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 거듭난 자의 삶에 드러나는 힘 토저 대표작 시리즈 5
에이든 토저 지음, 한상국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여 년 전에 읽었을 책을 다시 읽었다. 87년도면 대학교 4학년 때! Tozer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흡수했었을까? 다시 읽으면서 몇몇 군데 새로 줄을 친 것(10군데 미만이다!)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제대로 읽은 듯싶다.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은 [거듭난 자의 생활]. 1978년 초판이고 1981년 재판된 책이다. 책값이 1,000원!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같은 제목으로 1999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고, 2006년에 [능력 - 거듭난 자의 삶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개정되어 나왔다. 하지만 원서의 제목은 ‘Born After Midnight’으로 동일하다. 첫 번째 장의 ‘깊은 밤을 지나 태어나다’가 원제목을 반영한다.

 

깊은 밤… 그리고 태어남… Tozer는 그리스도인 됨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됨은 단지 출발(시작)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이 시대의 어두움(깊은 밤)을 지적한다. 현대화 될 수 없는 구원의 방법, 그리고 복음… 그는 그 시대의 교회가 현대화 되는 것을 염려한다. 나 역시 이 시대 교회의 현대화를 염려한다. 하지만 염려와 반대와, 그가 말한 ‘방어적인 자세’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러면 어떻게? 대안? 비판하려면 대안을 말하라는 것 또한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나는 이 표현을 대학 다닐 때에 김진홍 목사의 책에서 읽었고, 그 당시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대안… 대신할 수 있는 방법! 해결책! 꼭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만 하는 걸까? 원래부터 있었던, 성경에 기록된 방법을 다시 제시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아,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싶다! Tozer가 지적하는 ‘Oh!’가 있는 신학의 무게 있는 외침을 다시금 듣고 싶다! 다시금… 깊은 밤을 지나, 통과하여, 새로이 태어나고 싶다!

 

*****(읽으며 메모한 것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내가 이와 같은 글을 쓰게 된 유일한 자격이라고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이 그의 피로써 사신 교회의 영적 싸움에 대한 서글픈 관심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좋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때때로 가치 없는 도구를 통해서도 값있게 일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돌려져야 할 것이다. 기타 이곳에서 발견되는 약점이 있다면 인간의 약점 때문이므로 그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3)

- 많이 보게 되는 ‘겉치레’의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왠지 Tozer가 하는 말이기에 ‘빈 말’로 들리지 않는다. 신앙에 관련된 글을 쓰는 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관심과 자격… 인기와 재물을 위해서 책을 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쓴 글/책이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돌려져야 할 것! 문제가 있다면 전적으로 저자의 약점으로 돌려져야 할 것!

 

2.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우시도록 요청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채우시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냉랭하고 그의 불운한 상태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축복스런 성령께서 만족시키는 충만함을 가지고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소원의 진공상태가 없는 것이다.”(8) - 요청이 아니라 허용이라고? 어떻게 허용한다는 것일까? 원하지 않으므로 요청하지 않는 것이요, 결국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일까? … 이와는 반대되는 기도자와 기도의 자세…

“종종 그의 영적 열망이 너무나 크고 중요한 나머지 그 열망들이 그의 생애에 있어 모든 다른 관심들을 떠밀어내는 일이 나타난다. 그와 같은 사람은, 매년 매월 지역 교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대표 기도를 하고 있지만, 그러한 차겁고 안일하며 의례적인 기도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 당황한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서로 알겠다는 듯이 쳐다보지만, 그는 소경이 책망을 받으면서도 더욱 외친 것처럼 더욱 더 외치게 되는 것이다.”(8) - 아!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3. “그러나 우리는 오래 기도하는 무리들이나 강하게 울고 부르짖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행위들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9) - 이 ‘그러나’가 중요하다! 자신의 논지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쪽 주장을 하고서는, 그것이 치우친 것이 될 새라 오해의 여지를 막기 위해 ‘그러나’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선하심은 가장 높은 기도이며, 그것은 우리의 가장 낮은 필요의 부분까지 내려오시는 것이다.”(10) -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실상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을 초월하며,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것의 효용과 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시는 이런 모든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들이 하나로 줄어들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욕망을 허락하실 수 없는 것이다.” (10) - 그 하나의 욕망이란… 부흥을 향한 욕망이다!

“부흥의 교리와 승리 생활의 교리를 배우는 것은 용이하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둡고 힘든, 스스로를 포기하는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가는 일은 전연 별개의 일이다. 여러 사람이 여기에 부름을 받으나 선택되어지는 자는 적다.”(10) - 이론 VS 실재, 그리고 실제

왜냐하면 약속된 땅으로 실제 건너가려는 많은 사람들은, 잠깐 동안 서서 갈망하는 눈으로 강을 바라보다가는 슬픈 듯이 되돌아서서 모래 위와 같은 옛 생활의 어느 정도 안전성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자가 많은 것이다.”(10) - 찬송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졸여서 못 가네”…

“늦게까지 앉아서 기도하는 데에는 공로가 없다. 그러나 일상적인 것을 지나 특별한 것으로 지나가려면 진정한 마음과 결심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같이 행하지 않는다. 이것을 밀고 나가는 자는 이러한 특별한 체험이 깊은 밤을 지나서야 도달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10) - 늦게까지 기도하는 것 자체가 공로와 자랑이 될 수는 없다.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의 진정과 결심의 표현일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사람만이 깊은 밤/어둔 밤을 지나 원하던, 약속된 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5.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영적 체험의 질(質)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 원인이 내적 증거의 교리를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한 예이다. … 복음적인 교사들의 계열에서도 증거(witness), 체험(experience), 감정(feeling)이라는 용어들이 의도적으로 회피되고 있는 실정이다.”(11) - 내가 비난 받는 것과 같은 태도일까? (내가는 가끔 너무 성경의 가르침만을 고수하고 영적인 체험을 무시한다고 비난받곤 하기에…) 하지만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믿음’과 관련하여 ‘논리 vs 내적 증거’를 비교하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다가 밤낮으로 측정기를 달아 놓고 분에 넘친 경건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리스도의 명분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11) - 밤낮으로 측정기를 달아 놓는 것은 지나친 일일 수 있지만,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 시대에는 ‘분에 넘친 경건주의자’가 너무 많기에 더더욱!!!

 

6. “우리가 진정으로 오순절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사도신경적 후손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 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영의 증거를 가진 자가 참 후손인 것이다.”(12) - Amen!

 

7. “그들은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 큰 능력과 큰 은혜가 그들의 생애를 특징지어 주게 되었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당하는 것이 즐겁도록 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비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하다. … 그들은 종교적인 감정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성경 자체가 증거를 담당한다’라든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사람은 그 자신 속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라는 성경 말씀을 교묘하게 둘러대며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내적 증거 대신에 본문으로부터 이끌어낸 논리적인 결론들로 대치시키고 있다. 질문실에서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와의 대화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당신은 주님이 당신을 받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를 원합니까?’ ‘예.’ ‘그래요, 그러면 이것을 읽으세요. 내게로 오는 자를 나는 결단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예.’ ‘ 자, 만일 그가 당신을 내어 쫓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내 생각으로는 그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멘. 자, 그가 지금 다신을 받아 들였습니다. 당신은 그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어리둥절하여 구하던 그 사람은 억지로 웃음을 띠게 강요되어지고, 그가 그리스도에게 개종케 되었노라고 증거하게 된다. 그는 정직하고 진정을 구했으나 잘못 인도되었던 것이다. 그는 영적 논리의 제물로 떨어진 것이다. 그와 같은 확신은 흔들리는 삼단논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증거도 없고, 즉시로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내적 변화의 앎도 없는 것이다.”(12-14) - 이것은 소위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영적 논리’의 허점을 명백하게 지적하는 부분이다.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성경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순전히 ‘논리’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 견해가 아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16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이 ‘논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토저가 지적하는 것은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가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8. “찰스 웨슬리가 쓴 승리적인 찬송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영은 피에 대답하시며,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탄생됨을 말하여 준다.’ 논리적인 결론으로 말해서, 구원받는 것을 나타내는 이와 같은 노래 구절은 분명히 이단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단적일지라도 나는 그와 같은 영광스런 이단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더욱 크게 사용하실 것이다.”(14) - 영광스런 이단!! 현 세대와 이 시대의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배치되는, 그래서 이단적이라고 모욕당하는 성경적인 가르침! 그것이 이단으로 불린다면 그것은 진정 영광스런 이단일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기꺼이 그 영광스런 이단에 참여할 것이다.

 

9. “첫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는 개종(conversion)이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 오늘날은 모든 것이 처음 믿는 행위에 의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주어진 순간에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게 되고 그 후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된다. … 우리들은 개심자들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열심히 인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믿는 행위를 취하기만 하면 그들은 그들의 모든 책임을 단번에 다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로 하여금 성경에서는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기괴스럽고 적용될 수도 없는 조직계통의 창시자가 되는 결과를 초래케 한다.”(15) - ‘믿게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지적한다. 믿음/구원은 시작일 뿐이다!

사도행전에서의 믿음이란 어떤 신자에게나 하나의 시작이었지 끝이 아니었다. 즉 시작하는 여행이었지 누워서 주님의 승리의 날을 기다리라는 침대가 아니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단번에 되어지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감명을 받고 그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어느 곳으로 주님이 가시든지 그를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마음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 생각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16) - ‘믿음’은 과정!!

“여기에서 우리는 개종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어려운 점들은 덜 나타내고, 마음의 평화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가 누릴 세상적 성공들만을 잘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되어 진다. 우리는 우리를 듣는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지금 알맞고, 존경할 만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정치적 거물들이나 성공적인 실업계의 거물이나 심지어는 헐리우드의 수영장 세트 등과 함께 대단히 인기 있게 되었음을 확신시켜야만 한다. 지옥에 가야 마땅할 죄인들이 이처럼 확신이 되어서,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accept)하려고 떼를 지어 나오는 것이다.”(17) - 현대 복음전도, 아니 ‘복음 세일즈’에 대한 신랄한 지적!! 무엇을 얻기 위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교회들…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종족의 일원으로서 중대한 혼란의 짓눌림 속에 빠져 있으며, 그들이 그곳에서 쉽사리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솔직한 진리를 말해주기 전까지는 우리들의 청중 앞에서 완전히 정직하게 설 수 없다. 그들이 만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대부분 분명코 멸망할 것이다.”(18) - ‘솔직한 진리’… 하지만 인기는 없는, 그리고 실제적인 결과도 가져오기 힘든… 하지만 전해야만 하는 유일한 진리! 멸망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천국행 기차를 탄 것처럼 속이는 장삿속…

“초기의 신자들은 그들에게 모든 희생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인기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충분하게 이해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섰었다. 그들은 그 순간부터는 그들의 생명과 자유가 위험스럽게 되어지는 미움 받는 소수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18) - 복음… 참된 복음… 성경에 기록되고, 초기의 참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따랐던 그 복음…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복음이 맞는가… 우리는 서로 속고 속이는 자들은 아닌가?

 

10. “유사한 기독교 기구 속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영접하는 자는 카드에 사인을 하여 주겠다고 초대하고 있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의 등잔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이 경우 죄인의 모든 의무는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이루어진다. 그 후에는 양동이를 들고 와서 세상이 제공하고 있는 모든 대등한 것들을 종교의 이름으로 받아서 최대한 즐기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 관한 이러한 개념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 이러한 시도는 언제나 인간과 그의 필요를 가지고 시작하여서 그 다음에 하나님을 향하여 주의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야망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인간을 찾으시고 있는 분인 것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먼저이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 있는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에 두었고 인간의 구원을 다음에 두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은 현재도 그렇고 영원토록 그리스도인들이 출발하는 진정한 지점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 무엇이건 그 이외의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은 분명코 신약 성서적 기독교신앙은 아닌 것이다.”(22-24) - 하나님이 먼저! 인간의 필요가 우선할 수 없음! 심지어 인간의 ‘구원’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 구원,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는 결국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동시대의 덴마크 사람들을 향하여 그 시대의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며,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외쳤던 것처럼…

 

11. “그 중에 가장 나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나약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모욕이 되는 것이다.”(28) - 고등학교 때 해롤드 쿠쉬너의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라는 책을 읽었었다. 유대교 랍비인 쿠쉬너는 자기 아들인 아론이 조로증(早老症, 빨리 늙는 병.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서 빨리 늙고 빨리 죽는다)에 걸린 것 때문에 고민하던 끝에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토저가 지적하는 ‘최고의 모욕’의 실예라고 할 수 있겠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현재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들인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 성경은 진리이지만 ‘모든’ 진리를 다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있지 않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요,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결론을 무리하게 주장하는 것 역시 쓸데없는 짓이다. 이러한 것들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제한적으로(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 때문에 모든 것을 철저하게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므로!) 알게 될 것이다.

 

12. “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불붙은 화염검을 그룹들에게 주어 그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게 되었을 때부터 재앙은 쌓이기 시작되었던 것이고, 인간 역사란 것도 결국 이 재앙의 발전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31) - 흠… 창세기 3:24에는 하나님께서 그룹들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셨다고 되어 있지, 그룹들에게 화염검을 주었다고 되어 있지 않다. 원문이나 다른 번역본들을 살펴보아도 토저의 설명을 지지해주는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화염검은 스스로 회전하는 성질의 것이었지, 그룹들의 손에 들려지는 일반적인 ‘검’이 아니다.

 

13. “우리는 마치 모든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가정하고 주저앉아 살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 위기 가운데서 사는 것에 대하여 마치 위기가 존재치 않는 것처럼 여기면서 살라고 주장하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는 것이 나에겐 언제나 어려운 과제인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섬긴다고 하나 내가 보기엔 그들은 세상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동시에 할애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계가 불타고 있는 동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압력을 가하게 되면 그들은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까지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고 이유를 대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인간타락을 실제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인지 의아심마저 갖는 것이다.”(32-33)

 

14. “나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말에 있어서는 긴데 행함에 있어서는 짧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능력 있는 언어는 사용하나 우리의 행위는 악한 행위인 것이다.

나는 시인 워즈워드가 실제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의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존재하지도 않는 신들을 믿는 진정한 이방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내포한 시를 쓴 것에 상당한 동감을 갖게 된다.

세상에서 말은 많이 하고 행하기는 아주 적게 하는 기관을 들라면 교회 말고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느 공장이고 원료가 되는 재료는 그렇게 많이 쓰면서 완공품을 그처럼 적게 낸다면 6개월이 못가서 파산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즉 미국의 어떤 마을에서 어느 주일날 드린 기도의 일퍼센트의 십분의 일만 응답되어도 하룻밤 사이에 마을이 변화될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수백만 마디의 말을 퍼부어 대지만 그 기도들이 응답이 되는지 어떤지를 결코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으며 만일 그 기도들이 응답받는다면 우리 자신이 오히려 실망하거나 당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너무 심한 이야기를 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 우리가 말들에 정착하는 까달은 행위들이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취하여 그것을 짊어지고 가기 보다는 ‘주여 내가 매일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34-36) - 날카로운 지적, 깊이 있는 생각, 정곡을 찌르는 표현, 우리의 실체를 숨김없이 그대로 다 드러내는 단호함… 이것이 내가 토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다.

 

15. “하나님의 양들이 위험 속에 처할 때에 목자가 별들만 바라다보며 ‘영감적인’ 주제들이나 묵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목자는 무기를 움켜쥐고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42) - 실제적인! 그러나 ‘실용적’이지 않은! 우리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그에 대응하는 부분에 있어서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16. “어떤 이는 마귀를 통째로 등한시 하는 극단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며, 어떤 이는 마귀를 너무 심하게 여기는 경향을 취하는 사람이 있다.”(43-44) - C. S. 루이스가 그의 [스크류테이프의 편지]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 이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마귀를 처음으로 보고 계시록 20장에서 마귀를 마지막으로 본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마귀는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지상에서의 끝날까지 마귀가 있을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가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존재는 못되나(omnipesence는 하나님만의 속성이므로) 마귀도 여러 곳에서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인데(ubiquitous), 그가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한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omnipresence와 거의 같은 효과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 유비쿼터스라는 단어를 여기서 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지만 토저가 말하는 마귀는 유비쿼터스 능력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쉽다.

 

17. “진리와 사교(미신) 사이에는 겨우 머리칼 하나같은 차이밖에 없는 것이다.”(45)

 

18. “성경적인 방법이 있다. 즉, 그것은 우리 앞에 언제든지 주님을 놓는 것이고, 우리의 비전의 중심에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사탄이 숨어 들어오게 되는 경우에는, 사탄은 오직 여백이 있을 경우에만 나타나게 되는데 밝은 빛의 끝에서 그림자와 같은 모습으로만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거꾸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즉 사탄을 우리의 비전의 중심에다 놓고 하나님은 가장자리 끝에다 두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46) - 그 무엇도 하나님의 우선권과 중심되심을 흩트려 놓을 수 없다. 사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원수를 내쫓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들어오시게 하는 방법이다. 양들은 이리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양들은 목자 곁에 가까이만 머물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탄이 무서워하는 것은 기도하고 있는 양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46) - 흔히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마치 돌을 줍는 시늉을 하면 개가 도망가듯이, 성도가 무릎을 꿇으면 사탄이 도망간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토저는 명백하게 말한다. 사탄이 우리의 기도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기도는 사실상…

 

19. “이단들은 우리의 생각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에 우리는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두 가지 입장이 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생각은 우리 자신을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예측하여 주는 것이다.”(48) - 긍정적 사고, 적극적 사고, 긍정의 힘… 등을 주장하는 것은, 토저에 의하면 ‘이단’이라고 할만한 행위이다. 우리의 말에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전혀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요, 그것을 정도 이상의 힘을 가진 것처럼 가르치는 것도 잘못이다.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처음부터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예로 들면서 우리의 말도 그런 능력을 가진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잘못되었다.

 

20. “진정한 위대함은 성품 속에 있는 것이지 능력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계셨고 우리들은 몰랐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내려가도록 마드신 곳에서 우리들은 기어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다.”(54, 56)

 

21.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자일수록 신문 보도자는 그에 관하여 더욱 찾을 거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가 그의 동료들의 존경을 귀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얼마 동안은 그들이 싫어하는 그늘 속에 억지로 가리우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바쁜 세상을 그가 그 곳에 있다고 하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60-61) - 참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가!!

 

22. “이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판단되어진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취하려는 언덕에 얼마나 기어 올라갔는가의 거리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 바닥에 있으면 완전한 실패자이다. 꼭대기에 있으면 완전한 성공자이다.”(62) - 이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다.

“우리가 창조되어진 목표를 성취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그러나 죄가 이것을 뒤틀어 놓았다. 그리고 이것이 첫째 진리와 최고의 영예자가 되고자 하는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가득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와 같은 탐욕 때문에 전 세계가 마치 귀신과 같이 질주하고 있으며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어지게 되었다.”(63) - 뒤틀어진 욕망, 야망…

“우리 주님은 분명 실패자로서 죽으셨다. … 그럼에도 소위 고백하는 교회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고 있으며 사람이 판단하고 있는 방법을 따라 판단하고 있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모든 것에서 돌아서야만 한다. 특히 복음의 사역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마음들을 살펴봐야 하고 그들 내면 속 깊은 곳에서의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그 어떤 사람도 기꺼이 실패자가 되기를 원하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성공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자기의 성공의 영광이, 만일 하나님이 바라신다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기를 원하게 되기 저까지는 종교적인 활동에서 도덕적으로 성공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64) - 기꺼이… 실패자가 되기를 원하는 상태…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성공시키는 것은 그 종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지점까지 훈련시키셨을 때에는 그 종에게 성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종이 성공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운 존재도 아니고 전체적으로 볼 때 더욱 가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사람ㅇ게 성공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실패자가 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실패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65) - 세상의 가치 기준, 평가 기준과는 정 반대 되는…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읽으며 Amen!할 수밖에 없다.

 

23. “종교적인 교훈은 그것이 아무리 건전하다고 하여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빛을 가지고 올 수 있으나, 시력을 나누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비춰주심이 없는 말씀만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가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지만, 종종 보게 되면 구원이 없는 진리가 있을 수는 있는 것이다.(67) - 말씀과 성령!

 

24.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에야말로 보통 일상적인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75) - 일상의 영성?

 

25. “그 어떤 헌물이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드려지게 된다면 하나님이 너무 작다고 하실 헌물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무엇이건 예수님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보다 더 크게 나타나 보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살 수는 있을 것이며, 때로는 이것이 더욱 영웅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더 큰 상급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78)

 

26.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질서를 반대로 하고 있으나, 아직도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일처리를 옛날 아담의 통치방식대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큰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얼마나 여러 가지인가?’ 등등이 기독교 일들을 평가하려 할 때 묻는 질문들이다. … 그러나 영의 세계 속에서는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인간들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늘의 맛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맛이 있고, 우리의 심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 아니고 아담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으나 부끄럽게도 이방 철학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영혼 하나가 하나님께 있어서는 별이 총총한 우주보다도 더욱 귀하다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천문학은 공간과 물질과 운동을 다룬다. 반명 신학은 생명과 개성과 존재의 신비를 취급한다.”(80-82) - 영적인 생각… 그것을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것은 ‘얼마나 큰가, 많은가, 여러 가지인가?’하는 것과는 반대라는 것이다!

 

2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죄를 제거하는 것이며, 우리의 죄를 새롭게 정제(精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날카롭게 주목해야만 한다.”(87)

 

28. “신학에는 오(Oh)가 없다. 이것이 불길한 것은 아니라 해도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특색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려진 것을 지적인 용어로 표현하려는 것인데,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표현할 말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지성 앞에서 놀랍고 광대하고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실 때에는 지성은 침묵에 빠지고 심령은 ‘오, 주 하나님이시여!’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신학적 지식과 영적 체험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상속되어 내려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친숙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용어상의 차이 정도가 아니다. 그 차이는 실제적이고 중요하고 때로는 치명적이다.”(94) - 토저는 상속되어 내려오는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학적 지식과, 친숙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영적 체험을 대조시키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분명 신학은 ‘이성’을 주된 도구로 사용하고, 영적 체험은 ‘경험’을 주된 도구로 사용하기에 차이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어떠한 찬탄이나 Oh!라는 외침이 없다고 하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영적 체험은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해서도 안 된다. 둘은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에도 ‘Oh!’가 있어야 한다! 있다! 칼빈의 저작을 보라! 박윤선 주석을 보라! 이성적인 추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친숙한 관계와 그로 말미암은 찬탄이 거기 드러나 있지 않은가! 이런 신학을 하고 싶다! Oh!가 있는 신학!

 

29. “문제 자체는 새것이 없고, 문제 자체는 그 어느 것도 현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가 진리의 성령 안에서 깊이 밝혀지지 않는 한 시간이 경과하는 것 자체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육적인가 하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 그러면 도대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갖는 관계,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우선권을 갖는 것이다. …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한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는 결단코 현대화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96-99) - 현대화… 새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진리’가 문제다.

 

30. “상상력도 축복이 될 수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와 그것이 얼마나 잘 훈련되어있느냐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다. … 상상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부정할 수도 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imagination’과 ‘imaginary’라는 단어를 잘못 혼동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상상적인(imaginary)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실제적인 책이 바로 성서이다. … 종교의 영역에서 상상력이 깨끗하게 된 값어치는 자연적인 물질들 속에서 그 물건들의 그림자인 영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100-103) - 허구로서의 상상과 현상 뒤에 숨어있는 실제를 파악해 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 한편 이러한 구분은 김지찬 교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에서 말하는 allegory와 allegorazation의 구분과 비슷하다.

 

31.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의 아들이다. 그는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 살며, 그들로부터 그들이 전에 얻었던 개념을 받고 있으며 아담 때부터 계속해서 타락한 생(生)의 소견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나 그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면 새 왕국을 이루고 있는 법칙들과 원칙들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게 된다. 거란 그가 받아온 사고방식과 훈련은 옛날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대단히 지혜롭고 기도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세상의 방식을 따라 하늘의 생애를 살아보려고 노력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육적 생활이라고 불렀던 것이다.”(105) - 세상의 방식으로 영적인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 처음부터 생소한 영적인 내용을 알아차리기는 힘들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 새것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새것에는 새것에 따르는 원리가 있음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옛것과 그 원리도 벗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32. “인간의 활동영역 중에서 아마 종교 활동의 영역처럼 낭비되고 허비되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의 한 시간, 기도모임에서의 한 시간이 그냥 다 낭비될 수 있는 것이다. … 어떤 이는 평생 동안 교회를 참석하고 있으나, 그것 이상 조금도 더 나아지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 보통 교회에서 보면 해가 바뀌어도 매주일 똑 같은 기도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듣게 되는데, 어떤 이는 그것들이 응답될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 앞으로 나가지 않고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속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너무나 많다. 그것은 단순히 말해서 낭비하는 운동인 것이다. … 이와 같은 비참한 낭비 뒤에는 대개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잘 모르고 있든지, 믿지 않고 있든지, 불순종하고 있는지 어느 한 가지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잘못 교훈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그저 겨우 반 밖에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이렇게 하여 급히 왕국으로 들어오게 된 후에는 더 이상 말하여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못한 것이다. 새로 회심하게 된 자는 망치가 있고 잘라내는 톱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알면서도 청사진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무엇을 지어나가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막연한 생각조차도 못하고서, 그저 매주일마나 나와서는 자기의 연장을 갈아놓고 집에 돌아가서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어두는 식의 옛날 늘 하는 식의 신앙생활을 살기 시작한다.”(108-110)

 

3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물건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따라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진짜 보화로는 여기지 말아야 한다. … 보화란 다음과 같은 4가지 4중 시험에 따라 발견될 수 있다. ①그것은 우리가 가장 가치를 두고 있는 것, ②그것은 우리들이 잃어버리기를 가장 싫어하는 것, ③그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할 때마다 가장 많이, 여러 차례 우리의 생각이 향하는 것, ④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이다.”(114) - 보화… 또는 우상!! 그것을 밝혀내는 구체적인 4가지 기준!

 

34. “어떤 이든지 혼자 살기에 충분할 만큼 현명하거나 선하거나 강한 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광범위하게 우리가 서로 의존하게 만드셨다. … 하나님 자신 다음으로 우리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122)

 

35. “하나님 안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깨어지지 않은 현재만 있을 뿐이다.”(123)

 

36. “우리들은 새로운 개종자들에게 우리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야기를 통하여, 모범을 통하여, 심리상태를 통하여, ‘주님을 위하여 일하러 가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을 통하여 섬김을 받으시려 하심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등한히 하고서, 마치 하나님께서 노동자들이나 모으시는 것처럼 ‘봉사’하도록 몰아대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주된 것은 틀림없이 경배하는 편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만하고 복음에 내포된 실천들을 등한히 여길 위험성은 적은 것이다. 누구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봉사에 대한 의무를 금방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되면 즉시로 순종과 선한 일로 인도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순서다. 이것은 결코 거꾸로 뒤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134-135)

 

37. “우리를 형성하는 몇 가지 능력들을 살펴보자. ①친구들-우리는 다 우리들의 동반자에 의해서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다. ②문학-우리가 무엇을 즐겨서 읽느냐에 따라서 끝에 무엇이 되어질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③음악-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거절할 수 없는 신비스런 끌림이 음악 속에는 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 주게 되고 또한 도덕적이건 비도덕적이건 어떤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예비해 준다. ④즐거움-인간의 구조는 어느 정도는 즐거움을 필요로 하도록 구조가 되어 있다. ⑤야망들-세계의 위대한 사도들은 모두 다 야심적이었다. ⑥사고-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일상적인 생각 속에 엄청난 능력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137-139)

 

38. “당신 자신에 관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당신이 의사에게 가는 것은 위로를 받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발견하고 그에 관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짓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151-152) -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의사를 대하는 태도와 같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