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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책
앤 후드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사건들이 마치 모래알처럼 자기 옆을 스쳐지나간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 많은 사건들이 결국에는 나의 기억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채 영원한 침묵으로 잠든다는 걸 종종 잊고 지낸다. 나를 스쳐간 많은 일들, 그러나 나의 기억 속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일들을 나는 어떻게 추억해야 할까. 아쉬움이란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스쳐갔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시간 속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동안 나는 온전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나는 이따금 소설을 읽는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의식에서 사라진 많은 것들을 다시 되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살았던 그 시간 동안 부지불식간에 사라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다시금 되새기게 되니까. 마음에 되새기는 횟수만큼 나는 조금씩 겸손해질 수 있으니까.
"시간에서의 이탈, 사차원이라는 개념이 지금 자기가 느끼는 것, 겪고 있는 것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느덧 어릴 적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릴리의 침대가 자기 침대 맞은편에 일년 동안 주인 없이 놓여 있었다. 시트와 얇은 여름용 싸개가 꾸깃꾸깃 뒤집혀 있었다. 마치 어린 그녀가 막 거기서 나왔거나 금방 다시 들어갈 것 같았다. 에이바가 무릎에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를 평쳐놓고 읽으며 그 책이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쓰인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그랬던 걸까? 지금도 궁금했다." (p432~p.433)
미국의 여류 작가 앤 후드는 그녀의 소설 <내 인생 최고의 책>에서 우리가 흘려보내는 시간의 잔물결을 좀 더 세밀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식 속에 가둬두지 못한 많은 일들이 바람처럼 사라져갔음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책에 등장하는 에이바도 그런 실수와 아픔을 간직한 여인이다.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으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녀는 설상가상 이혼의 고통까지 겪게 됨으로써 마음을 편히 내려놓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모두 잃고 만다. 그때 그녀의 친구 케이트가 구세주처럼 다가온다.
미국의 가장 작은 주 로드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프로비던스 지역에 위치한 아테나이움 도서관의 아래층 방에서 매달 두 번째 월요일 이루어지는 북클럽 모임에 에이바가 가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북클럽은 해마다 주제를 달리하여 진행하는데 에이바가 가입했을 때의 주제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책'이었다. 북클럽의 회원들은 8월과 12월을 제외한 열 달 동안 각자가 선정한 10권의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에이바의 오랜 친구이자 사서로서 북클럽 모임을 주재하는 케이트는 회원들이 정한 책의 목록을 기초로 하여 각각의 달에 읽을 책을 선정한다. 12월에 새로 가입한 에이바가 고른 책은 로절린드 아든의 <클레어에서 여기까지>였다. 이 책은 물론 작가가 꾸며낸 가상의 책이지만 말이다. 다른 회원들은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 <안나 카레니나>, <백 년 동안의 고독>, <제5도살장> 등 다양했다.
25년간에 걸친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른 후 가입한 북클럽이었기에 에이바는 처음 얼마간은 북클럽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에는 숫제 읽지도 않고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체하려다가 회원들에게 들켜 창피를 당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에이바는 북클럽 멤버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저자가 간담회를 해주기로 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저자와 출판사를 찾기 위한 여정에 돌입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에이바는 북클럽 멤버들의 사정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고, 남편과 아이들에 매여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살았던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남성인 루크와 잠시 연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여섯 아이를 키워낸 루스의 부지런함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에이바와 같은 날 들어온 신입 멤버이자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의 마음을 토닥이기도 한다. 책을 매개로 멤버들과의 교류가 잦아짐으로써 에이바는 점차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에이바가 어렸을 때 그녀의 엄마 샬럿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느라 늘 바빴고,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아버지는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엄마 샬럿과 비어트리스 이모는 서점을 같이 운영하며 샬럿이 바쁠 때는 비어트리스가 아이들을 돌보곤 했다. 재주가 많고 활동적이었던 릴리는 그날 높은 나무에 올라갔었고, 에이바는 그 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엄마 샬럿이 서점으로 출근하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왔던 비어트리스 이모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릴리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구급차가 릴리의 시신을 수습했고,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행크 빙엄이 왔고, 릴리의 사고 소식을 들은 샬럿과 아버지 테드가 왔다. 릴리가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을 때 그 누구도 릴리를 돌보지 않았다는 죄책감은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비어트리스 이모가 종적을 감추었고 엄마 샬럿의 차가 제임스타운 다리 위에서 추락했다. 유서도 없었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에이바는 엄마가 자살했다고 믿었다. 사실 샬럿과 행크 빙엄은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고, 릴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던 날도 그들은 함께 있었다.
릴리와 엄마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았던 책이 <클레어에서 여기까지>였다. 에이바는 그 책을 통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남편 짐을 만났고, 아들 윌과 딸 매기를 낳았다. 누구보다도 성실한 아들 윌과는 다르게 딸 매기는 약물과 남자 문제로 부모의 속을 썩이던 아이였다. 짐과 헤어졌을 때 윌은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산악 고릴라 연구를 하고 있었고, 매기는 미술사를 공부하겠다며 피렌체로 유학을 떠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매기는 학교를 그만두고 독일인 남학생을 따라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서 매기는 마약과 섹스에 취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한다. 가족들과의 연락도 끊은 채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던 매기는 결국 경찰에 의해 구조된다. 매기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에이바는 짐에게 연락하였고 파리에 갔던 짐으로부터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그리고 작가 로절린드 아든을 찾는 과정에서 에이바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제5도살장>을 인생의 책으로 선정했던 존은 이렇게 말한다.
"책이라는 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오늘 밤 독서 모임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시간 여행이니 뭐니를 생각하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지더라고요. 저도 이제 뭔가를 좀 이해했나보죠?" (p.436)
인생의 어떤 순간에 벌어진 일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억 속에 착 달라붙어 삶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경우도 있고, 기억에도 없던 어떤 일이 한참이나 지난 어느 순간에 내 삶 속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우리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달라진 환경에 그때그때 적응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오는 충격으로 인해 우리가 잠시 방향을 잃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때 책은 종종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마음을 닫고, 두 눈마저 질끈 감았던 어느 날, 마음을 다잡고 읽었던 책은 내가 다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고, 감았던 눈을 뜨게 한다. 그 순간에도 여러 일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갔음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가을의 기미가 느껴지는 것처럼 지난 여름을 스쳐간 많은 일들이 잘게 부서지는 오후, '내 인생 최고의 책'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