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평점 :
헤살거리는 햇살이 마냥 좋았던 오늘, 나는 벌써 힘겨웠던 여름을 저만치 떠나보낸 듯 가슴 한켠이 설레었습니다. 시나브로 변해가는 날씨에 이렇듯 들뜨고 기꺼워하는 까닭은 그날이 그날 같은 고만고만한 일상에 적이나 지치고 무력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뒤돌아보면 바람 같은 인생입니다. 수십 번의 여름을 지나왔건만 나는 그 중 절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오매불망 가을을 기다리고 여름의 기억을 차례로 잊어갑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여름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여름이 한두 해쯤은 있을 테지요. 살다 보면 말입니다.
"뿌리 뽑힌 채 이식된 것 같은 낯설고 삭막한 서울에서의 삶, 철저하게 '기브 앤드 테이크'로 일관하는 듯한 도시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 붙일 곳 없어 서성대던 나였다. 그런 내게 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오랜만에 햇볕을 쪼인 화초처럼 쑥쑥 자랐다." (p.53)
서명숙의 <영초언니>를 읽었던 건 열흘쯤 전이었습니다. 그길로 내처 리뷰를 썼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쓸 수가 없었습니다. 작가가 40여 년만에 불러낸 천영초에 대한 기억이 80년대 후반의 잊혀지지 않는 어느 여름으로 나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사람들에겐 시간이 아로새긴 삶의 무늬가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강력한 레이저 불빛으로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그 기억의 문신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내게 고통도, 실망도 안겨주었지만 찬란한 청춘의 봄날을 함께했던 내 인생의 첫 멘토 영초언니, 풀각시처럼 영롱했던 그녀가 서서히 부서지고 망가져가는 걸 눈뜨고 지켜보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터. 그녀가 떠나는 날 공항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부디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출발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p.263)
고려대학교 학보사 기자였던 교육학과 76학번 서명숙과 신문방송학과 72학번 천영초가 만났던 건 어쩌면 예정된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977년 11월 3일 고대신문 창간기념일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 천영초는 고대신문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모에 훌륭한 문장가로 알려졌다고 합니다. 제주도 매일시장 내 '서명숙상회'집 딸 서명숙과 신문사의 전설 천영초는 그렇게 만나 친해졌고 급기야 그해 겨울방학 서명숙은 천영초의 자취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그들의 자취방은 자연스레 고대 여자 선후배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자주 모이던 열 명은 '고려대 내에 읽고 생각하고 떠드는 모임'인 '가라열'을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1977년 그해 겨울, 기록적인 한파가 한반도를 덮쳤다. 그러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각자 섬처럼 외로웠던 여자들끼리 모여서 추운 날 서로 깃털을 부비는 작은 새들처럼 체온을 함께 나누었기에, 우리는 정신적으로 따뜻했다. 유신체제하의 대한민국은 '겨울공화국'처럼 점점 얼어붙어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가라열을 통해 어둠이 짙은 만큼 새벽도 머지않았다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뜨거운 청춘, 아름다운 젊은 날이었다." (p.59)
1978년 학보사 기자 시절 마음에 두고 있던 엄주웅의 권유로 구로동에서 야학을 시작한 서명숙은 영초언니와 종로에서 처음으로 가투(가두투쟁)를 경험하고, 가라열의 선배 혜자언니가 데모를 주도하여 연행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성금을 모아 구속자들에게 영치금을 전달하던 중 마침내 엄주웅마저 구속되는 참담한 시절을 겪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영초언니의 주도로 유인물을 작성하여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다만 감옥에 있는 엄주웅과의 관계가 부쩍 가까워졌던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습니다.
1979년 2월 영초언니의 자취방을 나와 학교 앞으로 이사를 했던 서명숙은 그해 봄 자신의 모교인 제주도의 신성여고에서 교생실습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생실습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명숙은 서울로 연행됩니다. 영초언니의 주도로 유인물을 제작했던 게 빌미가 되어 긴급조치 위반 혐의가 적용된 것이지요. 경찰의 협박과 회유, 고문이 있었고, 길고 힘들었던 수감생활이 이어졌습니다.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석방시켰습니다. 236일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항쟁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굵지굵직한 사건들이 펼쳐집니다.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던 정문화와 결혼을 했던 영초언니, 극심한 생활고와 아들의 탄생, 이혼과 캐나다로의 이민 등 굴곡진 삶이 계속됩니다. 엄주웅과 어렵사리 결혼했던 서명숙의 삶도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방향이 엇갈린 채 진행되었고 2002년 이국땅 캐나다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한 영초언니는 시력을 잃고 뇌의 6,70 퍼센트가 손상된 채 영구귀국했습니다. 23년간 언론계에 몸담았던 서명숙도 2007년 귀향을 하였습니다.
책에서도 야학교사로 잠깐 등장하는 유시민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각자 세대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다르며, 그 십자가들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옳지 않다.'고 그는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말했습니다. '6.25전쟁 때 배고팠던 이야기와 지금의 청년실업 문제를 비교하는 건 맞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지요. 과연 서명숙과 영초언니 등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선택에 모든 누명을 덧씌운다는 것은 뭔가 억울하고 불공정한 느낌이 든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요? 혹은 실체도 없는 '세대의 십자가'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할까요.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80년대 후반의 나의 기억을 말해야 할 듯합니다. 꾹꾹 눌러두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이 책 <영초언니>로 인해 내 의식의 수면 위로 스프링처럼 튀어올랐다고 말한다면 억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1989년 6월 30일, 평양축전 시국대회가 한창이었습니다. 시험 거부로 맞섰던 학생들은 비장한 결의에 차 제가 다니던 학교로 모여들었습니다. 모든 출입로는 전경들로 인해 봉쇄된 상태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시험을 강행했던 교수님 한 분이 있었고 나는 무사히 시험을 치른 후 학교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최루탄이 곳곳에서 발사되었고 교정은 순식간에 최루탄 연기로 가득찼습니다. 마치 연막탄을 뿌린 듯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동시다발의 강력한 공격이었습니다. 가방을 든 채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화장실에는 최루탄을 피해 몰려든 사람들이 나 말고도 여덟 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수위 아저씨와 남학생 한 명, 그 외에는 모두 여학생이었습니다. 그 순간 흰 헬멧에 청카바를 입은 백골단의 무리가 뛰어들었고,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의해 한 여학생이 머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선연한 피가 화장실 벽면으로 번졌고, 이를 본 다른 여학생이 놀라 몸이 굳은 채 거품을 물고 쓰러졌습니다. 전쟁과 같은 아수라 난장이었던 그날 학교 주변의 모든 대학생들을 잡아들였고, 심지어 하숙집에서 한가하게 바둑을 두던 학생들까지 모두 연행되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서울 시내 전체의 유치장이 부족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조사를 받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그해 여름 그 순간에서 정지된 채 지워지지가 않습니다. 어느 여학생이 흘린 선연한 핏자국으로 말이지요. <영초언니>는 아마도 내가 목격했던 어느 여학생의 피흘림처럼 시대에 영합하지 않았던 젊은 몸짓, 그 시대의 십자가를 두 어깨에 짊어진 숭고한 희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여름이 한두 해쯤은 있을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