회 개혁이란 근본적으로 영적인 개혁, 곧 새로운 형식과 구조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추구하는 개혁이 아닌 한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구되는 것은 깨끗해진 교회이지 단순히 형식만 개혁된 교회가 아닌 것이다.”(42)

 

18. “사실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현대 종교와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개념이 되고 말았다. 옛날식의 경건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새로운 류의 영성에 대한 탐구는 현재의 개신교를 괴롭히고 있는 정체성(正體性)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 현대의 개신교 신학교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양성하기보다는 종교학자들을 양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45) - 경건과 영성은 상반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 둘은 같은 것을 지향한다. 전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옛날식의 경건과 새로운 종류의 경건(그것은 ‘영성’이라고 지칭된다)의 대립이다. 예를 들어, 옛날식의 경건/영성이 내면적이고 영적이라면, 새로운 종류의 영성/경건은 외면적이고 생활적이다. 그래서 ‘생활 영성’이 새로운(?) 분야로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옛날식이건 새로운 것이건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요, 동일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 내면적이고 영적인 경건이 꼭 외면적이고 생활적인 부분을 무시한다고 주장해야만 하는가? 외면적이고 생활적인 것을 추구하려면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을 무시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둘 다 추구해야 한다. 진정한 내면적/영적 경건은 외면적/생활적인 영성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19. “경건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두려움이 합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경건은 도덕주의와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도덕주의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보려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절실히 깨닫고, 반면 그의 자비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신실하게 신뢰해야 함을 전제로 삼는다.”(47) - 흔히 ‘경외’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敬)과 두려움(畏)을 함께 아우르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그것이 옳은 가르침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은 신학적인 개념이지 성경 본문에서 가져온 개념은 아니다. 성경이 ‘경외’라고 번역하는 히브리 단어에는 ‘두려움’이라는 의미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친밀감은 있지만 ‘두려움’은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페이지 뒤에서 저자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경건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헌신을 의미한다면, 그 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거룩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개신교신학(다양한 보수적 신학들을 포함하여)에는 하나님과 너무 친숙해져 있는 면이 있다. 그것은 때때로 그대로 신성모독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아무도 친숙하게 알고 있는 고난당하는 이웃에 불과한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두려워할 수는 없다(Whitehead). 또 아무도 사랑만 하고 진노와 정죄와는 무관한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할 수는 없다.”(51)

 

20. “교회와 신학교에서 일고 있는 상담과 그룹 활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개인적인 신앙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 그러나 순수히 세속적인 심리학적 입장이 신학적 성서적 입장을 너무 자주 대신해 버리고, 인간은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의존하게 된다. 오늘날 신앙세계에서도 정신요법(psychotherapy)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 문화가 진지한 경건의 표인 십자가를 지는 것과는 상반되는 자기성취를 강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속적인 정신요법이 가진 올바른 통찰력과 발견들을 손상시키려는 뜻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통찰력들이 목회, 또는 영혼을 치료하는 일(seelsorge)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게 된다.”(50) - 이 부분이 옥성호 집사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옛날식의 경건(경건과 십자가를 짐)은 새로운 종류의 경건(내적 치유와 상처 입은 기억의 치유)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심리학이 목회학을 대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와 목사들은 이러한 현상과 흐름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를 의심스럽게 보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생각이 있는 이들 대다수가 이러한 추세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1. “예전회복운동(liturgical movement)은 예배의식을 강조하고 성찬을 사람들의 삶 속에 다시 중심이 되게 함으로써 경건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 하였다. 이 운동에는 권장할만한 일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는 심미주의(審美主義, aestheticism)와 복고주의(復古主義, archaism)의 맛이 나는 것도 있다. 오늘의 교회는 예전(禮典)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건이 소멸되어 가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형식적인 기도와 연도(連禱) 같은 것에 있지는 않다. … 예전의 회복은 경건의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두드러지게 해준다. … 내적인 경건은 외적인 성례전의 실행 없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포사이드(P. T. Forsyth)가 상기시켜 주는 바와 같이, 성례전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하더라도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50-51)

 

22. “기도를 탄원과 간구로 이해하는 기도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회복하는 일은 긴급한 것이다. 탄원하는 기도 없이 복음적인 경건도 있을 수 없다.”(52) - 탄원 기도의 중요성은 C. S. 루이스가 그의 [개인 기도]에서 강조한 바가 있다. 이 부분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3.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지워진 의무이다.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 유지하지(perseverance; 견인, 堅忍) 않고는 구원은 박탈되고 말기 때문이다.”(53) - 저자가 하는 말은 기본적으로는 옳은 말이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견인’은 신학적으로 볼 때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행위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사람 편에서의 유지의 노력도 전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견인’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의 가장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다는 내용이다. 둘째로, ‘구원의 박탈’ 역시 설명이 필요한 부분으로서, 이렇게 간단하게 서술하고 끝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24. “새로운 세속 신학은 ‘종됨’(servanthood)과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ness)을 이야기한다. 구정통신학은 교회성(churchliness)을 강조했다. 우리는 경건함(godliness)이나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을 강조한다. 오늘날 진정으로 인간적이 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 아주 신랄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다.’”(58) - 잘못된 초점에 대한 지적.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세상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초점이다!

 

25. “긍휼을 베푸는 일이 동반되지 않는 경건은 위선적 경건(piety)이요, 경건을 동반하지 않는 긍휼은 선행주의(do-goodism)에 불과하다. … 기독교 신앙은 자기 성취(self-fulfillment)를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 부인(self-denial)을 가르치고 있다.”(59) - 오늘날의 잘못된 ‘자기 긍정’의 가르침에 대한 지적.

 

26.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말을 빌리면, ‘그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가 신령해질(divine)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육(成肉)하신 목적은 사람을 ‘신격화’(deification)시키는 것이다.”(66) - 우리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사실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신비주의나 이방 종교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이/같이 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성경적인 개념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Adam이 취했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예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뒷부분으로 가면 이 부분이 다시 지적된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자주 은혜를 통해 사람이 거룩해지거나 신격화된다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중세 말기의 신비가인 제노아의 캐더린(Catherine of Genoa)는 ‘나의 존재는 하나님이다. 단순히 동참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나의 존재가 변화한다는 뜻엣, 나의 존재는 하나님이다’라고까지 하였다.”(107) - 이들의 가르침은 좀 위태로워 보인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 형상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말하지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순종과 승귀는 우리에게 모범은 될지언정,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과 같을 수는 없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27. “부활은 현재 상황에서 실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종말적 사건이다. 더욱이 부활한 몸은 하나의 영체(靈體, spiritual body)이다(고전 15:44).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의 증언에 충실하려 한다면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이 이 세상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67) - 이 부분에서 저자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활체’는 순수한 ‘영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게 되는 실제 부활체의 대표는 예수님의 경우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말씀하심으로써 ‘부활체’는 ‘영(체)’와는 또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부활과 구원이 ‘영적인’ 것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순수한 영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사실상 부활이라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이미 죽어서 영과 육이 분리되어 있는데, 영적이기만한 부활이라면 굳이 죽은 육신을 일으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육체’(!)의 부활을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28. “미래의 그 나라는 신약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변형된 또는 영화(靈化, spiritualized)된 땅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혈과 육은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15:50)고 읽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장가가는 일이나 시집가는 일이 없을 것이요(마 22:30), 하나님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 중심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시기(요 4:24) 때문이다.”(72) - 이 부분에 있어서 저자가 한 쪽에 치우치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왜 자꾸 영화(靈化)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결혼이 없다는 사실과 아무 관련이 없다. 혈과 육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저자 자신도 뒷부분에서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다(“‘육’(flesh)이라는 말로 그는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요소를 의미하였다.”, 85). 예를 들어, 부활체는 영과 육이 결합한 형태이고 그 경우의 육은 무흠한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는 일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성경은 그것이 ‘새롭게’ 된 땅(아니면 ‘성화(聖化, 거룩하게) 된 땅’이라고 해도 괜찮겠다)이라고 하지 ‘영화’된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의 주장일 뿐이다.

 

29. “그리스도의 나라 또는 영적 공동체(Spiritual Community) 안에 교회와 국가 양자를 모두 포함시키는 현대 신학의 흐름들(Barth, Tillich, Cullmann, Bonhoeffer)에서는 한 가지 다른 과오를 볼 수 있다. 이런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라는 진리와,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일 뿐 아니라 그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기도 한 것이다.”(73) -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이 땅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 역시 종말론적, 즉 미래적이기만 하지 않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인 특징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뒤에 나오는 진술을 보면 그것도 아닌데…

“물론 이 두 가지 형태의 신학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잡고 있어야 하고,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과 마찬가지로 미래적 종말론(futuristic eschatology)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161) - 저자는 미래적 종말론과 마찬가지로 실현된 종말론도 놓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0. “영적 갱신 운동에 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혼동되어 버리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75) - 내가 보기에 저자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분리시켜 버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31. “우리의 이웃이 상해나 죽음의 위협을 직접 받고 있을 때라면, 언제라도 우리는 영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베르자예프(Berdyaev)는 ‘내게는 빵이 물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빵이 영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옳았다고 하겠다.”(75) - 내가 보기에 베르자예프의 말은 제대로 번역된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전에 보았던 대천덕 신부의 말이 이것과 관계되는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천덕 신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굶는다면 그것은 물질적인 문제이지만, 내 형제가 굶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가 된다.” 내가 먹을 것이 없다면 내가 게으른 탓이지만, 내게 먹을 것이 있는데도 내 형제가 굶주리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내가 그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책망 받아야 할 신앙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것과 통하는 맥락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내가 먹는 빵은 물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형제가 먹을 빵이 없다는 것은 나의 영적인 문제이다.”라고…

 

32. “현대 신학의 맹점은 그것이 성과 속,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를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은 거룩하다. 모든 것이 신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틸리히에 따르면 전 세계는 신성하다. 그리고 로빈슨의 견해에서 보면 성 행위까지도 영적이거나 신성한 것이다. 성 행위는 기껏 좋게 보아도 완전히 인간적인 행위에 불과하고, 결코 신적인 것일 수 없다.”(76) - 인간적인 모든 것이 신적인 것이어서 거룩하다거나 모든 세계가 다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지나치다. 하지만 성(性)의 경우에 대해서는 저자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타락한 성은 인간적인 것이요 신적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규범 아래에서 행해지는 성을 ‘완전히 인간적인 행위에 불과하고 결코 신적인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성 역시 하나님이 만드셨을 때에 보시기에 좋았던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제는 붙여야겠지만… 구원받아 회복된 인간과 세계와 성은 다 거룩한 것일 수 있다. 오죽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말에게 거는 방울까지도 거룩하다고 하겠는가(슥 14:20)!

 

33. “교회의 사명은 자연적인 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또는 세속적인 것을 거룩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람에게 자신이 그 거룩하신 분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그를 거룩하신 그 분의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성과 속의 종합(synthesis)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그런 종합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곧 ‘역사를 넘어서’만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에도 이루어질 것이다. … 그 때에는 성과 속 사이의 긴장과 모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77) - 이 부분에서 자자는 지속적으로 ‘영화(靈化)’에 대한 견해를 견지한다. ‘거룩, 신성, 영적’이라는 표현은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에 의하면 앞서 지적한대로 인간과 세상, 그리고 성은 결코(!) 신적인 것일 수 없다. 그리고 그것뿐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그 무엇도 거룩하거나 신성하다거나 영적이라는 표현을 덧붙일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지나쳐 보인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완전히 영화(榮華)롭게 되기까지는 구원받은 인간을 ‘의롭다고 칭할 수’(칭의) 없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이 땅에는 단지 ‘거룩하게 되어 가는 과정’(聖化)만 있을 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누구도 의롭다고 불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34. “우리는 성서의 마귀론을 탈신화화 해버렸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에 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칼라스(Kallas)가 바로 지적한 바와 같이 마귀론을 버릴 때 곧바로 종말론까지 버리게 된다.”(79) - 마귀론과 종말론의 관계에 대한 지적.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35. “개신교에 속한 교회들의 신앙생활에서 영적 훈련이 상실되고 없어졌음을 문제 삼는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데이(Albert Day)는 의견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 개신교 신도들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영적 통찰력이 많이 부족하고 도덕적 능력을 심각할 정도로 잃어버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82)

 

36.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당시의 기독교 세계를 향하여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만 의로워진다는 성서적 진리를 일깨워주었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영적 훈련을 결코 잃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헌신적인 삶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는 거룩한 헌신의 삶을 위해 싸우는 때가 아니었다. …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과 청교도 운동에 가서야 내면적인 헌신의 삶에 대한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적인 개혁과 함께 삶의 개혁도 필요함을 지적함으로써 개신교의 종교개혁 운동을 성취시켜 보려고 했다. 스페너(Spener)는 성화(聖化)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83) - 경건주의와 청교도가 주장한 ‘헌신의 삶’에 대한 주장이 종교개혁의 ‘교리적인 개혁’과 짝을 이루며, 그것을 ‘성취’하는 ‘삶의 개혁’이라는 주장은 신선하다.

 

37. “웨슬리(John Wesley)는 그가 ‘유신론’(solifidianism)이라 이름 붙인 것, 즉 행함과 무관하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의 견해로는 이것이 대륙의 루터교가 가진 커다란 해독(害毒)이었다. 웨슬리는 우리가 아직 우리의 죄 가운데 있는 동안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 정신에 충실하게 남아있었다. 동시에 그는 우리가 우리의 죄에서 깨끗함을 얻기까지는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러나 현금에 이르러 경건은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개념이 되고 말았고, 권징(훈련, discipline)이라는 말은 현대의 개신교 신도들과 현대 문화가 모두 훈련보다는 처벌이라는 의미로 쓰게 되었다. 금욕적인 생활은 세상을 부인하는 것(world-denial)과 연관되었고, 그러므로 해서 대부분의 개신교 신도들이 싫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우리는 영적 훈련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봉사생활을 위해 자신을 강화할 수는 있다. 우리는 훈련하는 생활을 통해 자신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삶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의롭다함 가운데서 일보 전진할 수는 있다. 칼빈은 우리가 행함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함과 무관하게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84-85) - 루터와 칼빈은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과, 웨슬리는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와 비교할 수 있겠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

 

38. “우리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에 대하여 가지는 강력한 관심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기초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들을 초래할 수 있음을 우리의 종교개혁 시대의 선조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86) - 저자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들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내용을 소개한다. 그것들은 도덕주의, 도피주의, 신비주의와 신령주의, 바리새주의, 완전주의, 엄정한 실천주의 등이다. 이에 대한 글들을 아래에서 몇 가지 발췌해본다.

도덕주의 자신을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보려는 시도이다. 그렇게 되면 영적훈련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도피주의에서 영적 훈련들은 우리가 자신을 세상보다 위에 따로 들어 올리거나 폭넓은 사회생활을 피하여 개인적인 명상의 세계에 은둔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 기독교 신앙에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나 세속적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신비적 요소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체험을, 진리를 판정하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판단기준으로 보는 오류에 빠진다면 우리는 신비주의와 신령주의(spiritualism)에 빠진 것이 된다. 도피주의와 내향성의 위험을 피하려고 한다면 신비주의적 요소는 언제라도 성경말씀에 기록된 역사적 계시와 결합되어 있어야만 한다. // 바리새주의는 자신의 실제적인 모습보다 더 영적인 체 하는 것을 말한다. // 완전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때때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완전함에 이를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함 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실지로 우리의 가장 고상한 욕망과 덕목까지도 죄로 물들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악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덕행들을 두고도 회개해야 하는 이유이다. // 엄정한 실천주의는 엄격한 율법주의라고 할 수도 있는 것으로, 이런 류의 사고방식을 따르면 율법에 확고히 매달리는 것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된다.”(86-89)

그리고 난 후에 저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훈련이 어떤 것인지를 생스터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생스터(W. E. Sangster)는 기독인의 훈련은 ‘힘들고 무거운 부담을 주며 선에 이르지 못하는 헛된 노력이 아니라,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을 충성되게 모시는 것’이라고 옳은 이야기를 하였다.”(89)

 

39. “사실 기도 없이는 다른 어떤 훈련도 무슨 영적인 효험이나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도는 신앙의 핵심(soul)이다.(Calvin)”(89)

 

40. “우리는 기도를, 이웃의 필요를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Van Buren, J. A. T. Robinson)이나, 존재의 근거에 대한 명상(Tillich)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적 의미에서의 기도는 인격적인 신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이다. … 기도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람이 해야 할 과업이나 과제이기도 하다. // 기도와 묵상을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바르게 이해된 묵상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묵상을 간구보다 더 고사한 형태의 기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묵상을 참된 기도를 위한 준비로 볼 수는 있다. // 신앙의 진리들을 공부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아 할 또 하나의 훈련이다. 오늘의 목사들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공부라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90-91) - 기도, 묵상, 공부! 한편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이 여기서는 ‘안셀름’(Anselm)의 말로 소개되고 있다. 이 말은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그리고 안셀름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오는 명언인 듯…

 

41. “개신교 신도들은 경건의 실천과 영성 훈련에 관해서는 카톨릭 교회를 닮아가야 한다. … 우리의 입장은 경건생활이 율법주의의 소용돌이와 신령주의의 암초를 피하려면, 종교개혁의 메시지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끝까지 분석해보면 가장 강력한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다.”(96-98) - 영성 훈련과 관련한 몇 가지 논의. 간단하게 인용해 놓았지만… 이것들은 하나하나가 꽤 무게 있는 진술들이다.

 

42. “신비 종교의 첫째 특징은, 그것이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직접적 또는 즉각적 체험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 기독교 신비가들은 공통적으로 이 궁극적 실재를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세상의 영(the World Spirit), 무한자, 존재의 근원과 같은 좀 더 비인격적인 개념으로도 그것을 생각해 왔다.”(105) - C. S. 루이스가 [개인 기도]에서 지적하듯이, 이들의 신비 경험과 그것을 통한 발견이 과연 동일한 것일까를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43. “신비가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쌓는 공덕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에 불과하다고 한다. 더욱이 기독교적 신비주의의 주류에서는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가능성은 하나님과 연합되는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인된다. 틸리히가 상기시켜주는 바와 같이 ‘모든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몰아적인 경지에서 하나님과 재결합되는 단계에 가서는 그것이 억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108) - 틸리히의 주장은 개인의 ‘영적 각성’이나 공동체의 ‘부흥’이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매우 성경적인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저자는 신비가들이 이처럼 성경적인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판단 기준이 성경이 아닌 그들의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점도 잊지 않고 지적한다.

신비가에 있어서의 권위는 영적인 체험 또는 신비한 체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퀘이커파의 신비가들은 이것을 흔히 ‘내적인 빛’이라고 불러왔다. 쉴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좀 더 성경말씀에 충실하려는 일부 신비가들은 거듭남이나 성령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비가들에게 있어서 권위의 근거는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어떤 해석가의 말을 빌리면 ‘신비가에게 있어서는 그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어떤 것이든 관계없이 최종적인 권위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 있다.’”

 

44. “플라톤은 그의 [향연(Symposium)]에서 ‘사랑의 사다리(ladder of love)’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하늘의 영역에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이 사랑의 사다리는 중세 카톨릭 교회의 경건에서 ‘공덕의 사다리(ladder of merit)’가 되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주입된 은혜(infused grace)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닦는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 신비가들은 이 신비한 사다리를 ‘야곱의 사다리’와 접목시켜보려고 했다. 사람이 타고 올라갈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고 내려오시는 사다리를 상상하는 것이다.”(109)

 

45.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간구보다 묵상과 명상으로 해석되어진다. 혼합종교 신봉자로 알려지고 있는 헉슬리(Aldous Huxley)는 선포하기를 ‘인도의 신비가들과 기독교의 신비가들의 실제적인 가르침은, 간구하는 기도를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이 뜻에 단순히 맡기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했다.”(110) - 신비주의는 신비주의끼리 통하는가?

 

46. “그는 지고(至高)의 보편자이기보다는 절대하신 단독자(the absolute individual)이신 것이다. … 그는 친교를 나눌 수 없는 부동의 동자(動者, unmoved mover)나 세계의 영혼(World Soul)이 아니시고, 삼위일체의 존재로서 자기 안에서 완전한 친교를 하시는 분이시다.”(115) - 신학에 들어온 헬라 철학적 개념들은 주의 깊게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신비주의적인 진술들도 성경적인 개념에 의해 분별되어져야 한다.

 

47. “비록 플라톤주의자들은 흔히 영혼의 불멸성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자연적인 불멸성은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비가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불연속성을 이야기한다.”(116) - 이것 역시 헬라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의 차이에서 온다. 성경은 ‘영혼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부활’을 말한다!

 

48. “우리는 성서에서 입증되고 비추어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주어진 자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드러나 있다. 브룬너가 말한 대로 ‘신앙은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있다고 선포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자기에 관한 지식(self-knowledge)이 신지식(God-knowledge)에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신지식이 자기 지식을 가능케 한다.”(117) - 저자는 ‘두 가지 형태의 영성’이라는 핵심적인 장에서 ‘신비주의’가 주관적인 신비 체험에 근거하는 것을 지적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함을 지적한다. 자신을 성찰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의 힘, 양심, 체험, 인격, 행함은 진리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서 계시면서,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과 성경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부름을 입고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단순히 성령께서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아주 날카롭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학이 확실한 이유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아가서 우리 자신의 밖에 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나 양심, 체험이나 인격, 또는 행함을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것, 즉 거짓일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를 의존하게 된다.(124)

 

49. “복음주의 신학에서 아주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삶이다. … 스페너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의 요체는 회개와 신앙과 새로운 순종이다.’”(119) - 이제 신비주의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

 

50. “기독교 신비가들은 보통 예수님을 친히 묵상적이고 명상적인 기도를 실천하신 전형적 인물이라고 지목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기도 생활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분명히 간구하는 기도와 중보적 기도였음을 보여준다. 그가 사람들을 떠나 물러갔던 것은 육의 굴레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무한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구할 것을 간구하고 고통과 눈물 가운데 있는 자기 사람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121)

 

51. “우리는 성서적 신앙에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정반대를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모든 주관적인 감정과 열광적인 신앙생활의 길을 막아버리려는 합리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에 맞서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125) - 저자는 신비주의의 약점을 지적하면서도 ‘신비(주의적 요소)’를 아예 제거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균형 잡힌 태도를 견지한다. 치우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52. “신정통주의 신학은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의 객관성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하여, 신앙적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신앙적 체험이 따르지 않는 구원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루터와 베드로와 바울이 그렇게 말하였다고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당신은 반드시 그리스도 자신을 체험하여야 한다. 그리고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그것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느껴야만 한다.’고 하였다.”(128) - Amen!

 

53. “니그렌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가져갈 수 있지 않은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지 아니한가?”(132) - 흠…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난 니그렌의 말에 더 많은 표를 던지고 싶다. 어느 청교도인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의 회개도 회개되어져야 한다”고…

 

54. “신비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라고 말하기보다는 경건생활의 표본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 중심의 종교가 되고 만다. …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며 동시에 본보기도 된다고 한 키에르케고르가 옳았다. …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다는 것(imitation Christi)은 우리가 외형적으로 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떠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의 형상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133)

 

55.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실 때조차도 우리 자신과 연합되어 버리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는 따로 계시는 분이시다. 틸리히는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안에서 들려오는 말씀(inner word)이 아니라 외부로부터(outside)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성경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외부는 안과 밖을 넘어서는 즉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바른 지적을 해주었다.”(135)

 

56. “이신론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초월성을 주장하는 반면에,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 복음주의는 성경말씀 중심인데 반하여, 신비주의는 성령의 내적증거와 빛을 강조한다. 그러나 온전한 성서적 보편 신앙을 위해 이 두 가지를 모두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말씀 없이 성령만 가진다면, 우리는 신령주의(神靈主義, spiritualism)나 철학적 신비주의(Mysticismus)에 빠지게 된다. 또 우리가 성령을 떠나서 말씀만 가진다면 우리는 결국 합리주의적 성서주의나 고백주의(confessionalism)에 빠지고 만다.(140-141)

 

57. “문제는 신학을 세속철학으로부터 어떻게 구별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143) - 그렇다!

 

58.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Gustafson)은 하비 콕스의 신학에 대한 비판을 이와 같이 빈틈없이 했다. ‘내가 믿기에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라는 원리로 의도되었던 것은 쉽사리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라는 원리에로 빠져들고 만다.”(146) - 정말? 조심!

 

59. “우리는 현대 신학이 (틸리히와 로빈슨의 경우에서처럼) 혼합주의를 지향하거나 (반틸 Van Til이나 로마 카톨릭 신학자 두간 C. Dugan의 경우에서처럼) 폐쇄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에 와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있는 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끊임없이 점점 더 문화에 순응되어 가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교회가 완전한 세속화를 막고 맞서려면, 교회는 교회의 참된 본질을 재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세속주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뒤로 물러서는 데 있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서는 데 있다. 세상과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대립점(point of conflict)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횡행하고 있는 악마적이고 파괴적인 세력들은, 그것이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태롭게 하기 전에 도전되고 분쇄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 문화는 이제 더 이상 나치주의와 파시즘의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세속적 구원들이 거론되어 왔다. 이들 가운데는 새로운 민족주의, 변증적 유물론, 세속적 휴머니즘, 민족주의의 이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주장, 고대의 풍요와 성의 신들을 다시 부상시키려는 새로운 쾌락주의 등이 있다. 비록 우리가 가정 상 종교 이후의(post-religious) 세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좀 더 치명적인 형태의 우상숭배와 열광주의를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종교들에 대해서 교회는 명백히 안 된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147-148)

 

60. “브룬너가 서구인의 종교적 상태를 ‘형이상학적 진공 상태’라고 묘사한 점에서 옳았다.”(148) - 그리고 그 진공 상태로 동양의 종교들과 뉴에이지 운동 같은 것들, 그리고 저자가 지적하는 민족주의, 유물론, 휴머니즘, 쾌락주의 등이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61. “필요한 것은 해밀턴이 주장하는 ‘세속적인 성도들’(secular saints)이 아니라, 기도와 헌신으로 신앙의 신비한 원천에 점차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 상대주의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있는 신학이 필요하다. 그 말씀이 현대인의 생활 방식을 포함하는 모든 철학과 이데올로기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149)

 

62. 오늘날 우리는 시대정신과의 화합을 추구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건전한 신학을 희생해서라도 시대정신에 적응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포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선포는 바른 것이다. ‘기독교는 현대 정신과 현대 문화에 굴복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갈라섬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문화와 인간의 먼 미래까지를 보장해주는 것은 문화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문화에 맞서는 기독교인 것이다.(157) - Amen!

 

63. “포사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있는 체험 신앙은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계시와 신앙에 기초를 둔다. 그런 체험 신앙은 체험을 통해 확립되고 체험 안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체험으로부터 나오지는 않는다. 체험은 신앙의 기관(器官)이지 그 척도(尺度)나 그것을 지배하는 원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는 것을 소유한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의 소유하고 있는 그것과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것과의 관계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주에게 있는 것이다.

루터는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보거나 느끼는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이성이 믿음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은 그냥 믿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죄의 용서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을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들이 다시 살게 되리라고 나에게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느낌에 따라 인도되어서는 안 되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루터, 특히 그의 생애의 후기의 루터는 신앙에서 체험적 요소를 낮추어 평가하는 것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체험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적으로 말할 때, 그는 거의 언제나 감각적 체험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성령의 내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에는 듣고 보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적 또는 신비한 들음이요 봄이다. 그는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나는 위로부터 오는 소리와 내 귀에 울리는 소리, 곧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을 듣는다’고 선포한다.”(162, 168, 169)

 

64. “구약 성경을 보면 ‘표적’과 ‘시험’(temptation)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려는 기사보다 더 많은 만족할만한 증거를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다.”(173) - 흠! 표적과 시험에 대한 부분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

 

65. “바울 자신은 은사를 많이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을 함부로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실제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체험의 많은 부분이 진짜가 아니라고 경고하였다(고전 12:3). 그는 또한 믿음과 사랑이 영속적인 데 반하여 황홀경에 빠져서 하는 방언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고전 13:8, 13).”(177-180) - 저자는 방언에 대해 의도적으로 낮추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 12:3은 꼭 방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고전 13:8, 13 역시 방언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에는 방언만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과 지식도 폐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방언은 지나치게 높이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낮추는 것도 문제다. 방언은 그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으면 된다.

 

66. “초자연적인 것과 기묘한 것에 거의 병적으로 매료되는 또 하나의 현대적 현상은 환각제나 마약을 통해 황홀한 상태를 경험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거짓 신비주의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종파를 드러내는 표는 영적인 것과 비슷한 무슨 체험을 할 목적으로 환각성의 약품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철학자 헉슬리(Aldous Huxley)는 이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었다. 말년에 그는 이런 약품들이 실재(實在, reality)를 직접 만나는 데 잠정적인 도움이 된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헉슬리가 기독교 예배에서 성찬용으로 환각제 약품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181) - 흥미롭기는커녕 매우 거북스럽고 혐오스럽다! --;;

 

67. “성경말씀에 따르면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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