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여린 햇살이 메마른 보도 위에 스민다. 그 알갱이들은 마치 분가루처럼 흩어져 살금살금 틈을 비집고 마침내 그 속으로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다. 나는 한참 동안 멀거니 바라보았다. 나날이 푸른 물이 빠지는 늦가을의 나뭇잎은 연신 마른 기침을 하면서도 스며드는 햇살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 고집스러움에 나는 놀란다. 기어이 잘려나가면서도 자연의 혜택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 바람은 이따금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안식을 준비하는 나무로부터 제 소임을 다한 나뭇잎들을 떨구었다. 무던히 애를 쓰던 바람도 어느 순간 어지간히 잦아들고 사방은 문득 고요하다. 나른한 오후에 가을의 변명이 낙엽처럼 쌓인다. 보도에 쌓이는 플라타너스의 너른 잎. 흉측하다.

 

고3 수험생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며 고사장으로 떠난 후 늦가을 여린 햇살과 무엇인가 지난 잘못을 비밀스럽게 실토해야 할 듯한 농밀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사는 게 허깨비처럼 느껴지는 허기진 오후. 가을을 가을답게 살아가던 사람들은 하나둘 어디론가 떠나고 제 욕심을 채우려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만 득시글한 21세기 대한민국.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도적질을 한 사람이 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또 다른 도둑을 잡으라며 검찰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런 웃지 못할 코미디에 국민들은 또 얼마나 큰 무력감에 빠지는지...

 

계절을 계절답게 하는 것은 철따라 농도가 달라지는 햇빛과 바람과 물의 조화다. 겨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잠시 가벼워진 듯한 오늘, 가을의 푸석한 햇살이 메마른 대기를 밟고 한껏 여유롭다. 모든 게 빠르게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이 한낮의 여유는 얼마나 값진 것인지. 노랗고 빨간 색감으로부터 받는 눈의 호사와 소임을 다한 나뭇잎의 자발적인 쇠락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더 부끄러워 해야 할까.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민 대다수가 내려오라 하는데 싫다고 버티는 작금의 세태를 보면서 홀연히 떨어지는 분분한 낙엽 앞에 나는 무한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지금 손에 쥐어진 것과 눈앞에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영원히 제것으로 남도록 하겠다는 저들의 탐욕이 마냥 부끄러워지는 하루다. 우리는 그런 대통령을 뽑지 않았다고 뒤돌아 서서 부인하고 싶은 그런 오후가 쓸쓸히 흐르고 있다. 쇠락하는 가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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