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뿔소를 보여주마
조완선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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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의 특징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한(恨)의 정서'가 그것이다. 정상적으로 대학 입시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결코 잊혀지지 않는 단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한(恨)이 아니라 '억울함'으로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다. 한(恨)과 억울함은 서로 비슷한 듯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한(恨) 하면 개인적인 노력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운명적인 느낌이 들지만 억울하다는 것은 신분이나 경제력 등 인위적인 격차에서 비롯된 차별과 이것에 대한 개별적 분노를 일컫는 게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억울함에는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제도나 법질서, 불공정한 개인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恨)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수용의 과정이 필수적이지만 억울함에서는 복수와 수용 중 어느 것 하나를 개인이 선택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억울함을 주제로 문학이 발전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편법과 무원칙 속에서 공정함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추리소설을 그닥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읽었던 우리나라의 몇몇 추리소설과 일반 소설에서 언뜻언뜻 개인이 느끼는 억울함의 단면을 확인하곤 했다. 조완선의 소설 <코뿔소를 보여주마>도 기본적으로 억울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듯하다. 독재나 다름 없던 군부정권의 시절, 자신의 억울함을 속시원히 밝힐 수 없었던 개인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책이라는 상상의 공간에서 씻김굿을 하듯 풀어냈다. 억울한 영혼들을 대신해서 작가는 서슬 퍼런 원한의 칼날을 과거 권력자들을 향해 겨누었다.

 

"권영욱은 한마디로 인간 쓰레기였다. 이 세상에 모든 추악하고 더러운 게 그의 몸속에 있었다. 1년 내내 청소를 해도 지워지지 않을 오물이 그 안에 가득했다. 냄새가 너무 고약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왜곡과 조작, 고문과 가혹행위, 편법과 술수, 그가 제멋대로 휘두른 철퇴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배종관, 고석만, 손기출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무고한 인물에게도 수많은 올가미를 씌워 저세상으로 보냈다. 한때 야마라고 불리던 사내, 정녕 야마가 데리고 갈 사람은 바로 그가 아닌가!" (p.365)

 

소설은 공안부 검사 출신 변호사 장기국의 실종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장기국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배달됨으로써 사건을 맡은 최두식 반장은 이것은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님을 직감한다. 범죄심리학 교수인 오수연과 검사 홍준혁이 투입된다. 거물급 인사의 실종에 부담을 느낀 수사팀은 사건을 비밀리에 붙이고 취재진의 접근을 막는다. 그러나 수도일보 8년차 기자인 형진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사건의 진상을 조금씩 밝혀낸다.

 

"세상은 평온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두식은 밤낮없이 정체 모를 범죄자들과 외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 세상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무덤덤했다. 아파트 앞의 공원은 일상을 즐기려는 사람으로 가득 넘쳐났고,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행복에 겨워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p.64)

 

범인들은 대담하게 장기국의 사체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범죄심리학자 오연수는 이번 사건이 장기국 한 명으로 그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한다. 곧 이어 보수 신문의 유력 시사평론가 백민찬이 실종된다. 그리고 백민찬의 블로그에 경고성의 댓글이 달린다. 수사팀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다방면의 조사를 벌인다. 그 결과 이 사건이 1986년 공안 정국 당시 반국가 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로 지목되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세 명의 피해자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과거 역사의 추악한 모습에서 수사팀은 저마다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대학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황 선배가 학생 운동으로 수배중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던 기억이 있는 수연, 평범한 노점상이었던 아버지가 시위 중 사복경찰인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 죽은 후 그 죽음을 대가로 은밀한 거래를 받아들였던 두식, 유신헌법을 반대하던 아버지가 경찰에 쫓기다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 그 이후 친척집을 전전하며 갖은 고생과 폭력에 시달렸던 준혁...

 

사건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내막이 밝혀지고 억울하게 죽었던 여러 사람들의 2세와 그들을 보듬었던 비오 신부님의 실체가 드러난다. <코뿔소를 보여주마>는 추리소설답게 소설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강한 흡입력과 원한과 복수의 구도가 적절히 짜여진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평면적인 구성과 독자들 누구나 예측 가능한 밋밋한 흐름. 추리소설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반전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소설에서 반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있다. 주제의 무거움이 그것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부조리한 현실과 인권 말살, 그리고 억울한 죽음들. 그것을 고발하기 위해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선택하고 복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꾀했다는 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욕심과 그 욕심의 충돌로 인한 사건의 발생, 주변을 훑듯이 흘러가는 빠른 전개, 독자의 예상을 깨는 반전 등이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당시에 공안이나 대공 업무를 담당했던 수사팀은 그야말로 조작과 왜곡의 달인들이었다.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인물을 한 명 점찍으면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 제멋대로 조직도를 그리고, 굴비 엮듯 줄줄이 잡아들이고, 고문을 하고 고문에 못 이긴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원했던 내용의 허위자백을 받고 죄도 없는 사람들을을 구속했다. 죄가 있어서 구속되었던 게 아니라 재수가 없으면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고문기술자로 이름이 높았던 자가 목사 안수를 받던 그런 아이러니한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도 우울하다. 학생들은 대공 수사팀의 수사관들을 '화가'라고 불렀다. 어찌나 그림을 잘 그리던지... 조직도는 거의 예술가 수준의 작품이었다. 오직 상상력에 의존한. 작가는 그 시절의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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