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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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봄날을 꼽으라면 언제라고 말할 수 있을런지요. 해마다 봄이 오면 나는 문득 미안해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뭐 하나 변변히 해놓은 일도 없는데 떡 하니 차려진 이 찬란한 봄을 올해도 이렇게 염치없이 도둑 구경을 해도 되는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저 먼 과거의 어린 시절에는 이만큼 자랐으니 장하지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고 해마다 빈 손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봄날을 오롯이 구경만 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나는 요즘 봄밤의 미안함을 달래기 위해 공지영의 에세이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변명처럼 읽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아픈 시절이 있고, 겨울의 눈보라를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날들이 이따금 찾아온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봄날의 화려함은 지난 겨울의 처참함을 가리기 위한, 대책도 없이 추레했던 그날의 기억을 잊기 위한 눈홀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J, 성장에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인간이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필히 물레방아처럼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달갑지 않지만 이제는 볼멘소리로 그냥 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저 자신에게 묻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울어보았나, 정말 물레방아처럼 온몸으로 울어보았나, 설사 그것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그렇게 온몸으로…… 온몸으로……." (p.128)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기억이 때로는 고문이 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인간의 능력이란 고작 과거의 기억을 타의적으로만 회고할 수 있을 뿐 떠오르는 기억을 자의에 의해 막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삭정이처럼 황폐하고 메마른 심정일 때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얼마나 주눅들게 하는지요. 차라리 그것은 육체에 가해지는 형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작가의 두번째 산문집이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서없는 생각들이 자맥질하듯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습니다. 작가 또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는 걸 언론을 통해서든 지인으로부터의 입소문을 통해서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심한 고통을 겪고 난 후 한 인간의 모습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걸 믿는지요. 폭풍이 몰아친 후 맑게 개인 하늘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타인의 고통이 내 고통인 양 느껴지지 않는, 오롯이 타인의 고통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J'라는 익명의 존재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위해서는 가상의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각각의 글은 D.H. 로렌스의 '겨울 이야기', 파블로 네루다의 '나는 생각한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기형도의 '빈 집', 자크 프레베르의 '이 사랑', 김남주의 '철창에 기대어', 문태준의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등의 문학 작품들을 매개로 하여 글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산도르 마라이의 '하늘과 땅'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열어놓은 문으로 운명이 들어오고, 또 우리가 운명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청하는' 거라고 그는 어느 책에선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약은 아득한 은하수(相期邈雲漢)'라고 끝을 맺는 이백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도 보입니다.

 

"산도르 마라이, 아흔이 다 된 나이에 혼자서 미국의 한 도시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 이럴 때는 아흔이라는 복된 장수조차 형벌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감히 객관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p.225)

 

그렇습니다. 책의 제목인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는 이라크 시인 압둘 와합 알바야티의 시 '외로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빗방울들이 합쳐져 강으로 바다로 흐르듯, 사람들의 모든 외로움과 상처의 빗방울들이 화해와 용서의 바다로 흘러 위로 받길 바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빗방울처럼 서로 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척에 있지만 결국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나의 지나친 해석일까요.

 

작가가 털어놓는 감정의 부침들은 솔직하다 못해 더러 읽는 것조차 힘에 겨울 때가 있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고 칩거하던 시절, 작가에게 위로가 되었던 시와 그때의 단상들을 정리하였다는 이 책은 봄날의 변명을 고해성사처럼 읊어야 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한 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음의 갈라진 틈은 누군가의 고통과 눈물로 메워진다는 걸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나 깨닫게 되겠지요. 이제 막 벙글기 시작하는 목련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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