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3일이었던가요?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온 질문에 아베 총리가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일축했던 게 말입니다. 과거 전범국의 수장인 그가 피해국에 대해 취하는 그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태도에서 우리는 분노를 넘어 어떤 치욕적인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런 심정이었겠지요. 그러나 그게 다였습니다. 우리나라 외교부는 정례 브리핑에서 "구체적인 표현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서둘러 봉합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부의 저자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참담한 모욕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베에게서 받은 치욕보다 더한 수모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이미 1945년에 종식된, 오직 우리의 과거 역사에서만 등장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것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이며, 현재 진행형의 치욕이라는 걸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일교포 2세로 평생을 떠돌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서경식 작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수치와 모멸감은 오히려 감정의 사치쯤으로 비치는 건 아닐지...

 

"나에게 예술은 그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것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은 창문은 벽 높은 곳에 잇어서 바깥 경치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색깔 변화나 공기가 흐르는 기미는 느낄 수 있었다. 손은 닿지 않고, 창문으로 도망칠 수도 없지만, 그 작은 창문 덕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p.9~p.10)

 

서경식이라는 이라는 이름 석 자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하여 이미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경계에서 춤추다>가 먼저 생각나곤 합니다. 타와다 요오꼬와 서경식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엮은 <경계에서 춤추다>에서 그는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었던 모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 그의 두 분 형(서승, 서준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여 각각 19년과 17년의 옥살이를 살게 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지금쯤 대한민국의 평범한 일원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오늘 내가 읽었던 <청춘의 사신>이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운명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형님들이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구속된 것은 1971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였다. 당시 대학 3학년이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형님들처럼 일본 사회를 떠나 한국으로 건너가서 뭔가 진실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그 철없고 막연한 인생설계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두 형님이 옥중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고 자주 고문에 시달리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회사에 취직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구체적인 '생활' 같은 것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p.9)

 

<청춘의 사신>은 '20세기 전반의 회화예술에 관한 에세이 서른한 꼭지를 한권에 모은' 책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세계 대전과 대량 학살로 기억되는 20세기 전반이 그 시대를 살았던 화가들에게 어떤 식으로 투영되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드바르드 뭉크를 비롯하여 에곤 실레, 오토 딕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파블로 피카소 등 20세기 전반의 화가들이 겪었을 고통과 시대의 불안이 어떻게 예술로 표출되는지, 인간에게 과연 예술은 무엇인지 작가는 묻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가 그린 것은 청춘의 욕망과 좌절을 애처롭게 비추어 낸 20세기의 '죽음과 소녀'다. 여기서는 사신이 아니라 오히려 소녀가 상대를 놓지 않으려고 찰싹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신은 실레 자신의 자화상이고, 소녀는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찔(Wally Neuzil)이다." (p.76)

 

작가는 어느 책에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가가 폭력을 소유하고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아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자체도 자신의 부조리한 삶의 의미를 '신'이나 '국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약점이 있다"고 말이지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국가에 의한 '죽음'의 수탈을 끝낸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남과 북이 강대강으로 부딪치는 작금의 현실은 국가에 의한 '죽음'의 수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에곤 실레가 그렸던 '죽음과 소녀'의 소녀처럼 '죽음'을 상징하는 사신을 마치 연인인 양 꼭 껴안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베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용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민족의 수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식민지 역사를 되풀이하는 단초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