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감정도 필요에 따라 말끔히 없애버리거나 상황에 맞는 적당한 감정을 새로이 만들어내거나 뒤섞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나이만 먹었지 수양은 되지 않아서인지 감정 조절에 애를 먹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하는 말이다. 이런 모습의 나를 향해 '그 나이 먹도록 도대체 뭐했누?' 하고 혀를 끌끌 찰 분이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의 됨됨이란 게 제 스스로 깎고 다듬어가는 것이어서 조금만 게을리해도 사람이 감정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되레 감정이 사람을 지배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걸 진즉 알았더라면 인격의 수양에 좀 더 힘을 쏟았을 텐데 나는 이미 그 시기를 놓친 게 아닐까 싶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개막되자 이런저런 소식이 쏟아지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미국을 대표하여 방문한 펜스 부통령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를 보면서 지난 정권의 실정으로 인한 국격의 실추가 이토록 심각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치솟는 화를 누르기 어려웠다.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남북한이 동시 입장하자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지만 펜스와 아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문 대통령이 주최하는 개막 리셉션장에도 늦게 나타나 빈축을 사는 등 외교적 결례를 서슴지 않았다. 아베는 한 발 더 나아가 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연기할 단계가 아니라며 예정대로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주권침해이자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있는 말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베와 펜스는 대한민국을 주권국가로 보지 않은 셈이다.
이런 문제는 정치인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 NBC의 중계방송 아나운서는 "일본이 한국을 1901년부터 1945년까지 강점했지만 모든 한국인들은 일본이 문화 기술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본보기였다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도 남북 선수단이 들고 공동 입장한 한반도기 사진을 설명하면서 "독도는 일본이 소유한 섬"이라고 보도해 물의를 빚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화를 내야 마땅한 기사였다. 그러나 보수 야당은 김정은의 특사단과 북한 응원단은 비난하면서도 펜스와 아베의 행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펜스와 아베를 향해 체면상 호래자식이라고는 못할지언정 비난의 말은 한마디 해야 하지 않았나. 자유당이 미국이나 일본의 정당이 아니라면 말이다. 개막식이 있은 지 며칠 지났건만 생각할수록 화가 치민다. 모처럼 날씨는 화창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