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보니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속담도 있다지만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은 듯했다. 나는 우산에 듣는 빗소리를 박자로 세며 산을 올랐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을 따라 등산로의 낙엽이 제 몸을 뒤채며 저 멀리 달아났다. 가을은 기억의 출구를 무채색의 우울로 채색하는 계절이다. 낮게 드리운 하늘과 갈잎의 흩어짐이 허무와 한숨으로 치환되는...
점심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했다. 공원의 은행나무 아래서 떨어진 은행을 주워 담는 노인. 은행이 담긴 바구니에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노인은 공원 한켠의 수돗가에서 은행을 씻었다. 장갑을 낀 노인의 팔뚝은 가냘펐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폐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사는 게 뭔지...' 생각했었다. 노인은 은행의 과육이 모두 벗겨질 때까지 여러번 치대고 헹구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들, 그러니까 분명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들은 사실 모두가 사물의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일세. 그렇지만 조금만 노력을 하면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알게 되어, 마침내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런데 나는 밝은 세상으로 끝내 끌어내지 못하는 이 그리운 존재 때문에 마음은 우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떠나게 되네그려."
생텍쥐페리의 소설 <남방우편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생텍쥐페리의 저작은 대개 가을과 어울리는 것들이 많다. 사랑과, 관계와, 삶과, 시간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추억에 빠져들곤 한다. 추억이 아름다운 건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절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기억이란 과거를 향해 우리가 쏘아보낸 시간의 화살이 절망의 벽에 튕겨져 되돌아 온 시간의 파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