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사傳 3 - 기록 아래 숨겨진 또 다른 역사 ㅣ 한국사傳 3
KBS 한국사傳 제작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1971년 여름 한국 역사에서 기념할만한 발굴이 있었다.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장마를 대비해 배수구를 정리하던 중에 새로운 무덤 하나를 발굴한다. 도굴이 안 된 처녀분으로 발견된 이 무덤은 백제 25개 왕인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었다. 왕릉이니만큼 많은 양의 유물이 나왔다. 왕관에서 시작해서 금송으로 만든 관 등 엄청난 유물이 쏳아져 나왔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유물은 묘지석이었다. 이 묘지석에는 이 무덤의 주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주인은 바로 사마(斯磨)였다.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을 밝혀주는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 고분의 발굴로 인하여 한일 고대사에 의문으로 남아 있던 부분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이다.
개로왕의 즉위 시에 백제는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무령왕이 즉위하기 26년 전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현재 풍납토성으로 추정)을 격파하고 개로왕을 죽인다. 이에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옮기게 된다. 즉 웅진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사마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다가 40살이 되어서야 백제의 왕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그 시절 백제의 상황은 아주 어려웠다. 웅진으로 천도한 후 무령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3명의 왕들은 피살을 당하는 등 국가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태에서 무령왕은 백제를 중흥하기 위해 먼저 시야를 대외로 돌려 고구려와 전쟁을 개시한다. 또 대내적으로는 농토 확장을 위해 노력한다.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즉위 후에도 가깝게 지냈음은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청동거울은 무령왕이 일본의 계체 천왕에게 하사한 것이다. 이 청동거울에 새겨진 48자 중에 “사마가 남제왕인 계체에게 하사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전에는 사마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이렇듯 한일 간의 역사에 공백으로 남아있던 부분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무령왕의 묘지석으로 말미암아 사마와 무령왕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 외에도 놀랄만한 부분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무령왕의 죽음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붕(崩)’자다. 붕이란 글자는 황제의 죽음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처럼 무령왕은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하여 약화된 백제를 중흥시킨 장본인이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증거는 <삼국사기>에도 나와 있다. “갱위강국(更爲强國)” 즉,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한국사傳 3>(한겨레출판.2008년)은 이렇게 무령왕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1971년에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1500년 간 잠자고 있던 ‘사마왕’이란 이름을 찾게된 것이고, 이어 6세기의 동아시아 역사는 다시 쓰여 지게 되었던 것이다.
백제 무령왕이외에도 이 책 <한국사傳 3>권에는 조선 정희왕후, 허난설헌, 홍의장군 곽재우, 광암 이벽, 무왕 대무예, 문왕 대흠무, 송강 정철, 세종 이렇게 9명이 소개되고 있다.
소개되어 있는 사람 중 광암 이벽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벽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벽은 바로 천주교와 관련된 사람이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바로 광암 이벽이 독서를 하던 곳으로 다산 정양용의 형제들도 이벽과 함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에 보면 “기해년(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 형제와 권철신 등 젊은 선비들이 ‘강학’을 했던 것이다. ‘강학’이라는 말은 ‘유교 경전이나 성리학 경전을 연구하는 모임’을 뜻하지만, 이 강학은 그런 모임이 아니었다. 이들은 새로운 학문, 즉 서학을 배우는 것이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이렇게 세계 역사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벽은 지금의 명동인 명례방에서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100년 후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된다.
어느 사회나 금기는 존재한다. 사상, 종교에서 비롯해 음식, 의상 등 다방면에 걸쳐 존재한다. 특히나 사상이나 종교 관란 금기를 깨는 것은 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광암 이벽은 이런 금기에 도전한 것이다. 그 도전의 끝은 당연히 죽음일 수밖에 없었다.
1984년 103인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이 명단에 이벽은 포함되어 있지 못했다. 어찌 보면 조선 천주교에 씨앗을 뿌린 이벽은 당연히 이 명단에 들어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 왜일까?
“형벌을 받고 처형당했다는 명확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류한영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신부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벽은 배교(背敎)를 했다는 것인가? 물론 이벽이 배교를 했다는 문서도 존재한다. <조선순교사 비망록>이라는 책에는 이벽이 “페스트에 걸려 8~9일을 앓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기록을 살펴본 결과 이 시기에 전염병인 페스트가 창궐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1979년 이벽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을 발굴하여 유골을 보자 치아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이러한 증거는 이벽이 음독자살을 했을 수도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독살의 개연성도 충분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의 배교와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은 230년이 지난 지금 450만 명의 신자가 믿음을 지키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죽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열전’이 재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교훈도 된다.
이 책에 마지막에 소개되고 있는 세종의 이야기도 눈에 들어온다. 세종이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