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꾹 다져진 듯한 농밀한 침묵이 새벽 달빛과 함께 등산로를 밝히더이다. 아, 오늘은 정월 하고도 대보름. 그 휘황한 달빛을 받으며 나는 여느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산을 올랐습니다. 한 달 전보다 한 뼘쯤 길어진 낮이 게으른 자의 뒷목을 부여잡는 듯하고 부지런한 청설모의 힘찬 몸짓에 새삼 부끄러워지는 아침이었습니다. 금세라도 초록물이 들 듯한 춘삼월 초봄, 계절처럼 쑥쑥 희망이 자랐으면...
성큼성큼 길을 걷다가도 시나브로 길을 잃기도 하고, 혼곤한 잠에 빠져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도 어느새 저 멀리서 비치는 한줄기 빛을 발견하는 게 우리네 삶인지도 모릅니다. 유난히 매서웠던 지난겨울이 있었기에 오는 봄을 더욱 반갑게 맞을 수 있음을 나는 압니다. 하염없는 시간들이 모래 위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아침이면 어젯밤 시체처럼 풀썩 쓰러져 잠들었던 순간이 부끄러워지곤 합니다. 내 삶의 뒷좌석에 앉아 마치 동승자처럼 무심히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요.
숲이 던져주는 삶의 조언들에 대해 이따금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의 등산로에서 쓰러진 고사목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엊그제 내린 비가 죽은 나무를 기어코 땅으로 쓰러트렸을 테지요. 쓰러진 나무는 결국 자신의 몸으로 주변 나무들의 성장을 돕겠지요. 우리네 삶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 나와 무관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걸 가슴 깊이 새기고 싶습니다.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이 올 때면 나무가 자라듯 나의 영혼도 조금씩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