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율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추지나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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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는 아니지만 작가의 이름을 혼동하여 생각도 없이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한꺼번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생각이 복잡하거나 뭐에 씌이기라도 한 듯 '이 사람이 확실해!' 자신만만해 하는 경우에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요. <고백>을 썼던 미나토 가나에와 <화차>와 <모방범>을 쓴 미야베 미유키를 혼동했던 건 지난주 목요일의 일이었습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동네서점을 보고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이죠.

 

판매대에 놓인 신간도서를 쭈욱 훑어보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불문율>에서 눈길이 멈추었고, '아, <고백>을 썼던 작가의 신간이 나왔구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만 읽었더라도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겠지만 그 순간에 나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충만했었고 구매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졌던 나의 판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추리소설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닥 즐기는 편도 아닌 까닭에 책은 곧바로 펼쳐지지 않은 채 며칠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숙소의 책상 위에 덩그마니 놓였던 책을 어젯밤에 겨우 발견하여 그길로 내처 읽게 되었습니다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작가를 혼동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작가의 문체나 분위기가 많이 변했는 걸'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작가를 혼동했다는 걸 알아챈 건 책을 다 읽은 후였고 이 책도 신간이 아닌 제목만 바꿔 재출간되었다는 사실도 그때 겨우 알았습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불문율"을 포함하여 일곱 개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일본최고의 미스터리 작가라는 호칭에 걸맞게 "불문율"에 실린 단편 또한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날카롭게 파헤치면서도 그 속에서 상처 받은 인간의 모습을 놓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상처 받은 인간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따뜻하고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그래도 우리 사회는 아직 살 만하다고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번째 작품인 "결코 보이지 않는다"와 여섯번째 작품 "무쿠로바라"는 읽기에 따라서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결코 보이지 않는다"에는 인적이 끊긴 늦은 밤,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는 오지 않고 결혼한 지 한 달이 된 신혼의 에쓰로는 애가 탑니다. 부슬부슬 안개 같은 비가 내리는 봄밤은 여전히 추위를 느끼게 합니다. 에쓰로의 뒤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던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같은 방향이면 합승을 하자고 말을 겁니다. 노인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같이 걷자고 말합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노인은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노인은 자신이 기르던 개와 아내가 된 여인의 인연에 대해 말합니다. 아내는 애완견 로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였습니다. 결혼할 배우자와는 붉은 실로 맺어진 관계인 반면 검은 실로 맺어진 인연은 임종을 지키게 된다는군요. 말하자면 노인의 아내는 로쿠와 검은 실로 맺어진 인연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노인은 에쓰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이란 녀석은 엄청나게 넓은 게임판이나 퍼즐 같은 건가 봅니다. 나나 당신이나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나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지만 운명의 눈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옆에 나란히 있기에 어울리는, 비슷한 모양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기에 만났을 때 서로 그립게 느꼈을까요. 정해진 상대를 겨우 만났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로쿠는 집사람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죽은 아이는 지인을 따랐던 겁니다. 와, 찾았다, 반쪽을 찾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둘이 만나서 완성된 운명의 그림을 발견했으니까." (p.67~p.68)

 

"혼선"에서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서 만일 여자가 받으면 밤마다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변태 성욕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발신자의 번호를 쉽게 알 수 있고 차단도 가능하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그건 가능하지가 않았었죠. 마지막 작품인 "안녕, 기리하라 씨"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일침을 가하는 소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은 지 십 년 된 목조 이층 건물에 사는 오스기 씨 가족은 모두 다섯 명입니다. 오스기 씨의 노모와 부부, 그리고 그들의 딸과 아들로 이루어진 그 집에는 각자의 방에서 독립된 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스기 씨 집에는 소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가족 모두가 집단 중이염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소리는 다시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기리하라 씨가 등장합니다. 소리를 지운 건 그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소리가 사라진 후 가족들은 비로소 할머니의 외로움을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기리하라 씨가 할머니와 오목을 두던 모습을 떠올렸다. 가족이면서 격리되었다. 이 집에서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내 눈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 텔레비전 앞에 앉은 할머니의 등이 떠올랐다. 서랍에서 귀걸이를 가져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오늘 밤에 죽으려고 했다. 우리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지고. 이전부터 그럴 작정으로 물건을 모아서는 감추었다." (p.282)

 

이렇게 나는 우연처럼 소설 한 권을 새롭게 읽었습니다. 최근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어느 방송국의 드라마로 제작된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어째 이상한데' 싶으면 여지없이 그 순간에 책을 내려놓고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나의 독서 습관을 감안할 때 이번 경우는 조금 예외적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건 미야베 미유키의 놀라운 마법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행에서 때로는 길을 잃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독서에도 때로는 작가를 혼동할 필요가 있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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