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인데 어찌된 일인지 내게도 인생 상담을 청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 못한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다. 사람마다 성격도, 처한 환경도, 앞으로의 바람이나 희망도 제각각인데 누군가에게 나의 지난 경험을 말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초한 약속에 어쩔 수 없이 응할라치면 쭈볏쭈볏 주눅이 들곤 한다.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보다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을 중언부언 늘어놓는 바람에 상대방을 크게 실망시키지나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더구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이렇게 해라, 말한다는 건 너무나 무책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까닭에.

 

어제도 그와 같은 약속이 한 건 있었다. 30대 초반의 그 친구는 내가 알지 못하는 동행 한 명을 대동하고 나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민망할 정도로 격식을 차리는 바람에 적잖이 당황했다. 음식을 주문하여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는 다들 말이 없었다. 미리 따라 놓은 소주를 한 잔 가볍게 들이켠 후 발그레한 얼굴로 그 친구가 내게 털어놓은 말은 여자친구에 대한 문제였다. 사내 연애를 한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본인 입을 통하여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친구 왈 연애를 시작한 지 반년이 넘었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어 속이 탄다는 거였다. 데이트를 할 때는 즐겁고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지만 헤어지고 나면 뭔가 허전하고 괜스레 시간만 허비한 게 아닌가 하는 후회도 이따금 든다는 게 그 친구 말의 요지였다.

 

예의 바르고 밝은 성격의 그는 누가 보더라도 일등 신랑감이었다. 그런 까닭에 연애 경험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던 그도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상대를 만나고 보니 좀처럼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허튼 농담이나 방송가 루머, 연예인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소득 없이 헤어지는 일이 일상처럼 반복되다 보니 그도, 그녀도 조금씩 지쳐가는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우리의 삶도 기쁘고 유쾌한 일로만 채워진다면 삶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에 금세 싫증이 날 테고 말이다.

 

이따금 자신의 고민이나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가족사 등 상대방도 긴장하며 들을 수밖에 없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관계는 늘 겉돌게 마련이다. 시쳇말로 남사친, 여사친의 관계라고나 할까? 만나면 즐겁고 헤어져 돌아올 때는 뭔가 허전한... 시험을 앞둔 학생이 신나게 게임을 하고 나서 느끼는 후회의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농담이나 가벼운 대화는 관계의 시작에서 더없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관계를 깊어지게 하지는 않는다.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말도 날씨의 변화처럼 달라져야 하는 게 당연할 터 그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말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겼다.

 

어제 뉴스에 보도되었던 자유당 서울시당위원장의 막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공식 석상에서 그런 막말을 내뱉는다는 건 자신과 당의 체신만 깎아내릴 뿐이다. 대통령을 향해 '깡패 같은 놈'이라고 하면서 '이런 놈을 상대해서 점잖게 나가다가는 나라 꼴이 안 된다'고 했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게 막말을 일삼는 사람은 국민과 대통령이 점잖게 대해서는 안 된다. 본때를 보여서 그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