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갈라디아서
진 에드워즈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괄호는 책의 페이지를 나타냄.

1. [이야기 사도행전]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야기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13:3까지만을 다루고 있고, [이야기 갈라디아서]는 사도행전 13:4부터 16:5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 사도행전]은 ‘이야기’체이면서 ‘설명’식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소설’ 형식을 띄고 있다. 그래서 ‘설명’ 형식보다는 비판의 여지가 많이 줄었다. 한편, 내용에는 ‘작가적 상상력’이 더 많이 나타나고, 그 가운데는 ‘상상력’에 불과한 내용도 있다. 그러나 현재 번역된 [이야기 ~] 시리즈 세 권 가운데서 가장 잘된 책이라고 생각된다.

2. 바울이 구브로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의 이름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다는 내용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바울이 처음부터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과 로마식 이름인 ‘바울’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한편, 바울(Paulus)이라는 라틴어는 ‘작다’는 뜻이 있지만, ‘사울’이라는 히브리어에는 ‘크다’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묻다, 요청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이다.

3. 저자는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 ‘두 사도’라는 표현을 쓰면서 작은 글씨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이야기 사도행전]에서는 그런 배려 없이 바울과 바나바가 ‘사도로 임명’되었다고만 말했었는데, 이런 사소한 변화는 아마도 ‘사도권’에 대한 저자의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즉, 비록 성경 본문에 딱 한 번 이들을 ‘사도’로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12사도를 가리키는 특수한 의미가 아니라 ‘파송/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인식...

4. 이들의 여행 과정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바울의 선교여행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을까 하는 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매우 유익했다.

5. 예배에 있어서 ‘회중의 참여’를 이야기한 것은(118) 너무 ‘현대적’인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6. 감동으로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고 눈물이 핑 돌게 하는 몇몇 부분들이 있었다.

1)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장면, 늙은 노예와의 대화, 새 교회의 형성, 빈곤한 중에 제공된 음식... 등에 대한 묘사는 감동적이었다.
2) 안디옥 사건(파티장에서)에 대한 묘사(226 이하) 역시 매우 감동적이었다!!
3)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바울 환영 장면(320) 역시 감동적이다!

7. 바나바를 ‘견습생’으로 묘사한 것(145)은 [이야기 사도행전]에서 처음부터 바나바의 직업이 바울과 같았다고 묘사한 것과 비교된다. 저자는 203페이지에서도 바나바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저자는 [이야기 사도행전]에서 처음부터 바나바가 가죽일을 했다고 이야기한 것을 여기에서 수정하는 듯 한데, 이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8. 바울이 돌에 맞은 사건(182)을 보는 시각은 한 가지가 아니다. 저자는 바울이 단순히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본문(14:17)은 돌로 치는 일과 관련하여 비록 ‘무리를 초인’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유대인의 주도 아래 행해졌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이 돌로 치는 경우, 저자가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며, 확실하게 죽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끝난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라! 아마도 저자는 바울이 ‘다시 살아났다’(나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는 것에 근거하여 바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기절했는데 죽은 것으로 오해 받은 것처럼 말한다. 유대인들이 돌로 칠 경우, 기절한 것을 죽은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9. 더베가 안티파테르의 출생지라는 저자의 소개는 불충분해 보인다. 저자는 안티파테르와 관련하여 ‘케사르의 친구’라고만 소개했는데(186), 이 안티파테르가 유대를 다스리던 분봉왕인 헤롯 가문의 창시자인 ‘헤롯 안티파테르’라는 점을 설명해 주었다면 좀 더 도움이 되었을 듯 하다.

10. 예루살렘의 야고보를 ‘예수님의 형제’라고 하면서도 계속 ‘사도 야고보’라고 부르는데(219 이하), 이는 매우 혼동을 가져올 수 있는 표현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였지만 ‘사도’는 아니었다. 사도 야고보는 초기에 이미 순교했다(행 12:2). 그럼에도 저자는 계속해서 12명의 사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251), 성경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이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면서 동시에 사도였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11. 저자는 디도를 누가의 형제로 소개하는데(240) 이것은 처음 듣는 주장이다.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한편, 저자는 [이야기 로마서]에서는 다시 디도가 누가의 조카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12. 저자는 [이야기 사도행전]에 이어서 계속해서 베드로가 글을 모른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264). 그렇게 단정 지을 근거는 없다.

13. 저자는 바나바가 바울과 헤어진 이후의 행적과 관련하여, 그가 바울의 요청으로 고린도에서 사역했다고 주장한다(289). 하지만 이것이 어디에 근거한 주장인지 알 수가 없다.

14. 디모데를 데려가는 바울의 행동에 대한 설명(315)은 상당히 통찰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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