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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아닌 척 애써 감춰보려 해도 우리의 판단은 늘 돈과 결부짓게 마련이어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쓸모와 효용만 앞세워 그 사람의 면면을 따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속물근성이 깊게 밴 게 아니냐, 비아냥거리며 채근한다고 할지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태도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완전히 옳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반박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변해가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나 후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처럼 몰강스럽게 변할수록 한편으로는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어떤 것, 이를테면 정이나 연민이나 사랑이나 그딴 것들이 말할 수 없이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어느 한때 우리의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던 그 마음들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라치면 마음 한쪽이 휑뎅그렁하고 쓸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빈 자리가 해가 갈수록 더욱 크게 보인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는 이러한 나의 마음을 다시 한번 일깨운 책이었다. 어찌 보면 나의 취향에 맞는 소설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런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특징은 사실 별게 아니다. 문장이 화려하거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특별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작가에 의해 전달되는 철학적 깊이나 주제의 선명성도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개입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서사만으로 아주 조금씩 감동이 깊어지도록 하는 소설이라면 좋다.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극히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강물이 불듯 아주 서서히 독자의 마음속에 젖어들어, 어느 순간 뭉클한 감동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소설이라면 나는 주저없이 그 책을 집어든다. 그러나 단순한 서사만으로 독자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작가는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
"엄마와 할아버지는 늘 무기력했고 사람을 사귀는 일에 서툴렀다. 나는 엄마와 할아버지를 작동하지 않아 해마다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가는 괘종시계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변화할 의지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사람들이라고." (p.14)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하여 '씬짜오, 씬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한지와 영주' 등 일곱 편의 중, 단편 소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쇼코의 미소>는 베트남 전쟁이나 세월호 사건과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여리고 약한 인물을 스토리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주제에서 오는 무겁고 딱딱한 느낌보다는 그런 기억을 안고 사는 소설 속 인물들의 힘겨운 삶에 시나브로 공감하게 된다.
"투이와 함께 벽에 기대앉아 스누피 만화책을 읽던 그 시간도. 그 시간은 아직도 달콤하고도 씁쓸하게 내 마음의 좁은 수로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위태롭게나마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의 부모와 상처받았기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던 응웬 아줌마 부부가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p.91)
"할머니는 일생 동안 인색하고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태도로 답답한 인생을 버텨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p.105)
고등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왔던 쇼코가 자신의 집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것을 계기로 가까워진 소유와 쇼코는 이후에도 편지를 통해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 소유뿐만 아니라 소유의 집에 머무는 동안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했던 소유의 할아버지에게도 편지를 보내오던 쇼코는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기고, 대학에 진학한 소유가 교환학생으로 캐나다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난 쇼코의 친구로부터 소유는 쇼코의 연락처를 받게 된다. 무작정 찾아갔던 쇼코의 집에서 소유는 자신의 기대와는 크게 달랐던 쇼코의 모습에 실망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업 대신 영화판에 뛰어들었던 소유는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살이에 점점 지쳐가고 그 즈음, 무뚝뚝하기만 했던 할아버지가 소유의 자취방을 찾아온다. 할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의 삶을 예감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고 할아버지의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쇼코가 한국을 찾는다. 어긋나기만 했던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은 할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다시 복원된다.
"그때의 기록을 읽어나가면 우리가 나눴던 웃음과 이야기들, 밤의 풍경과 밤공기에 섞인 보리수꽃 향기까지 느낄 수 있다. 내게 웃어주던 한지의 얼굴, 한지가 매점에서 산 밑창이 얇은 슬리퍼, 우리가 나눠 마시던 콜라와 다리 하나가 약해서 자꾸 뒤로 넘어가던 간이 벤치 모두 생생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모두 없었던 일처럼 빛을 잃는다. 한지와 보낸 시간의 세부를 낱낱이 기억하면서도 실감은 점점 흐려진다." (p.162)
"스물셋의 나와 스물여덟의 선배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곱고 뜨거운 마음을 그 시에 담아 부르고 있었다. 내가 병자도, 선배가 망자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가 아직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때, 우리는 그렇게 이별했다." (p.210)
문화와 환경이 다른 이국에서 이웃으로 만난 응웬 아줌마와 호 아저씨, 그리고 그들의 아들 투이. 베트남 전쟁으로 온 가족을 잃었던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응웬 아줌마와 그 전쟁에서 형을 잃은 주인공의 아버지. 두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씬짜오, 씬짜오', 자신의 집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친척 언니와 그녀의 기구한 삶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아름다운 소설집이었다.
"아니는 저만의 숨으로, 빛으로 여자를 지켰다. 이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녀를 지켜주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저들 부모의 삶을 지키는 천사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도 그 천사들을 부모의 품으로부터 가로채갈 수는 없다. 누구도." (p.241)
"수술을 한다고 해도 별 가망이 없으리라고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무너졌을 말이었지만 말자는 오히려 편안했다. 더이상의 수술도, 항암치료도 싫었다. 무엇을 위해 생을 연장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어떤 미련도 없었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도 두렵다는 점에서는 죽음과 진배없었다. 그 마음을 숨기고 영수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말자는 알지 못했다." (p.264)
마음에 담았던 문구는 이보다 훨씬 많았지만 각각의 소설에서 하나의 인용문만 뽑았을 뿐인데 이렇게나 길어지고 말았다.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은 대개 아버지가 없거나, 있어도 가족 전체를 든든히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만 일으키는 존재다. 전통적인 가족 형태의 붕괴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공동체를 상정하기 위해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손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금세 부서져내릴 듯한, 약하디약한 가족 공동체가 이 험악한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스럽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은 이야기 자체에 내재된 힘일 뿐 작위적인 아름다움에서 오는 의도된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