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김일권 지음 / 사계절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2008년은 ‘세계 천문의 해’다. 갈릴레오가 천체 망원경을 사용해 우주를 관측한지 400년이 지난 올해에 UN은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400년 전 인간은 하늘을 볼 때 망원경이라는 도구를 이용하게 되어 자연의 신비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망원경이 발명되기 이전에도 오랫동안 하늘의 천체를 관찰해 왔다. 그냥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가지고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리 오랜 세월 하늘과 그곳에 있는 천체를 관찰했을까.

중국의 저명한 과학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장샤오위엔의 <별과 우주의 문화사>에 보면 <역경,易經>에 표현된 천문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천문이란 하늘의 무늬를 뜻하고, 인문이란 사람의 무늬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늘의 무늬를 보고는 먼저 전쟁의 승부나 농업의 풍흉에 대해서 판단했고, 수해나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 제왕의 안위 등 군사적 분야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었다. 즉 중국에서 천문학이란 제왕을 위한 학문이었다. 동양 최초의 역사서인 <사기>를 쓴 사마천은 태사령이었다. 태사령은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이었다. 이렇듯 하늘을 관측하는 직업은 동양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생겨났다. 그만큼 왕조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천문학은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중국과 같은 의미로 고대이래로 천문학을 중요시했다. 삼국사기 본기에 보면 수많은 천문현상이 일어났음을 적고 있다. 즉 삼국시대에도 별을 관측했다는 증거이다. 그 증거가 글자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으로도 남아 후대에 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 책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사계절.2008년)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는 별자리를 보고, 이를 해석하여 그 고구려인의 세계관과 사상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무덤 속에 별자리를 그린다는 생각은 진시황 때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시황의 무덤 천장에 천문을 그렸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실제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벽화의 별자리 그림은 오히려 고구려에 와서 꽃을 피웠다.

 

진파리 4호분(590년) 벽화는 고구려 별자리 그림에서도 백미에 속한다고 한다. “다른 벽화무덤이 벽면을 따라 방위별 천문도를 그린 것인데 비해 이 무덤은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라 하여 전체 하늘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별자리를 한 장의 천정 판석에 그렸다.”(35쪽)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특히 천문도 중앙에는 북극성좌와 북두칠성을 그렸으며. 둘레에는 동양의 별자리를 상징하는 28수를 둥근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중국의 경우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천문기술이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하지만, 이런 증거는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이를 우리가 더욱 발전시켰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고구려의 천문기술이 중국보다 빨랐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고구려 전체의 고분 중 벽화가 그려진 것은 총 107개이다. 이중에서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고분은 총 25기에 달한다. 이는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기의 중국의 경우는 16기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 고구려의 천문학이 오히려 중국보다 우월했을 수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고구려의 별자리 그림에서 특이한 점은 “별자리와 함께 신화적인 도상이 발달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와 직녀상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또 천왕지신총의 서수(瑞獸, 상서로운 짐승)그림은 도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집안지역의 오회분 4호묘에서는 사신도에 더하여 중앙 천장부에 황룡도까지 그려 넣었다. 그래서 오신도 벽화가 되었는데, 중앙에 황룡을 그렸다는 것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오신도는 중국의 벽화묘에는 없는 양식이다. 이는 고구려적 고유성이 반영된 문화양식으로 판단하고 있다.

 

고구려의 천문 연구 전통은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의 벽화무덤은 총 22기이고, 그중 17기에 천문도가 그려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조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조선에서는 천상열차분야지도만이 고구려의 별자리에 대한 기억으로 남겨졌을 뿐이다. 고구려의 천문도는 일본으로도 전해졌다. 1998년 발견된 기토라 고분의 천장에는 금박 전천천문도가 그려져 있었다. 일본 전역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8세기 전후에 전천천문도를 그렸다는 것은 그 나라의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준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를 분석한 결과, 별을 관측한 지역이 평양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시끄럽게 호들갑을 떨던 일본 언론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저자 김일권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우리 역사에 있어서 천문연구 분야의 개척자라고 한다.  “이제 겨우 고구려의 전통 별자리를 찾아내어 복원하는 중에 있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였던 더 많은 하늘의 역사를 되살려 내는 작업이 앞으로 주어져 있다.”라고 말하며 이 책을 끝맺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베아르피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름은 ‘조지’, 한국인이며 미국에서 유학을 했고 현재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수다. 그가 바로 이 소설 <나스타샤>(베아르피.2008년)의 주인공이다. 30대 초반인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토론토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책의 시작과 함께 케빈의 커피숍이 등장한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여자와 만난다. 그 여자와 만나기 이전인 캐나다 생활 초기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녀와의 만남과 그 이후의 삶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녀와의 만남 이전에 조지의 생활은 강의와 준비 그리고 교수 동료인 그렉과의 낚시가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광대한 캐나다의 자연과 아름다운 호수 그리고 플라이 피싱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전개된다. 그는 이렇게 자연에서 함께 하는 생활에서 큰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삶에는 돈을 보상할 수 있는 여러 계기가 있다. 자연이 주는 즐거움, 음악과 그림과 소설과 시와 여인의 미소가 주는 즐거움 등은 돈 못지않게 커다란 행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124쪽)

그는 자연과 음악 그리고 그림과 함께 하고 있지만 여인의 미소를 느끼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600쪽이 넘는 분량의 이 책에서 거의 200쪽이나 되어서야 소설의 제목인 나스타샤가 나타난다.


낚시터로 가는 여정의 중간에 위치한 케빈의 커피숍에서 조지는 그녀와 만난다. 그녀는 케빈의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할 종업원으로 커피숍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민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조지는 그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지는 그녀에게 이름을 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름을 묻는 조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지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나는 조지야”라고 말하고 이어 그녀를 가리키며 다시 묻는다. 알아들었다는 표현으로 그녀는 웃었다. 이 웃음을 보고 조지는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웃음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여자는 자기 자신이 될 줄 안다. 표정만 웃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미소에 의해 자신의 전 인격이 웃을 때 거기에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고결함까지 있다. 티 없는 웃음은 따스함과 친근감을 불러온다. 스스로가 될 줄 아는 사람만이 그런 웃음을 짓는다. 그러한 사람은 순수하고 선량하고 솔직하다.”(185쪽)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그러나 조지는 알아듣지 못하고, 다만 그녀의 이름이 네 음절이라는 것만 알아듣고는, 그녀를 나스타샤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 이름이 그가 알고 있는 러시아 여자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조지에게 있어서 그녀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이 이미 그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나스타샤의 본명은 메첸체바 가일로프였다. 나이는 32세이다. 그녀는 단순하게 캐나다로 이민 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망명을 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독립하려는 우크라이나에서 그녀는 반체제 운동 혐의로 체포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받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걸어서 우크라이나를 탈출하고 오스트리아로 가서 그곳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망명을 신청한다.

사실 그녀가 반체제 운동을 한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을 사랑했기에 그녀는 그와 항상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일을 돕게 된 것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체포되고, 아기는 고아원에 수용이 되었다. 게다가 체포된 뒤에 그녀는 모진 고문을 받아 골반이 골절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조지가 그녀를 몇 번째 보았을 때  그 육체적 상처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다. 

조지는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녀의 몸을 치료해준다. 게다가 그녀가 캐나다에서 홀로 생활할 수 있게 대학도 보내준다. 그녀의 몸을 치료해주기 위해서 한국에까지 오기도 한다. 둘은 매일 매일의 삶이 행복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항상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남편과 아이 때문이었다. 이 둘의 생사여부는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의 불안은 곧 조지의 불안이기도 했다. 조지는 그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의 도움을 얻는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있으며, 현재 감금되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그들을 출소시켜 캐나다로 올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 그 결과 나스탸샤의 남편과 아이는 무사히 캐나다로 오게 된다. 그런데.......

나스타샤란 책 제목을 보면서 나는 괜스레 이 책이 슬프게 전개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스탸샤란 이름 속에서 제정 러시아 말기의 음울한 현실과 혁명으로 인한 제정의 멸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서 나스타샤는 허물어져가는 소련의 국가 운명처럼 그렇게 슬픈 삶을 살았다. 조지와의 만남으로 인해 슬픔을 극복하고 행복해질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슬픈 느낌은 마치 복선처럼 내게 작용했다. 

 

저자 이름인 조지수는 필명이라고 한다. 그는 십 수 권의 책을 저술한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번 책은 필명으로 했다 본명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공부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교수생활을 했다고 저자 소개에 있는 내용을 봐서는 이 책은 그의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과 음악에 있어서의 해박한 지식과 아울러 철학이나 종교, 기타 여러 학문에 걸친 그의 지적인 면모가 주인공인 조지의 입을 통해 독자들에게 읽혀진다. 이 책은 캐나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과 아름답고 슬픈 사랑 그리고 많은 지적인 표현들이 들어있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틈새 독서 -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의 하루 15분 책읽기
김선욱 지음 / 북포스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년 간 150~180권 정도의 책을 읽는 것을 아는 주변사람들은 자주 내게 어떤 책을 읽으면 좋겠냐고 묻는다. 실상 이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일단 흥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야의 책을 읽으려면 정말 대단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에 반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관련된 책을 읽는 다면 흥미도 있고 재미도 있기에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그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먼저 읽으라고 권한다. 또 책을 평소에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면, 그들은 매우 미안해한다. 마치 자신이 나에게 잘못이라도 한 듯이, 읽어야 하건만 읽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에 죄스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단 그들은 ‘읽을 시간이 없어서’라고 핑계를 댄다. 그들은 안정된 마음과 시간과 같이 주변 환경이 준비되어야만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책 읽기를 대단한 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권할만한 책이 바로 이 책 <틈새독서>(북포스.2008년)다.

저자인 김선욱은 ‘독서전도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철에서 어깨에 ‘책을 잃자’라는 의미를 가진 띠를 두르고 사람들에게 책을 읽기를 권유하고 있다. 마치 신앙을 전도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가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에게 독서를 권유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책을 통해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 책을 읽는다면 행복할까?


저자는 자신의 책읽기 경험을 통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들 두루 읽음으로써 간접경험을 충분히 하면 ‘마음을 계발’할 수 있고, 또 ‘인생의 방향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는다고 한다. 그것도 자를 대고 아주 정성스럽게 말이다. 이는 이 책을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삶과 족적, 그리고 자신의 배움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도 밑줄을 그으며 읽고는 있지만, 그 이유는 기억하고 싶거나 나중에라도 다시 그 책을 읽을 때 그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본다면 그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극히 개인적인 목적뿐인데, 저자의 시야는 나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을 느낀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핑계로 대는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시간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하루 15분 책 읽기’를 권유하고 있다.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하루 15분의 독서, 당신의 인생이 바뀝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마치 성경에서 나오는 선지자가 광야에서 하듯 그는 독자들을 향해 외치고 있다. 하루에 15분씩 책을 읽으면 한 달이면 한 권, 일 년이면 12권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하루에 1시간씩 읽는다면 일 년이면 50권을 읽을 수 있고, 이렇게 읽는다면 “부자가 되고, 성공도 하고, 인격도 함양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독서를 한다는 것만 가지고도 부자가 되고, 성공도 하고 인격도 함양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이는 저자의 바람을 적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저자의 말처럼 된다면 책이 지금보다 훨씬 많이 팔리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데 몰두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독서가 성공과 부자에 이르는 데에는 필요하지만, 필요 충분한 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저자의 비유가 좀 지나치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다보니 이 책 곳곳에서 보면 독서를 안 하면 마치 가난해지고, 실패하고 말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책을 읽고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역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나도 저자처럼 전철 안에서 항상 책을 읽는다. 사람들이 많고, 소음도 많은 공간이지만 책을 읽다보면 주변의 소란함은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많은 양의 독서를 전철에서 해치우고 있다. 그렇지만 지하철이나 버스와 같이 움직이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읽으면 머리가 어지럽다는 사람들도 있다. 전철 15분은 모든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좋아 하는 책도 다르듯이 책을 읽는 적합한 장소도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잠자기 전과 새벽시간 기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오랜 기간 꾸준히 읽기를 해 온 사람들에게는 책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읽는 시간과 장소 등에 대해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독서를 시작하려는 사람은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에서 부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책을 잘못 고르면 시간과 돈 모두 아깝기 때문이고, 독서에 대한 열의도 식을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사傳 3 - 기록 아래 숨겨진 또 다른 역사 한국사傳 3
KBS 한국사傳 제작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1년 여름 한국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발굴이 있었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장마를 대비해 배수구를 정리하던 중에 새로운 무덤 하나를 발굴한다. 도굴이 안 된 처녀분으로 발견된 이 무덤은 백제 25개 왕인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었다. 왕릉이니만큼 많은 양의 유물이 나왔다. 왕관에서 시작해서 금송으로 만든 관 등 엄청난 유물이 쏳아져 나왔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유물은 묘지석이었다. 이 묘지석에는 이 무덤의 주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주인은 바로 사마(斯磨)였다.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을 밝혀주는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 고분의 발굴로 인하여 한일 고대사에 의문으로 남아 있던 부분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이다.

개로왕의 즉위 시에 백제는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무령왕이 즉위하기 26년 전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현재 풍납토성으로 추정)을 격파하고 개로왕을 죽인다. 이에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옮기게 된다. 즉 웅진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사마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다가 40살이 되어서야 백제의 왕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그 시절 백제의 상황은 아주 어려웠다. 웅진으로 천도한 후 무령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3명의 왕들은 피살을 당하는 등 국가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태에서 무령왕은 백제를 중흥하기 위해 먼저 시야를 대외로 돌려 고구려와 전쟁을 개시한다. 또 대내적으로는 농토 확장을 위해 노력한다.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즉위 후에도 가깝게 지냈음은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청동거울은 무령왕이 일본의 계체 천왕에게 하사한 것이다. 이 청동거울에 새겨진 48자 중에 “사마가 남제왕인 계체에게 하사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전에는 사마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이렇듯 한일 간의 역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부분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령왕의 묘지석으로 말미암아 사마와 무령왕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 외에도 놀랄만한 부분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무령왕의 죽음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붕(崩)’자다. 붕이란 글자는 황제의 죽음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처럼 무령왕은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하여 약화된 백제를 중흥시킨 장본인이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증거는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다. “갱위강국(更爲强國)” 즉,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한국사傳 3>(한겨레출판.2008년)은 이렇게 무령왕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1971년에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1500년 간 잠자고 있던 ‘사마왕’이란 이름을 찾게된 것이고, 이어 6세기의 동아시아 역사는 다시 쓰여 지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 무령왕이외에도 이 책 <한국사傳 3>권에는 조선 정희왕후, 허난설헌, 홍의장군 곽재우, 광암 이벽, 무왕 대무예, 문왕 대흠무, 송강 정철, 세종 이렇게 9명이 소개되고 있다.


소개되어 있는 사람 중 광암 이벽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벽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벽은 바로 천주교와 관련된 사람이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바로 광암 이벽이 독서를 하던 곳으로 다산 정양용의 형제들도 이벽과 함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에 보면 “기해년(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 형제와 권철신 등 젊은 선비들이 ‘강학’을 했던 것이다. ‘강학’이라는 말은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 경전을 연구하는 모임’을 뜻하지만, 이 강학은 그런 모임이 아니었다. 이들은 새로운 학문, 즉 서학을 배우는 것이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이렇게 세계 역사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벽은 지금의 명동인 명례방에서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100년 후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된다.


어느 사회나 금기는 존재한다. 사상, 종교에서 비롯해 음식, 의상 등 다방면에 걸쳐 존재한다. 특히나 사상이나 종교 관란 금기를 깨는 것은 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광암 이벽은 이런 금기에 도전한 것이다. 그 도전의 끝은 당연히 죽음일 수밖에 없었다.

1984년 103인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이 명단에 이벽은 포함되어 있지 못했다. 어찌 보면 조선 천주교에 씨앗을 뿌린 이벽은 당연히 이 명단에 들어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 왜일까?

 

“형벌을 받고 처형당했다는 명확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류한영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신부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벽은 배교(背敎)를 했다는 것인가? 물론 이벽이 배교를 했다는 문서도 존재한다. <조선순교사 비망록>이라는 책에는 이벽이 “페스트에 걸려 8~9일을 앓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기록을 살펴본 결과 이 시기에 전염병인 페스트가 창궐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1979년 이벽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을 발굴하여 유골을 보자 치아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이러한 증거는 이벽이 음독자살을 했을 수도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독살의 개연성도 충분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의 배교와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은 230년이 지난 지금 450만 명의 신자가 믿음을 지키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죽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열전’이 재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교훈도 된다.

 

이 책에 마지막에 소개되고 있는 세종의 이야기도 눈에 들어온다. 세종이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이안 일본 - 일본 귀족문화의 원류
모로 미야 지음, 노만수 옮김 / 일빛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생각한다. 지리적으로는 가까우나 그들에 대한 심리적인 부분은 멀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멀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요인은 양국 간의 과거 때문일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슬픈 역사가 두 나라 사이의 간극을 벌려놓았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의 거리를 느낄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왕조의 변천과 그 시기까지 겨의 알고 있으나,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만큼 알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경우에는 일본에 있어서 시대별 구분을 알지 못했다. 특히나 한반도와 관련된 일본의 역사 인식은 임나일본부와 같이 식민지 경영을 위하여 한반도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생각 때문에 일본의 역사와는 더욱 멀어져 있었다. 게다가 일본어를 모른다는 것도 이에 한몫했을 것이다.

 

필자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의 시대 구분은 나라 (奈良), 헤이안(平安), 가마쿠라(鎌倉)시대 라는 단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시대적으로 언제이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어느 왕조 시대인지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그런 필자에게 이 책 <헤이안 일본>(일빛.2008년)을 집어 들었다. 다 읽고 나니 일본에 대한 거리는 그대로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본 역사에 대한 지식의 거리는 조금은 좁혀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든다.


헤이안(平安) 시대는 나라(奈良) 시대 다음이고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전이다. 서기 연대로 따지자면 794년부터 1185년까지 400여 년간을 말한다. 한반도의 역사와 비교하자면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고려 중기까지다. 한반도에서는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는 시기가 바로 일본의 헤이안 시대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필자는 어려움에 빠졌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고생했다. 우리가 읽는 한자와는 다른 독음을 가지고 있고 또 왜 이리 이름은 길던지.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 家持) 등 일본인들의 이름은 우리와 같이 한문을 쓰고 있지만, 읽는 방법이 전혀 달라서, 그 이름이 익숙해지기 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의 이름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면서 책을 읽는 진도는 조금은 빨라졌다.


헤이안 시대의 정치 중심에는 한반도 도래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대 이래로 일본의 상위 문화를 이끈 집단은 바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높은 수준의 문화는 그들의 신분과도 맞닿아 있었다. 도래인들은 헤이안 시대의 상층부 귀족 사회에서 일본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 여성들은 상당히 자유분방했으며. 또한 멋 내기에도 현대인들 못지않았다. 여성들이 멋을 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식품은 바로 부채였다고 한다. 부채는 “오관(五官 ; 눈, 귀, 코, 입, 피부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체를 뜻함)의 직접적인 노출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슬금슬금 내비치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매력을 한층 더 북돋아 주면서 맘껏 부풀려 주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지금도 여름에 여성들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더위를 물리치는 행위는 어찌 보면 유혹적이기도 하다. 그 부채에서 옅은 향내까지 나면 그 효과는 더욱 좋기도 하다. 

우리나 일본이나 오랜 동안 문자는 오로지 한문만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한반도에서는 한글이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듯이, 일본에서도 그들만의 문자를 만들어 낸다. 히라가나와 가타나가가 그것이다. “히라가나는 와카, 모노가타리를 쓰기 위해 태어났다. 반면에 가타가나는 한문을 이해하기 위해 출생했다. 히라가나로 글을 쓰는 창작자는 여인들이었고, 가타가나의 동량은 남성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히라가나는 여성의 문자, 가타가나는 남성의 문자였다.” 이는 조선 초에 한글이 만들어졌으나 초기에는 한글을 사용한 사람들은 바로 여자들이었던 경우와 비슷하다. 이중 히라가나로 쓰였다는 모노가타리에 대해 일본인들은 세계 최초의 소설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모노가타리(物語)를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처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100여 쪽은 겐지 모노가타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겐지 모노가타리는 이 역사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부록 같은 느낌이 든다.

 

저자인 모로 미야(茂呂 美耶)는 일본인 아버지와 대만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한문과 일본어를 둘 다 할 수 있었기에 이런 좋은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모로 미야가 소개하는 헤이안 일본을 읽으니 일본의 속살이 보인다. 일본의 역사에 약간은 가까이 간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들과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