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그 상식을 뒤엎는 역사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 이정환 옮김 / 창해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꼭 그런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일본 사람들의 책은 상당히 ‘실제적’인 내용에 치중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많이 다룬다는 느낌이다. 아니, 문제를 생활과 관련시킨다고 해야 옳을까?

이 책 역시 음식에 대한 여러 내용들을 다루고 있지만, 계속해서 실생활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실용 정신은 배워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이론 중심인 책들과는 달리 더 빨리 친숙해지고, 그 내용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음식과 관련한 재미있는 ‘여행’을 한 기분…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카레라이스라고 하면 마치 인도 요리 같지만 인도에는 카레라이스라는 요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카레나 ‘커리(curry)’라는 말조차 지금은 거의 죽은 말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인도 사람들은 대부분 카레라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인도사람은 걸쭉한 재료를 밥에 얹어서 먹는 요리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정도다.

인도 요리의 보물창고로 알려진 [조리 사전]에는 약 3천 종류의 조리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카레라는 이름의 요리는 불과 25종이다. 이처럼 카레라는 말은 본고장인 인도에서조차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며, 카레라이스는 크로켓 등과 마찬가지로 서양 요리를 바탕으로 변천된 요리인 것이다.(28-29)

 

2. 드넓은 황무지를 개척하려면 가족이 모두 땀 흘려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질보다 양이 중시되었고, 여유 있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음식을 만드는 습관 따위는 도저히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집 안에서 한가롭게 맛을 내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는 노력보다는 드넓은 밭을 개간하면서 개울에서 고기를 낚거나 숲으로 들어가 짐승을 사냥하는 쪽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즉 미국은 겉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남성형 사회인 것이다.(54-55) - 미국 음식이 맛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3. 차의 카페인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영국인의 경우에는 평생 10만 잔 이상의 홍차를 마신다고 한다. 차의 원산지는 미얀마 북부에서 중국의 운남성에 이르는 지역 일대다. 차를 마시는 습관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이다. 처음에는 종기나 방광의 통증을 가라앉혀주고 졸음을 쫓아주는 한약의 일종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술을 금지하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3세기 중반부터 순수한 기호품으로서 마시게 되었고, 글부터 약 1세기 정도 지나 본격적인 차 재배가 시작되었다.”(61)

 

4. 차라는 이름은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사전 [이아(爾雅)]에 처음 등장한다. 그 뜻은 ‘쓰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인데 아마 달였을 때의 쓴맛에서 유래된 것 같다.

차의 표준 중국어인 북경어에서도 ‘차’라고 발음하는데 원래는 광동어의 ‘차’에서 비롯된 말이다. 육로로 전파된 차는 그 집산지가 광동 지방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그대로 정착됐다. 몽고의 ‘차이’, 북인도의 ‘차야’, 이란의 ‘차’, 터키나 러시아의 ‘챠이’, 아랍의 ‘샤’, 한국의 ‘차’ 등은 모두 어원이 광동어의 ‘차’다. 즉 ‘차’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육로를 경유해 차가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바닷길에는 복건어인 ‘테’가 현지어로 정착됐다. 말레이반도의 ‘테이’, 남인도나 스리랑카의 ‘테에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유럽의 ‘테’ 또는 ‘테이’, 그리고 영국의 ‘티’가 그런 지역에 해당한다. 이 ‘테’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바닷길을 경유해 차가 전파된 지역으로 어원은 복건어의 ‘테’이다.(65) - 차의 전파 경로에 따라 명칭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한편 저자는 일본의 경우 바닷길을 경유할 수밖에 없음에도 ‘차’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복건 지역에서 차를 선적하기 훨씬 전에 광동으로부터 유학 승려들이 차의 묘목을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5. 적어도 커피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10세기 초에 아랍의 의사인 라지(Rhazes, 865-923)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소호, 심장강화작용, 이뇨작용 등을 인정한 라지가 ‘반(bun)’이라고 불리는 야생 커피열매를 부수어 끓여서 ‘반찬(Bunchun)’이라는 이름을 붙여 환자들에게 마시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지금처럼 커피 원두를 끓여 마시는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 아랍인이라는 점은 사실인 듯하다.(68, 69)

 

6. 이탈리아에서는 숙적인 이슬람교도들의 음료를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강해 애호가들과 배척자들 사이에 난투극 직전까지 가는 등 대립이 심화됐다. 그런데 중재에 나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판결로 대립은 종결됐다. 우르바누스 8세는 이런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맛있는 음료를 이슬람교도들만 독점하게 할 수는 없다.” 여담이지만 커피에 설탕이나 밀크를 넣는 스타일을 고안한 사람은 빈에 ‘카페 트빌리나’를 개업한 폴란드인(일설에 의하면 크로아티아인이라고도 한다) 프란츠 게오르그 코르시츠키다.(74) - ^^;

 

7.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와인을 찬물에 섞어 마셨다는 사실은 뜻밖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와인 1에 냉수 3의 비율이 기준으로 와인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교양이 없는 야만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와인에 물을 섞게 된 배경에는 취하는 것을 방지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서 아껴 마셔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에 질그릇 같은 거친 용기를 사용해서 쉽게 증발하는 바람에 내용물이 농축되어 신맛이나 단맛이 매우 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발효를 억제시키기 위해 송진이나 바닷물같은 이물질을 첨가했지만, 농축된 와인을 마시기 좋도록 하기 위해 물을 섞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91)

 

8. 현재의 이슬람 법학자들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알라가 돼지고기를 금지한 가장 큰 이유는 그 지저분한 습성과 음식물이 매우 불결하다는 돼지의 생태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돼지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사람들에게 지저분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사육하는 쪽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기원전 10세기 무렵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이, 각지의 유적에서 대량의 돼지 뼈가 발굴되면서 밝혀졌다. 따라서 환경론과 동시에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문이 든다.(113, 115) - 베르베르의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는 매우 특이한 주장을 하는데, 많은 종교에서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는 이유는 돼지가 인간과 가장 가까운(유전적으로도!) 위치에 있기 때문이며, 인류의 조상일 수도 있는 가능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9. 지저분하고 부정한 동물로서 금기의 대상이 된 돼지에 비해 소는 청결하고 신성한 동물이라는 이유에서 금식의 대상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일찍이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에게 있어서 소는 노역의 대상이었고, 우유나 버터를 공급하는 원천이었으며, 쇠똥은 비료와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따라서 소는 그들의 생존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존재라는 이유에서 숭배의 대상이 돼왔다. 힌두교의 신학자에 의하면 소에는 3억 3천만의 신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수소는 링가(linga: 남근, 음경)와 함께 시바 신앙의 상징이고, 암소는 크리슈나 신의 시종이라는 이유에서 지금도 소를 죽이는 행위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행위보다 더 무거운 죄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힌두교도에게 있어서 소는 숭배해야 할 성스런 동물이고 식용으로 이용한다는 괘씸한 발상은 있을 수도 없다.

같은 소이면서도 물소는 죽음의 신 야마가 타고 다니는 동물로 여겨져 죽이든 먹든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도 별문제가 되지를 않는다.

유목민이었던 아리아인은 기원전 1500년경에 북인도에 침입했는데, 그 당시에는 소를 식용하는 데에 아무런 금기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종교적인 행사에는 반드시 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기원전 1000년경의 북인도에서는 가장 선호한 음식이 쇠고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는 쇠고기를 먹는 행위 자첼ㄹ 악행이라고 설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물 살해에 직접 관여하지만 않는다면 육식에는 너그러운 편이었고, 석가모니 자신도 세상을 뜰 때까지 육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가난한 농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음식이 궁핍한 상태에서도 농사짓는 데 필요한 소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농민들은, 여전히 쇠고기를 식용하는 지배자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느꼈다.

이것이 나중에 불교의 불살생 계율을 도입한 힌두교에 영향을 끼쳐, ‘신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육류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는 논법을 내세워 대중들에게 큰 지지를 얻으면서 5세기경에는 힌두교 교리의 하나로 정착됐다.(117-123)

 

10. 어쩔 수 없이 우유를 마시고 싶은 경우에는 쇠고기를 먹는 뒤에 6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반대로 유제품을 먹었을 경우에는 30분 동안은 쇠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따로 조리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쇠고기용과 치즈용 도마를 따로 준비해야 하는 식으로 그야말로 성가시기 짝이 없다. 경건한 유대교도인 경우에는 쇠고기와 우유를 같은 냉장고에 넣지 않고 음식 재료마다 사용하는 조리 기구를 따로 준비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귀찮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우유가 들어간 커피조차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129) - 유대인의 경우…

 

11. ‘철의 위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의 어떤 작가는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면서 부화 직전의 달걀 요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깃털이 자라 병아리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달걀을 뜨거운 물에 삶은 것인데, 태국의 ‘카이한한’이나 필리핀의 ‘바루트’도 같은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먹는 광경은 그야말로 엽기다. 마치 짐승 같은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밥에 달걀을 풀어 비벼 먹는 것이 더 기분 나쁘다고 한다.

북미의 원주민인 포모족은 도토리 가루에 붉은 점토를 섞어 구운 빵을 먹고, 남미의 티무브족은 흙을 생선 기름으로 튀긴 프라이를 즐겨 먹는다고 한다. 또 북미의 코만치족은 사슴의 분뇨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 남서부의 톤족 사이에는 예로부터 소의 분뇨를 조미료로 사용한 ‘피엔치차이’라고 불리는 요리가 있었다고 한다.

곤충은 과일과 함께 인류의 식생활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음식물이다. 일본에서도 메뚜기볶음이나 꿀벌의 애벌레를 식용하는 지방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나가노 현 이나 지방의 ‘자자무시 요리’는 유명하다. ‘자자무시’는 수생 곤충의 애벌레를 총칭하는 말이다.

전 세계에서 먹을 수 있는 곤충은 약 5백여 종에 이른다고 하는데, 지금도 곤충을 상식(常食)하고 있는 지역은 중국,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다. 중국 내륙 지역의 농민은 누에의 번데기나 귀뚜라미를 즐겨 먹고 베트남에서 라오스와 태국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는 물방개, 개미, 나비, 매미 등을 즐겨 먹는다.

나비는 몸통을 버리고 날개를 그대로 씹어 먹고, 개미는 수프의 재료로 이용하면 신맛이 있어 꽤 먹을 만하다고 한다. 물방개나 매미는 야채와 함께 기름으로 볶으면 맛도 있고 소화가 잘된다고 한다. 또 태국의 일부 주민은 물장군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고, 라오스의 산악 지대에 사는 주민은 바퀴벌레 알이나 거미를 튀겨서 먹는다고 한다. 그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미각을 즐기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30년대 초, 라오스인의 식생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긴 영국인 음식 문화학자 W. S. 브리스트는 용기를 so 여러 가지곤충들을 먹어본 결과 그 진미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절찬했다.

“무엇 하나 맛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몇 가지 종류는 정말 맛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물장군은 특필할 만한 것으로 야채의 풍미도 느낄 수 있다. 불에 구운 물장군이나 끓는 물에 절반 정도 익힌 거미는 미묘한 향기를 풍기는데 씹으면 수플레(souffle, 서양식 달걀 요리의 일종으로 달걀흰자를 거품내서 생선이나 육류로 만든 하얀 소스를 첨가해 불에 구운 요리)처럼 부드러워 결코 기분 나쁜 맛이 아니다. 흰개미, 매미, 바퀴벌레의 밧은 양상추와 비슷하고, 큰 거미의 일종인 네필라(nephila)는 양상추와 감자를 섞은 맛이다. 이런 곤충들을 먹어본 이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단순히 선입관에 의해 곤충식(昆蟲食, 곤충을 먹는 것)을 판단하고 있었나보다. 곤충이나 거미 등을 포함한 절지동물을 먹는 데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없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매미를 즐겨 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매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매미는 마지막 탈피를 하기 직전의 번데기일 때가 가장 맛이 좋다. 그리고 성충인 경우에는 교미가 끝난 이후에 하얀 알이 가득 들어 있는 암컷이 맛있다.”(140-144) - 엽기적인 요리들에 대한 내용.

 

12.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먹는 행위는 야만적이고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며, 위생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천한 행동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낳은 단순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의 문명의 선진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는 유럽에서조차도 오랜 세월 동안 수식 문화(手食文化,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 먹는 식사 문화)가 이어져 내려왔고, 젓가락 문화가 침투해 있는 일본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으로 밥을 주물러 만드는 초밥을 만들어 먹는 것은 물론이고 토스트, 패스트푸드인 햄버거 등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사용해 먹고 있지 않은가.

수식을 하는 인구는 전 세계의 40퍼센트인 약 25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인도의 힌두교도나 서아시아의 이슬람교도는, 음식물은 신이 내려주신 신성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매우 강해 식기를 비롯한 식사 도구는 더러운 것이고 손이 가장 청결하다는 종교적인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과거에는 유럽인들도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이 문화권에서는 오른손은 청결하지만 왼손은 부정하다는 관념이 철저해 신께서 내려주신 음식물을 만질 수 있는 것은 오른손뿐이라고 믿고 있다. 설사 선천적인 왼손잡이라 해도 왼손으로 식사하는 경우는 없다. 사용하는 손가락도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등 세 손가락만으로 정해져 있고,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인 베르베르족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속담도 있다. “한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증오를 상징하고, 두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오만하다는 뜻이다. 세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뜻이며, 네 손가락이나 다섯 손가락으로 식사하는 것은 대식가라는 증거다.”

힌두교도 등 수식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제2관절부터 끝부분까지만 사용해 마치 코끼리가 코를 사용하듯 능숙하게 손을 놀리면서 음식물을 입으로 옮긴다. 카레처럼 젖은 음식도 문제없다. 잡는다, 쥔다 라는 과정을 통해 입뿐 아니라 손의 감촉도 즐긴다는 이유에서 “먼저 손으로 맛보고 이어서 입으로 그 맛을 음미한다”라고 표현할 정도다.(149-151)

 

13. 젓가락의 기원은 중국이다. 약 3천4백 년 전, 은(殷) 왕조의 수도였던 은허라는 지역에서 수많은 무기와 식기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으로 만들어진 젓가락이 발굴됐는데, 그것은 일상적인 식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바치는 공물을 집기 위해 사용한 예기(禮器)로 추정되고 있다.

젓가락이 탄생한 배경에는 위생적인 면이나 뜨거운 음식을 집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손님이나 윗사람과 함께 식사할 때 손을 사용해 음식을 흐트러뜨리거나, 서로 많이 잡기 위해 보기 흉한 다툼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없애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에 기록돼 있다.(155-156)

 

14.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이 스파이의 국적을 조사할 때 젓가락과 숟가락을 주어 식사를 하게 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즉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식기를 손으로 집어 들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젓가락을 식기 위에 걸쳐놓는 것이 일본인, 반대로 식기를 탁자에 내려놓은 채 젓가락과 숟가락을 번갈아 사용하며 식사하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젓가락과 숟가락을 식탁에 내려놓는 것이 한국인이라고 구별했던 것이다.(163)

 

15. 한국의 인사말로는 ‘안녕하십니까’라는 것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1960년대에 일반화된 용어이고, 그 전에는 ‘식사는 하셨습니까?’라는 용어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인사말이었다. 식사를 나누어 먹는다는 동료의식과 음식에 대한 세심한 가치관이 낳은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165) - 흔히 ‘식사하셨습니까?’는 굶기를 밥먹듯하던 시절에 나온 인사말이라고 하는데… 전혀 새로운 해석으로 보인다. 우리의 이야기를 남이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좀 묘한 기분이다. 그것도 좀 다른,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가 가해진 해석을…

 

16. 식사 도중에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는 것이 매너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원래 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는 사인이었다.(177) - 서양인들의 식사 매너에 대한 내용 중… 한편 젓가락에 대한 내용 중에서도 그 끝을 뾰족하게 하지 않고 뭉툭하게 하는 것 역시 무기로 쓸 수 없게 하기 위한 것(157p)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17. 식사를 마치면 접시 위에 나이프와 포크를 교차해두는 습관이 있다. 지금은 식사를 마쳤다는 사인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원래는 17세기에 이탈리아 귀족이 시작했을 때에는 그렇게 교차해 두는 것이 종교적인 심벌인 십자가를 표현한 것으로 신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경건한 매너였다.(183)

 

18. 샐러드가 유럽이나 미국인의 일반적인 식탁에서 독립된 요리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인 18세기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는 약용 요리나 육류 요리 이후의 지방분을 제거하기 위한 첨가물에 지나지 않았고 레스토랑 메뉴에도 샐러드라는 품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유럽에서 탄생한 샐러드이지만 그 내용물은 소금만으로 맛을 낸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 야채를 먹는 습관이 미국으로 건너간 19세기 중반부터 샐러드는 독립된 ‘요리’로 바뀐다.

미국인의 식생활은 로스트비프에 야채를 첨가하는 간소한 내용인데 불을 사용하는 요리에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던 그들이 생 야채에는 유난히 신경을 썼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샐러드 소스가 개발된다. 야채 샐러드 소스이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프렌치 드레싱도 프랑스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1884년 미국에서 탄생한 드레싱이다. 프렌치라는 이름은 프랑스인이 고안했기 때문이라고도, 프랑스 요리의 전채로 사용되는 것이 어울리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정설은 없다.

또 드레싱과 야채를 섞는 동안에는 전화도 받지 말라고 할 정도로 신경을 쓰는데 이런 속담이 있다. “샐러드를 만들 때에는 네 명이 필요하다. 기름을 넣는 낭비를 좋아하는 사람, 식초를 넣는 인색한 사람, 소금을 넣는 고문변호사, 그것들을 모두 섞는 미치광이.” 즉 기름은 듬뿍 넣고 식초는 약간 넣고 소금은 미묘한 판단으로 간을 맞추고 마지막에는 단번에 섞어야 한다는 샐러드 요리의 비결을 설명하는 말이다.(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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