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비에 젖은 눅진한 등산로 위로 죽은 나무가 군데군데 쓰러져 있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들에게 물은 그야말로 생명수이지만 생명을 다하고 나면 물은 얼마나 짐스러운가. 발걸음이 무거웠다. 깊게 잠들지 못했던 나는 간헐적으로 쏟아지던 빗소리에 하릴없이 깨어 그때마다 번번이 멀뚱한 시간을 보냈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얕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몇 번을 더 뒤척이다가 집을 나섰다.

습습한 바람이 우듬지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의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제 점심을 함께 했던 한 친구의 말이 아침 산행길 내내 멍한 내 의식을 붙잡았다. 신혼 시절에는 술에 떡이 되어 밤 늦게 들어가서 술기운에 횡설수설 늘어놓던 변명도 철석같이 믿어주던 아내가 이제는 말똥한 정신으로 이 궁리 저 궁리 고심하여 그럴 듯한 변명을 꺼내놓아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는다는 넋두리였다. 말하자면 예전에 했던 자신의 변명은 아내의 가슴에 점성 좋은 엿처럼 찰싹찰싹 잘도 달라붙었는데 이제는 점액질의 미역처럼 줄줄 흘러내리기만 할 뿐 도무지 늘어붙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다른 친구 왈, "1번, 사랑이 식어서. 2번, 변명의 트렌드가 변해서. 3번, 나이가 들고 창의성이 떨어져서. 4번, 지금껏 같은 변명만 무한반복해서. 이 중에서 몇 번인 것 같아?" 하고 물었다. 하소연하던 친구는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