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위기
도날드 G.블로쉬 / 소망사 / 1996년 1월
평점 :
품절


* 마음에 드는 저자다. 신학적 성향에는 조금 차이가 있는 듯도 싶지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저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박식함과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촘촘하게 엮어가는 글 솜씨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 두껍지 않은 얇은 책임에도 그 안에서 발견하는 내용들을 상당히 풍성하다. 앞으로도 관심을 두고 찾아보아야 할 저자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 그의 책이 국내에 그리 많이 번역되지 않은 것이 아쉽고… 그나마 번역되어 나온 책들도 비싸다는 것이 아쉽다… --;;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이 정확하지 못한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 저자는 블룸하르트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데, 이 인물은 일반 책에서는 그 이름을 발견하기 힘들다. 사실 관심을 가져야 할 인물들(이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부자父子이므로…) 들임에 틀림없는데… 경건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병 고침과 악령축출(아버지 블룸하르트), 그리고 사회활동과 정치가로서의 활동(아들 블룸하르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앙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고, 이들은 바르트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 교회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에서 저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대조시키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논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발견하기 힘든 방식이다. 로잔 이후로는 진보와 보수가 서로에게 배울 점들을 배우고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회들은 대부분 두 가지의 필요성을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이 문제로 인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씌여진 당시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 두 가지 형태의 영성에 대한 설명은 매우 유익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를 비교하는 도표도 함께 제공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교회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관심에서와 같이,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도덕적이고 교리적인 실제 문제들에도 그리 깊이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가지는 대부분의 관심은, 교회의 조직화된 기구를 유지하는 것과 관계되고 있다.”(3) -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관심들… 교회는 그 관심을 교회 자체에만 두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다수의 여론과 염려와는 달리 한국 교회의 80% 이상이 교회의 ‘생존’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2. “주일학교의 교과 과정은 대체로 그 교회가 가진 성서적 교회적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칭의, 기도, 경건, 회개와 같은 주제들이 실제로는 무시되고 있다. … 그러나 개인적인 변화 없이 순전한 사회개혁이 있을 수 있는가? 오늘날 본회퍼의 주장을 잘못 이해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 본회퍼는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헌신이라는 비밀스러운 훈련 없이 그런 복음 전파는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세속 세계에 영적인 것을 전하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결코 같은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본회퍼를 비판할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빠뜨리고 있었던 것으로는 마귀의 세계에 대한 신학이다. 그것은 결국 그가 발전시킨 ‘성년이 된 인간(the man come of age)’과 같은 생각들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복음주의적 전통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본회퍼가 마귀의 실체를 심각하게 다루지 못했다고 하면, 로빈슨(J. A. T. Robinson), 파이크(James Pike), 해밀턴(William Hamilton), 하워드 무디(Howard Moody), 알타이저(Thomas Altizer), 하비 콕스(Harvey Cox)와 같은 세속 신학자, 또는 급진 신학자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현대성(modernity)이라는 장밋빛 색안경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실제적으로 ‘성(聖)’과 ‘속(俗)’을 같은 것이라고 하고 만다. 이 사람들 중의 몇몇은 기독교적 세속성이란 속된 것과 외설적인 것, 그리고 혼전 성관계와 혼외 성관계를 모두 수용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 알타이저와 해밀턴은 성(性)을 새로운 영역의 신성한 것이라고 봄으로써 새로운 쾌락주의에 빠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매클레오드(George Macleod)는 세속 신학자들보다 좀 더 성서적이고 현실적인 발언을 한다. ‘반드시 세속 세계는 하나님의 활동 영역이고 하나님께서는 만물 안에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 계신다고 말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훈련시키려고 사탄을 거기에 풀어 놓으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거기에 또한 그리스도를 보내셨음을 기억하라.’”(3-5)

-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자기의 색깔을 확실하게 드러내며, 소위 세속적인 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에 대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나열되는 신학자들의 이름… 왠지 골치 아픈 내용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일괄할 수 있기 위한 도구가 되어줄 것 같은 기대감도 함께 갖게 한다.

 

3.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자녀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도리어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5) - Amen!

 

4.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사적인 생활에서만 순종의 삶을 살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공적인 생횔 영역에서도 순종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나 나그네요 유랑자로 살 것이다.”(6) - 점점, 그리고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드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는 모습까지! ^^;

 

5. “신앙이 빈약해짐과 더불어 커뮤니케이션의 위기가 왔다. 세속적 신학자들(secular theologians)은 신앙적인 개념이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는 무슨 의미 있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불트만(Bultmann)에 따르면, 성서에 나오는 고대의 그림 같은 언어(picture-language)를 세속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탈신화화(脫神話化, demythologized)할 필요가 있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진리를 불신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는 신앙적인 언어 대신에 정치적 언어를 이용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반대로, 윌리엄 호던(William Hordern)은, 지금도 기독교 신학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God-talk)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12) - ‘God-Talk’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을(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쨌든 현대인들에게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깃은 기본적으로는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실제적인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었다. 호던의 지적처럼 우리는 복음을 희석시키거나 변질시키지 않고 그대로 내놓고자 할 필요가 있다.

 

6. “현대 문화의 세속화도 복합된 축복일지 모른다는 견해에도 진실한 요소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의문시되는 문화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도 식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죽었을 때는 사람도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그를 지으신 창조주, 그 분으로부터 그의 존재의 의미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죽으심은 사라졌던 신들이 재등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는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곧, 그 문화의 형이상학적 영적 공백을 차지하려는 우상들이 재등장하는 것이다.”(13) - 이것은 정확히 마이클 호튼이 그의 책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의 6장 ‘이교도로의 복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동안, 수많은 이교도와 그들의 우상들이 미국과 유럽 세계에 승리의 행진을 하며 들어왔다! 그것이 과연 ‘성숙’이고 ‘성년’이 된 것일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인간이 도덕적 영적 성숙을 얻었는가? … 만일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기술적 지식과 능력이라고 한다면, 현대인은 성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목표가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라고 한다면, 인간은 새로운 요람기(a new infancy)로 후퇴한 것이 되고 만다(Abraham Heschel).”(13)

 

7. “그러나 온전한 갱신은 종국적으로 새로이 성령을 부어 주심에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결국 우리 시대의 헌신의 갱신은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재발견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14) - 어지러운 신학적 개념들을 나열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성령으로 결론을 맺는다! 아, 그의 신학은, 그가 제시하는 방향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타당성 있어 보인다.

 

8. 건전한 교리에서 벗어난 거룩한 생활은 곧 도덕주의(moralism)가 되고 만다. 동시에 거룩한 생활이 따르지 않는 바른 교리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행하는 ‘경건주의’ 운동에서 우리는 흔히 신학에 대한 경시를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라는 것이다. 이런 류의 흐름은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다음과 같은 경구를 반영하고 있다. 즉 ‘누구나가 어떤 개념들에 매달리지 않고도 여전히 경건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사고가 개신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깊이 파고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경건한 생활을 경시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참으로 사람은 자기가 그 진리에 헌신하지 않고 그 진리를 바로 알 수는 없는 것이다(Pascal). 내적인 헌신을 잃은 교리는 생명이 없다. 헌신적인 삶이 없는 신앙은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과오들 중의 하나였다. 루터와 칼빈은 모두 신앙이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구주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뢰와 확신에 있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적 신학(theologia dogmatica)은 영적인 삶의 신학 또는 헌신의 신학(theologia vitae spiritualis)과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거룩한 헌신의 삶은 과거에 우리가 얻는 구원에 대한 표징(sign)과 거울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이 구원이 사람들의 삶 속에 실현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단인가? 우리는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헌신의 삶이, 우리의 구원이 쟁취되어지고 계속적으로 회복되어지는 전투장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칭의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과거의 희생이 오늘의 현실에 적용되어가는 수단인 것이다. 우리의 행함(works)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함과 무관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14-15) - 주옥(珠玉) 같은 글이요 문장이다! 건전한 교리와 경건한 생활의 균형! 교리적 신학과 헌신의 신학의 균형!

 

9. “참된 경건은 그의 비판 기능을 날카롭게 해주기도 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참된 것과 잘못된 것 사이를 식별해야 할 필요를 더 많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은 지식과 총명(식별력, 빌 1:9)으로 넘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시험해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변덕스러움과 종잡을 수 없는 상상력에 따라 움직이는 그런 종교는 정박(碇泊)할 자리가 없다. 그러나 반면에 기독교의 헌신생활은 성서적 계시, 곧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 3)에 닻을 내라고 있다.”(16) - ‘하나님의 말씀, 성서적 계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우리의 비판과 식별, 시험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성경의 기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참으로 우리가 접하고 경험하고 배우는 모든 것은, 그 무엇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시험해 보아야만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버려서도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기초와 기준!!!

 

10. “하나님의 죽으심(the death of God)을 경험한 시대는 이제 신자들이 삶 속에서 그의 아들이 부활하는 능력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18)

 

11. “본회퍼는 신앙의 궁극적인 관심을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관심과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옥중서한]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삶임을 지적하였다. 내세 지향적 신앙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이것이 본회퍼가 전통적 경건이 보여주는 내세를 다스리는 이신론(理神論)적 하나님 사상을 반박하면서 ‘내재하시는 초월자(the beyond in the midst)’로서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이유이다.”(23) - 내세 지향적 신앙과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의 균형!

 

12. “신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세속 철학을 서로 관련시키려고 하는 반면, 급진 신학자들은 종교를 초월하여 세속적인 신앙에로 파고들려고 한다. 이런 형태의 신학에서 우리는 신정통주의의 비관론에 비교해서 인간의 능력에 관한 뚜렷한 낙관론을 보게 된다. 바르트와 브룬너가 인간의 무력함과 비참함을 강조한 반면 세속 신학자들은 영웅적 행위에 매력을 느낀다. … 이 신학자들이 세속적인 성인들(secular saints)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주목할 만큼 흥미로운 일이다.”(25) - 흥미로운 논평.

 

13. “우리는 이 운동이 조금 더 깊은 신학적 기반 위에 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참된 연합은 사랑이나 선한 뜻만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결국 진리를 기초로 하여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맥케이(John Mackay)와 배서디(Bela Vassady)같은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여 살아가려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복음주의적으로 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27) -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균형!

 

14. “우리도 성경말씀에 적용해 쓰려고 할 때 무오성(inerrancy)이라는 개념보다 전혀 과오가 없고 확실하다는 개념(infallibility)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신앙적이고 신앙고백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과학적이고 변증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29) - inerrancy와 infallibility

 

15. “많은 신학자들이 헌신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Evangelical Theology)]에서 헌신이 없는 신학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32) - 바르트는 보수주의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경건을 지향하는 인물이다. 내가 신대원을 다닐 당시만 해도(90-92년) 총신에서는 바르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럼에도 바르트에 대해 심정적으로 친밀감을 느끼게 된 것은 한 교수님으로부터 바르트의 일화를 들으면서였다. 그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학적인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신학자 바르트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서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다는 이야기…

 

16.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삶에서도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35) -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 차이가 나서는 안 된다!

 

17. “어떤 등대도 개인적인 회개(repentance)와 돌아섬(conversion)이 없이 세워질 수 없다. 이것은 교회 개혁이란 근본적으로 영적인 개혁, 곧 새로운 형식과 구조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추구하는 개혁이 아닌 한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구되는 것은 깨끗해진 교회이지 단순히 형식만 개혁된 교회가 아닌 것이다.”(42)

 

18. “사실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현대 종교와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개념이 되고 말았다. 옛날식의 경건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새로운 류의 영성에 대한 탐구는 현재의 개신교를 괴롭히고 있는 정체성(正體性)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 현대의 개신교 신학교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양성하기보다는 종교학자들을 양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45) - 경건과 영성은 상반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 둘은 같은 것을 지향한다. 전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옛날식의 경건과 새로운 종류의 경건(그것은 ‘영성’이라고 지칭된다)의 대립이다. 예를 들어, 옛날식의 경건/영성이 내면적이고 영적이라면, 새로운 종류의 영성/경건은 외면적이고 생활적이다. 그래서 ‘생활 영성’이 새로운(?) 분야로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옛날식이건 새로운 것이건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요, 동일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 내면적이고 영적인 경건이 꼭 외면적이고 생활적인 부분을 무시한다고 주장해야만 하는가? 외면적이고 생활적인 것을 추구하려면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을 무시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둘 다 추구해야 한다. 진정한 내면적/영적 경건은 외면적/생활적인 영성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19. “경건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두려움이 합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경건은 도덕주의와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도덕주의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보려고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절실히 깨닫고, 반면 그의 자비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신실하게 신뢰해야 함을 전제로 삼는다.”(47) - 흔히 ‘경외’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敬)과 두려움(畏)을 함께 아우르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그것이 옳은 가르침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은 신학적인 개념이지 성경 본문에서 가져온 개념은 아니다. 성경이 ‘경외’라고 번역하는 히브리 단어에는 ‘두려움’이라는 의미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친밀감은 있지만 ‘두려움’은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몇 페이지 뒤에서 저자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경건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헌신을 의미한다면, 그 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거룩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개신교신학(다양한 보수적 신학들을 포함하여)에는 하나님과 너무 친숙해져 있는 면이 있다. 그것은 때때로 그대로 신성모독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아무도 친숙하게 알고 있는 고난당하는 이웃에 불과한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두려워할 수는 없다(Whitehead). 또 아무도 사랑만 하고 진노와 정죄와는 무관한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할 수는 없다.”(51)

 

20. “교회와 신학교에서 일고 있는 상담과 그룹 활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개인적인 신앙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를 반영한다. … 그러나 순수히 세속적인 심리학적 입장이 신학적 성서적 입장을 너무 자주 대신해 버리고, 인간은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의존하게 된다. 오늘날 신앙세계에서도 정신요법(psychotherapy)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 문화가 진지한 경건의 표인 십자가를 지는 것과는 상반되는 자기성취를 강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속적인 정신요법이 가진 올바른 통찰력과 발견들을 손상시키려는 뜻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통찰력들이 목회, 또는 영혼을 치료하는 일(seelsorge)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게 된다.”(50) - 이 부분이 옥성호 집사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옛날식의 경건(경건과 십자가를 짐)은 새로운 종류의 경건(내적 치유와 상처 입은 기억의 치유)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심리학이 목회학을 대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교회와 목사들은 이러한 현상과 흐름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를 의심스럽게 보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생각이 있는 이들 대다수가 이러한 추세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1. “예전회복운동(liturgical movement)은 예배의식을 강조하고 성찬을 사람들의 삶 속에 다시 중심이 되게 함으로써 경건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 하였다. 이 운동에는 권장할만한 일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는 심미주의(審美主義, aestheticism)와 복고주의(復古主義, archaism)의 맛이 나는 것도 있다. 오늘의 교회는 예전(禮典)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건이 소멸되어 가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형식적인 기도와 연도(連禱) 같은 것에 있지는 않다. … 예전의 회복은 경건의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두드러지게 해준다. … 내적인 경건은 외적인 성례전의 실행 없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포사이드(P. T. Forsyth)가 상기시켜 주는 바와 같이, 성례전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하더라도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50-51)

 

22. “기도를 탄원과 간구로 이해하는 기도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회복하는 일은 긴급한 것이다. 탄원하는 기도 없이 복음적인 경건도 있을 수 없다.”(52) - 탄원 기도의 중요성은 C. S. 루이스가 그의 [개인 기도]에서 강조한 바가 있다. 이 부분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3.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지워진 의무이다.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아 유지하지(perseverance; 견인, 堅忍) 않고는 구원은 박탈되고 말기 때문이다.”(53) - 저자가 하는 말은 기본적으로는 옳은 말이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견인’은 신학적으로 볼 때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행위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사람 편에서의 유지의 노력도 전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견인’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의 가장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신다는 내용이다. 둘째로, ‘구원의 박탈’ 역시 설명이 필요한 부분으로서, 이렇게 간단하게 서술하고 끝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24. “새로운 세속 신학은 ‘종됨’(servanthood)과 ‘거룩한 세속성’(holy worldness)을 이야기한다. 구정통신학은 교회성(churchliness)을 강조했다. 우리는 경건함(godliness)이나 거룩한 두려움(holy fear)을 강조한다. 오늘날 진정으로 인간적이 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 아주 신랄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다.’”(58) - 잘못된 초점에 대한 지적. 인간을 중심으로 하고 세상을 중심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초점이다!

 

25. “긍휼을 베푸는 일이 동반되지 않는 경건은 위선적 경건(piety)이요, 경건을 동반하지 않는 긍휼은 선행주의(do-goodism)에 불과하다. … 기독교 신앙은 자기 성취(self-fulfillment)를 이야기하기 전에 자기 부인(self-denial)을 가르치고 있다.”(59) - 오늘날의 잘못된 ‘자기 긍정’의 가르침에 대한 지적.

 

26.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말을 빌리면, ‘그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가 신령해질(divine)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육(成肉)하신 목적은 사람을 ‘신격화’(deification)시키는 것이다.”(66) - 우리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사실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신비주의나 이방 종교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이/같이 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성경적인 개념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Adam이 취했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예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뒷부분으로 가면 이 부분이 다시 지적된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자주 은혜를 통해 사람이 거룩해지거나 신격화된다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중세 말기의 신비가인 제노아의 캐더린(Catherine of Genoa)는 ‘나의 존재는 하나님이다. 단순히 동참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나의 존재가 변화한다는 뜻엣, 나의 존재는 하나님이다’라고까지 하였다.”(107) - 이들의 가르침은 좀 위태로워 보인다. 성경은 인간이 자기 형상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말하지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빌립보에서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순종과 승귀는 우리에게 모범은 될지언정,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과 같을 수는 없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27. “부활은 현재 상황에서 실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종말적 사건이다. 더욱이 부활한 몸은 하나의 영체(靈體, spiritual body)이다(고전 15:44).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의 증언에 충실하려 한다면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이 이 세상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67) - 이 부분에서 저자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활체’는 순수한 ‘영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게 되는 실제 부활체의 대표는 예수님의 경우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고 말씀하심으로써 ‘부활체’는 ‘영(체)’와는 또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부활과 구원이 ‘영적인’ 것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이 순수한 영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사실상 부활이라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된다. 이미 죽어서 영과 육이 분리되어 있는데, 영적이기만한 부활이라면 굳이 죽은 육신을 일으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육체’(!)의 부활을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28. “미래의 그 나라는 신약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변형된 또는 영화(靈化, spiritualized)된 땅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혈과 육은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15:50)고 읽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장가가는 일이나 시집가는 일이 없을 것이요(마 22:30), 하나님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 중심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시기(요 4:24) 때문이다.”(72) - 이 부분에 있어서 저자가 한 쪽에 치우치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왜 자꾸 영화(靈化)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결혼이 없다는 사실과 아무 관련이 없다. 혈과 육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저자 자신도 뒷부분에서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다(“‘육’(flesh)이라는 말로 그는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요소를 의미하였다.”, 85). 예를 들어, 부활체는 영과 육이 결합한 형태이고 그 경우의 육은 무흠한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는 일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성경은 그것이 ‘새롭게’ 된 땅(아니면 ‘성화(聖化, 거룩하게) 된 땅’이라고 해도 괜찮겠다)이라고 하지 ‘영화’된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의 주장일 뿐이다.

 

29. “그리스도의 나라 또는 영적 공동체(Spiritual Community) 안에 교회와 국가 양자를 모두 포함시키는 현대 신학의 흐름들(Barth, Tillich, Cullmann, Bonhoeffer)에서는 한 가지 다른 과오를 볼 수 있다. 이런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라는 진리와,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일 뿐 아니라 그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이기도 한 것이다.”(73) -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이 땅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 역시 종말론적, 즉 미래적이기만 하지 않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인 특징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뒤에 나오는 진술을 보면 그것도 아닌데…

“물론 이 두 가지 형태의 신학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잡고 있어야 하고,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과 마찬가지로 미래적 종말론(futuristic eschatology)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161) - 저자는 미래적 종말론과 마찬가지로 실현된 종말론도 놓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0. “영적 갱신 운동에 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혼동되어 버리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75) - 내가 보기에 저자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분리시켜 버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31. “우리의 이웃이 상해나 죽음의 위협을 직접 받고 있을 때라면, 언제라도 우리는 영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베르자예프(Berdyaev)는 ‘내게는 빵이 물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빵이 영적인 문제일 수 있다’고 한 점에서 옳았다고 하겠다.”(75) - 내가 보기에 베르자예프의 말은 제대로 번역된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전에 보았던 대천덕 신부의 말이 이것과 관계되는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천덕 신부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굶는다면 그것은 물질적인 문제이지만, 내 형제가 굶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가 된다.” 내가 먹을 것이 없다면 내가 게으른 탓이지만, 내게 먹을 것이 있는데도 내 형제가 굶주리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내가 그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책망 받아야 할 신앙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것과 통하는 맥락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내가 먹는 빵은 물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형제가 먹을 빵이 없다는 것은 나의 영적인 문제이다.”라고…

 

32. “현대 신학의 맹점은 그것이 성과 속,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를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은 거룩하다. 모든 것이 신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틸리히에 따르면 전 세계는 신성하다. 그리고 로빈슨의 견해에서 보면 성 행위까지도 영적이거나 신성한 것이다. 성 행위는 기껏 좋게 보아도 완전히 인간적인 행위에 불과하고, 결코 신적인 것일 수 없다.”(76) - 인간적인 모든 것이 신적인 것이어서 거룩하다거나 모든 세계가 다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지나치다. 하지만 성(性)의 경우에 대해서는 저자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타락한 성은 인간적인 것이요 신적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규범 아래에서 행해지는 성을 ‘완전히 인간적인 행위에 불과하고 결코 신적인 것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성 역시 하나님이 만드셨을 때에 보시기에 좋았던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제는 붙여야겠지만… 구원받아 회복된 인간과 세계와 성은 다 거룩한 것일 수 있다. 오죽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말에게 거는 방울까지도 거룩하다고 하겠는가(슥 14:20)!

 

33. “교회의 사명은 자연적인 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또는 세속적인 것을 거룩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람에게 자신이 그 거룩하신 분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그를 거룩하신 그 분의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성과 속의 종합(synthesis)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그런 종합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곧 ‘역사를 넘어서’만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에도 이루어질 것이다. … 그 때에는 성과 속 사이의 긴장과 모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77) - 이 부분에서 자자는 지속적으로 ‘영화(靈化)’에 대한 견해를 견지한다. ‘거룩, 신성, 영적’이라는 표현은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에 의하면 앞서 지적한대로 인간과 세상, 그리고 성은 결코(!) 신적인 것일 수 없다. 그리고 그것뿐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그 무엇도 거룩하거나 신성하다거나 영적이라는 표현을 덧붙일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지나쳐 보인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완전히 영화(榮華)롭게 되기까지는 구원받은 인간을 ‘의롭다고 칭할 수’(칭의) 없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이 땅에는 단지 ‘거룩하게 되어 가는 과정’(聖化)만 있을 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누구도 의롭다고 불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34. “우리는 성서의 마귀론을 탈신화화 해버렸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에 관해서 혼란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칼라스(Kallas)가 바로 지적한 바와 같이 마귀론을 버릴 때 곧바로 종말론까지 버리게 된다.”(79) - 마귀론과 종말론의 관계에 대한 지적.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35. “개신교에 속한 교회들의 신앙생활에서 영적 훈련이 상실되고 없어졌음을 문제 삼는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데이(Albert Day)는 의견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 개신교 신도들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영적 통찰력이 많이 부족하고 도덕적 능력을 심각할 정도로 잃어버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82)

 

36.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당시의 기독교 세계를 향하여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만 의로워진다는 성서적 진리를 일깨워주었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영적 훈련을 결코 잃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헌신적인 삶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에는 거룩한 헌신의 삶을 위해 싸우는 때가 아니었다. …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과 청교도 운동에 가서야 내면적인 헌신의 삶에 대한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적인 개혁과 함께 삶의 개혁도 필요함을 지적함으로써 개신교의 종교개혁 운동을 성취시켜 보려고 했다. 스페너(Spener)는 성화(聖化)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83) - 경건주의와 청교도가 주장한 ‘헌신의 삶’에 대한 주장이 종교개혁의 ‘교리적인 개혁’과 짝을 이루며, 그것을 ‘성취’하는 ‘삶의 개혁’이라는 주장은 신선하다.

 

37. “웨슬리(John Wesley)는 그가 ‘유신론’(solifidianism)이라 이름 붙인 것, 즉 행함과 무관하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의 견해로는 이것이 대륙의 루터교가 가진 커다란 해독(害毒)이었다. 웨슬리는 우리가 아직 우리의 죄 가운데 있는 동안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 정신에 충실하게 남아있었다. 동시에 그는 우리가 우리의 죄에서 깨끗함을 얻기까지는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러나 현금에 이르러 경건은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개념이 되고 말았고, 권징(훈련, discipline)이라는 말은 현대의 개신교 신도들과 현대 문화가 모두 훈련보다는 처벌이라는 의미로 쓰게 되었다. 금욕적인 생활은 세상을 부인하는 것(world-denial)과 연관되었고, 그러므로 해서 대부분의 개신교 신도들이 싫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우리는 영적 훈련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봉사생활을 위해 자신을 강화할 수는 있다. 우리는 훈련하는 생활을 통해 자신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삶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의롭다함 가운데서 일보 전진할 수는 있다. 칼빈은 우리가 행함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함과 무관하게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84-85) - 루터와 칼빈은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과, 웨슬리는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와 비교할 수 있겠다. 믿음과 행위의 문제…

 

38. “우리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에 대하여 가지는 강력한 관심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기초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들을 초래할 수 있음을 우리의 종교개혁 시대의 선조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86) - 저자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들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내용을 소개한다. 그것들은 도덕주의, 도피주의, 신비주의와 신령주의, 바리새주의, 완전주의, 엄정한 실천주의 등이다. 이에 대한 글들을 아래에서 몇 가지 발췌해본다.

도덕주의 자신을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보려는 시도이다. 그렇게 되면 영적훈련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도피주의에서 영적 훈련들은 우리가 자신을 세상보다 위에 따로 들어 올리거나 폭넓은 사회생활을 피하여 개인적인 명상의 세계에 은둔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 // 기독교 신앙에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나 세속적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신비적 요소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체험을, 진리를 판정하는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판단기준으로 보는 오류에 빠진다면 우리는 신비주의와 신령주의(spiritualism)에 빠진 것이 된다. 도피주의와 내향성의 위험을 피하려고 한다면 신비주의적 요소는 언제라도 성경말씀에 기록된 역사적 계시와 결합되어 있어야만 한다. // 바리새주의는 자신의 실제적인 모습보다 더 영적인 체 하는 것을 말한다. // 완전주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때때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완전함에 이를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함 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실지로 우리의 가장 고상한 욕망과 덕목까지도 죄로 물들어 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악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덕행들을 두고도 회개해야 하는 이유이다. // 엄정한 실천주의는 엄격한 율법주의라고 할 수도 있는 것으로, 이런 류의 사고방식을 따르면 율법에 확고히 매달리는 것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된다.”(86-89)

그리고 난 후에 저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훈련이 어떤 것인지를 생스터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생스터(W. E. Sangster)는 기독인의 훈련은 ‘힘들고 무거운 부담을 주며 선에 이르지 못하는 헛된 노력이 아니라,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을 충성되게 모시는 것’이라고 옳은 이야기를 하였다.”(89)

 

39. “사실 기도 없이는 다른 어떤 훈련도 무슨 영적인 효험이나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도는 신앙의 핵심(soul)이다.(Calvin)”(89)

 

40. “우리는 기도를, 이웃의 필요를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Van Buren, J. A. T. Robinson)이나, 존재의 근거에 대한 명상(Tillich)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적 의미에서의 기도는 인격적인 신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이다. … 기도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람이 해야 할 과업이나 과제이기도 하다. // 기도와 묵상을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바르게 이해된 묵상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묵상을 간구보다 더 고사한 형태의 기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묵상을 참된 기도를 위한 준비로 볼 수는 있다. // 신앙의 진리들을 공부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아 할 또 하나의 훈련이다. 오늘의 목사들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공부라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90-91) - 기도, 묵상, 공부! 한편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이 여기서는 ‘안셀름’(Anselm)의 말로 소개되고 있다. 이 말은 터툴리안과 어거스틴 그리고 안셀름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오는 명언인 듯…

 

41. “개신교 신도들은 경건의 실천과 영성 훈련에 관해서는 카톨릭 교회를 닮아가야 한다. … 우리의 입장은 경건생활이 율법주의의 소용돌이와 신령주의의 암초를 피하려면, 종교개혁의 메시지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끝까지 분석해보면 가장 강력한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다.”(96-98) - 영성 훈련과 관련한 몇 가지 논의. 간단하게 인용해 놓았지만… 이것들은 하나하나가 꽤 무게 있는 진술들이다.

 

42. “신비 종교의 첫째 특징은, 그것이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직접적 또는 즉각적 체험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 기독교 신비가들은 공통적으로 이 궁극적 실재를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세상의 영(the World Spirit), 무한자, 존재의 근원과 같은 좀 더 비인격적인 개념으로도 그것을 생각해 왔다.”(105) - C. S. 루이스가 [개인 기도]에서 지적하듯이, 이들의 신비 경험과 그것을 통한 발견이 과연 동일한 것일까를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43. “신비가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쌓는 공덕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에 불과하다고 한다. 더욱이 기독교적 신비주의의 주류에서는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가능성은 하나님과 연합되는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인된다. 틸리히가 상기시켜주는 바와 같이 ‘모든 준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몰아적인 경지에서 하나님과 재결합되는 단계에 가서는 그것이 억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108) - 틸리히의 주장은 개인의 ‘영적 각성’이나 공동체의 ‘부흥’이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매우 성경적인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저자는 신비가들이 이처럼 성경적인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판단 기준이 성경이 아닌 그들의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점도 잊지 않고 지적한다.

신비가에 있어서의 권위는 영적인 체험 또는 신비한 체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퀘이커파의 신비가들은 이것을 흔히 ‘내적인 빛’이라고 불러왔다. 쉴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좀 더 성경말씀에 충실하려는 일부 신비가들은 거듭남이나 성령 세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비가들에게 있어서 권위의 근거는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어떤 해석가의 말을 빌리면 ‘신비가에게 있어서는 그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어떤 것이든 관계없이 최종적인 권위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 있다.’”

 

44. “플라톤은 그의 [향연(Symposium)]에서 ‘사랑의 사다리(ladder of love)’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하늘의 영역에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이 사랑의 사다리는 중세 카톨릭 교회의 경건에서 ‘공덕의 사다리(ladder of merit)’가 되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주입된 은혜(infused grace)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닦는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 신비가들은 이 신비한 사다리를 ‘야곱의 사다리’와 접목시켜보려고 했다. 사람이 타고 올라갈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고 내려오시는 사다리를 상상하는 것이다.”(109)

 

45.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간구보다 묵상과 명상으로 해석되어진다. 혼합종교 신봉자로 알려지고 있는 헉슬리(Aldous Huxley)는 선포하기를 ‘인도의 신비가들과 기독교의 신비가들의 실제적인 가르침은, 간구하는 기도를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이 뜻에 단순히 맡기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했다.”(110) - 신비주의는 신비주의끼리 통하는가?

 

46. “그는 지고(至高)의 보편자이기보다는 절대하신 단독자(the absolute individual)이신 것이다. … 그는 친교를 나눌 수 없는 부동의 동자(動者, unmoved mover)나 세계의 영혼(World Soul)이 아니시고, 삼위일체의 존재로서 자기 안에서 완전한 친교를 하시는 분이시다.”(115) - 신학에 들어온 헬라 철학적 개념들은 주의 깊게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신비주의적인 진술들도 성경적인 개념에 의해 분별되어져야 한다.

 

47. “비록 플라톤주의자들은 흔히 영혼의 불멸성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자연적인 불멸성은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비가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불연속성을 이야기한다.”(116) - 이것 역시 헬라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의 차이에서 온다. 성경은 ‘영혼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부활’을 말한다!

 

48. “우리는 성서에서 입증되고 비추어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주어진 자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드러나 있다. 브룬너가 말한 대로 ‘신앙은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있다고 선포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자기에 관한 지식(self-knowledge)이 신지식(God-knowledge)에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신지식이 자기 지식을 가능케 한다.”(117) - 저자는 ‘두 가지 형태의 영성’이라는 핵심적인 장에서 ‘신비주의’가 주관적인 신비 체험에 근거하는 것을 지적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함을 지적한다. 자신을 성찰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의 힘, 양심, 체험, 인격, 행함은 진리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서 계시면서,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과 성경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부름을 입고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단순히 성령께서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아주 날카롭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신학이 확실한 이유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아가서 우리 자신의 밖에 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나 양심, 체험이나 인격, 또는 행함을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것, 즉 거짓일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를 의존하게 된다.(124)

 

49. “복음주의 신학에서 아주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삶이다. … 스페너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의 요체는 회개와 신앙과 새로운 순종이다.’”(119) - 이제 신비주의에서 복음주의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간다.

 

50. “기독교 신비가들은 보통 예수님을 친히 묵상적이고 명상적인 기도를 실천하신 전형적 인물이라고 지목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기도 생활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분명히 간구하는 기도와 중보적 기도였음을 보여준다. 그가 사람들을 떠나 물러갔던 것은 육의 굴레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무한자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구할 것을 간구하고 고통과 눈물 가운데 있는 자기 사람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121)

 

51. “우리는 성서적 신앙에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정반대를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모든 주관적인 감정과 열광적인 신앙생활의 길을 막아버리려는 합리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에 맞서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125) - 저자는 신비주의의 약점을 지적하면서도 ‘신비(주의적 요소)’를 아예 제거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매우 균형 잡힌 태도를 견지한다. 치우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52. “신정통주의 신학은 역사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의 객관성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하여, 신앙적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신앙적 체험이 따르지 않는 구원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루터와 베드로와 바울이 그렇게 말하였다고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당신은 반드시 그리스도 자신을 체험하여야 한다. 그리고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그것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느껴야만 한다.’고 하였다.”(128) - Amen!

 

53. “니그렌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가져갈 수 있지 않은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지 아니한가?”(132) - 흠…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난 니그렌의 말에 더 많은 표를 던지고 싶다. 어느 청교도인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우리의 회개도 회개되어져야 한다”고…

 

54. “신비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라고 말하기보다는 경건생활의 표본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 중심의 종교가 되고 만다. …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며 동시에 본보기도 된다고 한 키에르케고르가 옳았다. …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다는 것(imitation Christi)은 우리가 외형적으로 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떠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그의 형상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133)

 

55.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실 때조차도 우리 자신과 연합되어 버리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는 따로 계시는 분이시다. 틸리히는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안에서 들려오는 말씀(inner word)이 아니라 외부로부터(outside)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성경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외부는 안과 밖을 넘어서는 즉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바른 지적을 해주었다.”(135)

 

56. “이신론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초월성을 주장하는 반면에,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다. … 복음주의는 성경말씀 중심인데 반하여, 신비주의는 성령의 내적증거와 빛을 강조한다. 그러나 온전한 성서적 보편 신앙을 위해 이 두 가지를 모두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말씀 없이 성령만 가진다면, 우리는 신령주의(神靈主義, spiritualism)나 철학적 신비주의(Mysticismus)에 빠지게 된다. 또 우리가 성령을 떠나서 말씀만 가진다면 우리는 결국 합리주의적 성서주의나 고백주의(confessionalism)에 빠지고 만다.(140-141)

 

57. “문제는 신학을 세속철학으로부터 어떻게 구별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143) - 그렇다!

 

58.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Gustafson)은 하비 콕스의 신학에 대한 비판을 이와 같이 빈틈없이 했다. ‘내가 믿기에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라는 원리로 의도되었던 것은 쉽사리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라는 원리에로 빠져들고 만다.”(146) - 정말? 조심!

 

59. “우리는 현대 신학이 (틸리히와 로빈슨의 경우에서처럼) 혼합주의를 지향하거나 (반틸 Van Til이나 로마 카톨릭 신학자 두간 C. Dugan의 경우에서처럼) 폐쇄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에 와서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있는 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끊임없이 점점 더 문화에 순응되어 가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교회가 완전한 세속화를 막고 맞서려면, 교회는 교회의 참된 본질을 재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세속주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뒤로 물러서는 데 있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서는 데 있다. 세상과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대립점(point of conflict)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횡행하고 있는 악마적이고 파괴적인 세력들은, 그것이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태롭게 하기 전에 도전되고 분쇄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 문화는 이제 더 이상 나치주의와 파시즘의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세속적 구원들이 거론되어 왔다. 이들 가운데는 새로운 민족주의, 변증적 유물론, 세속적 휴머니즘, 민족주의의 이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주장, 고대의 풍요와 성의 신들을 다시 부상시키려는 새로운 쾌락주의 등이 있다. 비록 우리가 가정 상 종교 이후의(post-religious) 세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좀 더 치명적인 형태의 우상숭배와 열광주의를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종교들에 대해서 교회는 명백히 안 된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147-148)

 

60. “브룬너가 서구인의 종교적 상태를 ‘형이상학적 진공 상태’라고 묘사한 점에서 옳았다.”(148) - 그리고 그 진공 상태로 동양의 종교들과 뉴에이지 운동 같은 것들, 그리고 저자가 지적하는 민족주의, 유물론, 휴머니즘, 쾌락주의 등이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61. “필요한 것은 해밀턴이 주장하는 ‘세속적인 성도들’(secular saints)이 아니라, 기도와 헌신으로 신앙의 신비한 원천에 점차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 상대주의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있는 신학이 필요하다. 그 말씀이 현대인의 생활 방식을 포함하는 모든 철학과 이데올로기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149)

 

62. 오늘날 우리는 시대정신과의 화합을 추구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건전한 신학을 희생해서라도 시대정신에 적응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포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선포는 바른 것이다. ‘기독교는 현대 정신과 현대 문화에 굴복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갈라섬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문화와 인간의 먼 미래까지를 보장해주는 것은 문화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문화에 맞서는 기독교인 것이다.(157) - Amen!

 

63. “포사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있는 체험 신앙은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계시와 신앙에 기초를 둔다. 그런 체험 신앙은 체험을 통해 확립되고 체험 안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체험으로부터 나오지는 않는다. 체험은 신앙의 기관(器官)이지 그 척도(尺度)나 그것을 지배하는 원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는 것을 소유한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의 소유하고 있는 그것과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그것과의 관계이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주에게 있는 것이다.

루터는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보거나 느끼는 모든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이성이 믿음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은 그냥 믿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죄의 용서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을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들이 다시 살게 되리라고 나에게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느낌에 따라 인도되어서는 안 되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루터, 특히 그의 생애의 후기의 루터는 신앙에서 체험적 요소를 낮추어 평가하는 것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체험을 신앙의 기반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적으로 말할 때, 그는 거의 언제나 감각적 체험이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성령의 내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에는 듣고 보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적 또는 신비한 들음이요 봄이다. 그는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나는 위로부터 오는 소리와 내 귀에 울리는 소리, 곧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을 듣는다’고 선포한다.”(162, 168, 169)

 

64. “구약 성경을 보면 ‘표적’과 ‘시험’(temptation)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려는 기사보다 더 많은 만족할만한 증거를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다.”(173) - 흠! 표적과 시험에 대한 부분은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

 

65. “바울 자신은 은사를 많이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을 함부로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실제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체험의 많은 부분이 진짜가 아니라고 경고하였다(고전 12:3). 그는 또한 믿음과 사랑이 영속적인 데 반하여 황홀경에 빠져서 하는 방언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고전 13:8, 13).”(177-180) - 저자는 방언에 대해 의도적으로 낮추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 12:3은 꼭 방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고전 13:8, 13 역시 방언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에는 방언만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과 지식도 폐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방언은 지나치게 높이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낮추는 것도 문제다. 방언은 그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으면 된다.

 

66. “초자연적인 것과 기묘한 것에 거의 병적으로 매료되는 또 하나의 현대적 현상은 환각제나 마약을 통해 황홀한 상태를 경험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거짓 신비주의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종파를 드러내는 표는 영적인 것과 비슷한 무슨 체험을 할 목적으로 환각성의 약품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철학자 헉슬리(Aldous Huxley)는 이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었다. 말년에 그는 이런 약품들이 실재(實在, reality)를 직접 만나는 데 잠정적인 도움이 된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헉슬리가 기독교 예배에서 성찬용으로 환각제 약품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181) - 흥미롭기는커녕 매우 거북스럽고 혐오스럽다! --;;

 

67. “성경말씀에 따르면 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