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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루소의 개.

 

 

 

1.

 

 

  일전에 리오 담로시의 평전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루소의 저작 중 ‘고백록’을 바탕으로 쓰여 진 그 글에서는 루소의 대한 깊은 연구와 더불어 각종 역사적 사실의 추적을 통하여 루소의 삶을 그려내는 모습이 정말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책을 읽고 루소라는 인물에 대해서 반은 실망을 하고, 반은 희망을 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먼저 실망을 한 이유는 루소는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고 인격적으로 고매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이고, 그의 각종 기행들은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다’ 라는 말로 방패막이를 해주기에는 너무 지나쳤었기 때문이지요. 5명이나 되는 아이를 버린 일부터, 끊임없이 친구를 의심하고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들에게 분노의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마치 세계 전체가 자신의 적인 듯 적대하는 그의 모습이란 정말 저에게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런 일들 때문에 루소에 대해 실망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니, 저렇게 편집증에 시달리고 자존심과 자기 허세로 가득 찬 사람도 세상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내는데, 나라고 무슨 일을 못하겠어?’ 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물론 혹자는 저의 이런 생각을 보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루소가 정말 바보인줄 아느냐, 어디 너랑 비교를 하느냐,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루소가 제일 싫어할만한 생각이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루소의 삶이 수많은 모순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의 일생에서 단 하나 일관적이었던 것은 고독, 조금 더 넓게 이야기한다면 자유에 대한 사랑이었지요. 그가 말하는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는 평등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평등은 인간 근원적인 평등을 뜻합니다. 내가 당신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그런 인간으로서의 평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인간이고 루소도 인간인데, 루소가 인간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사회계약론을 쓰고 에밀과 같은 작품을 썼다면, 나 또한 인간으로서 무언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는 곰보고 호랑이처럼 빨리 달려보아라, 같은 포유류잖는가, 라는 말과 비슷한 오류를 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소는 그 자신을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두고 ‘뛰어나다’ 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을 격리하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 보다는 이런 식으로 그에게 우린 동등하다, 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길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의 근거는 루소가 일평생 진정한 친구, 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갈망해왔다는 점에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특별시하고 신성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삶을 살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고 저런 일을 못하겠는가, 라는 말을 비웃는 사람들의 생각은 루소가 싫어할만한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2.

 

 

  저 책 ‘루소 평전’을 시작으로 루소의 저작들을 몇 권이고 찾아 읽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머리 셋 달린 괴물은 아니었잖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나도 그처럼 언젠가 개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괜히 그의 저작이 읽고 싶어지더군요. 에밀, 사회계약론, 고백록까지. 사실 에밀이야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이전에도 한 번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고백록은 그 때 처음 읽었었지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고백록은 저에게 알쏭달쏭한 책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남은 것이라고는 루소의 각종 성(性)적인 언어들뿐이었습니다. 아니 내밀한 고백에는 필연적으로 본인의 성에 관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나는 목사의 딸이 나를 더 때려주기를 바랐다’ 라던가 ‘바랑부인이 없는 동안 나는 그녀의 자리에서 그녀의 미끈한 발을 생각했다’ 같은 구절을 보게 되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무슨 책인지 심각하게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지요. 그의 생을 알쏭달쏭하게 만들었던 것은 이런 고백록과 같은 책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의심도 저를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친구였던 달랑베르나 디드로, 그림과 같은 사람들과의 다툼 뿐만 아니라 이번에 읽은 책 ‘루소의 개’에서 다룬 것처럼 흄과의 다툼은 거의 대부분 그의 의심에서 기인한 것이지요. 의학에서 성격 장애를 분류할 때 ‘세상이 마치 자신의 적이 된 것 같고 모두가 자신에게 나쁘게 구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를 편집증적 성격 장애라고 부릅니다. 루소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대학 병원 정신과에 입원을 권유받았겠지요. 루소는 이 편집증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신과적인 질환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정신과적인 질환은, 예를 들어 강박증이라던가, 망상장애나 성격장애 같은 것들은, 마음을 어떻게든 굳게 먹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현대 들어와서는 적극적인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현대에 접어들어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그저 개인의 성격인 줄 알았겠지요. 그래서 이 책에서 언급하는 수많은 귀족들과 귀부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루소는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이지요.

 

 

3.

 

 

  이런 공상과 망상에 젖어서 세상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며 살아가는 루소의 정 반대편에 흄이 있습니다. 흄은 칸트 이전에 인간의 이성의 극한까지 사고를 전개하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의 문제점을 드러낸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이는 그의 회의주의적인 성격에서 기인합니다. 네, 이렇게 보면 흄도 항상 의심하고 숙고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심은 루소의 의심과는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는 그의 의심이 자신의 일반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사교계에서는 ‘사람좋은 데이비드’ 라는 이명을 항상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그의 동시대에서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 당시 사람들은 흄에게 역사가의 소명만을 기대해왔었습니다만 그가 없었더라면 칸트가 이후에 인간의 오성에 관한 눈부신 통찰을 내어놓기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아인슈타인도 그의 이론을 전개하기 전에 감탄 속에서 흄의 논문을 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루소가 공상적 인간이라고 한다면 흄은 이성적 인간이었고, 감정에 치우친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이성을 가진 사람은 볼 수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평판도 잘 유지하면서 학문적 성과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루소의 개’에서 나오는 흄과 루소의 논쟁은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성과 감정이 부딪혔을 때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테니깐요. 서로가 이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논리에 의거하여 상대방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킬 수 있겠지만 이성과 감정, 혹은 감정과 감정이 부딪혔을때에는 상대방을 이해시키기란 하늘에 별따기와 다름없는 일입니다. 당시 루소는 그 자신의 저서 때문에 곤경에 빠져있었습니다. 물론 그 곤경이라고 해봤자 실제로는 그저 나라만 벗어나면 되는 것이었고, 더 이상 국가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추적 후 처형과 같은 적극적인 형벌을 가하려고 하지는 않았기에 (루소가 자신이 머물던 콩티 공작의 성을 떠나며 한참 길을 가던 도중 자신을 잡으러 성으로 오는 병사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루소가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었던 점을 배제할 수 는 없겠습니다만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 라고 여길 때 깊은 절망을 느끼게 되지요. 바로 이 시기에 흄은 친구인 부플레 백작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이름 높던 루소를 영국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한 번도 사람을 보지 않고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도 우정이 가능할까요? 아마 이 시기의 흄과 루소는 그렇게 믿었던 모양입니다. 혹은 그저 우정을 가장했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흄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판만 믿고 루소가 영국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그리고 연금도 타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가 그 자신의 평판, 사람 좋은 데이비드를 유지하려고 이런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생판 모르는 남을 선뜻 부양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영국에서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영국으로 떠납니다.

 

 

4.

 

 

  유튜브에는 다양한 동영상들이 올라오는데, 그 중 ‘역사 속 인물들의 랩배틀Epic rap battle of history' 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역사 속 인물들로 분장해서 제작자들이 Rap을 통하여 배틀을 벌이는 영상들인데 잘 알려졌을 만한 영상으로는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이 서로 랩배틀을 벌이는 장면이 있지요. 물론 그냥 보기에는 상당히 많은 비속어들이 포함되어있습니다만 실제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인물들이 그에 대척되는 삶을 살았던 (물론 저 영상에서는 그런 것을 매우 엄격하게 따지지는 않았었지만) 인물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 ‘루소의 개’에서 다루는 다툼이 그와 같지요. 루소를 영국으로 데려간 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다툼에 시달리게 됩니다. 물론 루소의 입장에서는 그 자신이 위험을 느낄만한 요소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흄이 잠결에 자신이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중얼거린 일이라던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전부 개봉되어 있었다는 점과 같은 요소들이 바로 그것이지요. 하지만 흄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았습니다. 자신은 사는 곳을 제공해주고 연금도 받아다주려고 노력하는데 루소의 까다로운 성격은 그 수많은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 하나 어긋나게만 만드니 말이지요. 그렇게 촉발된 다툼은 끝내 루소의 연금의 연기를 요청하는 편지로 시작됩니다. 그리곤 주장하지요, 흄 당신은 나의 적들과 내통하여 나를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역사속 인물들의 랩배틀’ 이라면 분명 ‘흄, 너는 엉성한 계획으로 내 적들과 공모했겠지, 그리고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겠지, 하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겠지’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주장이 크게 근거를 가지기 어려운 것이, 예를 들어 A란 사람이 B, C와 동시에 친하다고 합시다. 그런데 B와 C는 사이가 매우 나쁩니다. 그래서 B는 자주 친교를 나누는 A에게 C와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가 C와의 관계를 끊어야 할까요? 글쎄요, A와 B가 연인관계라면 혹시나 그런 주장이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 중 어떤 게 우위에 있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사랑을 더 우위에 두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정의 이름으로, 그것도 사실 B와의 친교는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도, B의 강요에 의하여 A는 C와의 관계를 끊어야 하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지요. 루소와 흄과 루소의 이전 친구들,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달랑베르나 그림과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사실 루소는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이지요. 네, 루소의 문제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냥 무던하게 넘겨버리지 못했다는 것 말입니다. 이는 결국 루소와 흄 사이를 파국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결국 그 결말은 둘에게 모두 상처를 남겼으며 그 후 그 둘은 다시는 보지 않았습니다.

 

 

5.

 

 

  독재자들은 고양이를 싫어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양이는 자신을 주인과 친구로 여긴다고들 합니다. 저야 고양이들을 길에서 만나보거나 혹은 고양이 카페에 들렀을 때 잠깐씩 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고양이를 길러본 사람들은 이 고양이가 나랑 동등하게 여기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제정치를 펼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싫어하기에 고양이를 싫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개는 어떨까요? 그런데 개는 고양이와 달라서 한번 주인을 정하면 그 주인에게 애정을 많이 쏟고 따른다고 하네요. 사실 개도 저는 그리 많이 다뤄본 적이 없으니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저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저 말, 독재자들이 고양이를 싫어한다, 라는 말은 과장이 좀 섞여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완전히 그른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사람은 그 고양이를 하나의 개체로 생각해서 그 자신의 영역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특히나 고양이들에 대한 학대 등을 큰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반면에 개는 그 자신을 버리고 주인을 따를 정도로 충실합니다. 루소의 개, 쉴탕도 그와 같아서 비록 짖고 루소의 사색을 방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를 평생 충실하게 따랐다고들 하지요. 물론 루소는 그 자신의 편지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쉴탕을 하나의 가족과 같이 여기고 우리는 동등한 친구와 같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만약에 루소가 정말 동등한 친구처럼 구는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이지 궁금해집니다. 루소가 타인에게 바랐던 것은 마치 개와 같은 자신에 대한 충실성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그만큼 타인에게 충실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의문이었으면서 말입니다. 물론 상호적으로 저런 충실성이 이루어진다면 인간관계로서 더할 나위없이 좋을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충실하고 당신 또한 나에게 충실하며 서로가 외로운 세상을 걸을 때 한 줄기 빛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나 법정 스님이 ‘귀한 인연이길’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한동안 연락이 없다고 해서, 그가 내게 사랑의 관심을 안준다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고 포기하는 그런 가벼운 인연이 아니길’ 라고 말입니다. 항상 충실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우정이라는 이름에서는 사실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어쨌든 이런 루소의 친구에 대한 생각은 이 책 ‘루소의 개’에 의하면 쉴탕과 다른 두 ‘개’를 낳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친구였으나 결국 갈라선 프리드리히 그림과 데이비드 흄이 바로 그들이지요. 이들은 쉴탕과 달리 끊임없이 루소의 상상 속에서 그를 괴롭히고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 ‘개’들은 그가 잘 되는 것을 보면 사정없이 짖으며 할퀴려 달려들고 그가 힘든 일에 빠지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좋아한다고 여겼지요. 사실은 그의 기대가, 그의 망상이 그 개들을 낳은 것일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마냥 루소를 미워하지도 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지도 못하는 이유는 그 루소의 바람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을만한 소망이기 때문이겠지요. 저 또한 품고 있는 친구에 대한 비원. 나를 잘 알아주고 잘 이해해주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그런 친구에 대한 기대 말입니다. 그런 친구는 사실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그런 기대를 꿈꾸게 됩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알아줄 거야, 저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해줄거야, 하지만 그런 기대는 언제나 배반당하고 우리는 상처입고 추락하게 됩니다. 내 친구, 라는 말이 어느 새 이 놈, 이라는 말로 바뀌게 되고 너 밖에 없다, 라는 말이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누구나 기대를 품고 배신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어느새 인간관계에 대한 처세를 익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 기대가 배반당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더 이상 타인에게 깊은 인간관계를 기대하지 않는 시대가 왔는지도 모릅니다. 편지가 상대방에 대한 연락의 주축이 되었던 18세기 살롱은 좀 달랐을까요? 글쎄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진심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힘들고 다른 사람의 진심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지요. 그러고 보면 루소는 좀 우리들에 비해서 서툴렀으며 우리들에 비해서 감정에 매우 솔직했을 뿐이었겠지요. 그 깊은 감정은 그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편집증적인 증세에 빠지게 만들었으나 ‘루소 자신’이 되게 하였으며, 만약 그게 지나치지 않았다면 루소는 별 문제 없이 살롱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었겠지만 끝내 ‘루소 자신’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루소가 끝내 이렇게 절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나의 개를 사랑해주오, 라고.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는가', '루소 평전(리오 담로시)'

 

 

p.s. : 심심해서.. 제가 읽은 책들 중 같이 읽으면 괜찮을 것 같아보이는 책들을 두 세권

        끄적거려 보기로 했습니다, 풋.. 제 멋대로 기준이라서.. 양해해주세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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