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 토저 신앙인물 시리즈
제임스 스나이더 지음, 심민호 옮김 / 두란노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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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이 책의 분량이 적은 것이 아쉽다! 지금의 3배쯤 되어도 지루한 줄 모르고 읽을 터인데...

* 나 자신을 Tozer로 푹 적시고 싶다!! Tozer는 신비주의자들의 정신을 호흡했고 그들의 지지를 의지했다(160p). 나는 Tozer의 정신을 호흡하고 그의 지지를 의지한다!

* 그에 대한 글, 그의 글들을 읽어가면서 어느 새 내 눈은 눈물을 머금고 있다. 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여! 나 역시 그러한 사람이고 싶고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

*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나는 또 다른 토저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169p). 나 역시 두려워한다! 이 시대에 Tozer와 같은 이를 다시금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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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같은 Tozer의 글, 또는 Tozer에 대한 글을 몇 개 인용해본다.(보라색은 나의 note)

1. 해외 선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으며 대화의 그럴듯한 주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 뛰어들어 보면 극히 단조롭고 현실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순교를 주제로 하는 폭스의 저서는 독자에게 흥분과 긴장감을 일으켜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실제 주인공들은 자신의 죽음에 관해 결코 즐거워할 수 없었을 것이다.(34p) - 환상을 버리고 실제적이 되라!

 2. 제게 볼 줄 아는 지혜와 보는 것을 성실하게 알릴 용기를 주옵소서. 제 음성을 아버지 음성과 같게 하셔서 병든 양들이 그것을 알아듣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63p) - 제게도!!

3. 무엇보다도 토저를 구별 짓게 했던 것은 그가 읽은 것에서 얻은 지식을 신속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능력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읽는 것의 열 배를 생각하라.”(73p).

4. 엄숙한 주제를 그렇게 경박한 방식(마음을 찢으라=>셔츠를 찢지 말라)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이다.(85p)

5. 그는 경박함이나 하나님의 진리를 감미롭게만 만드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경계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보다 더 엄위하고 불변하고 경탄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는 깊이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90p) - 이 시대의 경향에 대한 정확한 지적!

6. 다른 이들은 영명한 개요와 세심한 언어 연구를 늘어놓는 반면 토저는 청중을 곧장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끌어 갔다. 그것이 그의 설교의 목표이자 목적이었다.(108p) - 나의 설교도 그러하기를!

7. 그의 설교 준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도였고 따라서 그의 설교는 기도에 흠씬 젖어 있었다. 결국 그가 기도에서 발견한 것들이 선포되는 것이다.(109p) - 반드시 적용할 것!!!

8. 만일 우리가 좀 더 폭넓게 그 잘못들을 다룬다면 우리는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고도 그 오류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116p) -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다루는 매우 지혜롭고도 중요한 방식!

9. 쓰여져야 할 유일한 책은 마음에서부터 솟아나는 내적 압력에 의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책이오. 만일 당신이 반드시 써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 책이라면 당신은 쓰지 말아야 할 것이오.(126p) - 저술에 대한 확고한 지침!

10. 오늘날의 유행은 용납할 줄 모른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참는 것이다. 관대한 성자들은 오류와 죄악들을 용납함으로써 오히려 장기간 교회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행해진다.(132p) - 용납과 사랑에 한계선을 긋는!

11. 나는 내 시대에서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네.(152p)

12. 당신은 대쪽처럼 신학적으로 곧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대쪽처럼 속이 비었을 수도 있다.(163p) - 대쪽같이 곧음만이 다는 아니다!

13. 나는 특별히 기름 부음을 받고 오늘날의 필요를 위한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게 될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시대적 요청을 믿는다. 이 사람들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조용한 확신으로 말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그들 세대의 선지자들이다.(164p) - 이 시대의 선지자들을 일으키소서!

14. 우리는 성령을 더욱 소유하려고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그가 우리를 더욱 소유하시도록 확실히 할 뿐이다. 그가 우리의 전부를 취하실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전부를 가질 수 있다.(166p)

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기독교 신앙이 우리 자신의 죄를 제거함 없이 단지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님을 예리하게 인지해야 한다.(178p) - 개선이 아닌 제거!

16. 저술은 장점이 과대하게 묘사되고 결점이 감추어졌을 때 거짓으로 전락한다.(186p)

17. 토저는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깊이 생각하고, 일단 자신의 결론에 이르면 자기 생각대로 할 것을 고집했다.(214p) - 그것이 정말 고집일까?

18. 과거의 영적 거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쉬운 길로 취하지 않았고 값을 치르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거룩함으로 편안함을 찾지도 않았다. 우리는 오늘날 훨씬 부드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큰 슬픔이다. 왜냐하면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이미 숙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227p) - 넓고 쉬운 길...

19. 나는 진리에 이르는 길로 쉬운 본문 성경과 부지런히 바닥에 두 무릎을 꿇는 연습을 추천하다. 너무 많은 각주를 조심하라. 이스라엘 랍비들은 영감 어린 본문에 지나치게 많은 주해를 첨부시켰다. 그 결과 엄청난 교리가 생겨났고 이것은 마침내 성경 자체를 밀어내 버리고 말았다.(236p) -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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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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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들 읽히려고 산 책인데, 오히려 내가 푹 빠져서 읽었다. 재미 삼아 조금씩 나누어 읽으면서 2/3 정도를 읽다가, 바쁜 일이 있어서 한 동안 읽지 못하다가 오늘 나머지 부분을 다 읽어버렸다.

2. 한 마디로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현대 철학과 빅뱅 이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서양 철학의 흐름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서양철학사’를 다룬 철학 책들과는 달리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특별히 ‘추리 소설’과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긴장감’을 느끼게 만든다. 저자가 시대별로 소개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부분도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았지만, 저자가 설정한 ‘미스테리’한 부분들도 계속 흥미를 끌어서 이야기의 진행이 어떻게 갈 것인가 궁금한 마음을 갖고서 계속 읽게 한다. 특별히 중반에 접어들면서 ‘힐데’가 등장하는 부분부터는 정신이 어질어질 할 정도로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감수자의 말처럼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몇몇 철학적인 내용에서는 생각을 달리 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그것은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찾아보기 힘든, 드문 수작(秀作)이다!

3. 이야기를 진행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복습하고 반복하는 내용들이 나오고, 한 철학자의 사상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많이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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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와 떠도는 사원
김용규.김성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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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1과 중2인 두 딸에게 읽히려고 산 책이다. 아이들 주기 전에 먼저 읽어 보았는데, 상당히 재미가 있어서 하루 만에 다 읽어치웠다.  아이들에게 읽히기에는 무난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2. ‘철학 판타지’라는 부제처럼, ‘판타지’의 형식을 빌어 ‘철학적인 개념’들과 심지어는 ‘첨단 과학’과 관련된 내용들까지도 다루고 있다. 이 책이 처음 발행된 시기(2001년)를 감안한다면 생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새로운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어서 신선하고 놀랍기도 하다.

3. 하지만 ‘소설’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재미는 좀 떨어진다고 하겠다. [소피의 세계]와 같은 책과 비교한다면... 조금 ‘단선적(單線的)’이라고 할까... ‘철학 이야기’로서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지만, ‘판타지 소설’로서는 전체적인 구성이 빈약하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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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로마서 - 로마서 전후의 비하인드 스토리
진 에드워즈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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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는 책의 페이지를 나타냄.

1. [이야기 로마서]는 [이야기 갈라디아서]에 이어지는 내용인 듯 한데, 실제로는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에서의 ‘폭동’에서 시작된다. 프롤로그에서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만난 사건이 잠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 중간의 내용이 다른 책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기본적인 형식은 [이야기 갈라디아서]와 같지만 전체적인 내용이나 수준은 [이야기 갈라디아서]보다 못한 것 같다.

2. 초반부의 이야기 흐름은 [이야기 갈라디아서]와는 달리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야기 갈라디아서]의 경우 ‘사도행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내용을 따라가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이야기 로마서]의 경우에는 사도행전 뿐 아니라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내용까지 이야기 흐름에 섞어 놓았기 때문에, 사건의 전개를 이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제시되는 내용들의 근거 구절들을 중간 중간에 제시해 주었다면, 사건의 진행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3. [이야기 갈라디아서]에서 나왔던 것과 동일한 혼동이 계속된다. ‘야고보’를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를 ‘사도’로 부르고 있으며, 이번에는 ‘열둘’ 중에서 야고보만 남았다(7)고 말한다. 하지만 이 야고보는 사도가 아니며, 열두 사도와는 무관하다.

4. 저자는 에베소 폭동 때에 디모데가 그곳에 있었다고 소개하는데(15), 사도행전 19:22은 이 폭동 직전 상황을 소개하면서 디모데는 에라스도와 함께 마게도냐에 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기록한다(행 19:23).

5. 저자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블라스티니우스’([이야기 갈라디아서]에서부터 등장하는 가상의 바울 대적자)라고 소개한다(240). 소설 형식이기에 ‘가상 인물’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육체의 가시’에 대한 다른 여러 해석들이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조금 아쉽다. 적어도 각주 형태로라도 다른 해석들을 소개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6. 저자는 [이야기 갈라디아서]에서는 디도가 누가의 ‘형제’였다고 소개했고, [이야기 로마서]에서는 디도가 누가의 ‘조카’였다고 소개한다(94). 그러면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디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은 누가가 디도를 좋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은 확실히 뭐라 할 수 없지만, 두 사람을 인척 관계로 소개하는 것은 어디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런 부분도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7. 저자는 이방인 교회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의 이유를 이방인 교회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예루살렘 교회를 감동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한다(95).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신학적 이유도 있다. 예를 들어, 신학자들은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학개서 2:7의 내용을 이방인 교회와 연결시켜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이방인 교회를 인정시키려는 의도를 바울이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부분도 함께 소개되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 브리스길라가 바울이 쓴 로마서를 읽는 장면에서, 저자는 여러 번에 걸쳐 ‘교회’에게 보내진 편지를 ‘개인’에게 보낸 편지처럼 읽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는데(153, 160) 이는 전적으로 옳고 필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읽는 것에서 보다 더 ‘공동체적’으로 읽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9. 저자는 ‘젤롯’(열심당)을 새로운 분파라고 소개하는데(205)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열심당의 역사는 꽤 오래 되었다. 구약의 비느하스에서 비롯하여, 가까이는 신구약 중간 시대의 맛다디아를 중심으로 한 전쟁에서도 ‘열심당’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10. 저자는 몇 가지 유익한 새로운 사실/정보를 제공한다.

1) 다소에 대한 표현 가운데 ‘초라하지 않은 도시’라는 것에 대한 내용(219): 이 표현은 한 세기 전에 유리피데스가 사용한 것으로서, 매우 박식한 사람만 아는 표현이었다. 루시아는 이 표현을 알고 있었고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놀랐다.

2) 바울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서원한 것에 대한 내용(230): 이것은 ‘사흘’ 이내에 바울을 죽여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3) 가이사에게 항소한다는 것의 의미 가운데 한 가지(241): 가이사에게 항소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는데, 왜냐하면 가이사 앞에 설 날을 기다리면서 로마 감옥에서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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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갈라디아서
진 에드워즈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괄호는 책의 페이지를 나타냄.

1. [이야기 사도행전]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야기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13:3까지만을 다루고 있고, [이야기 갈라디아서]는 사도행전 13:4부터 16:5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 사도행전]은 ‘이야기’체이면서 ‘설명’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소설’ 형식을 띄고 있다. 그래서 ‘설명’ 형식보다는 비판의 여지가 많이 줄었다. 한편, 내용에는 ‘작가적 상상력’이 더 많이 나타나고, 그 가운데는 ‘상상력’에 불과한 내용도 있다. 그러나 현재 번역된 [이야기 ~] 시리즈 세 권 가운데서 가장 잘된 책이라고 생각된다.

2. 바울이 구브로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의 이름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다는 내용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바울이 처음부터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과 로마식 이름인 ‘바울’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한편, 바울(Paulus)이라는 라틴어는 ‘작다’는 뜻이 있지만, ‘사울’이라는 히브리어에는 ‘크다’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묻다, 요청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이다.

3. 저자는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 ‘두 사도’라는 표현을 쓰면서 작은 글씨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이야기 사도행전]에서는 그런 배려 없이 바울과 바나바가 ‘사도로 임명’되었다고만 말했었는데, 이런 사소한 변화는 아마도 ‘사도권’에 대한 저자의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즉, 비록 성경 본문에 딱 한 번 이들을 ‘사도’로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12사도를 가리키는 특수한 의미가 아니라 ‘파송/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인식...

4. 이들의 여행 과정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바울의 선교여행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을까 하는 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매우 유익했다.

5. 예배에 있어서 ‘회중의 참여’를 이야기한 것은(118) 너무 ‘현대적’인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6. 감동으로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고 눈물이 핑 돌게 하는 몇몇 부분들이 있었다.

1)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장면, 늙은 노예와의 대화, 새 교회의 형성, 빈곤한 중에 제공된 음식... 등에 대한 묘사는 감동적이었다.
2) 안디옥 사건(파티장에서)에 대한 묘사(226 이하) 역시 매우 감동적이었다!!
3)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 환영 장면(320) 역시 감동적이다!

7. 바나바를 ‘견습생’으로 묘사한 것(145)은 [이야기 사도행전]에서 처음부터 바나바의 직업이 바울과 같았다고 묘사한 것과 비교된다. 저자는 203페이지에서도 바나바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저자는 [이야기 사도행전]에서 처음부터 바나바가 가죽일을 했다고 이야기한 것을 여기에서 수정하는 듯 한데, 이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8. 바울이 돌에 맞은 사건(182)을 보는 시각은 한 가지가 아니다. 저자는 바울이 단순히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본문(14:17)은 돌로 치는 일과 관련하여 비록 ‘무리를 초인’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유대인의 주도 아래 행해졌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이 돌로 치는 경우, 저자가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며, 확실하게 죽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끝난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라! 아마도 저자는 바울이 ‘다시 살아났다’(나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는 것에 근거하여 바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절했는데 죽은 것으로 오해 받은 것처럼 말한다. 유대인들이 돌로 칠 경우, 기절한 것을 죽은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9. 더베가 안티파테르의 출생지라는 저자의 소개는 불충분해 보인다. 저자는 안티파테르와 관련하여 ‘케사르의 친구’라고만 소개했는데(186), 이 안티파테르가 유대를 다스리던 분봉왕인 헤롯 가문의 창시자인 ‘헤롯 안티파테르’라는 점을 설명해 주었다면 좀 더 도움이 되었을 듯 하다.

10. 예루살렘의 야고보를 ‘예수님의 형제’라고 하면서도 계속 ‘사도 야고보’라고 부르는데(219 이하), 이는 매우 혼동을 가져올 수 있는 표현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였지만 ‘사도’는 아니었다. 사도 야고보는 초기에 이미 순교했다(행 12:2). 그럼에도 저자는 계속해서 12명의 사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251), 성경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면서 동시에 사도였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11. 저자는 디도를 누가의 형제로 소개하는데(240) 이것은 처음 듣는 주장이다.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한편, 저자는 [이야기 로마서]에서는 다시 디도가 누가의 조카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12. 저자는 [이야기 사도행전]에 이어서 계속해서 베드로가 글을 모른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264). 그렇게 단정 지을 근거는 없다.

13. 저자는 바나바가 바울과 헤어진 이후의 행적과 관련하여, 그가 바울의 요청으로 고린도에서 사역했다고 주장한다(289). 하지만 이것이 어디에 근거한 주장인지 알 수가 없다.

14. 디모데를 데려가는 바울의 행동에 대한 설명(315)은 상당히 통찰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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